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향자

 


'''대한민국 국회의원 (광주 서구 을)'''
제19~20대
천정배

'''제21대
양향자'''

''현직''

'''대한민국 제21대 국회의원
양향자
梁香子 | Yang Hyangja
'''
<colbgcolor=#004ea2> '''출생'''
1967년 4월 4일 (57세)
전라남도 화순군 이양면 쌍봉리[1]
'''본관'''
제주 양씨
'''종교'''
개신교 (예장통합)[2]
'''학력'''
광주여자상업고등학교 (졸업)
한국디지털대학교 (인문학 / 학사)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전기전자컴퓨터공학 / 석사)
'''가족'''
배우자 최용배[3]
'''소속 정당'''

'''지역구'''
광주 서구 을
'''의원 선수'''
'''1'''
'''의원 대수'''
21
'''소속 위원회'''
기획재정위원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현직'''
제21대 국회의원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
더불어민주당 광주 서구을 지역위원장
일본경제침략대책특별위원회 위원
'''경력'''
삼성전자 반도체메모리설계실 연구보조원
삼성전자 메모리사업부 SRAM설계팀 책임연구원
삼성전자 메모리사업부 DRAM설계팀 수석연구원
삼성전자 메모리사업부 플래시설계팀 수석연구원, 부장
삼성전자 메모리사업부 플래시개발팀 상무
더불어민주당 선거대책위원회 위원
더불어민주당 광주광역시당 서구 을 지역위원회 위원장
더불어민주당 전국여성위원장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
인사혁신처 산하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 원장
더불어민주당 일본경제침략특별위원회 위원
'''SNS'''


1. 개요
2. 생애
2.1. 삼성전자 플래시개발실 상무
2.2. 연구보조원~과장 시절
2.3. 사내 대학 시절
2.4. 이후
3. 정계 입문
4. 논란
4.1. "반올림, 전문 시위꾼" 폄하 논란
4.2. 자기 표절 논란
4.3. 역사왜곡금지법 발의 논란
5. 저서
6. 소속 정당
7. 선거 이력
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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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전 기업인이자 현 정치인이다. 소속 정당은 더불어민주당이며, 문재인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영입인재로 정계에 입문했다.
20대 총선에서 광주 서구 을 지역에 도전하였다가 낙선의 고배를 마셨지만, 2016년 8.27 전당대회 여성 부문 최고위원 선거에 출마하여 민주당의 전국여성위원장 겸 여성 최고위원으로 당선돼 추미애 지도부에서 활동했으며, 2018년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때 민주당 광주시장 경선에 도전장을 냈지만 본선에는 통과하지 못했다. 2018년 8월 '국가인재개발원'의 원장으로 임명되어 취임했다. 2019년 8월 1일 사직하고 더불어민주당 일본경제침략대책특별위원회에 합류했다.
친문 성향의 트위터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다가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뒤 청와대 뉴미디어비서관실에서 일하게 되는 김선 씨가 양향자 최고위원의 인생 스토리를 트위터에 올려놓았다. #

2. 생애



2.1. 삼성전자 플래시개발실 상무


2014년 동아일보에 보도된 양향자 상무
1967년 4월 4일, 전라남도 화순군 이양면 쌍봉리에서 태어났다. 이후 광주여자상업고등학교, 한국디지털대학교 인문학 학사 과정,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전기전자컴퓨터공학 석사 과정을 졸업했다. 졸업한 후 삼성그룹에 취업했고 삼성그룹에서 인문계고 고졸 여성 출신이 임원이 된 것은 1993년 말 삼성생명의 임춘자 (대전여고 졸)가 최초였다.[4]
그러나 양향자는 고졸 여성 중에서도 삼성그룹 역사상 첫 여자상업고등학교 출신 임원이었으며, 삼성전자에 여상 평사원으로 입사해서 메모리사업부 플래시개발실 상무이사라는 연구임원직에까지 올랐다.

