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민주화와 평화통일을 위한 국민연대

 




1. 개요
2. 상세
3. 인물


1. 개요


더불어민주당 내 계파 중 하나로, 줄여서 '''민주평화국민연대''' 또는 '''민평련'''이라고 한다. 조직적이고 공식적인 활동을 하는 유일한 계파로 볼 수 있다. 민주평화당과는 다르니 주의. 운동권 출신으로 성향은 진보주의로 분류된다. 또한 진보성향의 동교동계도 존재한다.

2. 상세


김근태와 함께 민주화 운동을 했던 재야 운동권 인사들로, 1999년 3월 발족한 '''국민정치연구회'''가 모태다. 핵심인 김근태-인재근 부부 부터 그 계승자를 자처하는 이인영까지 대부분 당시 학생운동의 주요인사였다. 주로 서울 수도권 지역 학생운동 계열의 주류 고위 간부 출신으로 이뤄졌으며, 김근태의 이니셜을 따서 GT계로도 불린다. 대략 김대중 전 대통령이 복귀한 시기 전후에 정계에 입문하기 시작했고, 참여정부 시절 열린우리당의 당내 주류가 되었다. 2005년 '''경제민주화와 평화통일을 위한 국민연대'''로 명칭을 바꾸었다.
김근태 사후, 결속력이 급격히 느슨해졌다. 적어도 새정치민주연합 시절까진 거대 계파로 꼽혔지만, 문재인이 당대표를 역임하며 안철수가 탈당하고 총선과 대선을 치르기까지의 지난한 과정을 치른 후로는[1] 386의 정체성인 명문대 운동권 경험자들이 배출되지않고 민주당의 중도화,명망가 위주로 대표되는 친노의 확산에 직격탄을 맞고 여기 저기 흩어지지면서 계파로써의 영향력이 상당히 와해된 상태.
사실 계파로써 영향력과 국민 지지도 딱히 높지않고 그렇게 흩어지면서 국민적 지지와 관심이 떨어짐에도 불구하고, 양향자 vs 유은혜 여성위원장 선거[2] 파동이나 지탄받는 여러 활동[3]에 비해 당내 요직, 비례대표 입후보 및 순위 배정에 있어서 적잖이 과잉대표된 결과를 보인다. 간단히 말해 당의 지지층이나 당원 전반에게 별로 지지받지 못하거나, 심지어 무관심(...)한데도 당내 영향력은 꽤 있다는 것. 이는 기본적으로 민평련 소속 의원의 숫자가 적지 않기 때문이며, 넓게 보면 해당 지역구 대의원들에 대한 장악력이 강하기 때문으로 볼 수도 있다.
따져보면 근 15년 내지 20년 정도 단일 계파로 존속했고, 소속으로 분류되는 정치인들은 다수가 다선이며, 다선이 아니더라도 대개 정치경력 20년은 된다.[4]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국민 또는 의회에서의 정치력이 별달리 특출나지도 않다. 국민에게 어필할만한 국감 또는 국조 활동이나, 사회적 이슈로 특히 입법이 간절한 법안 발의등이 상대적으로 현저히 떨어진다. 단독으로 150석을 넘겼던 열린우리당의 의회에서의 성과와 이후 더불어민주당이 들어서기 전까지 의회에서의 성과는 전체적으로 긍정적인 점수를 주기 어렵다. 특히 열린우리당 시절은 오합지졸에 지리멸렬이란 평가를 들어도 할 말이 없을 수준. 열린우리당 시절 최대계파였고 민주당계 정파의 평지풍파 내내 일정 정도 영향력을 유지한 계파란 점에서 책임을 피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평련이 계파로 더불어민주당까지 존속한 이유는 당내 정치에서 이렇다할 손해를 보지 않는 처신에 있다. 그나마 정치력 혹은 영향력이 발휘되는 부분은 당내 권력투쟁. 직접 당권에 도전하지 않을 때에는 당권 컨텐더에 이른바 세몰이[5]로 지지를 표하여 존재감을 행사하는 편. 정당의 어느 계파, 예컨대 친이/친박/친노/친문/비노/반문/비박 등등의 정당 내 정파들은 대개 당권에 도전한다. 당권을 쟁취하고 그 당권을 행사하여 여러 정치적 이벤트, 특히 대선/총선/지선 이벤트의 결과로서 정치적 자산을 얻기도 하고 정치적 책임을 지고 물러나기도 한다. 민평련은 대체로 이런 시도에 직접 나서지 않았기 때문에 정치적 자산도 책임도 질 것이 없어서 긴 세월동안 계파로 존속했다고 볼 수 있다. 그로 인해 부침을 겪는 다른 정파와의 관계에 따라 소속 정치인들이 둥둥 떠다녀서 결속이 느슨해진 것이기도 하고. 결국 정치인 혹은 정파로서의 능력이란 것이, 당 바깥에서 다른 정당과 싸워 의회에서 성과를 내는 쪽이나, 혹은 대중들에게 강력한 존재감을 드러내서 표심을 확장하는 쪽은 별로고, 당내 영향력을 강화해 당직 배분과 공천 배분으로 정치 생명을 연장하는 보신주의에 치중된 것 아니냐는 비판도 있다. 20년이란 기간은 정치인에게 결코 적은 시간은 아니다.
