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청룡/1982년
1. 창단
MBC는 1981년 6월부터 창사 20주년 기념 사업의 일환으로 프로야구단 창단을 구상하고 있었다. MBC가 먼저 팀을 만들면 다른 팀들도 뒤따라 창단해서 프로야구 시대가 열릴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정부 차원에서 프로야구 창설이 추진되자 MBC는 자신들의 우선권을 주장하고 나섰고, 연고지도 최대시장인 서울을 고수했다. 프로야구를 추진한 측에서도 이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방송사가 참여해야 프로야구를 홍보하고 확산시키는 데 유리하다는 이유였다.
팀명으로 공모와 심사를 거쳐 '청룡'으로 정해졌다. MBC 관계자에 따르면 공모결과 ‘드래곤즈’란 이름이 압도적으로 많았는데 외래어인데다 가까운 일본에도 유사한 팀명이 있어 청룡으로 부르기로 했다고 한다[1] . MBC 사옥이 자리한 정동이 옛날부터 ‘용마루’로 불렸다는 것도 청룡이 선정된 이유 중 하나였다. 한편 초대 감독에는 원래 ‘빨간 장갑의 마술사’ 김동엽 감독이 유력했다. 김동엽 감독은 당시 MBC에서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것은 물론 MBC의 프로야구단 창단 과정에서도 많은 일을 했다. 하지만 정작 그를 데려간 것은 해태였다. 마찬가지로 재일교포 출신 김영덕 감독도 고려 대상이었지만 OB에서 먼저 영입했다. 대안으로 박현식, 배성서 등의 이름이 거론되다가 일본에서 돌아온 한 거물급 인사의 이름 석자에 모든 것이 정리됐다. 1981년까지 일본 프로야구에서 선수로 활약한 백인천이 주인공이었다.
MBC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6천만 원의 거액을 주고 백인천을 초대 감독으로 영입을 완료했고, MBC는 프로야구 개막일까지 방송을 통해 연일 일본과 미국 프로야구의 명장면을 내보내며 프로야구 붐을 조성하는데 주력했다. 1982년 2월 26일, 서울 문화체육관에서 MBC 청룡의 화려한 창단식이 열렸다. 이날 창단식에는 박영수 서울시장, 서종철 한국야구위원회(KBO) 총재는 물론 MBC 소속 인기 탤런트와 코미디언들이 대거 참석하였다.
2. 정규 시즌
1982년 3월 27일 동대문야구장에서 삼성 라이온즈와의 경기로 역사적인 한국프로야구 원년 개막전이 치러졌다. 연장 10회말에 터진 이종도의 '''끝내기 만루홈런'''으로 프로야구 1호 승리팀이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여기 참조.
대다수의 야구 전문가들이 전국에서 가장 많은 고교야구팀을 보유한 서울 지역을 연고로 하는 청룡을 삼성과 함께 상위권을 다툴 우승후보로 점찍었으나 예상외로 전기리그와 후기리그 모두 3위에 그쳤다. 선수단 구성에서 먼저 문제를 드러냈는데 서울지역 선수들을 대상으로 한 드래프트에서 그해 세계선수권 대회 출전으로 당장 팀 합류가 불가능했던 김재박과 이해창을 지명하여 전력에 보탬이 되지 못했고[2] , 이광은도 시즌 개막 시점에서는 성무(공군) 야구단에서 복무 중이었는지라 전역 후에 뒤늦게 합류할 수 있었다. 반면 MBC에 밀려 대전으로 간 OB는 박철순을 지명했으며 그는 22연승이라는 불멸의 기록과 함께 원년 우승의 결정적인 원동력이 되었다. 이로 인해 MBC는 하기룡과 이길환, 이광권이 마운드의 주축을 이뤘지만 확실한 에이스가 없다는 뚜렷한 약점을 가지게 되었다. 게다가 지나치게 특정 포지션에 편중된 선수단 구성으로 포수 출신인 이종도와 신언호가 외야수를 봐야하는 수비력에도 허점이 많았던 것이다. 신언호의 외야 송구 능력은 뛰어났지만. 결국 1982년 4월 15일 광주 무등야구장에서 해태 타이거즈를 상대로 1경기 7실책을 저질러 32년 후 SK 와이번스가 그 기록을 깰 때까지 KBO 흑역사의 한 귀퉁이를 차지했었다.
