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화부인

 


'''칭호'''
'''유화부인(柳花夫人)'''
'''별호'''
신모(神母)[1]
동신성모(東神聖母)[2]
'''이름'''
유화(柳花)
'''남편'''
해모수왕(解慕漱王)
'''아들'''
추모왕(鄒牟王)
'''아버지'''
하백(河伯)
'''생몰년도'''
음력
? ~ 기원전 24
1. 개요
2. 생애
2.1. 초기
2.2. 주몽을 낳다
2.3. 죽음
3. 그 외에
4. 창작물에서의 유화부인


1. 개요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성왕어머니이다.
보통 '유화'라고 짧게 불리기도 하지만 그냥 음으로만 부르면 油畵와 헷갈리기 때문인지 '''유화부인(柳花夫人)'''으로 부르는 경우도 많다. 고려시대 민간에서는 신격(神格)으로서 동명성모(東明聖母)라고도 불렸다.
고구려의 건국 신화와 실제 사서의 기록에 동시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동명성왕의 목숨이 위협받게 되자 부여에서 탈출시켰으며, 이후 동명성왕이 졸본에서 고구려를 건국한 이후로도 곡식의 씨앗을 전해주는 등 여러모로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끝내 아들이 세운 고구려에 가지 못하고 부여 땅에서 죽었다. 이후로 고구려인들에게 나라의 시조인 동명성왕과 함께 조상신으로 숭배받았다. 수신(隧神)이자 농업신으로서 추앙받았다. 농업신으로 추앙받은 이유는 고구려 건국 신화에서 유화부인이 주몽에게 곡식 낟알을 주었기 때문.
그 와중에 해모수가 동명성왕의 아버지라는 설을 삼국사기에서 제기하고 있는데 신으로 추앙받는 유화부인에 비해 해모수는 그렇지 않아 아버지가 아닐 것이라는 추측이 힘을 얻는다.

2. 생애



2.1. 초기


고구려 건국 신화에 의하면[3] 유화는 본래 의 신 하백의 딸이었는데 하루는 유화가 자매들(훤화(萱花), 위화(葦花) 등[4])과 함께 강에서 놀던 중에 천제의 아들 해모수를 만났고 해모수와 압록강 가의 집에서 동거하였다.[5]
그러나 해모수는 유화를 버려둔채 혼자 하늘로 올라갔고 유화의 아버지 하백은 유화가 부모의 허락도 없이 외간 남자와 놀아났다면서[6] 크게 노하여 유화의 입을 석 자로 쭉 늘려서 추녀로 만든 뒤 백두산 근처의 우발수로 유배를 보내버렸다.
유화는 이후로 우발수에서 지내다가 그 곳에 사냥을 나온 동부여금와왕과 만나게 되었다.[7] 유화의 사연을 들은 금와왕은 유화를 거두어들여서 부여의 궁궐에서 지낼 수 있도록 해주었다.[8]

2.2. 주몽을 낳다


그런데 부여의 궁궐에서 태양빛이 유화를 계속 쫓아와 비춘 뒤 임신하였고 후에 '''왼쪽 겨드랑이로''' 을 낳았다.[9] 이를 괴이하게 여긴 금와왕이 알을 몇번이고 내다버렸지만 동물들과 들이 와서 알을 감싸주며 보호하는 것을 보고는 알을 다시 유화에게 돌려주었다. 이후 유화가 알을 포대기에 싸서 따뜻한 곳에 고이 놓아뒀더니 알을 깨고 한 아이가 나왔다. 이 아이가 바로 주몽으로, 훗날 고구려를 건국한 동명성왕이었다.
이후 주몽을 잘 키우다가 금와왕의 아들이었던 대소 왕자와 그 형제들이 주몽을 시기하여 죽이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에 유화부인은 아들인 주몽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아들을 부여 밖으로 도주하게 만들 계획을 세웠다.
어느날 채찍을 들고와서 왕의 들을 내리쳐서 가장 멀리 뛴 말을 골라 주몽에게 그 말의 가시를 놓아두게 했다. 그 말은 제대로 먹이를 먹지 못해 비실해졌고, 금와왕은 주몽에게 그 말을 주었다. 그리하여 주몽은 명마를 득템했다(…). 이후 결국 대소가 주몽을 죽이려 하자 유화는 주몽을 부여에서 떠나게 한다.
주몽은 이후로 갖은 고생 끝에 졸본에 도착했는데, 그만 급하게 가느라고 곡식의 씨앗을 가지고 가지 못했다. 유화는 비둘기에게 오곡의 종자를 가지고 주몽에게 가게 하여 농사를 짓게 도왔다. 이후 기원전 37년에 주몽이 졸본에 고구려를 건국하였으니, 그가 바로 동명성왕이었다.

