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쇼 진품명품-출장감정/방영 목록/2016~2020년
1. 2016년
2. 2017년
[1] 주둥이 부분이 깨져 다시 붙임[2] 느티나무로 제작, 서랍에는 장서 문서 보관[3] 서랍과 장식[4] 반닫이 몸통[5] 일제강점기 말 ~ 해방 직후 작품[6] 1880년~1930년대 근대 문인화가[7] 유형문화재 제33호 홍지문(弘知門)의 다른 이름.[8] 잔받침 100만원 + 잔 50만원[9] 신윤복의 도장도 없고, 크기나 구도가 진품과 다르다.[10] 방씨 집안의 교지[11] 북한에서 쓰던 실책[12] 한권에 20만원씩 총 3권[13] 조선 초기 상강기법이 쇠퇴해가던 시기에 만든 청자[14] 손잡이의 박쥐 문양은 복을 상징[15] 청전 이상범의 40대 때 작품으로, 10년전에 방송되어 감정가 50만원정도 였다고 한다.[16] 친정어머니가 주신 문서. 아버지의 대변 맛을 보며 아버지의 건강 상태를 확인하고, 돌아가신 후 3년 동안 시묘(侍墓)룰 극진히 했다.[17] 의제 허백련(1891~1977) - 근대 한국화가로 전형적 남종화(南宗畵) 풍을 그렸던 상징적 인물[18] 남편이 수집한 의뢰품이다.[19] 경주시에서 온 의뢰품으로, 증조부가 남긴 책이다.[20] 해당 작가의 작품이 많이 남아있기에 감정가 하락[21] 바깥쪽은 흑백상감+역상감 기법을 사용[22] 규당 한유동(1913~1992) - 인물화와 화조화에 뛰어난 근현대 화가[23] 방짜 대야(60만원), 주물 양푼(20만원)[24] 석연 이공우(1805 ~ ?)[25] 40년전 아버지로부터 받은 도자기[26] 이가 빠져서 감정가 하락[27] 설주 송운회(1874 ~ 1935) - 전라남도 보성군 태생으로 중국의 서체와 동국전체를 섭렵해 설주체라는 독특한 필체를 만들었다.[28] 최북 (생년 미상) - 조선 후기의 화가 산수화와 메추라기를 특히 잘 그렸음. 1747년~1947년 통신사 화원으로 일본에 다녀온 기록이 있다.[29] 최북(崔北)사라는 글씨도 위작. 1985년에 80만원을 주고 구매했다고 하는데, 최북의 진품은 약 8,000만원 ~ 1억원의 가치라 한다.[30] 잔 : 100만원, 잔대 : 50만원[31] 창암 이삼만(1770~1947) - 조선 후기의 서예가. 초서를 잘 썼으며 그의 서체를 창암체라 함.[32] 취당 장덕(1907~1976) - 화조도와 매화를 잘 그렸음. 1927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선 경력이 있다.[33] 이광사(1705~1777)[34] 춘초 지성채(1899 ~1980)[35] 청채 김태석(1985~미상)[36] 중광 스님(1934~2002)[37] 과거 시험때 참고하던 책[38] 해무리굽(그릇을 굽을 깍아내 모양이 햇무리 같은 굽) 청자로 고흥과 강진에서 주로 생산되어 남은 수가 많은 편이라 한다.[39] 도자기(접시) 1점당 25만원[40] 25년 지인이 산 그림으로, 을해년(乙亥年)인 1935년에 완도의 실제 경치를 그린 그림. 지역을 한정해 그린 병풍은 아주 귀한 편이라 한다.[41] 김평묵(1819~1891) – 조선 말기의 학자. 이향로의 제자로 유생들의 위정척사운동을 후원함. 돌아가신 후 1906년 서울에서 제자들이 문집을 발행했고, 본 별집은 전라도와 경상도의 제자들도 중암 선생의 글과 출판비를 모아 1912년 발행한 것이다.[42] 노안도(蘆安圖/蘆雁圖) - 갈대와 기러기가 그려져 있는데, 갈대 노(蘆)자와 기러기 안(雁)자와 소리가 노안(老安)과 같아 노후의 편안한 삶을 기원하는 그림[43] 국조시산 - 허균(許均)이 엮은 시선집으로 정도전부터 퇴계 이황,송강 정철,석주 권필까지 조선 초 중기에 활동한 234명이 시 877수가 실려있음. 