형미

 

1. 개요
2. 생애
3. 대중매체에서


1. 개요


逈微
864년~917년
후삼국시대승려. 시호는 선각대사(先覺大師)이다.
형미와 대경대사(大鏡大師) 여엄(麗嚴, 862~930)[1], 진철대사(眞澈大師) 이엄(利嚴, 870~936)[2], 법경대사(法鏡大師) 경유(慶猷, 871~921)[3] 등과 함께 후삼국시대의 4대 선승(禪僧)을 일컫는 해동 4무외대사(海東 四無畏大師)라 한다.[4] 이들은 모두 당나라 조동종(曹洞宗)의 승려인 운거산(雲居山)의 도응(道膺, 846~902년)을 사사했다는 공통점이 있으며 형미대사는 나머지 셋의 사형이다.

2. 생애


864년 무주(武州)에서 태어났으며 15살 나이에 장흥(長興) 가지산(迦智山)[5] 보림사(寶林寺)에서 보조(普照)선사 체징(體澄, 804~880)의 제자로 출가했다. 이후 구례(求禮) 지리산 화엄사에서 구족계를 받고 보조선사의 제자로 지내다가 보조선사가 세상을 떠난 뒤 당나라로 유학해 불법을 배우고 905년 귀국하여 강진(康津) 월출산 무위사(無爲寺)의 주지가 되었다. 어떤 계기인지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나주를 통해 입국했으니 이 인연으로 왕건과 교류했을 가능성이 높다.[6] 이후 왕건의 군대에서 군법사를 맡을만큼 왕건과 긴밀한 관계였다.
917년 궁예에 의해 처형되는데 왕건의 역성혁명이 있기 불과 1년 전 시점.[7] 시신은 왕건이 즉위한 직후인 919년 3월에 수습되어 개경 오관산(五冠山)에 이장되었다. 이후 왕사로 추증되고 921년 시호가 붙었으며 선각대사 편광탑비(先覺大師遍光塔碑)를 세워 그를 기렸는데 탑비는 태조가 죽고 난 뒤인 혜종최언위의 비문으로 새겨졌으며 정종 대에 무위사에 안치되었다.
선각대사가 궁예에게 처형당한 이유에 대해 선각대사탑비의 내용에서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다. 비석에 따르면 선각대사는 '왕'이 912년의 나주 공방전 때 무위사를 방문해서 만났고 '왕'의 권유로 함께 철원으로 올라갔다고 전한다. 만약 '왕'을 궁예라고 해석한다면 미륵 신앙을 기반으로 하고 있던 궁예가 형미대사를 직접 태봉의 수도인 철원으로 데리고 갔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당시 호족 세력들에게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던 선종 불교를 포용하려는 의도였다는 해석이 있다. 반면 '왕'을 왕건이라고 해석한다면 선각대사는 왕건의 권유로 그를 따라갔다가 궁예의 미움을 사 변을 당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8] 이 때 궁예가 처형의 이유로 내세운 것이 '대사가 누군가의 편을 들었다'라는 것. 궁예가 왜 형미대사를 처형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학자들은 단순히 미륵불 신앙 때문이 아니라 결국 정치적 갈등에 따른 결과물이라고 해석하고 있으며 궁예는 왕건을 견제하기 위해 형미대사의 처형이라는 극단적인 카드를 꺼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9] 형미대사가 석총처럼 궁예의 미륵불 신앙을 비판했기 때문에 처형되었을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10]

