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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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사 각황전. 각황전 석등과 이형의 탑이 보인다. 사사자삼층석탑이 아니니까 주의.
한자 : 華嚴寺 / 로마자 : Hwaeom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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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라남도 구례군에 있는 사찰. 지리산 국립공원 안에 있다. 전국의 사찰 중에서도 손에 꼽힐 만큼 거대한 중층 금당인 각황전으로 유명하다. 화엄사에는 이 각황전과 돌로 된 석등과 사자석탑, 불화 4가지의 국보를 가지고 있으며, 절 자체도 역사적·학술적인 가치를 인정 받아 2009년 사적 제505호로 지정됐다. 이름과는 달리 화엄종이 아니라 조계종 소속으로서 대한불교 조계종 제19교구 본사이다. 참고로 화엄종의 총본산은 인천 남동구 간석동 만월산에 있는 약사사이다. 사찰 입구로 들어오는 길의 도로명은 화엄사로다.
2. 역사
구례군이 현재 전라남도라 때문에 화엄사가 백제와 연관된 것으로 많이 오인되는데, 사실 화엄사는 신라 고승들이 창건하고 중창한 절이다. 사실 오늘날의 구례와 광양 지역은 원래 가야의 영토였고[2] , 6세기 중반 신라 진흥왕이 가야의 전지역을 신라에 완전히 병합되면서 이 지역도 신라에 편입되었다. 애초에 절을 창건한 사람이 진흥왕의 총애를 받던 신라 고승 연기조사다.
진흥왕은 당시 새로 편입된 이 지역에 화엄사를 세움으로써 해당 지역 주민들의 민심을 수습하면서 지배력을 강화하고, 아울러 군사적인 목적으로도 활용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신라의 전통적인 정복지역 유화정책과 신라 불교 고유의 중요한 특징인 호국불교사상과 연관되는데, 실제로 화엄사는 화랑의 정신교육 장소로 이용되는 등 군사적인 용도로도 활용되었다.
544년 신라의 고승 연기조사[3] 가 창건했다. 절 이름은 화엄경의 두 글자를 따서 붙인 것.
선덕여왕 12년(643)에는 자장법사[4] 가 화엄사를 증축하고 석존사리탑(釋尊舍利塔), 7층탑, 석등롱(石燈籠) 등을 지었다.
화엄종을 개창한 의상대사는 화엄사 해회당에서 화랑도들에게 화엄사상을 가르쳤다.
문무왕 때인 677년 당나라에서 화엄종을 공부하고 돌아온 의상대사가 각황전을 창건하고 왕명으로 석판에 화엄경 80권을 새긴 것을 화엄사에 보관하도록 했다.[5]
경덕왕(742~764) 때 이르러 8원 81암자로 화엄불국 연화장세계의 면모를 갖추었다.
헌강왕 1년(875년)에 도선대사가 다시 증축했다...
고려시대에도 증축이 이어졌다. 943년(고려 태조 26년)에 도선대사의 유지에 따라 오백선찰을 건립한 후 삼천팔백사를 세웠다. 이후에도 광종대, 문종대, 인종대, 충숙왕대에 중수가 있었다.
이렇게 절이 쭉쭉 크며 잘 나가던 시기가 있었는데..
조선시대에 임진왜란시기인 선조 26년(1593)에 왜병의 습격으로 모든 건물이 불타 버리고 1630년부터 7년을 걸려 재건하였다. 절이 타버리자 뿔뿔히 흩어진 승려들은 산과 동굴에서 은신하다가 1630년에 다시 모여 이 절의 폐허를 본 뒤 분개하고는 이 '대화엄종주'를 다시 세우기로 맹세하고 절을 재건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나마 한 번에 다 못하고 대웅전과 기타 건물은 1636년에, 각황전은 1703년에서야 재건이 완성되었다.(각황전을 1643년에 완성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래도 웅장하게 잘 재건했는지 숙종 27년(1701)에 화엄사를 선교양종[6] 의 대가람[7] 으로 하였다고 한다. 킹 오브 절이라는 이야기.
한국 전쟁때 '적들이 숨을 수도 있으니 화엄사를 불태우라.'는 명령을 받은 차일혁 초대 경찰 총경이 "태우는 건 하루면 족하지만 다시 세우려면 천 년도 부족하다." 하며 문짝만 모두 떼어 태울 것을 건의하여 살아난 이야기가 유명하다.
조계사 대웅전의 현판 편액 글씨는 바로 이 화엄사 대웅전의 편액을 탁본으로 복제해 가서 만든 것인데, 글씨는 선조의 여덟째 아들 의창군 이광의 것이라고 한다.