의뢰품은 필사본으로 총 9권 중 6권이 들어있음[44] 윤제술(1904~1986) - 교육자이자 정치가,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제자였으며 정계에서 은퇴한 뒤 서예로 말년을 보냄. 퇴계 이황의 시 퇴계(退溪)를 적었다.[45] 신퇴안우분(身退安愚分) - 벼슬에서 물러나니 어리석은 분수에 편안하데, 계상시정거(溪上始定居) - 시냇가 위에 비로소 자기 거처를 정하고, 임류일유성(臨流日有省) - 흐르는 물을 굽어보며 날마다 반성하네[46] 좋은 글씨이지만 남은 작품수가 많아 감정가 하락[47] 청자 위에 백토로 분을 발라 구워낸 '분청자기'로, 생활도자기로 대량 생산한 물건이다.[48] 신분과 품계에 따라 재질이 다른데, 의뢰품은 '소뼈'로 제작된 호패로 바깥 부분은 비단으로 제작되었다.참고로 신분이 낮은 사람은 나무를 사용했다고 한다.[49] 설송 최규상(1891~1956) - 전서(箭書)와 예서(豫書), 전각에 능했던 근대 서예가.[50] 중국의 시 중에서 좋은 구절만 골라 쓴 병풍이다. 愛看春山疑讀畵(애간춘산의독화) - 봄 산을 사랑스럽게 보니 마치 그림을 보는 듯 하고 / 靜淵古默似聽香(정연고묵사청향) 고요히 먹을 갈다 보면 마치 향기를 듣는 것 같네.[51] 빛치개 빗살 틈에 낀 때를 빼거나 머리에 가르마를 타는 데 사용한 물건으로 우각(소뿔)으로 만든 빗치개는 고급품임[52] 상어 껍질을 붙여서 만든 안경집으로, 어피(魚皮)는 고급 물건에 주로 사용하며 작은 크기로 보아 여성용 돋보기를 담았던 것으로 추정됨.[53] 빛치개 35만원 + 안경집 30만원으로 최종감정가 총 65만원 책정[54] 용준(龍樽) : 용문의 항아리[55] '''술'''을 담기엔 크기가 '''작은 편'''[56] 아말감으로 입술 부분을 수리[57] 꿀이나 약을 넣어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됨.[58] 모란문 항아리는 최종 감정가가 300만원인데 흠이 나서 최종감정가 150만원 평가함[59] 용항아리[60] 청화백자 모란 무늬호(모란문 항아리)[61] 250만원 (청화백자 용준) + 150만원(청화백자 모란 무늬호(모란문 항아리)) 도자기 2점 최종감정가 책정[62] 호패술은 명주를 꼬아서 만든 것으로 호패를 장식하는데 사용됨. 높은 신분의 인물이 주로 사용[63] 무관의 호패술은 짙은 색이고 문관의 호패술은 밝은색임[64] 호패는 호대에 만든 것[65] 미산(米産) 허형(許瀅) / 1862년 ~ 1938년 : 19세기 호남 지역에서 활동한 남종문인화의 대가[66] 남아있는 '''작품 수'''가 많은 편임. 화격이 떨어지기 때문에 30만원 평가함[67] 계속 들고 마셔야 하는 찻잔. 약 600년 전 분청사기 보안이 하나로 없다. 청자 빛깔이 흐린 편. 마상배(馬上杯)는 말 위에서 사용하는 술잔으로 전쟁터에서 군인들이 주로 사용했다.[68] 풀무(궤풀무) :화덕에 공기를 불어 불 온도를 조절하는 기구로 손잡이를 잡아당기면 흡입구를 통하여 공기가 들어가고 밀면 압축된 공기가 풍로를 따라 화덕으로 들어감[69] 심정창해월(心靜創海月) - 마음이 고요해야만 푸른 바다의 달을 볼수 있다.