설상가상 백인천 감독과 구단프런트와의 관계도 원만하지 못했다. 일본에서 프로야구를 먼저 경험하고 온 백인천 감독은 자신의 노하우를 최대한 구단에 전해주려고 했지만 이는 받아들여지기보다 충돌만 낳았다. 전지훈련이 필요해서 강릉에 가려고 했는데 사람들은 아마야구 생각만하고 뭐하러 멀리까지 가서 하느냐고 반문을 했을 뿐터러 야구공과 장비를 지원해 달라고 했더니 뭐가 많이 필요하냐면서 공은 한박스만 가지고 가서 하다 모자라면 또 한 박스 보내달라고 요청하는 식이었다. 게다가 방송사가 민간기업이 아닌 공기업이다보니 뭐하나 요구하는게 여간 힘든게 아니였다. 결재해서 상부의 승인을 받기까지 십여 단계를 거쳐 올라기곤 했다. 그런 문제들을 회사 관계자들에게 이해시키려고 노력을 많이 했는데 정작 사람들이나 언론에서는 트러블을 일으킨다는 식으로 표현했다.
2.1. 경기 결과
- 전기
2.2. 팀별 상대전적
2.3. 팀 기록
- 타격
- 투수
3. 사건 및 사고
8월 26일 삼성 라이온즈와의 원정 경기에서 프로야구 첫 몰수경기가 있었다. 삼성이 5대2로 앞서 있던 2회말 1사 1,2루 상황에서 삼성의 타자 정현발이 유격수 땅볼을 쳤는데 1루 주자 배대웅은 병살을 막기 위해서 2루수 김인식 쪽으로 거칠게 슬라이딩을 하면서 김인식과 충돌했다. 김인식은 화를 내며 배대웅의 얼굴을 때렸고, 곧바로 양팀 선수들이 몰려나왔다[3] . 심판들은 선수들을 떼놓은 후 김인식을 퇴장시켰다. 이에 백인천 MBC 감독은 원인 제공은 배대웅이 했는데 김인식만 퇴장시킨 것은 부당하다며 선수들을 철수시켰다. 주심의 경기 속행 요구에도 백인천은 계속 무시했고, 결국 몰수게임이 선언됐다.
4. 선수별 개인 성적
- 진한 표시는 리그 5위내 성적. 붉은 글씨는 1위 입상 성적.
4.1. 투수
- 우완
- 좌완
4.2. 타자
- 포수
- 내야수
- 외야수
5. 수상 및 기록
- 백인천 - 수위 타자(.412)[4] 최다 안타(103안타), 최고 출루율(.497), 최고 장타율(.740), 최다 득점(55득점, 해태 김봉연과 공동)
- 김용운 - 포수 골든글러브 수상
- 김용달 - 1루수 골든글러브 수상
- 하기룡 - 최다 연속 완봉승(3회)
[1] 막상 주니치와는 같은 언론사 팀이라는 점으로 자매결연을 맺었다. 이는 LG시절까지 이어져 2000년대 중반까지도 마스코트 교류행사 등이 이어졌었다.[2] 김재박은 시즌 막바지에 합류해 세 경기에 출장하지만 안타는 기록하지 못했다.[3] 사실 이 사건에는 소소한 반전이 있는데, 김인식은 벤치 클리어링이 벌어지기 전에 바로 사과했고 배대웅도 사과를 받아줬다. 또한 김은식 작가의 인터뷰에서 밝혀진 사실에 따르면 본인들은 절친한 친구관계였고 일종의 쇼맨십 차원에서 서로간에 장난으로 한 행동인데 생각보다 일이 커지는 바람에 양 당사자 모두 당황했다고 한다.[4] 역대 최초이자 최후 4할 타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