3. 교통
자가용으로 올 경우 순천완주고속도로 황전IC와 구례화엄사IC가 가장 가깝다. 두 나들목 모두 화엄사까지의 거리가 비슷하므로 상하행선에 따라 IC를 선택하면 된다. 나들목에서 화엄사까지는 약 20분 정도 걸린다.
대중교통으로 올 경우, 구례공영버스터미널에서 화엄사입구 정류장까지 가는 농어촌버스를 운행한다. 단, 버스 정류장에 내려서 화엄사까지 20분 이상 걸어가야 한다. 철도의 경우 구례구역이 가장 가깝지만 역에서 화엄사까지 바로 가는 버스는 없으므로 택시를 이용하거나, 구례구역에서 구례 읍내까지 가는 버스를 타서 환승해야 한다.
4. 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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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사의 가람 배치도.
4.1. 이상한 가람 배치
특이한 것은 보통 절이라면 탑이나 대웅전이 가장 큰 건물이기 마련인데, 이 화엄사는 각황전이 압도적으로 크다. 물론 각황전 역시 부처상이 있는 금당이긴 하지만. 아무튼 이러한 크기 차이 때문에 가람의 배치가 지나치게 비대칭적으로 변해 좀 이상해졌다. 게다가 각황전 앞의 석등과 그 아래의 서 5층 석탑은 삐뚤게 배치되어 있고, 대웅전 앞 아래에 있는 동 5층 석탑 역시 정 중앙에 있지를 않고 삐뚤게 배치되어 있다.
그런데 하나 더 이상한 점은, 중문(사천왕문)을 지나 대웅전과 각황전을 가기 전에 거쳐야 하는 보제루를 여느 절과 달리 밑으로 못 지나가고 동쪽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대단한 의도가 숨어있다.
절의 방문자가 보제루를 오른쪽으로 멀리 돌게되면 각황전은 멀어지고 대웅전은 상대적으로 가깝다. 그렇게 되면, 원근감에 의해 각황전과 대웅전의 크기 차이가 많이 줄어든다! 또한 보제루를 돌아 삐뚤게 배치되어 있는 각황전과 대웅전, 탑과 석등 전부를 동시에 바라볼 수 있게 되면 그 순간 마치 일직선상에 놓인 것처럼 보인다. 서석탑-석등-각황전이 일렬로 놓이고, 동석탑과 대웅전이 일렬로 놓인다. 탁월한 시각적 배치다.
4.2. 그 외
각황전 외에도 원통전이나 대웅전 등 크기는 작지만 좋은 건물이 많다. 대웅전은 석가모니불을 모신 메인 전각이지만 오히려 각황전에 인지도가 밀려버렸다. 또한 석물들도 국보급들이 많으니 하나 하나 그냥 지나치지 말 것.
보통은 각황전 주변과 국보들만 보고 돌아가는 경우가 있는데, 꼭 각황전 남쪽의 계단 위로 올라가서 효대와 구층암이란 곳을 보는 게 좋다. 웅장한 화엄사와 다르게 아담하지만 자연을 그대로 가져온 듯한 독특한 건물로 사랑받고 있다. 한국 건축은 자연과 어우러지는 것이 본질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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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층암의 독특한 기둥.
아무튼 화엄사에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국보가 있다.
4.3. 각황전 앞 석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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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황전 앞 석등(華嚴寺覺皇殿前石燈)은 국보 제12호로 지정되어 있다. 높이 6.4m, 직경 2.8m의 거대한 석등으로 한국에 남아있는 석등 중에서 가장 크다. 기석(基石)은 8각, 간석(竿石)은 병(甁) 모양으로 중간에 띠를 둘렀고, 각 면에 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만들어진지 천년 이상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보존상태가 대단히 좋다. 크기는 장중한 것을 넘어서 육중하다 싶을 정도로 거대하여 보는 이를 압도하지만, 신라의 뛰어난 불교 조각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평가 받는다.
4.3.1. 국보 제12호
화엄사 각황전 앞에 세워진 이 석등은 전체 높이 6.4m로 한국에서 가장 커다란 규모이다. 석등은 부처의 광명을 상징한다 하여 광명등(光明燈)이라고도 하는데, 대개 사찰의 대웅전이나 탑과 같은 중요한 건축물 앞에 배치된다.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로는 3단의 받침돌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을 올린 후 꼭대기에 머리장식을 얹어 마무리한다.
8각 바닥돌 위의 아래받침돌에는 엎어놓은 연꽃무늬를 큼직하게 조각해 놓았고, 그 위로는 장고 모양의 가운데 기둥을 세워두었다. 장고 모양의 특이한 기둥형태는 통일신라시대 후기에 유행했던 것으로, 이 석등은 그 중에서도 가장 전형적인 형태를 보이고 있다. 기둥 위로는 솟은 연꽃무늬를 조각한 윗받침돌을 두어 화사석을 받치도록 하였다. 8각으로 이루어진 화사석은 불빛이 퍼져나오도록 4개의 창을 뚫어 놓았다. 큼직한 귀꽃이 눈에 띄는 8각의 지붕돌 위로는 머리 장식이 온전하게 남아있어 전체적인 완성미를 더해준다.