2.2. 연구보조원~과장 시절


광주여상을 졸업한 후 1985년 11월 삼성전자 기흥연구소에 입사해서 반도체 메모리설계실 연구보조원으로 일했다. 그 당시 그녀는 주산, 부기 (장부기입), 타자 밖에 할 줄 몰랐다. 그렇다 보니 커피 타고 책상 닦고 복사하기, 반복적으로 반도체 회로를 보고 그대로 따라 그리기 정도의 잡일을 했다. 이런 업무들은 성장가능성이 없다. 호칭도 '미스 양'이었다.
당시 부서장이었던 임형규 책임연구원[5]이 악필로 글을 휘갈겨놓은 뒤 '야, 누가 이것 좀 정리해 봐라!' 하고 말하고 책상에 놓고 나갔다. 그녀에게 시킨 일은 아니었지만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글을 읽어보니 전문용어 투성이었다. 선배들에게 물어서 간신히 편지를 해독할 수 있었고 서식에 맞게 정리할 수 있었다. 나중에 임형규 책임이 돌아와서 보고 깜짝 놀라면서 누가 했는지 묻고는, "미스 양! 물건이네! 잘 했어!" 하고 칭찬했다고 한다. 그것이 입사 후 처음으로 이름을 불리며 받은 칭찬이자 최고 실력자에게 받은 칭찬이라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고 한다.
하지만 성실성을 인정받는 것과 기술을 배우는 것은 별개였는데, 당시 그녀는 연구원이 되고 싶었지만 방법은 없었다. 그런데 그 당시 그녀가 복사해서 연구원들의 책상 위에 올려놓던 서류는 주로 일본어로 된 반도체 기술 논문들이었다. 삼성전자가 반도체 사업을 시작한 게 1983년이라 일본보다 기술이 뒤쳐졌다. 그래서 박사들도 일본어 논문을 읽어야만 했다. 복사 심부름을 하면서 일어에 능통한 연구원 수가 의외로 적다는 걸 알게 된 후, 사내 강의를 통해 일본어를 공부하려고 했다. 고등학교 때 주 1시간씩 제2외국어로 일본어를 배웠지만 그 정도로는 논문을 번역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삼성전자 인사부서에서는 '고졸이라서' 사원 대상 일본어 강의의 신청을 거부했다. 세 번째 신청하자 '전례가 없어서 안 된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 후에 몇 번인지 기억도 안 날 정도로 신청하자 결국 강의에 들어갈 수 있었다. 듣는 사람들이 다 대졸 출신인데다, 일본어 강사마저 "네가 뭘 할 수 있겠냐"며 무시를 당했지만, 불과 '''3개월 만에''' 일본어 자격증을 제일 먼저 땄다고 한다. 주말에도 기숙사에서 계속 일본어 공부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본어를 다 배운 다음 복사한 자료 밑에 0.5㎜짜리 볼펜으로 깨알 같이 해석을 달아 나눠줬다. 그날 처음으로 '미스 양'이 아닌 '양향자 씨'라고 불렸다. 그때부터 그녀는 업무에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이때부터 연구원들이 일본어 서적을 들고 번역해달라고 찾아오기 시작했다.
당시 여성 연구보조원에게는 승진한다는 희망이 없었다. 임형규 책임이 기껏 칭찬한다고 꺼낸 말이 "열심히 해라, 꾸준히 실력 쌓으면 부장도 될 수 있을 거야"였다. 당시에는 연구보조원 출신이 부장을 다는 것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했기에 순수하게 칭찬한다고 한 말이었다. 양향자는 속으로 '사장도 달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좋게좋게 넘어갔다.
당시 연구보조원에게는 책상도 주어지지 않았다. 적당히 회의실이나 탕비실 티테이블에서 대기했다. 그녀는 임형규 책임에게 건의해서 책상을 받아냈다.
일본어 번역을 할 수 있게 되자 임형규 책임이 팀 회의에 끼워주기 시작했다. "앞으로 미스 양도 회의에 들어와라, 잘 몰라도 그냥 들어봐."하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은 없었지만 어쨌든 참석했다. 팀 회의 참석과 일본어 서적 번역을 통해 기술력을 쌓아 자신도 반도체 설계 업무를 맡을 수 있게 되었다.
당시 사내에서 흔치 않았던 일본어 자격증을 가진 여성 사원이었던 터라 이와 관련해 일화가 하나 있다. 1988년 당시 반도체 산업 선진국이었던 일본에서 대단히 중요한 반도체 권위자인 하마다 시게타카 박사가 내한했는데, 하마다 박사로부터 반도체 산업 진출에 필요한 노하우를 전수받기로 되어 있었던 삼성전자에서 양향자에게 일주일 동안 하마다 박사의 통역과 가이드를 맡겼다고 한다.
