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문화

 



1. 개요
2. 미술
3. 음악
4. 문학
5. 건축
6. 과학
7. 종교
8. 장례
9. 분묘
9.1. 왕릉
9.2. 관련 문서


1. 개요


고구려 문화의 전반에 대해 서술한 문서.

2. 미술


[image]
傳 집안 출토 절풍장식
한국의 교육과정에서는 고구려의 미술은 강건하고 웅장한 기품이 깃들어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하지만 단순히 강건하고 웅장하기뿐만한 게 아니라 섬세하기도했다. 근래에 들어선 귀족적인 섬세함도 있다는 것도 추가하는 듯하다. 그러나, 그런 여러 표현들은 굉장히 주관적인 것이므로 유의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고구려의 미술로 남아있는 것은 고분벽화나 몇몇 공예품이 전부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강서대묘의 사신도. 사실 이 그림은 사신의 그림이 있는 걸로 유명하지만 중앙에 황룡도 또한 존재한다.
일본에는 담징이 그린 것으로 전해지는 호류지의 금당 벽화가 있었는데 1948년에 보수 공사 중 일어난 누전 화재사고로 불타버렸다. 고구려의 미술에서 주목할 만한 부분은 프레스코 기법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벽화 제작 기법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 이 벽화가 그려진 시기가 담징의 생몰연대와 일치하지 않고, 고구려의 불교 미술과는 거의 판이하게 다른 작풍을 지니고 있어 고구려의 작품이라 보기 어려운 면이 많다. 게다가 담징이 금당 벽화를 그렸다는 것은 나라 지방에 구전으로 전해져내려오는 말에 불과하다.
또한 산수화의 발전에도 아주 크게 기여했다. 불상 등의 공예품은 북조의 영향을 받았으나, 후기에는 한반도 내부에서 유행했던 미록보살 반가사유상 양식도 출현한다.

3. 음악


고구려 음악의 흔적은 4~5세기의 재상 왕산악이 진나라에서 도입한 칠현금을 개조한 거문고의 연주를 위해 지은 100여 곡이 유명하다. 물론 지금까지 전해지는건 한 곡도 없지만(…). 어쨌든 이때 발명된 거문고는 조선시대까지 대히트를 치게 된다.
한나라 때에 중국인들이 음악가들을 고구려에 보내었다는 기록도 있는데, 또한 '고취'라는 악기도 함께 가져가 고구려에 전했다고 한다. 수서에서는 고구려의 노래로는 지서(芝栖)가 있고 춤곡으로는 가지서(歌芝栖)가 있었다고 한다. 또 《신당서》에서는 고구려의 악기가 총 21악기라고 전해지며 기타 다른 것들도 합치면 30악기 수준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나라 때 고구려의 음악이 궁중음악으로 편입된 적이 있다. 측천무후는 고구려의 25곡을 때때로 즐겨 들었지만 중세 송나라 때에 오면 1곡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흔적을 잃었고 살아남은 1곡도 의복을 포함한 본래의 기풍을 잃었다고 전해진다.[출처]
고구려인들은 노래와 춤을 즐겼다고 한다.(조동일,'한국문학통사1',지식산업사,2005,p230-231). 전하는 노래로 유리왕황조가 등이 있다. 내원성, 연양, 명주는 고려사 악지에 근원설화만 전하고 있는 고구려 시대의 노래들이다.

4. 문학


운문은 남아 있는 게 황조가, 여수장우중문시, 인삼찬, 영고석 등의 소수의 시밖에 없다. 그 외에는 위에서 언급한 고려사 악지에 수록된 것들 정도. 인삼찬의 '인삼'은 그 인삼이 맞다. 인삼을 의인화하여 인삼이 스스로 말하고 있는 내용이다. 아래가 그 내용.

三椏五葉(삼아오엽 세 가장귀에 다섯 모난 잎이

背陽向陰(배 양 향 음 햇빛을 등지고 그늘을 향했네.

欲來求我(욕 래 구 아 와서 나를 찾고자 하거든

椴樹梢尋(가 수 상 심 자작나무 숲으로 오시오.

'''인삼찬(人蔘讚)'''

전설 혹은 설화는 동명성왕, 호동왕자, 산상왕, 미천왕, 온달 관련 이야기가 전해진다. 고구려인의 문학은 아니지만 고구려 멸망 후 당나라 사람 번한(樊漢)이 지은 고려성 회고시(高麗城懷古詩)가 있다. 고려시대의 학자이자 문신인 이색이 고려의 멸망을 안타까워 하며 지은 시인 부벽루에도 고구려와 관련된 내용이 많이 들어있다.