탑몸돌에는 문비와 자물쇠, 사천왕상(四天王像), 광창(光窓)이 표현되어 있다. 몸돌을 덮고 있는 지붕돌은 꽤 두꺼운 편으로 아랫면에 비천과 구름을 표현하였다. 지붕돌 윗면 각 모서리를 따라 아래로 미끄러지면 그 끝마다 큼직한 귀꽃이 달려 있는데, 일부는 파손된 상태이다. 상륜부에는 둥글넓적한 복발 위로 보개(寶蓋)와 보주(寶珠)가 올려져있다.
이 석등은 통일신라 헌안왕 4년(860)에서 경문왕 13년(873) 사이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되며, 석등 뒤에 세워진 각황전의 위용과 좋은 조화를 보여준다. 약간의 둔중한 감이 느껴지긴 하지만 활짝 핀 연꽃조각의 소박미와 화사석·지붕돌 등에서 보여주는 웅건한 조각미를 간직한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 작품이다.
4.4. 4사자 3층 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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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자삼층석탑(華嚴寺四獅子三層石塔)은 국보 제35호로 지정되었다. 불국사 다보탑에 비견될 만한 이형의 석탑이다. 각황전 석등 바로 옆에도 비슷한 이형 사자탑이 있기 때문에 착각하기 쉽지만, 이 탑은 각황전 옆 108계단을 올라가야 볼 수 있다. 이곳이 지리산 밑부터 시작된 참배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곳이다.
이 사자탑과 앞에 있는 좀 작은 석등인 효대(孝臺)는 연기조사가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탑과 등 아래에는 사람을 새긴 석상 두 개가 있다. 석탑 안에 서 있는 것은 연기조사의 어머니, 그 앞의 석등 속에서 예배하는 것이 연기조사이다. 아마도 돌아가셨을 어머니를 위해 영원히 기도하고자 하는 마음을 감동스럽게 표현한 예술품이다. 화엄사에서 가장 중요한 볼거리를 각황전보다 이곳을 꼽는 사람도 많다.
의천도 이곳을 소재로 슬픈 시 한 수를 지었다.
참고로 석등 앞에 사람이 꿇어앉은 모습은 강릉 신복사지의 석탑과 미륵에서도 유사한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寂滅堂前 多勝景 [8]
적멸당 앞에는 빼어난 경치도 많은데,吉祥峰上 絶纖埃 [9]
길상봉 위에는 한 점 티끌도 끊겼네.彷徨盡日 思前事 [10]
온종일 서성이며 지난 일들 생각하니薄暮悲風 起孝臺 [11]
날은 저무는데 효대에 슬픈 바람 이누나- 대각국사 의천
(추가)작년즈음 지반약화로 문제가 생겨 보수작업이 진행중이며 2021년 말 즈음 보수사업이 끝날 예정이다.
4.4.1. 국보 제35호
지리산 자락에 있는 화엄사는 신라 진흥왕 5년(544)에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세운 절로, 호남 제일의 사찰답게 많은 부속 건물과 구례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국보 제12호), 구례 화엄사 동 오층석탑(보물 제132호), 구례 화엄사 서 오층석탑(보물 제133호), 구례 화엄사 원통전 앞 사자탑(보물 제300호) 등의 중요한 유물들이 전해온다. 탑은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절 서북쪽의 높은 대지에 석등과 마주보고 서 있으며, 2단의 기단(基壇)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형태이다.
아래층 기단의 각 면에는 천인상(天人像)을 도드라지게 새겼는데, 악기와 꽃을 받치고 춤추며 찬미하는 등의 다양한 모습이 그려져 있다. 가장 주목되는 위층 기단은 암수 네 마리의 사자를 각 모퉁이에 기둥삼아 세워 놓은 구조로, 모두 앞을 바라보며 입을 벌린 채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고 있다. 사자들에 에워싸여 있는 중앙에는 합장한 채 서있는 스님상이 있는데 이는 연기조사의 어머니라고 전하며, 바로 앞 석등의 탑을 향해 꿇어앉아 있는 스님상은 석등을 이고 어머니께 차를 공양하는 연기조사의 지극한 효성을 표현해 놓은 것이라 한다.
탑신은 1층 몸돌에 문짝 모양을 본떠 새기고, 양 옆으로 인왕상(仁王像), 사천왕상(四天王像), 보살상을 조각해 두었다. 평평한 경사를 보이고 있는 지붕돌은 밑면에 5단씩의 받침이 있으며, 처마는 네 귀퉁이에서 살짝 들려 있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의 받침돌인 노반(露盤)과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만이 남아있다.
