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디(영화)
1. 개요
[image]
'''제55회 아카데미 시상식 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 각본상, 미술상, 촬영상, 의상상, 편집상 수상작 / 음악상, 음향상, 분장상 후보작'''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의 일생을 다룬 것으로 유명한 1982년작 영화. 아무래도 주인공인 간디가 인도의 국부라 그런지 미국 영화임에도 1982년 11월 30일 인도에서 최초로 개봉되었으며, 영국에서 12월 3일, 미국에서 12월 10일에 최초로 개봉되었다. 아카데미 8개 부문을 수상했으며,[1] 당시 다른 강력한 수상 후보작이었던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E.T.를 제치고 최우수 작품상을 거머쥐었다. 미술상에서도 간디가 블레이드 러너를 제치고 수상하였고, 블레이드 러너가 후보에 올랐던 다른 한 분야인 시각효과 부분은 E.T.가 수상했다. 고통받는 블레이드 러너(...). 이후 인도 독립 70주년을 기념해 열린 영화제에서 개막작으로 상영되기도 했다.
미국 배급은 컬럼비아 트라이스타 픽처스가 했다.
머나먼 다리 같은 영화가 알려진 리처드 애튼버러[2] 가 감독하고 벤 킹슬리가 주연을 맡았다. 중간에 암리차르 학살사건 장면에서 나오는 영국군의 양민학살 장면 때문에 5.18 민주화운동 때 벌어진 학살이 연상돼서인지, 대한민국에서는 한동안 미개봉되어 영화잡지나 신문으로부터 왜 미개봉되냐고 까이는 글이 싣기도 했다가 89년 4월 8일에서야 188분 개봉판이 삭제없이 개봉했다. 서울관객 26만 5천여명으로 당시 기준으로 꽤 흥행했다.
참고로 리처드 애튼버러는 한국에서는 감독보단 배우로 더 잘 알려진 사람인데, 쥬라기 공원에서 공원 CEO인 존 해먼드로 나온 그 배우다.
이 영화에서의 명연기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벤 킹슬리는 인도인들에게 간디의 환생으로 착각을 받아[3] 고생했다고 한다. 실제로 간디를 봤던 인도 노인들이 촬영장의 벤 킹즐리를 보고 기겁했다 할 정도니... "싱크로율과 연기력의 시너지 효과"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두고두고 회자되는 명연기.
2200만 달러로 제작, 전세계에서 1억 2920만 달러를 벌어들이며 흥행도 성공했다. 더불어 마지막 간디의 장례식 장면에서 30만 명 이상의 엑스트라가 동원되어 한 장면에 나온 최다 엑스트라로 기네스북에 올랐다.
이 영화의 간디는 거의 신의 경지에 이른 성자로 간디의 인생에서 제기된 거의 모든 비판점이 사라지거나 수정되어서 나온다. 불가촉천민을 비롯한 하위 카스트를 폐지하고 모든 종교의 화목을 부르짖는가 하면 인종과 민족과 종교를 초월한 박애주의자로 나오는데 생전의 간디는 이슬람과 힌두교의 조화를 주장하긴 했어도 결국에는 힌두교를 편애한 경향이 있으며 불가촉천민에 대해서는 처우 개선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4]
한편으로 당시 파키스탄인들은 이 영화를 상당히 못마땅해 했다.[5] 파키스탄에서 간디와 동격인 국부 모하마드 진나를 부정적으로 묘사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이 영화의 간디는 상당히 미화된 반면 모하마드 진나는 간디와 네루에게 무리한 요구를 늘어놓고 들어주지 않으면 독립할 것이라고 협박하는 등 부정적으로 나오는 편이다. 다만 파키스탄처럼 무슬림이 대다수인 방글라데시에서는 이러한 묘사에 대해 평가가 나쁘지 않았는데, 모하마드 진나는 방글라데시의 전신인 동파키스탄의 벵골인들에게 우르두어 사용을 강요하고 벵골어 사용을 금지하여[6] 현재까지도 방글라데시에서 평가가 좋지 않기 때문이다.
2. 한국판 성우진(KBS)
KBS에서 1990년 2월 28일와 3월 1일에 이틀에 걸쳐서 방영했다.