당시 22세밖에 안 됐던 양향자의 일본어 실력은 통역까지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할 수 있겠냐'는 회사의 제안에 양향자는 기꺼이 업무를 맡겠다고 수락했다. 본인 스스로도 "사실 제가 그분들을 모시고 다녔어야 했는데, 그분들이 나를 모시고 다닌 거 같다(...)"고 자기 디스를 할 만큼 뛰어난 통역 가이드는 아니었던 모양이지만, 하마다 박사는 양향자를 상당히 마음에 들어했던 것 같다. 하마다 박사는 귀국길에 오를 때 공항에서 양향자에게 "너무 따뜻한 일주일이었다. 내 집으로 초대를 하고 싶다"는 인사를 건넸고 실제로 귀국한 지 2주도 안 돼 양향자를 초청했다고 한다.
그 이후에도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수천 장의 편지와 연하장, 카드를 주고 받았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양향자가 반도체 산업계를 떠나 정계 입문한 뒤 처음으로 도전한 선거였던 2016년 4.13 총선에서 낙선한 뒤 4월 20일 인사차 하마다 박사의 자택을 방문하였는데, 하마다 박사가 양향자에게 “실망하지 마라”고 위로한 뒤 “정치권에 가면 앞으로 중요한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될 텐데, 이것을 사용하라”고 격려하며 고급 커피 그릇 세트를 선물로 주었다고 한다. 이 커피 그릇 세트는 하마다 박사가 약 30년 전 우리나라로 왔을 때, 삼성그룹의 창업주였던 이병철 회장이 하마다 박사에게 선물로 준 것이었다고 한다. * 유튜브 인터뷰, 해당 에피소드는 49분 22초부터
1990년 삼성전자 직원과 결혼을 하였는데, 당시 고졸 여사원은 일이 힘들거나 결혼하면 퇴사하는 게 보통이었다. 당시 연구보조원 여상 고졸 입사 동기가 30명이었는데, 1991년 즈음에는 그녀 외에는 다 퇴사해 단 한 명도 남지 않았음에도 그녀는 일을 계속 하면서 1991년 딸을 낳았는데, 출산 전날까지는 일을 계속 해야 했으며 일이 고된 나머지, 부산의 시댁에 아기를 맡기고 오는 무궁화호 열차 안에서 펑펑 울었다고 한다. 맡길 곳을 찾지 못 해 입구 보안시설의 외부인 면회실에 아이를 맡겨 놓고 출근한 적도 있다고도 한다.
이런 복사 및 번역업무지원 일이 회사에 알려졌다. 당시 임원 비서 1명이 그만뒀는데 회사에서 후임자를 찾다가 상고 출신에 일본어 자격증이 있다고 그녀를 그 자리에 앉히려고 했다. 임형규 책임이 '니는 저 자리에 안 맞다'고 한마디로 못 하게 했다. 기술 연구원으로 커야 할 사람이 비서로 가면 커리어패스가 안 된다는 것이었다. 임형규 책임은 그녀를 개발팀으로 끌어당겨 줬다.
E-2 (전문대졸 사원 직급) 승진은 쉽게 성공했다. 하지만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된 뒤 E-3 (대졸 사원 직급) 승진심사에서 번번이 떨어졌다. 필기 시험은 붙었지만 면접 시험에서 이렇다 할 실수나 잘못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고배를 마셨다고 한다. 이 당시 직장 문화에는 (지금도 그렇지만) "여자가 아이를 낳았으면 '당연히' 퇴사하고 집안 일에 힘써야 하는 게 아니냐"는 생각이 상식처럼 굳어져 내려오던 때라, 그녀는 면접관들이 이러한 이유로 자신을 승진 시험에서 누락시켰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면접관에게 할 얘기를 테이프에다 녹음해서 몇 번씩 녹음을 반복하며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걸 승진심사에서 면접관한테 직접 얘기하는 패기를 보여줬다.
두 번째 필기 시험에 붙고 다음 면접 시험에서 면접관들에게 대놓고 "전 오늘 여러분께 면접을 보러 온 게 아닙니다. 만약 아이를 낳고 회사를 다닌다고 해서 이렇게 승진 시험에서 누락시키는 회사라면 제가 회사를 떠나겠습니다. 전 이런 회사에 다닐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고 쏘아붙인 뒤 그냥 면접장을 나와버렸다고(!) 한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 승진 시험에 최종 합격했다는 통보를 받게 되었다.[6] 이후 엘리베이터에서 그때 면접관으로 앉아 있었던 임원들과 마주친 적이 있었는데, 그 임원들은 양향자에게 "무서운 여자야!"라면서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인사말을 건넸다고 한다. 유튜브 인터뷰, 해당 에피소드는 4분부터 시작
1989년에서 1991년까지 임형규 책임연구원과 23명의 부서원들은 CCD 반도체 소자 국산화를 위해 3년간의 프로젝트를 시행했다. 1991년 당시 그 부서의 말단 연구원 5명 중에 그녀의 이름도 연구원으로 올라 있다.
입사 후 계속 연구보조원으로 지내다가 1993년 1월 SRAM 설계팀 책임연구원으로 승진했다.