[70] 동방삭(東方朔) - 중국 한(漢)나라의 저명한 문학가로 한무제(漢武帝)의 총애를 받은 관리로 서양모의 복숭아를 훔쳐먹고 삼천갑자(18만 년)를 살았따는 설화 속 인물[71] 분을 갤 대 필요한 물이나 기름을 담아두던 병으로 호리병박 모양, 잎이 붙어있는 연꽃 문양이 있음[72] 퇴화문(堆花文)은 도자기 몸체에 물감을 두껍게 올려서 표한한 문양 무냥이 튀어나와 보이는 것이 특징[73] 완전한 경우 1,000만원 이상이나 입 부분이 보수되어 감정가 하락[74] 기로소(耆老所) - 조선 시대 70세기 넘는 정이품(正二品) 이상의 문관들으 예우하기 위해 설치한 기구[75] 기로세련계도(耆老世聯稽圖) - 1804년 계성 만월대에서 열린 기로연(耆老宴)을 그린 그림으로 원본은 단원 김홍도의 작품이다. 의뢰품은 후대에 다른 사람이 그린 그림이며, 김홍도의 서명까지 똑같이 베꼇다면 위작(僞作)이지만 의로품은 서명 없이 그림만 그렸기 때문에 모작(模作)이다.[76] 정부에서 감사의 의미로 내린 교지. 1732년(영조 8년)에 재해로 나라가 어려워지자 태인아 사는 황익한(黃益漢)이 돈 18냥을 기부하여 그에 대한 감사의미로 종2품(從二品)의 벼슬을 내린다는 내용이다.[77] 연적 구멍 2개 - 1, 원하는 만큼 물이 나오도록 공기를 조절하는 구명,2, 물이 나오는 구멍[78] 청화백자산수죽무늬사각연적이 진품미 아닌 이유 - 공기조저 구멍에 손때가 전혀 없음[79] 백자음각철화새무늬연적은 후에 문양을 파서 철화를 넣었음[80] 진품은 유약이 번져있지 않음[81] 그림을 나중에 인위적으로 넣어 가치를 평가할수 없다![82] 백자음각철화새무늬연적[83] 은행나무로 만든 함[84] 장식은 놋쇠[85] 꽃 모양 거멀보다 일자모양 거멀이 더 오래된 장식[86] 얹혀 있던 선반은 사라진 상태[87] 중요한 문서나 지필묵 등을 보관했던 문서함[88] 원형 그래도 보존[89] 120만원에 구입[90] 책가도(柵袈圖) - 민화의 하나로 책,부채,향로,.도자기 등을 그린 그림[91] 중국의 책을 그렸음[92] 정조 이후 - 중국 그림의 영향을 받아서 많이 그렸음[93] 원근법이 뒤바뀐 역원근법의 그림[94] 석류의 의미 - 자손 번창[95] 원래 8폭 이상의 병풍에 있던 그림[96] 우동기 대구광역시교육청 교육감 의뢰[97] 1896년 근대교육이 시작되면서 발간한 교과서 "심상소학(尋常小學)으로 알고 있습니다."[98] 신정심상소학(新訂尋常小學) - 1896년 초등학교용 국어과 교과서로 발행한 책으로 총 3권으로 구성[99] 국한문이 혼용된 책[100] 국민소학독본에 이어 근대 교과서 중 2번째로 나온 책으로 자연,사회,역사,일상생활등 -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음[101] 한글이 제일 처음 등장[102] 그림과 내용이 함께 있어 교육 계묭에 많은 영향을 미침[103] 3권이 모두 있지 않아 감정가 하락[104] 상감기법이 나오기 이전에 만든 것으로 용도는 연적[105] 주전자 형태이므로 "청자 주전자형 연적"[106] 뚜껑이 있었다면 평가 가격의 2배![107] 문이 반쪽만 열린다 해서 반닫이[108] 책이나 옷을 보관[109] 앞판 가운데 달린 들쇠가 경상도반닫이의 특징[110] 경첩은 진주반당이의 특징을 보임[111] 백패(白牌) - 소과(小科) 합격 교지,홍패(紅牌) -대과(大科) 합격 교지[112] 김영옥(金榮玉) 무과중시[113] 중시(重試)- 조선 시대 당하관(堂下官)들을 대상으로 10년에 한 번씩 보던 과거시험 함격하면 더 높은 벼슬로 진급됨[114] 무과(武科) 중시 교지는 흔치 않아~[115] 20,30대에 과거에 합격해 벼슬을 하던 중 40,50대에 다시 중시에 합격[116] 문과(文科) 교지였으면 감정가 20~30만원[117] 남편이 중국 출장 중에 구입한 그림[118] 우리나라 화가의 그림이라 