각 부분의 조각이 뛰어나며, 지붕돌에서 경쾌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어 통일신라 전성기인 8세기 중엽에 만들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위층 기단의 사자조각은 탑 구성의 한 역할을 하고 있어 경주 불국사 다보탑(국보 제20호)과 더불어 우리나라 이형(異形)석탑의 쌍벽을 이루고 있다.
4.5. 각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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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 화엄사 각황전은 국보 제67호로 지정되어 있다. 본래 이름은 장육전이다. 각황(覺皇)이라는 말은 부처의 별명으로, 깨달음의 황제라는 뜻이다. 화엄사 대웅전보다도 더 크며, 크고 아름다운 정도가 대단해서 전국에서 손 꼽힐만한 중층 사찰 건물이다. 누각은 아니기에 2층은 없지만, 천장이 아주 높아 시원한 맛을 느낄 수 있다. 아주 높고 두꺼운, 그것도 심하게 휜 통나무 한 그루로 이루어진 기둥들 여러 개가 놓여진 모습도 인상적이다. 천장의 형태도 인상적인데, 가장 중심에 있는 천장은 바닥과 평행하게 놓여있지만 외각의 천장들은 지붕을 따라 비스듬하게 각도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형태의 천장은 빗천장으로 부르는 것으로, 일반적인 건축물에서는 쉽게 찾아보기는 어려운 형태다.
불타기 전 원래의 장육전에는 이름대로 석가여래의 불상을 모셔놓았던 것으로 추정(부처의 몸을 가리켜 장육금신(丈六金身)이라고 하기 때문에)하고 있다. 본래 건물은 신라 문무왕 10년(670)에 의상대사가 3층 구조에 정면, 측면 7칸(쉽게 말하면 건물의 기둥 사이의 공간이 한 칸이다)의 규모로 건립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임진왜란 도중 왜병의 습격으로 이 절과 건물들은 모두 불에 타버리고 불상 역시 사라졌다. 원래 각황전 외벽은 석벽이었고, 화엄경문 글자 10조9만5048언이 조각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이것 역시 이때 깨어졌다고 한다.
이후 다른 건물은 인조14년(1636년)에 다시 복구하였지만, 각황전 건물은 그 규모 때문에 숙종 25년(1699년)에야 공사를 시작하여 숙종 29년(1703)년에 완성하였다.(인 12년(1643)에 재건했다는 말도 있다.) 당시 상량문을 보면 이에 동원된 인부는 3,015명으로, 왕족도 조력했을 정도로 큰 공사였다.[12]
이후 영조 44년(1768)년에 자운선사가 수리한 적이 있는데, 이때는 인부가 980명 동원되었다. 헌종 13년(1847)에는 기둥과 서까래가 썩고 벽도 쓰러지려 하는 등 큰 손상을 입어 어사에게 요청을 하여 수리를 했다고 한다. 이후 광무 22년(1885)에도 수리한 기록이 있다. 일제강점기인 1927년에는 기둥이 내려앉아 건물이 기울고 지붕이 파손되어 조선총독부에서 해체수리를 했다. 1936년부터 준비하여 41년까지 수리하였고, 총감독은 유명한 한국 고건축 학자였던 후지시마 가이지로. 해체 당시 마루널을 벗겨내었더니 신라시절의 건물 초석이 있었고, 검게 그을린 임진왜란의 흔적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소석 사이의 전돌역시 산산조각 나있었고, 뒷벽과 좌우 벽을 가득 채운 화엄경석의 산재된 작은 파편들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전의 이야기가 사실이었던 것. 의상의 필적도 검은 돌에 새겨져 있었다고..
근대에 와서 원래 대웅전에 있던 불상을 각황전으로 가져다 놓은 사진이 있다.
현재의 각황전은 높은 기단 위에 서쪽을 바라보고 서있다. 정면 7칸(26.8 m), 측면 5칸(18.3 m), 높이 15 m로 사찰로써는 상당히 크지만 역시 경복궁 근정전보다는 작다. 칸 수는 더 많기 때문에 가끔 근정전보다 크다는 잘못된 소리가 나온다. 천장도 특이하게 처리한 편이다.
4.5.1. 국보 제67호
화엄사는 지리산 남쪽 기슭에 있는 절로 통일신라시대에 지었다고 전한다. 조선시대에는 선종대본산(禪宗大本山) 큰절이었는데, 임진왜란 때 완전히 불타버린 것을 인조 때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원래 각황전터에는 3층의 장육전이 있었고 사방의 벽에 화엄경이 새겨져 있었다고 하나,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만여점이 넘는 조각들만 절에서 보관하고 있다. 조선 숙종 28년(1702)에 장륙전 건물을 다시 지었으며, ‘각황전’이란 이름은 임금(숙종)이 지어 현판을 내린 것이라고 한다.
