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수진(발레리나)

 

슈투트가르트 발레단 수석 발레리나
강수진
姜秀珍 | Kang Sue Jin

[image][1]
<colbgcolor=#ffc0cb> 출생
1967년 4월 24일(56세)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본관
진주 강씨[2]
신체
167cm
국적
[image] 대한민국[3]
활동 기간
1978년 ~
종교
천주교(세례명 : 헬레나)
직업
발레리나, 수필가
학력
선화예술중학교 (발레과 / 졸업)
선화예술고등학교 (졸업)
수상 내역
2015년 제34회 세종문화상 예술 부문
2015년 세종문화상 예술부문
2014년 제25회 고운문화상 고운문예인상
2014년 바덴뷔르템베르크 공로훈장
2007년 존 크랭코상
경력
(前) 국립발레단
(現) 슈투트가르트 발레단 (수석 발레리나)
(現) 대한민국 국립발레단 단장
(現) 2013년 2018 평창동계올림픽 홍보대사
(前) 2011년 로잔국제콩쿠르 대회 심사위원
(前) 2007년 독일 캄머 탠처린
(前) 2006년 제3회 서울국제무용콩쿠르 발레부문 심사위원
1. 소개
2. 발레리나 경력
2.1. 강수진의 발
3. 국립발레단 단장 경력
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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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대한민국의 前 발레리나. 현재는 국립발레단 단장 겸 예술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발레계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2. 발레리나 경력


리틀엔젤스예술단 출신으로, 언니를 따라갔다가 뽑혔다고 한다.[4] 선화예술중학교를 지원했을 당시에는 한국무용을 배웠었고 한국무용을 전공하기로 했지만, 중학교 1학년 때부터 발레과에 사람이 없어서 지원자를 받는 것을 보고 발레과에 지원했고, 그렇게 골격 테스트를 통과한 후 발레를 전공하게 되었다고 한다.
선화예술고등학교 재학 시절인 1981년 12월에 모나코의 왕립발레학교 교장 마리카 베소브라소바의 눈에 띄어 모나코로 떠나 3년간 유학 생활을 했으며, 1986년에 독일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에 아시아인 중 최초로 입단하여 2015년까지 활동했고, 2016년 발레단에서 매년 있는 단원평가와 승진심사에서 면제되어 원할 때까지 수석 무용수 자격으로 무대에 오를 수 있는 아시아 최초의 종신 단원 자격으로서 은퇴했다.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에서 1994년에 솔리스트, 1997년에 수석 발레리나가 되었다.
1985년 아시아인으로서 2번째로[5] 로잔 콩쿨 (Prix de Lausanne)에서 공동우승하였다. 1999년 <춘희>라는 소설을 바탕으로 한 까멜리아 레이디의 마르그리트 역으로 무용계의 아카데미상이라 불리는 브누아 드 라 당스(Benois de la Danse) 상을 받았다. 당연히 한국인 최초이며, 18년 현재 이 상을 받은 한국인은 강수진과 김주원, 박세은 그리고 발레리노 김기민 4명 뿐이다. 2007년에는 독일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정부로부터 궁중 무용가에 해당하는 캄머탠처린(Kammertanzerin)이라는 상을 받았다. 우리나라로 따지자면 인간 문화재이고, 이 역시 아시아 최초[6]이다. 이정도면 무조건 아시아인 최초라는 수식어가 필수로 붙어야 할 지경. 무려 면책 특권이 있다고 한다(!)[7]
이러한 그녀의 기록은 당시 한국 출신 발레리나 중에서는 거의 최초였다.[8]
특이사항으로, 발레의 대명사이자 각 발레단의 프리마 발레리나가 의무적으로 맡는 프티파-이바노프 버전의 걸작 발레 블랑인 백조의 호수의 오데트 역으로 무대에 선 적이 한 번도 없다. 대신 차이코프스키 3대 클래식 발레이자, 클래식 발레리나로서 최고 난도를 자랑하며 무용수의 자질을 평가받는 작품이라는 <잠자는 숲속의 미녀>에는 출연했다. 이렇듯 강수진은 드라마티컬 발레에 최적화된 동양 무용수로서, 오네긴, 말괄량이 길들이기, 지젤, 카멜리아 레이디처럼 연극적인 요소가 많은 발레를 대표 레퍼토리로 갖고 있다.
발레단 동료였던 터키인 툰치 소크만 씨와 2002년에 결혼했다. 금슬 좋기로 소문난 부부답게, 한국으로 같이 따라온 남편도 국립발레단에서 무보수 객원코치로 같이 일하고 있다.