- 배한성 - 마하트마 간디(벤 킹슬리)
- 최수민 - 카스투르바 간디(로히니 해탠가디)
- 임종국 - 조지 경(존 길구드)
- 이정구 - 자와할랄 네루(로산 세스)
- 황원 - 사르다르 발라브바이 파텔(새드 제프리)
- 온영삼 - 얀 스뮈츠(아돌 퍼가드)
- 송두석 - 다이어 장군(에드워드 폭스)
- 김정호 - 무함마드 알리 진나(알리크 파담시)
- 엄주환 - 워커(마틴 쉰)
- 설영범 - 다니엘스(데이빗 갠트) / 인도인(알록 나스)
- 장정진 - 바커(리처드 메이어스) / 게잇(리처드 버논)
- 유해무 - 총독(존 밀스) / 인도인(쉬리램 라구)
- 이연희 - 미나빈(제럴딘 제임스)
- 김준 - 앤드류스(이안 찰슨)
- 유남희 - 마가렛(캔디스 버건)
- 강구한 - 광부 책임자(존 사비던트) / 인도인(모핸 아가시)
[1] 소위 그랜드슬램으로 불리는 5개 주요 부문 중에서 여우주연상 하나만 뺀 나머지 4개를 차지했다.[2] 여담이지만 이 영화는 리처드 애튼버러의 근성(...)이 아니었다면 나올 수 없었을지도 모를 영화였다. 원래 간디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는 1950년대부터 인도 정부 차원으로 기획은 되고 있었지만, 원래 감독이 병으로 사망하면서 흐지부지되었고, 이후 리처드 애튼버러가 우연히 인도 출신의 영국인인 간디의 추종자를 만났고, 이후 간디의 전기를 읽고 감명을 받은 후, 루이 마운트배튼(항목을 참고하면 알 수 있겠지만 인도의 총독을 지낸 인물이었고, 네루와도 친분이 있는 사람이었다.)을 통해 당시 인도의 총리이던 자와할랄 네루와 그의 딸이자 후일 총리가 되는 인디라 간디를 소개받아(!) 제작의 승인과 지원을 약속받았지만, 자와할랄 네루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하면서(...) 또 흐지부지되었고, 이후 70년대 중반 다시 제작을 시도했지만 이번에는 인도에서 비상 사태(...)가 선포되면서 나가리. 그러다 다시 리처드 애튼버러가 당시 인도의 총리인 인디라 간디를 직접 설득해 제작 승인과 인도 정부의 지원까지 얻어내면서 겨우 영화를 만들었다. 이후 영화가 개봉되자 리처드 애튼버러는 영화의 필름을 자와할랄 네루와 루이 마운트배튼, 그가 간디의 전기를 다룬 영화를 만들게 된 계기를 제공한 인도 출신의 영국인의 묘에 직접 바쳤다고 한다.[3] 벤 킹슬리는 인도계 혼혈 영국인이다.그러다 보니 인도인인 간디와 비슷하게 생겼다는 게 이상할 건 없다. 하지만 그런 것을 감안해도 엄청 비슷하게 생겼는데, 작게 나온 스틸컷들은 보면 그냥 간디처럼 보이고, 크게 나온 스틸컷들도 주름살이 좀 적고 덜 말라보이는것만 제외하면 영락없는 간디로 보인다.[4] 마하트마 간디의 명예를 위해 변호를 좀 하자면, 다음과 같다. 일단 힌두교가 단일 종교가 아닌 여러 종교의 집합체나 다를 바 없다는 점에서 인도 국민주의자인 간디의 눈에는 그야말로 여러 종교를 포용할 수 있는 완전체 종교로 보였을 법도 하다. 당장 간디는 힌두교 신자가 아니라, 자이나교 신자이며, 그 스스로도 "나는 힌두교인이자, 무슬림이며, 유대교인이자, 기독교인이다."라고 말한 바도 있었다. 그리고 본인은 불가촉천민들의 처우 개선에 무관심했다고는 하지만 그들에 대한 차별은 끝까지 반대하여, 자기가 주축이 되어 세운 사바르마티 아시람이라는 마을에 불가촉천민이 이주해오는 문제로 싸움이 나자, 스스로 불가촉천민들의 마을로 들어가서 살겠다고 말하면서 불만을 잠재워버리기도 했고, 심지어 자기 집에 세들어 살던 불가촉천민에게 화장실 사용을 금지한 부인을 크게 나무라고는 천민 전용인 요강을 신분으로 세입자를 차별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부숴버리라고 요구하기도 했을 만큼, 그들에 대한 포용의 의지는 컸다. 마하트마 간디가 무슬림들을 포용하려다가 힌두교 광신자의 손에 살해당했고, 그의 신분도 고위급 평민 계층인 바이샤라는 걸 생각해보자.[5] 이 영화 자체는 파키스탄에서 개봉되지 않았지만, 이미 이 당시에도 인도 영화의 복제비디오들이 파키스탄에서 판을 치고 있었고 이를 통해 이 영화가 파키스탄에서 알려지게 되었다.[6] 이 때문에 방글라데시 독립전쟁이 일어나 동파키스탄이 방글라데시로 독립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