이 건물은 신라시대에 쌓은 것으로 보이는 돌기단 위에 앞면 7칸·옆면 5칸 규모로 지은 2층 집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라 매우 화려한 느낌을 준다. 건물 안쪽은 위·아래층이 트인 통층으로 3여래불상과 4보살상을 모시고 있다.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인데, 벽쪽 사방으로 돌아가면서 경사지게 처리하였다.
화엄사 각황전은 건물이 매우 웅장하며 건축기법도 뛰어나 우수한 건축 문화재로 평가받고 있다.
4.6. 영산회괘불탱
華嚴寺 靈山會 掛佛幀. 화엄사 영산회 괘불탱은 조선 효종 4년(1653년)에 제작된 가로 7.76m, 세로 11.95m의 거대한 크기의 탱화(幀畵)이다.
탱화란 불교의 가르침이나 전해져 오는 이야기를 이미지화 하여 표현한 그림인데, 괘불탱은 탱화 가운데서도 야외에서 행해지는 불교 의식에 사용하는 초대형 탱화이다.[13] 문화재명에서 언급되는 영산회라는 것은 영산회상도를 뜻하는데, 이는 석가모니가 제자들에게 설법하는 것을 묘사한 그림을 말한다. 화엄사 영산회 괘불탱이라는 이름은 곧 화엄사에 보관된 석가모니가 제자들에게 설법하는 모임을 그린 거대한 탱화라는 것을 뜻한다.
1997년 9월 22일, 문화재청은 괘불탱이 가지는 미적인 측면과 불교 미술사적인 중요성을 인정하여 칠장사, 안심사, 갑사, 신원사, 장곡사, 청곡사에 전해지는 괘불탱들을 국보 제296호부터 제302호까지 연달아 지정하였으며, 이와 함께 화엄사 영산회 괘불탱은 국보 제301호로 지정하였다.
4.6.1. 국보 제301호
석가가 영축산에서 설법하는 모습인 영산회상을 그린 괘불이다. 괘불이란 절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행하기 위해 법당 앞뜰에 걸어놓고 예배를 드리는 대형 불교그림을 말한다.
화엄사에 있는 이 괘불의 크기는 길이 11.95m, 폭 7.76m이다. 석가불을 중심으로 문수보살·보현보살과 사천왕상 등이 배치되었다. 화면 중앙의 석가불은 높다랗게 만들어진 단의 연꽃받침 위에 앉아 있으며, 마귀를 물리친다는 의미로 손가락이 땅으로 향한 손모양을 취하고 있다. 둥근 얼굴과 어깨에서 부드럽고 원만한 느낌을 주고 필선은 매우 섬세하고 치밀해 세련미를 더한다.
석가불 좌우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석가를 모시며 서 있다. 사천왕 중 2구는 그림의 하단에, 2구는 상단에 배치해 마치 네 모서리를 지키는 것처럼 보인다. 각 상들의 얼굴은 둥글고 커다란 눈에 작은 코와 입, 길다란 귀를 가지고 균형잡힌 모습으로 서 있다. 홍색과 녹색을 주로 사용하였고 중간색을 사용해 은은하면서도 밝은 느낌을 주며 채색무늬와 금색무늬가 화려함을 더하고 있다.
조선 효종 4년(1653)에 만들어진 이 괘불은 각 상들의 늘씬하고 균형잡힌 형태, 밝고 선명하며 다양한 색채, 치밀하고 화려한 꽃무늬장식 등에서 17세기 중엽의 불화에서 보이는 특징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5. 기타
2012년 10월 5일, 누군가가 방화를 저절렀으나, 다행히 목재에 내화성을 가진 보호제가 발려 있었기 때문에 별다른 피해가 없었다. CCTV에 신문지에 불 붙이고 달아나는 사내가 찍혔다.
지리산 국립공원 안에 있기에 입장료를 받는 줄 아는 사람이 있는데, 지리산 국립공원은 2007년 부로 무료로 개방되었다. 입장료는 그냥 절에서 받아먹는 거다. 3500원 정도. 또한 구례군이 대중교통이 좀 부실한 관계로 절에서 나갈 교통편을 생각하고 시간을 넉넉하게 잡아야 한다.
템플 스테이 한다고 마구잡이로 절 아래에 건물을 늘리더니, 이번에는 관공서에서 하지 말라던 목조건물 아래에 무단으로 콘크리트 지하실을 만들다가 걸려버렸다. 그래서 2011년인 지금도 화엄사 앞에는 목조건물 밑에 있는 흉물스러운 콘크리트 구조물이 공사가 중단된 채 방치되어 있다. 다행히 현재는 마무리 되었고, 외부 직원들의 기숙사로 쓰이고 있다. 그 위에는 화엄원이 있다.