2.1. 강수진의 발


특히, 혹독한 연습으로 인해 발가락 마디가 기형적으로 돌출되어있는 등 발의 형태가 많이 흉한 것은 그녀에 관해 매우 유명한 일화이다. 시인 고은은 그녀의 발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발이라고 찬양했다.
그러나 이런 발의 형태는 물론 강수진의 혹독한 연습, 끈기와 노력 끝에 생긴 것도 있지만, 애초에 강수진의 발이 발레에 적합하지 않았으며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아서 발 형태가 망가진 것도 있다. 실제로 강수진의 팔, 다리, 목 길이는 완벽한 반면 의외로 무릎 아래로는 발레리나로서 부적합한 형태로, 이 때문에 턴아웃을 하는 데 특히 애를 먹었으며 나와있는 무릎을 넣고 발등아치가 없는 형태의 발을 튀어나와 보이도록 교정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심지어 연습 중 발가락뼈가 부러지는 심각한 부상을 입었음에도 진통제를 먹고 발을 붕대로 감아서 끊임없이 연습했다는 일화도 있는데[9], 사실 이건 미친 짓이라고 봐도 좋다. 아무리 강수진처럼 되고 싶어도, 일단 무용수나 운동선수들이 부상을 입으면 완전히 회복하기 전까지는 절대안정을 취하고 충분한 휴식기간을 가지는 것을 잊지 말자. 강수진 본인도 브누아 드 라 당스를 수상했을 당시 골절로 인한 수술 일정과 피로 때문에 기념 공연 무대에 서지 못하는 아쉬움을 겪었다. 그리고 무대를 보면 당장이라도 다시 연습실로 뛰어들어갈까봐 카멜리아 레이디에 출연할 때는 긴 머리를 단발로 자르며 욕망을 차단했으며, 1년간 충분한 휴식을 가진 끝에 복귀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우리나라의 '무조건 열심히'라는 사상이 맞물려, 아직까지도 강수진의 발 사진 한 장 때문에 수많은 무용 전공자들이 피해를 보고 있다는 것은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현재는 당시에 비해 토슈즈의 발 보호 패드가 훨씬 발전되어 강수진만큼 흉한 발을 가진 발레 전공자는 거의 없다. 그러므로 발레리나의 발이 깨끗한 것을 보고서 연습을 열심히 안 했다고 착각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10] 또한 하루에 2~3시간만 자며 발레 연습을 했던 것은 어릴 적 리틀엔젤스에서 활동할 당시 학업과 무용 연습을 병행하던 경험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며, 이렇게 혹독한 스케줄을 소화하며 두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는 발레 유망주는 많지 않다. 강수진의 압도적인 재능과 인간을 뛰어넘을 정도로 기울인 노력을 폄하할 이유는 당연히 없지만, 그럼에도 역시 좋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최근에는 자기관리를 충분히 하면서도(적어도 뼈가 부러지면 쉬면서) 우수한 실력을 보여주는 무용수들이 많다. 발레리나들의 고질병인 무지외반증 없이도 토슈즈를 신고 있는 발레리나들도 있으며, 교수법이 발전하여 더 이상 다리에 철심을 박는 것이 미덕이 아니게 되었다. 물론 이 분위기가 전세계적으로는 말할 것도 없고.

3. 국립발레단 단장 경력


2014년부터 임기 3년의 대한민국 국립발레단의 예술감독에 취임했다. 이후 2015년 11월에 예술의 전당에서 공연 예브게니 오네긴을 펼친 것으로 대한민국 무대에서의 활동을 끝냈고, 2016년 7월에 독일에서의 공연 예브게니 오네긴을 마지막으로 발레리나 활동에서 은퇴했다. 은퇴를 위해 작품을 하나씩 정리했던 것.
국립발레단 단장으로서 단원을 선발할 때 신체조건보다는 근성, 열정, 재능을 먼저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실제로도 자신이 이러한 평가 기준 덕분에 지금 이 자리까지 올라왔기 때문.
2017년 1월에 연임이 결정되어 임기가 2020년까지 연장되었다. 하지만 이는 많은 발레팬들을 눈물 흘리게 했다. 좋은 예술가가 꼭 좋은 행정가인 것은 아니라서.(...)