5. 건축


고구려의 건축은 축성술, 분묘조영 위주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일단은 그렇게 알려져 있는데
남은게 다 무너진 성곽에 무덤밖에 없다. 지못미. 특히 한반도의 무덤은 도굴 상태가 매우 심각해 출토품이 거의 없다. 심지어 요즘은 '''벽화도 뜯어서 판다'''고 한다. 남은 게 성곽과 무덤밖에 없다고 해도 남아있는 것들로 파악하건대 고구려의 성곽과 무덤은 높은 수준에 속한다. 두 쪽 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고구려 성곽은 주로 산 위에 건축되었으나 평지성도 있었다 평지성같은 경우는 굉장히 높게 쌓아 자체의 약점을 보완했다. 외형으로는 단순해 보이나, 실제로는 삼각형 모양으로 돌을 깎아 교차시키면서 쌓은 것으로 돌끼리 서로 맞물려 붕괴가 어렵도록 되어 있다. 고구려 성곽의 치나 옹성은 고구려 고유의 것은 아니나 중국에 비해 먼저 출현하여 일반화되었을 뿐이다.
웅장한 규모에 人자형 동자주가 두드러지고, 여말선초에 푸른 청자 기와가 건축에서 쓰였다면 고구려에선 붉은 기와가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온돌 또한 고구려 건축의 특징으로서 빼놓을 수 없다.
무덤은 돌무지무덤에서 굴식 돌방무덤으로 발전했다. 분묘로 가장 유명한 것은 장군총이다. 고구려의 돌무지무덤 중 원형보존이 가장 잘 되어있어 규모가 가장 큰 것으로 오해되곤 하지만, 실제로는 태왕릉과 같이 장군총보다 5배 이상 큰 돌무지무덤도 존재한다. 보존상태는 장군총에 비해 영 좋지 않지만.
고구려나 백제의 무덤은 흙을 무시무시하게 쌓아올린 신라, 가야의 무덤과는 달리 무덤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친절하게 완성되어 있어 여기만 찾아내면 도굴하기가 쉬운 편이다. 예전 나라가 건재했을 때는 무덤을 지키는 묘지기 등을 두면 되었지만 망하고 나면 그런 거 없기 때문에 차례차례 도굴꾼들에게 당하게 되었다. 백제 무령왕릉은 이런 점에서 볼 때 입구가 잘 숨겨지고 무덤이 아예 묻혀버리는 바람에 무사한 케이스.
백제와 신라가 사각형 형태의 목탑과 석탑들이 많았다면, 고구려는 팔각형 형태의 목탑들이 많았고, 석탑은 없었다.

6. 과학


독자적으로 천문학이 상당히 발전했다. 중국에서도 발견하지 못한 별자리를 발견한 바 있으며 이중 일부는 중국으로 흘러갔다. 우리가 잘 아는 조선시대의 천상열차분야지도 각석은 원본 각석이 대동강물에 빠져 이미 소실된 가운데 한성에 운좋게 남아있던 고구려 천문도 인본(4~6세기 추정)을 발견해서 다시 새긴 것이라고 한다.
또한, 일본의 벽화 고분(기토라 고분)중에는 고구려시기 평양의 하늘을 그린 것으로 파악되는 벽화를 가지고 있는 것이 있다. 고구려의 단위로써 주로 건축에 사용된 고려자, 즉 고구려척은 한반도, 일본열도에서 통용되었다. 의술 역시 뛰어나서 머리카락 하나를 열 개로 가를 수 있었다라고 할 만큼 침술 등에 뛰어났다. 전쟁을 많이했던 많큼 다른 국가들에 비하여 침술 외에도 외과술도 높은 수준이 아니었을까 추정된다.
또 막대한 철 생산과 가공운영능력 등을 증명하는 것답게 중공업도 우수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7. 종교