5.1. 각황전 중건 설화[14]
본래 각황전의 이름은 장육전이었다.
장육전 중건불사를 마음으로 결심하고 백일기도를 올리던 계파 선사는 문득 지난 밤 꿈을 떠올려 보았다. 백일기도를 드리던 지난밤 비로소 잠깐 잠자리에 들었는데 언뜻 하얀 옷을 입은 신령스런 노인이 꿈에 나타나 말했다.
"그대 계파[15] 여! 그대가 지금 세운 장육전 중건불사에 대한 대발원은 쉽게 이루어질 일이 아니니라. 그렇게 큰 일을 이루려면 복 있는 화주를 내어 큰 시주자를 얻어야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그러려면 대웅전에 물 담은 항아리와 밀가루 담은 항아리를 준비하고 먼저 물 항아리에 손을 담근 다음 밀가루 담은 항아리에 손을 넣어 빼보았을 때 밀가루가 묻지 않은 사람이 장육전 건립의 화주가 능히 될 수 있을 것이니라! 내 말을 명심하거라, 계파여!"
이렇게 말을 마친 신령스런 노인은 문득 허공으로 사라져 버렸다. 순간 눈을 번쩍 뜬 계파 선사는 이상스런 꿈도 다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날짜를 짚어보니 마침 다음 날이 드디어 백일기도 회향일이었다. 자신의 백일기도에 드디어 부처님이 답을 주신 것을 알아차린 계파 선사는 묵묵히 그 꿈에서 준 계시를 실행하여 장육전 중건 불사를 할 수 있는 화주를 정하기로 마음먹었다.
계파 선사는 대중 스님들이 아침 공양을 마치자 대웅전 마당으로 모두 모이게 했다. 산내 스님들과 대중에게 지난밤 꿈 이야기를 한 계파선사는 물 담은 항아리와 밀가루 담은 항아리를 대웅전에 차려놓고 차례차례 스님들이 들어가 먼저 물 담은 항아리에 손을 넣은 다음 그 물 묻은 손을 다시 밀가루 담은 항아리에 넣어 하얀 밀가루가 묻어 나오는지 안 나오는지 알아보는 실험을 했다.
벌써 승려 열댓 명이 그렇게 해보았으나 손에는 하얀 밀가루가 묻어있기 마련이었다. 그래도 아직은 실망할 때가 아니었다. 구름처럼 많은 스님들이 마당 가득 줄줄이 늘어서서 대기하고 있지 않은가. 생로병사의 고통을 끊고 맑고 밝은 부처의 마음을 깨달아 고통 지옥에 시달리는 중생구제의 대원력을 세우고 출가한 수행자들이기에 누군들 장육전 대불사의 화주를 맡을 주인공이 결코 없지는 않을 듯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천여 대중을 넘는 산내의 모든 사람들을 다 실험해 보았으나 화주는 나타나지 않았다. 실망의 빛이 얼굴 전면에 감도는 계파선사는 자신의 장육전 중건불사를 위한 백일기도가 이렇게 맥없이 끝나 버리는가 하고 깊은 회한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실험을 아직 안 한 누가 없을까?'
이렇게 마음을 가다듬으며 속으로 헤아려보는 순간 공양간 앞에서 중년의 공양주 보살이 캐온 봄나물을 다듬고 앉아있는 것이 언뜻 눈에 들어왔다. 계파선사는 대중스님에게 일러 나물을 다듬고 앉아 있는 공양주보살을 불러오게 했다.
계파선사의 말에 공양주보살은 마다하지 못하고 대웅전으로 들어가 먼저 물 묻은 항아리에 손을 푹 넣었다. 그런 다음 물 묻은 손을 그대로 밀가루 담은 항아리에 푹 넣었다. 그리고는 그 넣은 손을 대중스님들 앞으로 내밀었다.
"아! 이럴 수가……."
"밀가루 하나 묻지 않았다니!"
대중스님들이 공양주보살의 손을 보고 모두 깜짝 놀랐다. 화엄사 공양간에서 오직 밥 짓고, 나무 해 불 때고, 나물 캐 나물 만들고, 국 끓여 올리고 설거지하는 일밖에 모르는 사람이 그런 엄청난 재물이 들어갈 대불사의 화주가 되다니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참으로 신기한 이적입니다. 이로써 장육전 중건불사의 대화주로 우리 공양주보살님이 정해진 것입니다."
계파선사는 대중스님들에게 엄숙히 선언했다.
"선사님 저는 아닙니다. 일자무식인 저는 오직 밥밖에는 아무 것도 못합니다. 거두어 주소서 선사님!"