2.3. 죽음


기원전 24년 8월 (동명성왕 14년), 부여에 남아있던 유화는 아들인 동명성왕이 건국한 고구려에 가지 못하고 결국 부여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에 금와왕은 태후의 예로써 유화의 장례를 치르고는 신묘를 지어 주었다. 이후 고구려에서는 유화를 시조인 주몽과 더불어 시조신으로 섬기며 해마다 제사를 지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기록을 보면 태조대왕[10] 때에 왕이 부여에 행차하여 유화부인의 묘에 제사지냈다고도 한다. 이로 미루어보아 이후로도 고구려는 시조신들에 대한 제사를 거르지 않았거니와, 그 묘도 그대로 부여 지역에 위치했던 것으로 보인다.

3. 그 외에


신화적으로 봤을 때 상당히 여러가지 이미지의 신들이 유화의 이야기에 겹쳐있는데 하백의 딸이라는 점에서는 물과 관련된 신, 주몽이 명마를 득템하도록 한 이야기에서 봤을 때는 유목민족의 신, 비둘기에게 오곡의 종자를 가지고 주몽에게 가서 전달하게 한 이야기에서 봤을 때는 농경의 신의 이미지가 겹쳐져 있다. 이는 고구려의 환경과 연관이 깊은 걸로 보여진다.
또한 만주 지역의 버드나무 숭배도 그녀와 깊은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여지는데, 물과 생명을 상징하는 만주 지역의 버드나무 숭배는 그녀에게서 기원한 것일지도 모른다.[11] 북방에서 자주 발견되는 천손강림(or 빛으로 잉태)코드와 남방에서 자주 발견되는 알에서 태어난 영웅이라는 코드가 결합된 특이 케이스로 꼽기도 한다.
조선시대 말기까지 평양 지역에서는 고구려가 멸망할 때, 초대 왕의 어머니(즉, 유화부인)의 목상이 피눈물을 흘렸다는 전설이 남아 있었다. 또한 유화부인을 모시는 사당도 남아 있었는데, 목상을 조각하여 모셨으나 휘장을 드려서 잡인이 함부로 보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고려도경에 따르면 개경 선인문(宣仁門) 안에 나무로 만든 동신성모상(東神聖母像)을 모셔둔 동신사(東神祠)라는 사당이 있으며, 동신성모는 곧 주몽의 어머니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에 따르면 고구려의 멸망에도 불구하고 유화에 대한 숭배는 고려시대까지도 이어지고 있었다.

동신사는 선인문(宣仁門) 안에 있다. 땅이 좀 편평하고 넓은데, 정전의 집이 낮고 누추하며 행랑과 월랑 30칸은 황량하게 수리하지 않은 채로 있다. 정전에는 ‘동신성모지당(東神聖母之堂)’이란 방이 붙어 있고 장막으로 가려 사람들이 신상(神像)을 보지 못하게 만들었는데, 이는 나무를 깎아 여인의 형상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것이 부여(夫餘)의 처인 하신(河神)의 딸이라고 한다. 그녀가 주몽(朱蒙)을 낳아 고려의 시조가 되었기 때문에 제사를 모시는 것이다. 전부터 사자(使者)가 이르면 관원을 보내어 전제(奠祭)를 마련하는데 그 생뢰(牲牢 제물로 바치는 희생)와 작헌(酌獻 잔을 드림)은 숭산신에 대한 법식과 같다.

고려도경

그런데 삼국사기 신라본기 경순왕조의 마지막 기사에 첨부된 사론에는 동신사에 대해서 김부식 자신이 북송에 갔을 때 들은 이야기라며 별도의 기록을 첨부해 두었다. 그 내용은 북송의 우신관이라는 도관에서 모시던 한 여신의 상에 대해 관반학사 왕보가 "이는 당신네 나라의 신임. 중국 제실의 딸이 해동의 진한에 도착해 아들을 낳았고 그 아들이 해동에서 첫 번째 왕이 되었고 그 어머니는 지선으로 오랫동안 선도산에 머물렀으므로 이를 기리기 위해 중국에서 사당을 세운 것임."이라고 전해준 내용을 기록했고, 이어 북송 사신 왕양이 동신성모에게 제사지내면서 바친 제문에서 "어진 이가 처음으로 나라를 세우셨다"라고 한 기록을 인용하면서 동신사에서 모셔진 제신은 선도성모라고 지목하고 있다. 삼국유사에서도 해당 제문의 내용을 선도성모에 관한 기록에 인용했는데, 이는 처음 세워질 당시에는 고구려 계승의식을 강하게 지니고 있었던 고려 왕조가 후기로 갈수록 신라 계승 의식이 강해지게 되었다는 것과도 관련이 있는 듯 하다. 다른 가능성으로는 국모라는 입장에 있는 유화부인-동신성모와 선도성모라는 두 신격(神格)이 시대가 흐름에 따라 일치화되었을 수도 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볼 수 있듯이 신격의 일치화는 역사상 흔히 일어났던 일이다.
반론으로는 두 기록이 고려의 초기와 후기의 차이를 반영한다기엔 고려도경이 쓰여졌던 때는 김부식 또한 멀쩡히 생존해 있던 동 시대이다. 그래서 고려도경에는 김부식의 외모와 가문에 대한 기록도 있다. 오히려 우신관의 선도성모에 대한 내용이 당나라에 방문했던 신라인들의 구전을 전하고 있을 가능성이 커 연대상 훨씬 빨랐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북송인들과 김부식이 이전에 신라인들이 전했던 선도성모 설화와 당대 고려에 내려오던 유화부인 설화를 혼동한 것이 된다.
일본서기에는 668년 고구려가 멸망할 때의 기록에서 등장하는데, 아들인 추모가 처음 나라를 세우면서 자신의 나라를 천 년 동안 유지하게 하려고 했는데 모부인(유화부인)이 "나라는 아무리 잘 다스려 봐야 천 년은 무리야. 7백 년만 해."라고 해서(...) 고구려가 700년 만에 멸망하게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12]