우원식은 을지로위원회를 만들어 주축으로 활동하였으며 그에 따른 성과 또한 상당한 편. 원내대표에 오른 것도 단순히 민평련 배경만이 아니라, 정치인으로서의 업적이 어느 정도 반영된 면이 있다. 집권 초기 추미애 대표가 국민의당과 충돌하여 국회가 마비되자 김동철을 회유해 추경을 통과시키며 문재인 대통령에게 감사의 전화를 받을 정도로 정치력이 뛰어나다는 평가도 있었지만, 국민의당에게 끌려다니며 야당 하자는 대로 다 해줬다는 비판도 많이 들었다. 물론 그뒤 국민의당의 다수가 바른미래당으로 넘어가서, 사실상 5대 5구도가 되어, 2개의 야당을 상대로 협상력을 발휘하기 힘든 상황이기도 했다.
이인영의 경우에는 2015년 새정치민주연합 전당대회 이후로 꾸준히 민평련 세력를 동력 삼아 당권에 도전해 오고 있는 중이다. 2018년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에도 당대표 도전을 공식 선언했다. 그 후 같은 민평련 소속의 설훈과 후보 단일화 협상을 통해 이인영이 추대되었다. 이 단일화 과정에서도 민평련 소속 의원들이 잔뜩 모여서 협상 담판에 직접 참여했는데, 공개적으로 계파 행위를 하는데도 언론으로부터 별로 욕을 먹지도 않고, 큰 관심도 못 받는 중이다. 하지만 당원들로부터는 대놓고 '정치 담합'한다고 신나게 욕을 먹고 있긴 하다. 심지어 이인영에게 당대표 단일화를 해주고 뒤로 빠졌던 설훈이 갑자기 최고위원 후보로 등록을 해서 더 욕을 먹었다. 어쨌든 그 후 이인영은 별다른 퍼포먼스를 보여 주지 못하고 당대표 예선 경선에서 가볍게 탈락했고, 설훈은 결국 전당대회에서 최고위원으로 당선되긴 하였으나, 수도권 4선 의원+동교동계+민평련이라는 화려한 경력과 백그라운드 조직에도 불구하고 초선의 박주민과 재선의 박광온에게도 밀려 후보 8명 중 3위로 쳐지는 굴욕을 맛봤다.
실제 이력을 보면 2012년 대선과 마찬가지로 2017년 대선에서도 지지후보가 다양하게 나뉘었다. 노영민 전 의원처럼 애초부터 친문 핵심 격인 인사도 있고, 진성준처럼 문재인 당대표 시기 어려울 때 곁을 지키며 문재인의 사람이 된 경우도 있고, 유은혜처럼 선거 때 문재인 캠프에 자연스럽게 합류한 케이스도 있다. 홍의락처럼 탈당했다가 마지막에야 복당하여 문재인 지지를 선언한 경우도 있었고, 설훈처럼 예나 지금이나 확고부동한 비문-반문 포지션을 유지하는 경우도 있고, 유승희처럼 최고위원 회의에서 분위기 파악 못하고 혼자 노래나 부르면서 '봉숭아 학당' 소리나 듣다가 이재명 캠프에 합류한 경우도 있었고[6], 더러는 박원순을 밀어주는 분위기도 있었다.[7] 한편 이인영은 탄핵정국에서 민주당 측 개헌특위 간사를 맡는등 소극적으로나마 개헌론을 외치기도 했다. 이렇듯 민평련은 전체적으로 큰 존재감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별다른 잡음도 없는 어중간한 계파라 할 수 있다.
실제로도 호남계와 친노계가 갈등할 때 중간에서 조정하는 역할을 적절하게 수행해 오긴 했다. 2014년 김한길 안철수 당대표 시절이나 2016년 문재인 대표 시절 친노와 호남 격돌시 중간에서 조정하는 윤활유 역할을 했었다. 김근태처럼 돈받지 않는 청렴정치를 정치 신념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문재인 대통령과 통하는 점이 많아서 그런지, 아니면 점점 계파 자체의 세력이 와해되어서 의탁할 곳이 없는 사람이 많아지는 중이라 그런지, 문재인 대통령이 가까이두고 중용하는 사람도 꽤 된다.
시간이 지나면서 계파의 영향력이 예전같지 않다는 시각이 많다. 뚜렷한 자체 대권주자도 없고, 대중성 있는 정치인도 없는 상황에서, 다른 대권주자나 지도자들을 지지하거나, 계파의 세력을 지렛대 삼아 당직이나 공천 지분을 어느정도 챙기면서 겨우 유지하고 있다는 평가도 많이 받고 있다.
그리고 유일하게 자기 계파를 드러내놓고 주장하며 정기적인 자체 모임까지 가지는 집단이지만, 언론의 관심도 별로 없다. 심지어 친문들은 메신저 단톡방만 만들어도 언론에서 집중 포화를 받는 마당인데, 자기네들은 20년 동안 대놓고 계파질 하면서도 비판에서 자유롭다는 이유로 당원들로부터 그닥 좋은 시선도 못 받고 있다.
다만 홍영표가 원내대표 활동을 끝내고 차기 원내대표로 친문계와 함께 이인영을 선출해내면서 민평련의 활로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닌것으로 보였다.[8] 그러나 당대표인 이해찬이 본인이 담당하는 공천 체제에 민평련을 아무도 기용하지 않으면서 이해찬은 민평련 사이의 갈등에 본격적으로 불을 당긴 상황이다.