파리하게 얼굴이 질린 공양주보살은 계파선사의 말에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공양주보살님이 10년을 공양주로 열심히 일한 복력이 천여 대중스님들보다 뛰어나니 이렇게 오늘의 실험에서 신비로운 이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내가 실험한 것이 아니라 지리산의 주인이신 문수보살님께서 꿈에 나에게 지시한 것이니 공양주보살님을 화주로 선택한 것은 바로 문수보살님입니다. 그러니 이제 대시주자를 얻어 장육전 중건불사를 잘 이루도록 함께 노력합시다."
계파선사는 공양주보살의 말을 자르며 단호하게 말했다. 다른 대중스님들도 공양주보살이 화주로 정해진 것을 알고는 공양주보살에게 삼배하고 장육전 건립을 위한 화주의 중임을 맡기게 되었다.
꼼짝없이 그날 화주의 중책을 맡은 공양주보살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오직 밥 짓고 부처님 앞에 조석으로 공양 올리는 일밖에 모르는 자신이 엄청난 재물이 들어갈 장육전 대불사의 책임을 맡다니 자다가도 기절할 일이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이미 화주로 정해진 바에야 어떻게든 부처님을 붙잡고 늘어지는 길밖에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지엄하신 계파선사가 화주 소임을 딱 맡겨버린 판이라서 도망갈 수도 없었다. 저녁 공양을 지어 올리고 공양시간이 끝나자 공양주보살은 대웅전으로 들어가 마음을 가다듬고 단정히 앉았다.
부처님께 기도를 올려 소임으로 맡은 화주의 일을 잘 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를 올렸다. 그렇게 맡은 바 소임을 잘 수행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처님께 간절히 기도를 올리며 자꾸 머릿속으로 되뇌며 기도를 하는 공양주보살의 눈꺼풀이 어느덧 스르르 감겨 내렸다.
그러더니 그 눈앞에 머리가 허연 노인이 홀연 나타나는 것이었다.
"공양주보살, 그대는 화주를 맡은 일을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내일 아침 일찍 화주 소임을 실행하러 길을 떠나거라. 그리고 길을 가다가 제일 먼저 만난 사람에게 시주를 권하거라. 알았느냐!"
공양주보살은 번쩍 눈을 떴다. 눈앞에 노인은 없었다. 대신 부처님이 빙그레 미소를 지은 채 촛불 앞에서 반짝이는 것이었다. 꿈이었다.
'내일 아침 길을 떠나서 맨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시주를 청하라고? 아! 이는 지리산의 주인인 문수보살님의 현몽이구나.'
공양주보살은 그렇게 생각하고는 다음 날 아침 공양을 마친 후 비로소 화주 소임을 위해 길을 떠났다. 꿈에 노인의 말처럼 길을 가다가 처음 만나는 사람을 무조건 붙잡고 장육전 대불사의 시주자가 되어 달라고 다짜고짜 부탁을 할 참이었다. 사실 그 방법 외에는 자신에게는 더 이상의 좋은 방법도 없을 듯 싶었다.
맑은 지리산 물이 굽이쳐 흘러내리는 길 따라 내려가면서 공양주보살은 진달래 꽃이 피고 진자리에 파릇하게 돋아난 새순들을 바라보면서 모처럼 바깥바람을 쐬며 여러 생각들을 자유로이 해보았다.
어젯밤 꿈에 노인이 나타나 맨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시주를 부탁하라고 했으니 사실 그 일도 다 풀린 일이 아닌가. 적어도 천석지기나 만석지기 큰 벼슬을 사는 대감을 만나게 되어 무사히 일이 풀리게 되겠지하고 낙관해 보는 것이었다.
그렇게 들뜬 마음으로 간절히 고대하며 길을 가는데 진짜 멀리서 사람 하나가 나타났다. 이제 저 사람이 장육전 불사를 해 줄 어마어마한 재물을 가진 훌륭한 시주자이겠거니 하고 공양주보살은 들뜬 마음을 가다듬으며 다가갔다. 그렇게 마음을 정하고 다가가던 순간 공양주보살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세상에 이런 일도 있단 말인가!'
공양주보살은 열린 입을 닫지 못했다. 공양주보살 앞에 나타난 이는 놀랍게도 누더기를 걸친 거지 할머니였던 것이다. 화엄사 앞에 움막을 치고 살면서 가끔씩 화엄사 공양간에 와서 나물도 캐주고, 불도 때주고, 잔심부름을 거들어주면서 한 끼 공양을 얻어먹고 가거나 누룽지나 과일을 얻어가던 자식도 없이 혼자 사는 거지 할머니였다.
돈 많고 권력 많은 대 시주자를 만나겠거니 했는데 저런 거지 할머니라니, 갑자기 현기증이 일어나 머리가 어지러워진 공양주보살은 그 자리에 짚단처럼 맥없이 풀썩 쓰러질 지경이었다.