[image]
기본적으로 국교라는 개념은 없어도 다신교적 성격을 갖고 있다. 동명성왕유화부인을 고등신(高登神)과 부여신이라는 이름으로서 신으로 숭배하였고[1] 대장장이의 신인 수신(燧神), 소 머리를 한 농사의 신, 달의 여신, 해의 남신, 쇠를 다루던 야철신(揶鐵神), 수레를 다루던 제륜신(提輪神) 등을 섬겼으며, 그 외에도 가한신(可汗神)을 섬겼다고 전한다.[2] 이후 고구려인들 자체가 스스로를 천손이라 여기는 사상덕에 주몽이나 유화 같은 영웅적인 존재를 신으로 추앙하며 숭배하면서 천손사상을 더욱 강화하게 된다.
물론 이런 토속신앙 종교외에도 소수림왕 때 본격적으로 들어온 불교 역시 고구려의 다신교의 종교 중 하나로 들어왔고 나중에 도교 역시 들어오게 된다. 하지만 도교가 들어올 때에는 불교의 정치적 탄압을 받아서 도교가 위축되는 상황에 처하기도 했다.
고구려가 모시던 신 중 특이한 신은 기자신인데 기자조선을 세웠다던 기자로 여겨진다.현대에 들어서 기자 동래설은 부정되고 있는데, 이 부정론 중 하나가 고대 한국어에서 왕을 뜻하던 '길지'를 중국 측에서 기자로 오인했다는 설이다. 중국 측 기록에 음사란에 쓰여져 있는 점을 보아서 중국의 전통방식 제사와는 다른데, 만약 해당 부정설대로라면 고조선의 토착 지배자와 관련해서 숭상했을 가능성은 있다.[3]

8. 장례


당대 고구려는 부모가 죽으면 삼년상을 치뤘음이 중국사서가 증언한다. 광개토왕이 승하하고 부왕을 기리며 장수왕이 만 24개월 동안 상을 치룬 것을 광개토왕릉비가 증언하고 있다. 백제 또한 무령왕이 승하 했을때도 같은 방식으로 장사를 지냈음이 무령왕릉 지석에서 확인 되고 있으므로, 이 부문은 비단 고구려만 해당하는 장례 풍습은 아니다. 다만 신라는 6세기 초반에 순장을 금지 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있어서 신라가 그 전에 고구려와 백제의 삼년상 풍습을 따랐는지는 의문의 영역이다.
이에 대한 내막과 자세한 설명은 광개토왕릉비,무령왕릉,삼년상 항목을 찾아보자.
<廣開土太王碑文>

昊天不弔, 卅有九, 宴駕棄國. 以甲寅年九月卄九日乙酉, 遷就山陵.

(광개토태왕은) 하늘이 돌보지 아니하시어 39세(412년/영락永樂 22년)에 세상을 떠나 나라를 버리시었도다. 이후 갑인년(414, 장수왕 3년) 9월 29일 을유(乙酉)에 산릉(山陵)으로 능을 옮겨 모셨다.

<北史 列傳 - 高麗 >

死者,殡在屋内,经三年,择吉日而葬。居父母及夫丧,服皆三年,兄弟三月。初终哭泣,葬则鼓舞作乐以送之.埋讫,取死者生时服玩车马置墓侧,会葬者争取而去.

사람이 죽으면 염하여 집안에 놓는데, 3년 후에 길일을 택하여 장사지낸다. 부모나 남편이 상을 당하면 옷을 3년간 입고 형제는 3개월간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울며 읍하는데, 장사의 법칙은 북치고, 춤추고, 음악하면서 죽은 자를 보내는 것이다. 묻을 때에는 죽은 자가 태어났을 때의 옷과 익숙한 수레 말을 묘의 곁에 두는데, 장사에 모인 자들이 다투어 취한 후 가지고 간다.

<隋書 列傳 - 高麗>

死者, 殯於屋內, 經三年, 擇吉日而葬. 居父母及夫之喪, 服皆三年, 兄弟三月. 初終哭泣, 葬則鼓舞作樂以送之. 埋訖, 悉取死者生時服玩車馬置於墓側, 會葬者爭取而去.

죽은 자는 집안에서 염을 하고 3년 후에 길일을 택하여 장사지낸다. 부모나 지아비의 상에는 복을 3년간 입고 형제는 3개월을 지낸다. 처음부터 끝까지 슬피 우는데, 장례를 치를 때에 북치고 음악을 하여 춤추며 이를 보낸다. 이에 이르러 시신을 묻는데 모두 죽은 자가 살아있을 때의 옷이나 수레 말 등을 묘의 곁에 두는데 장사지내는 데 모였던 자들이 다투어 취한 후 가지고 간다.