2.3. 사내 대학 시절


사내 대학은 일반 대학과는 다른 곳이였는데, 삼성전자에서 사원들을 교육할 목적으로 1990년 설립했다. 1991년 사내 대학 (삼성전자 기술대학 반도체공학과)에 원서를 냈으나 반려되었다. 고졸 여사원에게 학업 지원을 한 전례가 없었다는 것이다. 다음 해 또 원서를 내자 '문과 여상 출신이 공학 공부를 어떻게 할 것인가?'라면서 반려했다. 3번째 원서를 내자 '심사대상이 아니다'는 답변을 받았다. 사규상 7년 이상 근속이면 누구나 참여가능이라고 명시되어 있었으므로 그것을 근거로 교육부서에 가서 따졌다. 교육부서 고위급이 '심정은 알겠지만 전례가 없어 곤란하다'고 답했다. 그러자 그녀는 '전례가 없으면 자신이 선례를 만들겠다'고 우겨서 입학했다.
들어갈 때는 꼴찌로 입학했다. 여성 고졸 연구원 보조는 그녀 1명뿐이었다고 한다. 공업수학, 유기화학, 고체물리학 등을 가르쳤지만 그녀는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힘들었지만, 회사 멘토 선배[7] 아랫집으로 아예 거처를 옮겨 틈틈이 과외를 받았다. 그 결과 1995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2.4. 이후


2005년 한국디지털대학교에서 인문학 학사 학위를 받았다.
2007년에는 DRAM설계팀 수석연구원으로 승진하였으며 2008년 2월 성균관대학교 전기전자컴퓨터공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8] 2011년에는 플래시설계팀 수석연구원 및 부장으로 배치되었다. 2014년에는 메모리사업부 플래시개발실 상무로 승진하였다.
95년부터 2016년까지 약 42건의 특허를 출원했다.

3. 정계 입문


학벌의 유리천장, 여성의 유리천장, 출신의 유리천장을 깨기 위해 모든 걸 다 바쳐 노력했지만, 청년들에게 '나처럼 노력하면 된다'고 말하고 싶진 않다. 오늘 열심히 살면 정당한 대가와 성공을 보장 받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스펙은 결론이 아니라 자부심이 되어야 한다. 우리 사회가 직장맘들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독해지거나 하나를 포기하라'는 것 말고는 없었다. 출산이 출세를 막고, 육아가 경력 단절로 바로 이어지는 구조를 바꿀 책임이 정치에게 있다.

양향자의 민주당 입당 인사 中

이런 발언과 태도가 젠더 폭력입니다. 공개 사과하세요.

