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희궁 경현당
1. 소개
慶熙宮 景賢堂
경희궁의 동궁으로, 왕세자가 공식 의례를 행하고 공부하던 정당(正堂)이었다.
위치는 경희궁의 중문 건명문의 바로 서북쪽에 있었다. 지금은 남아있지 않으며 그 자리에 서울역사박물관이 들어서있다.
2. 역사
1620년(광해군 12년)에 경희궁 창건 때 건립하였다. 경희궁을 지은 광해군의 세자 이지는 정작 사용해보지도 못한 채 인조반정으로 쫓겨났고, 인조의 큰 아들인 소현세자가 1625년(인조 3년) 이 곳에서 처음 관례와# 회강례[1] 를 행하면서# 처음 사용하였다.
전반적으로는 왕과 왕세자가 신하들을 만나고 공부하는 장소로 쓰였으나 이 외에도 다양하게 활용하였다. 숙종 시기에 세자였던 경종이, 영조 때 세손이었던 정조가 대리청정할 때, 공식적인 정치공간으로 사용하였고, 숙종과 영조가 기로소에 들어간 것을 기념하는 축하연도 두 번 다 이 곳에서 행하였다.[2] 영조의 아들 효장세자가 죽은 뒤 그 신주를 모시기도 했으며# 한학 문신들의 시험 장소로도 활용하였다.#
이후 헌종 때까지 활발하게 활용하다가 철종 이후에는 사용하지 않았다. 1860년대 고종 시기 경복궁을 재건할 때, 경희궁 건물들 헐어다 자재로 쓰면서 헐렸고 이 일대는 경작지가 되었다.
서궐(경희궁) 내에는 숭정전, 회상전, 정심합(正心閤), 사현합(思賢閤), 흥정당만 남기고 '''그 나머지는 모두 헐었다.''' 목재를 가져오니 다수가 썩었다. 이 가운데 좋은 것을 골라서 (경복궁의) 나인간(內人間)과 각사의 건조에 사용하였다.
《경복궁 중건일기》
3. 특징
- 《서궐도안(西闕圖案)》에 따르면, 정면 3칸, 측면 3칸의 총 9칸짜리 남향을 한 건물이다. 처마는 겹처마에 지붕은 팔작지붕이고 용마루와 내림마루, 추녀마루는 양성바름을 한 뒤 그 위에 취두와 용두, 그리고 잡상 5개를 얹었다. 기둥은 네모나게 깎아 세웠다. 정면 기준 가운데 칸은 양 옆의 칸보다 조금 더 넓으며 가운데 칸의 툇마루를 밖으로 나오게 하여 출입할 수 있게 하였다. 건물 전면에 계단을 3개 놓았으며, 남쪽 마당엔 사각형 모양의 연못을 팠다.
- 숙종이 기록한 《경현당조굴소기(景賢堂竈窟小記)》에 따르면, 위의 《경현당선온도》처럼 초기에는 서쪽에만 온돌이 있고 나머지 칸은 전부 마루였으나 숙종 대에 고쳐서 가운데만 마루로 두고 동쪽 방을 서쪽 방처럼 온돌로 바꿔서 좌, 우 대칭을 이루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