샀대요[119] 오원 장승업(吾園 張承業, 1843년 ~ 1897년) - 조선 말기의 화가,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과 함께 조선의 3원 화가로 불림[120] 천과 종이 모두 인위적[121] 소 그림 역시 이 당시에 물소가 아니라 한국소를 그렸음[122] 어디서든 좋은 그림을 제값으 줘야 살수 있어 싸다고 구입하는 것은 금물[123] 구한말을 거쳐 활동한 삼대(三代) 화가로 아버지가 소치,아들이 남농으로 알고 있습니다[124] '''사군자'''를 곁들인 '''수묵화'''를 많이 그림[125] '''나이''' 들어서 그려 '''완숙미'''가 느껴짐[126] '''연,오동나무,소나무''' 등을 더 그려 '''10폭을 완성'''[127] 아버지 소치 허련과 아들 남농 허건 사이에서 '''교량 역할'''을 한 '''미산 허형'''[128] 3대가 '''남종화'''를 '''현대화'''로 이어주는 역할을 함[129] 산수화,사군자 등 '''남긴 작품'''이 '''많은 편'''[130] 철종 때 통정대부 김노양의 벼슬을 '''숭정대부'''로 올려준 '''교지?'''[131] 통정대부(通政大夫) - 조선 신대 문신 정3품 당상관(堂山官)의 품계명[132] 숭정대부(崇政大夫) - 조선 시대 종1품 하계 문신의 품계명[133] 함풍(咸豊) 9년- 1869년[134] 100세가 되어 특별히 숭정대부로 벼슬을 올려준다는 교지 조선 시대에 보기 어려운 특별한 교지[135] 2016년 8월9일 서천군 문예의전당 소강당에서 촬영[136] 광주광역시
서구청에서 촬영[137] 장재성(서구 상무대로) 가 광주광역시 서구을의 구의원님이 의뢰했다. 고미술품에 관심을 많은 의뢰인이다.[138] 경상남도 함안군 3층 회의실에서 촬영[139] 출장감정-경남 의령군의 의뢰인 4명은 노인(할아버지3명,할머니3명)이 감정 의뢰했다.[140] 옛날에 아버지가 사용했던 주병[141] "일흔 살(70세) 넘어 막걸리 담아 마셔봤어요~"[142] 아무나 사용할수 없었던 도자기[143] 학,대나무,구름 모두 십장생[144] 장수를 의마하는 문양[145] 의뢰인의 감정 추정 예상가는 "200만원 예상해봅니다~"[146] 보관상태가 좋은 편[147] 약 180년 정도 된 작품[148] 깔끔해 보이는 소반 등장[149] "회사일로 바빠서 대신 왔어요~"[150] 친정 식구 소장품이에요~[151] 전체 크기:다리 높이/비율이 좋은[152] 조선 시대에 만든 전형적인 나주반(羅州盤)[153] 전라남도 나주시에 지역에서 만들어서 나주반이라고 한다.[154] 나주반의 특징 - 1. 상다리르 대나무 마디(竹節-죽절)모양으로 깎음[155] 2 전을 따로 만들어 붙이지 않고 통나무를 파서 만듦[156] 옷칠 대신 합성도료인 "캐슈도로"로 칠은 한 상태[157] 캐슈칠을 한 점이 가장 큰 감정가 하락 요인![158] "나주반이 훨씬 더 예뻐요~"[159] 의뢰인은 "이게 예쁩니다"라고 말했다.[160] 조형미가 아름다운 작품[161] 집에 있으니까 가지고 있었지!![162] 6,25전쟁 때 굴 안에 숨겨서 보관하던 그림[163] 감정을 해봐야 좋은지 아닌지 알지~[164] 춘곡 고희동(春谷 高義東)/1886~1985 - 근대 화가이자 우리나나 최초의 서양화가/전통적 회화를 서양화와 절충해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165] 1927년 3월 그믐에 그려 남전여사(藍田女史)에게 선물한 그림[166] 남젼여사가 누구인지는 아무도 몰라~[167] 남전여사는 아무런 기록이 없다.