젠더 폭력의 정의에 대해 묻는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의 질문에 대한 답변

2016년 1월 12일에 더불어민주당에 입당하였다. 더불어민주당 입당 인사에서 "학벌의 유리천장, 여성의 유리천장, 출신의 유리천장을 깨기 위해 모든 걸 다 바쳐 노력했지만, 청년들에게 '나처럼 노력하면 된다'고 말하고 싶진 않다. 오늘 열심히 살면 정당한 대가와 성공을 보장 받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스펙은 결론이 아니라 자부심이 되어야 한다. 우리 사회가 직장맘들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독해지거나 하나를 포기하라'는 것 말고는 없었다. 출산이 출세를 막고, 육아가 경력 단절로 바로 이어지는 구조를 바꿀 책임이 정치에게 있다."고 강조했다.
입당 인사에서 양향자 전 상무는 대기업 임원 출신이라는 성공적인 커리어에도 불구하고 솔직하고 공감가는, 무엇보다도 젊은 이들에게 부당한 노력을 강조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며 큰 인기를 얻게 되었다. #
더불어민주당의 공식 팟캐스트 방송인 진짜가 나타났다 시즌 2에 출연해 자신이 어떻게 정계 입문을 하게 되었는지 그간의 이야기를 직접 밝혔다.# 들어보면, 무슨 첩보 영화를 떠올리게 만드는 에피소드가 있다. 아무래도 발표 기자회견을 갖기 전까지 비밀을 유지하려고 그랬던 거 같다.
2016년 2월에는 박근혜 정부개성공단을 폐쇄하는 조치를 내리자 "시장이 있다면 그곳이 오지이든 사지이든 적국이든 진출하는 것이 기업가정신이다. 정치의 역할은 그 기업 활동을 보호하기 위해 국력을 다해 지원하는 것이다. 한 달 전 저는 제 손으로 사표를 쓰고 나오는데도, 그렇게 눈물이 났는데 아무 잘못도 없는데 그냥 빈손으로 쫓겨나오는 개성공단 입주 회사 임직원들의 마음이 어땠을지 짐작하기조차 어려웠다. 박근혜 정부는 중소기업을 살리겠다는 말을 하지 말라. 그럴 자격이 없다."라면서 박근혜 대통령을 질타하기도 했다.#1#2
2016년 4.13 총선에서 광주 서구 을 지역(화정3~4동, 서창동, 금호1~2동, 풍암동, 상무2동)의 후보로 전략공천을 받아 출마하였다. 광주여자상업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이 지역에서 남동생과 단 둘이 자취 생활을 한 인연이 있다고도 한다. 광주에 출마한 더불어민주당 후보들 중 가장 각광받았으나, 결국 천정배 국민의당 공동대표에게 23%에 달하는 큰 격차로 패배했다. 이후에는 더불어민주당 광주 서구 을 지역의 지역위원장으로 활동해왔다.
2016년 8.27 전당대회에서 열릴 여성 부문 최고위원 겸 전국여성위원장 경선에 출마하였으며 총 득표율 57.08%를 기록해 42.92%의 득표율을 기록한, 현역 의원 신분이자 정치 경력도 비교가 안 될 만큼 오래되었던 유은혜 의원을 꺾고 승리하면서 더불어민주당의 전국여성위원회 위원장(겸 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 와중에 명문대를 나온 운동권 출신 여성 선배 국회의원들이 똘똘 뭉쳐 유은혜 의원을 밀어주면서 고졸 출신이고 초보 정치인이었던 양향자 위원장을 강력하게 견제하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로 인하여 유은혜 의원 쪽은 민주당의 친문 성향 온라인 신규 당원들로부터 제대로 미운털이 박혔었다.[9] 사실, 전국여성위원장 자리는 명문대 출신 운동권 선후배가 뒤를 이어서 맡는 관행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양향자 위원장은 이 관행에 정면도전을 했던 셈이다.
그래서 SNS 반응의 흐름을 살펴보면 입당 후 처음으로 당내 경선에서 투표를 할 수 있게 된 신규 당원들도 처음에는 유은혜나 양향자나 누굴 뽑아야 할지 '참 행복한 고민이로다', 이러고 있었다.
이렇게 계파의 문제가 아니라 부당한 관행과 학연, 소위 엘리트 인맥으로 엮어진 정치질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바람에, "그래도 정치 짬밥이 좀 있는 사람이 맡는 게 낫지 않겠냐"며 유은혜 의원 쪽으로 조금이나마 기울어져 있던 무게중심이 "얘네들 좀 보소?"하며 단숨에 양향자 위원장 쪽으로 실리면서 당선에 큰 영향을 주게 되었다.
사실 경쟁자였던 유은혜 의원도 한때 친문계로 볼 수 있는 사람[10]이었지만, 주변 인물들의 과도한 옹호가 유 의원이 반감을 사게 만들어 버렸다.