9. 분묘


고구려의 무덤은 크게 돌로 쌓은 적석총(돌무지무덤)과 석실분(굴식돌방무덤)으로 구분지을 수 있다. 적석총은 피라미드형태의 계단식 적석총이 대표적이며 그중에서도 장군총이 많이 알려져 있다. 석실분은 아름다운 벽화가 칠해진 무용총, 각저총 등이 유명하다. 고구려 적석총은 압록강 유역에서 축조되던 무기단식적석총에서 발전하여 규모가 커지면서 계장식적석총, 계단식적석총으로 발전하였으며, 3세기 후엽에는 초거대 적석총이 축조된다. 일반적으로 초거대 적석총의 축조시기는 고구려의 왕권이 현저하게 부각된 시기로 본다.
고구려의 영역이 넓어지던 4세기 중후엽부터는 국내성일대에 귀족묘부터 낙랑과 요동에서 유행하던 석실봉토분이 들어온다. 과도기 형태로 우산하 3319호분과 같이 계단식적석총에 매장주체부는 낙랑의 전축분인 경우도 있다.
평양 천도와 함께 고구려의 주묘제는 석실분으로 전환된다.
고구려의 무덤은 오늘날의 길림성과 요녕성, 한반도 북부지역을 중심으로 분포하고 있으며 한반도의 중부지역인 경기도와 충청도 일대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그러나 지상에 축조되는 무덤의 특성상 많은 수의 무덤이 이미 멸실되었거나 현재도 파괴되고 있다. 200여 기의 무덤이 존재했던 것으로 알려지지만 현재 수십 기만 남아있는 상고성자 고분군이 대표적인 예. 현재 가장 많은 수의 무덤이 밀집분포하고 있는 곳은 길림성 집안시의 통구 고분군으로 약 10000여 기의 무덤이 분포하고 있다. 자세한 것은 아래 항목 참고.

9.1. 왕릉


왕릉의 경우는 석실구조를 채용하면서도, 토착묘제인 적석총의 규모와 장엄성이 현저해진다. 그 절정에 이른것이 고국양왕, 혹은 광개토왕릉으로 추정되는 태왕릉과 광개토대왕 혹은 장수왕릉으로 추정되는 장군총이다. 주로 초대형적석총들이 왕릉으로 비정된다.
  • 국내성 시기
    • 임강총 : 국내성 동쪽의 압록강 북안에 위치. 3세기 말~4세기 초로 비정되는 계장식 초거대 적석총. 동천왕릉으로 주로 비정된다.
    • 서대총 : 국내성 서쪽의 마선구 서쪽 산사면에 입지. 4세기 전반으로 비정되는 계단식 초거대 적석총.
    • 천추총 : 국내성 서쪽의 압록강 북안에 입지. 4세기 후반으로 비정되는 초거대적석총. 석재의 가공도가 고도로 높아지고, 밀림방지가공에 거대한 지탱석을 받쳐놓은 계단식 초거대 적석총.
    • 태왕릉 : 국내성 동북쪽에 입지. 천추총과 거의 같은 구조이나 지탱석이 더 커짐. 4세기 후반, 5세기 초반으로 비정.
    • 장군총 : 규모는 작아졌으나 매장주체부는 커짐. 비례가 훨씬 안정적이다. 5세기 초, 혹은 5세기 후엽에 비정.
  • 평양성(장안성) 시기
    • (전)동명왕릉 : 적석총에서 석실봉토분으로의 과도기를 보여주고 있다. 장수왕릉, 혹은 문자명왕릉으로 비정. 드물게 동명왕의 사당역할을 한 가묘로 추정하기도 한다.
    • 한왕묘 : 동명왕릉과 더불어 장수왕릉의 후보
    • 강서삼묘 : 강서대묘, 강서중묘, 강서소묘로 구성된 3개의 석실봉토분. 고구려 최후기 왕릉으로 비정된다.

9.2. 관련 문서




[출처] 김용만,'고구려의 그 많던 수레는 다 어디로 갔을까',바다출판사, 2005 p238[1] 유화의 경우에는 목상을 만들어 숭배했다고 하는데, 고려도경에 따르면 고려시대까지도 그 형태가 이어져내려오고 있었다. 고려도경에는 동신성모상 숭배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로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몽골의 침략과 조선의 개창에 따라 소실된 것으로 추정된다.[2] 이를 기록한 《구당서》에서는 이를 음사(淫祠)로 폄하했다.[3] 다만 고구려에서 공식적으로 고조선을 계승했다는 기록은 없어서 고구려가 영향과는 별개로 고조선을 계승했다고 보긴 힘들다.

분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