4. 여담


  • 슬럼프를 매운 음식, 그것도 아주 매운 음식으로 해결한다고 한다. 냉장고를 부탁해에서도 매운 요리를 주문했을 정도. 셰프들이 요리 과정에서 청양고추와 매운 고추가루를 많이 쓰다보니 눈물까지 흘리면서 준비했으나, 정작 강수진이 원하는 '뒷골이 땡기는 매운 요리'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다만 매운 요리를 잘 못 먹는다고 했던 서장훈도 강수진의 요리를 먹으며 이 정도면 맛있게 맵다고 할 정도였다. 셰프들이 아무래도 강수진이 즐긴다는 매운 맛의 정도를 낮게 잡은 듯.
  • 다이어트는 특별히 하지는 않지만, 체력을 위해 억지로 굶지는 않는 타입이다. 식판 위에 적당히 먹을 정도로만 올려놓고 먹는 편으로, 밑반찬은 한식을 선호한다. 한국무용을 하고 발레를 시작한 1년 후까지는 아이스크림을 대단히 좋아했으나, 발레에 몰두한 이후 끊었다. 방송에서 친구들이 떡볶이를 먹을 때, 옆에서 꿀짱구 과자를 놓고 한 개씩 녹여 먹으며 견뎠다고 선화여중 동창인 박선희 발레리나가 말했다.
  • 놀랍게도 삼겹살을 먹어 본 적이 없다. 특별히 채식주의인 것은 아니고, 소고기닭고기 정도는 조금씩 먹지만 빨간 고기가 맛이 있는지 모르겠고 자신은 채소가 제일 맛있다고 한다. 콘도그는 유학 가기 전에 먹은 이래 30년이 지났다고 한다.
  • 뛰어난 미모뿐만 서구적인 얼굴과 타고난 신체 조건으로 유명한데, 실제로 유학 시절 당시 한국에 휴가차 놀러왔을 때 잡지 모델로 픽업됐을 정도였다고 한다.
  • 동아시아 출신들에게 애정이 깊어 신예 발레리나들을 아시아에서 발굴하려 했던 스승 베소브라소바가 가장 사랑했던 아시아인 제자로 알려져 있다. 유학 시절 극심한 향수병으로 발레를 그만두려 했을 때, 스승이 자신의 집에 데려가 예절교육과 트레이닝을 시키며 제 2의 엄마 노릇을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때의 경험으로 성격이 바뀌었을 정도이며, 매너 외에도 언어를 열심히 공부하여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까지 4개국어를 현지인 수준으로 구사한다.
  • 2016년 5월 10일에 연세대학교 100주년 기념관에서 열린 SSG 지식향연에서 1부 강연자로 초청됐는데, 평범한 신변잡기적 내용으로 많은 아쉬움을 일으켰다. 차라리 인생이야기보다는 발레를 통해 이 사람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나 이를 준비하기 위한 과정과 결과 등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미학적인 이야기를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의견도 있다.
  • 2017년 9월 18일 비정상회담에 출연, '은퇴 후에도 일하는 나 비정상인가요?'를 안건으로 가져와 은퇴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남편에 대한 사랑 표현으로 남자 패널들의 부러움을 샀고, 은퇴 번복에 대해서는 "본인이 하고 싶다면 하게 둬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나 자신은 못할 것 같다"고 일축했다. 참고로 현재 50살이 넘는 나이에도 대단한 동안 미모를 자랑, 실제 그녀의 나이를 들은 패널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 그녀의 전성기 미모를 볼 수 있는 인터뷰 영상. 예쁘다는 말을 떠나서 정말 아름답다는 표현이 어울릴만큼 미녀이다.

  • 그녀의 외할아버지 화가 구본웅은 친일인명사전에 등록된 유명한 친일파이다.


[1] 2009년 사진[2] 출처: 《능성구씨족보》 구근모편.[3] 비정상회담 167회차에 출연하여 독일에서 30년 이상 거주했지만 여전히 대한민국 국적이며 다른 나라로 귀화할 마음이 전혀 없다고 언급하였다.[4] 강재수(姜宰洙)와 구근모(具嫤謨)의 4남매(1남 3녀) 중 둘째인데, 본인뿐만 아니라 언니와 여동생 모두 예술 분야를 전공했다.[5] 아시아인 최초는 1983년도에 수상한 일본인 요시다 미야코. 로열 발레단의 수석 무용수였다. 로잔 콩쿨의 상위 입상자들은 장학생상 자격으로 원하는 발레단 산하 발레학교에 유학할 수 있는 특전을 부상으로 받으며 이러한 코스로 세계 유명 발레단의 솔리스트, 프리마 발레리노나 발레리나가 된다.[6] 혈연, 지연을 따지는 한국 같았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다. 명창 박동진이 유명한 박칼린을 전수자로 삼으려다 박칼린이 한국 국적이 아니라는 이유로 극심한 반대에 부딪혀 포기했던 적이 있다.[7] 정당한 사유가 있으면 법을 어겨도 봐주는 특권이다. 무려 살인을 저질러도 정당한 사유가 있을 시 면책특권을 누릴 수 있다고 한다. 물론 거의 사문화된 일종의 명예포상이고 살인면허 같은 것은 아니다. 당연하지만..[8] 현재는 그녀를 뛰어넘는 한국의 무용수들이 수없이 많다.[9] 한술 더 떠 옥탑방의 문제아들에 나온 바에 의하면 토슈즈 안에 생고기를 넣고(!!!) 무대에 섰다가 도중에 핏물이 나왔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10] 사실 애초에 발레리나에게 발을 보여달라고 하는 것부터가 실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