유은혜 의원도 선거 개표결과 발표 직후 결과에 승복하면서 양향자 의원을 포옹해주면서 진심으로 축하해주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리고, 2018년 6월 13일에 실시될 지방선거에서 광주광역시장 선거에 출마한다는 보도가 있었는데#, 본인이 SNS에 밝힌 바에 따르면 아직 확실히 결정된 건 아니라고 한다. 그러다가 2017년 12월 13일, 공식적으로 광주시장 출마를 선언했다.# 광주에서 더불어민주당의 지지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상황이라 민주당 광주시장 후보 경선에서 승리한다면 역사상 첫 여성 광역자치단체장이 될 수도 있다. 여성이고 지난 총선에서 낙선해서 정치 경력이 없는지라 경선에서 가산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내부 경선에서도 해 볼만하다는 듯. 상기한 전당대회에서 현역 의원인 유은혜 의원을 제치고 여성최고위원에 선임된 경력만 봐도 당원들에게 어느 정도 신망이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
외부에는 광주시장 선거 출마가 확정된 건 아니라는 여지를 남겼지만, 본인은 그간 앞으로의 정치 행보에 대해 차근차근 준비해왔던 모양이다.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본인 싱크탱크인 ‘광주미래전략산업연구소’를 출범시켰다고 하며 1월 7일에는 광주과학기술원에서 산업정책 토론회를 열었다고 한다. 1월 28일에는 김대중컨벤션센터에서 자신의 저서인 ‘꿈 너머 꿈을 향해 날자, 향자’의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이 출판기념회에는 이석현·이개호·박영선·기동민·김병기·유승희·이수혁·최재성·정청래·전순옥·최민희민주당 동료들을 비롯한 5,000여명이 참석했다고 한다. #
그러나 인지도가 크게 작용하는 광역단체장 후보 경선의 특성상 이용섭, 강기정 등 상대 후보들이 워낙 광주에서 인지도와 지역 기반이 탄탄한 거물급들인 지라 14.85%의 득표율로 경선에서 떨어졌다. 경선 패배 후 양향자는 본인 SNS이용섭 후보의 경선 승리를 축하해 주며 그의 본선 승리를 기원하였다. 그리고 자신에게 지지를 보내준 지지자들에게도 "저는 이번에 너무 과분한 사랑을 받았다. 문재인 정부의 성공과 광주의 발전 그리고 민주당의 승리를 위해 항상 여러분들과 함께 최선을 다하겠다"고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사실, 당 내부의 일부 지지자들은 이러한 그녀의 안타까운 행보 때문에 이런 식으로 이용만 당하다 버려지는 게 아니냐는 걱정과 더불어민주당에 대한 전문가 집단의 회의감이 커질 수 있는 것에 대한 걱정을 많이 했었다. 더불어민주당이 분명히 국내 정당들 중에서는 가장 현실 속에서 발전을 추구하는 정당이라고는 해도 실무나 학술적인 부분에서는 많이 미숙한 걸 보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는데, 그 부족한 점을 보완해 줄 전문가 집단들이 당에 들어오는 건 고사하고 호감을 반감으로 바꿀 수 있는 일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
그렇지만, 2018년 8월 30일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의 원장(차관급)으로 임명되면서 이러한 걱정이 기우에 불과했음으로 결론이 났다.
2019년 일본의 경제보복을 계기로 당내 일본경제침략대책특별위원회 자문위원을 맡게 되었다. 정계 입문 전에는 반도체 산업에서 오랫동안 종사해온 사람이기도 하고, 일본에 대하여 어느 정도 지식이 있기도 한 사람이라는 점을 감안한 것 같다.
한편 2019년 8월 더불어민주당에서는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의 지역구인 서울 동작구 을에 양향자를 자객공천[11]하는 것을 검토 중이라고 한다. # 이러한 보도에 대해 이해찬 당대표는 "전혀 사실무근"이라고 부인했다. #
결국 20대 총선에 출마했던 광주광역시 서구 을 지역구에 21대 총선 예비후보 등록을 마쳤다. 당 내 예비후보들과의 경선을 거쳐야겠지만 아무래도 후보가 될 것이 유력하며 천정배와의 리턴 매치가 예상되는 상황. 이후 경선 승리로 공천을 받았다.
결국 개표 결과 상대 후보인 6선 거물 민생당 천정배 후보를 무려 '''75.8%'''라는 압도적인 득표차로 누르고 복수에 성공, 당선되었다.
윤미향을 지지 선언한 15인 중 1명이다.#