[168] 절벽 아래에서 뱃놀이하는 모습[169] 중국의 화풍이 엿보이는 그림[170] 새 감정위원의 글씨,고서 전문 감정위원인 김상환 감정위원[171] 이인좌의 난에서 공을 세워 사후에 받은 문서[172] 1728년에 일어난 무신란(戊申亂)=이인좌의 난)[173] 당시 공을 세운 박중로,박동로,박시로 3형제[174] 세 사람 사후인 1822년에 내린 문서로 공신의 후손들에게 부역을 면제해주는 내용[175] 조선 시대 관청 중 하나인 예조(禮曹)에서 발급한 문서[176] 정식 명칭은 예조입안(禮曹立案)[177] 예조판서의 수결(手決)도 찍혀있음[178] 목이 부러져 감정가 하락. 만약 목이 부러지지 않았다면 감정가는 1,000만원[179] 만약 진품이었다면 감정가는 400만원
서구청에서 촬영[137] 장재성(서구 상무대로) 가 광주광역시 서구을의 구의원님이 의뢰했다. 고미술품에 관심을 많은 의뢰인이다.[138] 경상남도 함안군 3층 회의실에서 촬영[139] 출장감정-경남 의령군의 의뢰인 4명은 노인(할아버지3명,할머니3명)이 감정 의뢰했다.[140] 옛날에 아버지가 사용했던 주병[141] "일흔 살(70세) 넘어 막걸리 담아 마셔봤어요~"[142] 아무나 사용할수 없었던 도자기[143] 학,대나무,구름 모두 십장생[144] 장수를 의마하는 문양[145] 의뢰인의 감정 추정 예상가는 "200만원 예상해봅니다~"[146] 보관상태가 좋은 편[147] 약 180년 정도 된 작품[148] 깔끔해 보이는 소반 등장[149] "회사일로 바빠서 대신 왔어요~"[150] 친정 식구 소장품이에요~[151] 전체 크기:다리 높이/비율이 좋은[152] 조선 시대에 만든 전형적인 나주반(羅州盤)[153] 전라남도 나주시에 지역에서 만들어서 나주반이라고 한다.[154] 나주반의 특징 - 1. 상다리르 대나무 마디(竹節-죽절)모양으로 깎음[155] 2 전을 따로 만들어 붙이지 않고 통나무를 파서 만듦[156] 옷칠 대신 합성도료인 "캐슈도로"로 칠은 한 상태[157] 캐슈칠을 한 점이 가장 큰 감정가 하락 요인![158] "나주반이 훨씬 더 예뻐요~"[159] 의뢰인은 "이게 예쁩니다"라고 말했다.[160] 조형미가 아름다운 작품[161] 집에 있으니까 가지고 있었지!![162] 6,25전쟁 때 굴 안에 숨겨서 보관하던 그림[163] 감정을 해봐야 좋은지 아닌지 알지~[164] 춘곡 고희동(春谷 高義東)/1886~1985 - 근대 화가이자 우리나나 최초의 서양화가/전통적 회화를 서양화와 절충해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165] 1927년 3월 그믐에 그려 남전여사(藍田女史)에게 선물한 그림[166] 남젼여사가 누구인지는 아무도 몰라~[167] 남전여사는 아무런 기록이 없다.[168] 절벽 아래에서 뱃놀이하는 모습[169] 중국의 화풍이 엿보이는 그림[170] 새 감정위원의 글씨,고서 전문 감정위원인 김상환 감정위원[171] 이인좌의 난에서 공을 세워 사후에 받은 문서[172] 1728년에 일어난 무신란(戊申亂)=이인좌의 난)[173] 당시 공을 세운 박중로,박동로,박시로 3형제[174] 세 사람 사후인 1822년에 내린 문서로 공신의 후손들에게 부역을 면제해주는 내용[175] 조선 시대 관청 중 하나인 예조(禮曹)에서 발급한 문서[176] 정식 명칭은 예조입안(禮曹立案)[177] 예조판서의 수결(手決)도 찍혀있음[178] 목이 부러져 감정가 하락. 만약 목이 부러지지 않았다면 감정가는 1,000만원[179] 만약 진품이었다면 감정가는 400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