절망의 순간을 가까스로 이겨내고 공양주보살은 지난밤 꿈만을 믿고 안되겠다 싶어 다짜고짜 엎드려 말했다.
"대 시주자님이시여! 우리 화엄사 장육전을 크고 훌륭하게 지어주소서!"
"우리 공양주보살님이 이제 실성을 했나보네 그랴. 새로 장육전 불사를 한다고 계파선사님이 그러시더니 이제 아주 실성을 했어 그랴!"
"아닙니다. 대 시주자님이시여! 그런 게 아닙니다. 우리 장육전을 새로 짓게 시주를 해주옵소서!"
거지 할머니가 그 말을 들으며 보니 공양주보살이 거짓이 아니라 진실로 그렇게 하는 것 같았다. 거지 할머니는 순간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두 손을 모아 합장을 하며 말했다.
"지리산의 문수보살님이시여! 이 몸이 죽어 왕궁에 태어나면 장육전 불사를 반드시 이루겠습니다. 저에게 가피를 내려주소서!"
거지 할머니는 수십 번 땅에 엎드려 절을 하면서 외더니 순간 맑은 물이 굽이쳐 흐르는 지리산 깊은 계곡 아래로 몸을 던져 버리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공양주보살은 깜짝 놀라 거지 할머니가 떨어진 곳을 바라보았다. 아스라이 저 아래로 몸을 던졌으니 죽었을 게 틀림없었다. 공양주보살은 어쩌다가 장육전 화주가 되어 애매한 생목숨 하나를 죽게 하였구나 생각하고는 큰일이다 싶어 마구 달아나고 말았다.
세월이 흘러 그새 육 년이 지났다. 한양 땅으로 도망가 주막집에서 막일을 하고 살던 공양주보살은 어느 부인의 심부름으로 창덕궁 앞에 나가게 되었다. 손님 하나를 만나 데려오라고 했던 것이다. 그곳에서 서성거리고 있는데 마침 궁 안에 살던 어린 공주가 유모와 함께 창덕궁밖에 나와 놀고 있었다.
다섯 살이나 먹었을까 하는 어린 공주는 길가를 아장아장 달려 다니며 뛰어 놀았다. 그 옆에 서있던 공양주보살은 그 어린 공주와 눈이 마주치게 되었다. 그런데 그 어린 공주가 공양주보살을 알아보고 낡은 옷에 매달리는 것이었다.
"우리 공양주보살님!"
그 어린 공주의 눈빛은 정말 공양주보살을 알아보는 눈빛이었다. 공양주보살은 깜짝 놀라며 그 어린 공주를 안아 주었다. 그런데 이 어린 공주는 이상하게도 태어나면서부터 한쪽 손이 펴지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어린 공주의 손을 공양주보살이 만지자 그대로 펴지는 것이었다. 더더욱 놀라운 것은 그 공주의 펴진 손바닥에 장육전이라는 글씨가 선명하게 써져 있었다.
이 사실은 곧바로 숙종대왕에게 전해졌다. 숙종은 공주를 낳고 손이 펴지지 않은 것을 이상하게 여기고 몹시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공양주보살의 손이 닿자 펴지고 그 손바닥에 장육전이라는 글씨가 써져 있다는 것을 보고는 그 내력이 몹시 궁금했던 것이다.
숙종은 공양주보살을 곧 내전으로 불러 들였다. 숙종 앞에 나선 공양주보살은 절을 올리고 나서 지금까지의 일을 소상하게 말했다.
"참으로 장하도다! 거지 할머니의 진실된 원력이 결국 공주로 환생하게 하였구나! 내 공주를 위하여 모든 비용을 내겠도다!"
숙종은 감격하여 말했다. 그러면서 장육전 중창을 할 비용을 바로 하사하였다. 장육전이 완성되자 숙종은 직접 각황전(覺皇殿)이라는 사액을 내려 주었다. 각황전이라는 사액의 뜻은 부처님을 깨달은 왕, 임금님을 일깨워 중건하였다는 것을 의미했다.
공양주보살은 각황전 건물이 완성되는 날 먼 옛날 그 거지 할머니를 떠올리면서 혼자만 아는 깊은 미소를 짓고 물끄러미 각황전 처마 위로 펼쳐진 지리산과 파란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서있었다.
물론 숙종에겐 슬하에 공주가 없었고 실록에 기록되지도 않은 민중의 야사이다.[16]
법철스님에 따르면 공양주보살은 거지 할머니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묻는 관아에 쫓겨 청나라까지 흘러가게 되고 저 공주는 청나라 강희제의 딸이라고 한다. 강희제가 시주를 하고 숙종 임금이 도왔다는 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