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수(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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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전 군인, 정무직공무원.
1928년 6월 8일 경상남도 사천군 삼천포면에서 태어났다. 1948년 12월 육군사관학교 7기 후기반을 졸업하고 헌병 병과로 임관되었으며, 이후 육군 대령으로 예편하였다.# 육군대학을 졸업했다.#
5.16 군사정변 이후 경찰관에 투신하였다. 부산직할시청의 경찰국장을[1] 지낸 다음 1964년 7월부터 1966년 9월, 1968년 2월부터 1969년 4월까지 2번이나 내무부(오늘날의 행정자치부)의 치안국장(1950년대~1960년대의 이사관급 경찰총수)을 역임한 이력이 있다. 이후 내무부 차관, 부산직할시장, 통일주체국민회의 사무총장 , 서울특별시장을 지냈다. 서울특별시장 재임 중이던 1981년 1988 서울 올림픽 유치에 성공하였다. 과천 서울대공원 건설 당시 막계 2리의 장막성전 신도들에게 최대한 특혜를 주려고 했다.
그러나 서울특별시장 재임 중이던 1982년 4월 서울 지하철 3호선의 무악재 구간 공사 현장이 붕괴되는 바람에 민심 수습 차원에서[2] 경질되었다.
이후 대한주택공사(현 한국토지주택공사) 사장을 지냈다가 1985년 10월 대통령비서실장으로 임명되었다. 1987년 7월 6월 항쟁과 6.29 선언에 따른 민심 수습 차원에서 물러나고 후임 대통령비서실장에 김윤환이 임명되었다. 얼마 안 되어 무역진흥공사(KOTRA) 사장에 임명되었다.
2003년 10월 9일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하였다.
[1] 지금의 지방경찰청(행정안전부 직할의 광역경찰청)과 전혀 다른 직제로서 XX도청 직할의 XX부국이다. 제1공화국은 미군정청의 경무부(警務部)와 관구경찰청(管區警察廳)을 내무부의 치안국과 10개 도청의 경찰국으로 축소했기 때문에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지방공무원으로 근무한 경찰관들은 박봉과 격무에 시달렸지만, 내무부가 모든 도청의 고위직(예를 들면 대한민국 대통령→도지사/국무총리→부지사/내무부 장관→국장/내무부 차관→과장)을 임명하여 파견하는 방식으로 경찰국을 통제했다. [2] 당시 경상남도 의령군에 우범곤 순경 사건도 일어나서 전두환 대통령이 내무부 장관(서정화)을 경질하고 나서 그의 후임으로 노태우를 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