3. 대중매체에서


태조 왕건에서도 출연하는데 배우용의 눈물정도전에서 무학대사를 맡았던 박병호.
왕건의 군법사로 등장하지 않는 대신 강비(연화) 처형 직전[11] 궁예가 당시 나주로 내려가 있던 왕건을 철원으로 소환할 때 처음 등장한다. 왕건의 부하 장수들은 왕건에게 소환 명령에 불응하라고 조언하지만 형미대사는 왕건에게 철원으로 돌아가라고 조언하였고 결국 왕건은 철원으로 돌아간다. 이 때 형미대사도 함께 가는데 왕건과의 대화에서 형미대사는 죽을 각오로 철원에 간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얼마 후 궁예가 강비와 두 아들을 처형할 때쯤 주막에서 낮술을 하는 것으로 재등장한다. 거기서 허월을 만나는데 형미대사는 대놓고 궁예를 "마구니 새끼 한 마리가 황궁에서 제 처자식을 때려 죽이고 있는 중이다"라고 칭하며 "자신은 세상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버리러 왔다"고 밝힌다. 궁예가 강비와 두 아들의 시체를 산에 내다 버리자 자신이 문도를 이끌고 산에 가서 강비와 궁예의 두 아들의 시신을 수습한 뒤 공개적으로 상여[12]를 이끌고 장례식 겸 시위를 벌인다. 허월도 장례식에 참여하는데 장례식이 벌어지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경악한 종간은 내군을 동원해 상여를 빼앗고 승려들을 구타하며 형미대사를 추포한다. 허월로부터 형미대사가 유명한 고승이며 그를 함부로 처형할 경우 민심이 완전히 떠날 것이라는 경고를 들은 종간은 궁예에게 형미대사의 목숨만은 살려주거나 정 안되면 처형을 뒤로 미루자고 간언했지만 그를 탐탁치 않아한 궁예는 아주 보란듯이 하자며 사월 초파일에 공개 처형하라고 명한다. 결국 형미대사는 저잣거리에서 언월도를 든 망나니들에 의해 처형되었고 이로 인해 허월의 경고처럼 민심이 궁예에게서 더욱 멀어졌으며 이미 역성혁명의 뜻을 마음 속에 품고 있던 4기장(복지겸, 홍유, 배현경, 신숭겸)은 사건이 벌어진 후 역성혁명을 최대한 빨리 시행하기로 마음먹는다.

[1] 성주산파(聖住山派)의 일원으로 경순왕의 스승으로 있다가 말년에 왕건의 후원으로 지평(砥平) 용문산(龍門山) 보리사(菩提寺)에 정착하였다.[2] 수미산파(須彌山派)의 개조로 해주(海州) 수미산(須彌山) 광조사(廣照寺)에서 가르침을 폈다.[3] 왕건에 의해 충주(忠州) 개천산(開天山) 정토사(淨土寺)에서 수도했다.[4] 이엄을 제외한 3명 모두 나주를 통해 귀국하여 왕건과 인연이 깊었고 이엄은 자신이 귀국할 때 도움을 준 김해의 호족 소율희를 왕건과 연결해주었다. 쉽게 말해 불교계에서 왕건을 지지하는데 두려움이 없던(無畏) 인물들인데 그럼 궁예를 두려워하지 않았을까(이들의 주요 귀국 루트인 나주나 김해같은 서남 해안 지역의 정세를 고려했을 때 견훤 또한 두려움의 대상이지 않았을까)? 형미대사는 이를 몸으로 보여줬다.[5] 나말여초의 선종 9산, 그 가운데서도 첫 산문으로 일컬어지는 가지산파(迦智山派)의 본산이다.[6] 왕건이 나주(금성)에 영향력을 미치기 시작한 것이 903년이다.[7] 왕건은 즉위 직후부터 "그를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다"고 말하여 그의 죽음을 애통해했다.[8] 이 해석은 다른 의미로도 중요한데 나주 공방전에서 궁예가 친정을 했다는 의미로 해석될 여지가 있기 때문. 반대로 왕건이라고 해석하고 왕건이 912년에야 선각대사를 처음 만났다면 왕건이 선각대사의 귀국에 관여했고 나주가 900년대 초부터 왕건의 든든한 지지 기반이었다는 기존의 해석이 흔들릴 수 있다.[9] 태조 왕건에서는 강비와 두 태자의 장례를 치뤄주다가 체포되어 초파일에 처형당하는 것으로 각색되었다.[10] 석총에게 인지도는 밀리지만 궁예에 의해 사망한 승려 가운데 가장 고위직인 승려였다.[11] 실제로 강비가 형미대사보다 먼저 처형당했다. 드라마에서도 매끄러운 전개를 위해 강비 처형과 형미대사 이야기를 엮었다고 밝혔다.[12] 물론 강비와 왕자들의 상여지만 이후 자신을 체포한 종간에게 '태봉의 상여'였다고 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