3. 인물


  • 최규성
  • 설훈[9]
  • 기동민
  • 김민기
  • 김현권
  • 위성곤
  • 김한정
  • 권미혁
  • 신동근
  • 소병훈
  • 김영진
  • 이목희
  • 오영훈
  • 노영민[10]
  • 우원식 (전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11]
  • 유은혜[12][13]
  • 진성준[14]
  • 이인영 (민평련계에서 꾸준히 미는 유일한 당권 주자)
  • 제윤경
  • 홍의락
  • 홍익표
  • 인재근 (김근태의 부인, 김근태 사망 후 사실상 민평련계의 수장)
  • 유승희
  • 허영

[1] 이 시기는 민주당계 정당의 주축인 더불어민주당이 탄생하기 직전 기간으로써 그야말로 격변기였기 때문에 계파간 부침이나 당원 조직 분포나 여론 지형의 변동이 심했다.[2] 대의원 선거는 유은혜, 권리당원 선거는 양향자가 승리했다. 이 과정에서 양향자의 입지가 불리해지도록 정치질을 했던 것이 온라인 입당 후 권리당원이 된 친문 지지층을 자극해 양향자 당선에 영향을 주었다. 유은혜 역시 범친문으로 분류되나, 양향자는 문재인 당시 대표가 온라인 입당과 동시기에 추진한 인재영입으로 발탁된 순수 친문 인사이기 때문이다.[3] 세몰이로 존재감 과시하는 것이 잦다. 선당후사에 반해 자기 정치를 하는 정도까진 아니라도, 아주 적극적인 선당후사에 입각한 정치로 평가받기도 미묘하다[4] 정치인이 항상 연달아 당선하는 것은 아니니까[5] 예컨대 당권 컨덴더가 주최하는 행사에 우르르 참석해서 축사하고, 사진 찍을 때 머릿수 채워 주고, 후원금 모금해 주는 그런 것[6] 문재인 당대표 시기, 극심한 계파 갈등으로 당이 파국으로 치닫을 때, 최고위원 회의에서 분위기 파악 못하고 뜬금없이 '봄날은 간다' 노래를 갑자기 불러서 당 안팎에서 온갖 욕이란 욕은 다 먹었다.[7] 이인영이 박원순을 밀어주던 대표적인 예로, 박원순은 불출마 이후 문재인 캠프로 이적시키느라 공석이 된 서울시 정무부시장 자리에 구로구의 김종욱 현역 시의원을 데려가는 바람에 19대 대선 때 이 지역(구로구 라선거구)에선 전국 유일의 광역의원 보궐선거가 병행되었는데, 이 인물은 이인영의 고대 후배이자 초선 시절 보좌관 출신으로 정치활동을 시작한 사람이다.[8] 경쟁자인 노웅래는 꾸준한 지지층이 있으나 반문에 가까우며, 김태년은 대외적으로 친문계로 알려져 있으나, 세부적으로는 이해찬의 측근이고 이재명이 세가 없던 시기부터 그를 감싸준 만큼, 범친문 내에서도 궤가 좀 다른 부엉이 모임, 김진표-전해철 계열의 친문 성향의 의원들이 이인영을 지지하고 있었다.[9] 민평련에서 가장 비문-반문 성향이 강한 것으로 분류.[10] 친문으로 편입된지 오래 되어 사실상 민평련계와는 멀어진 상태.[11] 19대 대선문재인 후보 지지를 하며 비문으로 보기에는 힘든 상황. 그렇다고 민평련과 멀어졌다고는 하기엔 힘들다. 국회의원 사무실에도 김근태 전 의장의 사진이 아직 걸려있다.[12] 문재인 정부의 사회부총리를 맡게 되면서 넓은 의미의 친문으로 분류되기도 하는 분위기.[13] 사실 유은혜는 정계 입문 때부터 문재인과 연이 있던 사람이었다.[14] 친문으로 편입된지 오래 되어 사실상 민평련계와는 멀어진 상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