4. 논란


  •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시위를 옹호하는 발언을 했다. 트위터, 이는 래디컬 페미니즘 성향의 시위이며, 이 시위에서 무슨 문구가 나오는 지 알면 옹호할 수가 없는데 말이다. [12]
  • 한국경제TV에 출연해 "일본은 소재기술·기초 과학이 우리보다 적어도 100년, 많게는 150년을 앞서 간다"는주장을 펼쳤다. 이는 한일 기술격차가 50년이라는 한국당 주장보다도 100년이 더 많은 것이다. 이에 대해 JTBC는 팩트체크 코너에서 실제 한국과 일본의 기술격차는 1.9년이라고 밝혔다. 양향자의 주장대로라면 우리의 기술 수준은 일본 메이지 시대의 기술 수준에 해당한다는 말인데 이건 상식적으로도 납득이 안가는 궤변일 뿐이다.
  • YTN 라디오에 출연하여 검찰 수사심의위원회가 이재용 부회장에 대해 불기소 권고를 내린 것에 관하여 "4년간이나 재판을 받아오고 있는 상황이 과연 정상적인 상황이냐"고 발언하여 이 부회장을 두둔했다는 논란이 일었다. 이에 대해 비판이 일자 양 의원은 이 부회장이 아닌 법 절차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라는 해명을 내놓았다.
그러나 수사심의위의 불기소 결정을 비판한 같은 당의 박용진, 노웅래 의원의 발언에 대해서도 정치인이 그러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발언을 하는 등 지속적으로 이 부회장을 옹호하는 발언을 하였기 때문에 논란을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4.1. "반올림, 전문 시위꾼" 폄하 논란


2017년 3월 6일 삼성그룹 반도체 노동자를 위해 2015년부터 농성하던 반올림#s-2을 이익만을 위하는 '귀족 노조'라 비판하며 논란을 일으켰다.# 애초에 반올림은 노조가 아닌 시민단체인 데다 유족이 아니면 나서지 말라는 말을 하면서 논란을 더 키웠다. 귀족 운운도 말이 안 되는 것이 반올림은 노조가 아니라 돈 나올 구석이 없어 후원금으로 유지되고, 변호사 한 명만이 연수원 동기들의 후원으로 고정된 월급을 받고 있을 뿐, 자원해서 활동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 노조 운동과 시민 운동의 근본을 부정하는 발언과 유족이 아니면 나서지 말라는 발언으로 차라리 순혈주의가 맞았다는 여론도 나오는 상황. 결국 하루도 못 가 사과문을 올렸다. 문재인 대통령의 이미지에도 약간 타격이 갈 듯 싶었으나 그렇게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다만 민주당 대선 후보 토론회 때 이재명 시장이 이 사건을 두고 공격하기도 했다.
폄하 발언이 논란이 되자 SNS에 부적절한 발언을 한 것에 대해 사과했으며, 해당 발언이 나오게 된 연유도 설명하였다.#

4.2. 자기 표절 논란


2016년 언론 보도
학술대회에 발표한 부분을 학위논문에 동일하게 실었으나, 이에 대해 인용‧출처 표기 등을 하지 않았다. 양 위원장은 <일요신문>에 “지금 기준과는 달리 당시엔 관행이었다”고 해명했다.

4.3. 역사왜곡금지법 발의 논란



"5·18왜곡 막으랬더니…" 양향자 '역사왜곡금지법' 헛발질 논란, 양향자 의원 법안 발의 논란, "뒤늦게 밝혀진 친일 행각 비판 못하나" 역사왜곡금지법에 쏟아진 우려, 역사 해석 여지 분분한데…법으로 통제하려는 민주당

5. 저서


  • 꿈 너머 꿈을 향해 날자, 향자 - 비타베아타, 2018.

6.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2016 - 2018
정계 입문

2018 - 2019
공직 취임으로 인한 탈당

2019 -
복당

7.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2016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광주 서 을

24,603 (31.48%)
낙선 (2위)

2020
제21대 국회의원 선거
'''61,279 (75.83%)'''
'''당선 (1위)'''
'''초선'''

8. 둘러보기


'''역임한 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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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근의 강성리·매정리·품평리와 함께 제주 양씨 집성촌이다. 출처.[2] 광주 무등교회 집사이다.[3] 1990년 결혼하였다.[4] 참고로 대졸 여성 출신의 최초 임원은 주혜경 (영문학과), 이정희 (간호학과), 전문대졸 여성 출신의 최초 임원은 장선희 (전문대졸)로 모두 1995년경이다. 남성 고졸의 경우 좀 더 빨라서 1995년 남성 고졸 중에는 전무 승진자도 있었다.[5] 그 당시 삼성전자에서 책임연구원은 말그대로 과제를 '''책임'''진다는 의미로 20여명의 구성원을 지휘하는 부서장을 말한다. 그는 서울대 학사, 카이스트 석사, 미국 플로리다대 전자공학 박사 출신으로 연구소 내에서도 가장 전도유망한 사람 중 하나였다. 이후 삼성전자 사장까지 승진했다. SK텔레콤 부회장을 맡고 은퇴했다.[6] 당시에는 여상 고졸 연구보조원은 유니폼만 입게 통제되던 시대고 이런 행동에는 퇴사를 각오할 용기가 필요했다.[7] 박상식. 박사를 받은 후 1989년 삼성전자에 입사해 반도체연구소 이미지 센서 개발 팀장을 역임했다. 이후 세종대 전자공학과 교수로 이직했다.[8] 학위 주제는 "2.0Gb/s/pin 이상의 DRAM 인터페이스를 위한 reference clock-based locking time을 갖는 phase-locked loop". [9] 아이러니하게도, 친문계의 정신적 지주인 노무현 전 대통령 역시 상고 졸업이 최종 학력이라는 이유로 명문대 출신의 운동권들에게 비슷한 수모를 겪었었다. 이는 열린우리당이 탄생한 여러 요인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때를 기억하고 있는 친문 성향 당원들이 화가 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한마디로 "명문대 나왔으면 다야?"라고나 할까.[10] 유 의원 항목에 있지만 정확하게는 김근태 전 장관과 그와 함께 학생운동에 투신한 사람들의 모임인 민평련 계열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하지만 아래 문단의 항목에서 보듯이 개인적으로 소모적이고 파당적인 언행이 문제된 적도 없고, 문재인 대표와도 가까운 친소 관계를 유지해왔기에 친문, 최소한 범친문에 해당한다는 시각이 틀린 건 아니다. 다만 이후에 표창원 의원의 박근혜 풍자 그림 관련하여 징계를 먹인 민평련 여성계 12인의 한 명으로 지목되면서 친문 계열 지지자들의 지지를 잃었다.[11] 상대 당 유력 정치인의 지역구에 자당 당협위원장 대신 신인 정치인/거물급 등 경쟁력 있는 인물을 배치해 유력 정치인을 낙선시키는 전략이다. 이기면 최상의 전략이고, 지더라도 표차가 크지 않으면 나쁘지 않은 전략이다.[12] 특히, 탄핵 당선. 문을 곰으로 뒤집는 비하 행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