4. 창작물에서의 유화부인


1970년대에 방영된 KBS 인형극 동명성왕에서는 버들아기라는 이름으로 나왔다. 스토리는 삼국사기에 나오는 그대로였다.
드라마 주몽의 등장인물. 오연수가 연기한다. 여담으로 아들 주몽역은 송일국이었는데, 두 사람은 1971년생으로 동갑이다. 심지어 어머니 역인 오연수의 생일이 더 늦다. 그럼에도 미스 캐스팅으로 비춰지지 않고 위화감 없이 명연기를 선보였다.
[1] 동명왕편[2] 고려시대민간[3] 삼국사기 및 삼국유사에 나오는 줄거리와 이규보동명왕편을 쓰면서 인용한 구삼국사의 줄거리가 조금씩 다르다. 구삼국사는 현재 전하지 않지만 이규보가 동명왕편을 지으면서 저본으로 삼은 책으로 동명왕편 중간중간에 해설용으로 구삼국사의 내용을 끼워넣은 덕분에 고구려 동명성왕 신화의 오래된 유형 한 가지를 더 알 수 있게 되었다.[4] 각각 원추리꽃, 갈대꽃이라는 뜻이다. 참고로 유화는 버들꽃.[5] 구삼국사에는 해모수가 하늘에서 내려와 놀다가 강가에서 놀고 있는 유화 자매를 보고 구리로 된 집을 만들어 그 안에 술상을 차려놓았고 자매는 그 집에 들어가서 술 마시고 노느라 정신없는 틈을 타서 해모수는 갑자기 나타나 문을 막고 자매들을 잡으려 했는데 두 동생은 운좋게 달아나고 유화 한 사람만 해모수한테 잡혔다.[6] 구삼국사에는 해모수가 자기 큰딸을 납치하고 감금했다는 말에 하백이 해모수에게 사람을 보내 꾸짖자 해모수는 유화를 돌려보내려고 했는데 유화가 그새 해모수에게 정이 들어서 안 돌아가려고 했다고 되어 있다. 이를 계기로 해모수는 정식으로 하백에게 혼인을 요청했고 하백은 해모수와 술법 겨루기를 한 뒤에 세 번을 해모수가 이기고 나서 그를 사위로 인정하면서도 혹시나 자기 딸을 버리고 혼자 하늘로 돌아가지나 않을까 싶어서 7일은 지나야 깨는 을 먹여서 취한 사이에 유화와 함께 가죽 자루에 넣어서 해모수의 오룡거에 실어 하늘로 올려보냈지만 하백의 생각과는 달리 해모수는 하늘에 도착하기도 전에 술에서 깼고 유화의 비녀로 가죽 자루를 찢은 다음 혼자서 오룡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이에 하백이 "네가 저딴 놈을 사랑한 바람에 내가 이런 수치스러운 짓까지 했는데 이게 뭐냐, 결국 다 말아먹었다"면서 딸 유화를 내쫓고 만 것.[7]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서는 우발수 강가에서 만났다고만 되어 있는데 구삼국사는 우발수 강가에서 고기를 잡던 강력부추(强力扶鄒)라는 어부가 "요새는 물고기 잡으려고 강에 쳐둔 그물이 이상하게 자주 찢어진다"고 금와왕에게 호소했고 금와왕이 쇠로 된 그물을 쳐 두게 했더니 입술이 석 자나 되는 여자가 물고기를 먹다 말고 그물에 걸려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늘어진 입술 때문에 무슨 질문에도 대답을 제대로 못하자 입술을 세 번 칼로 잘라내고 나니 그제서야 말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8] 훗날 유화부인이 죽자 금와왕이 왕후의 예로 장사지내 주었다는 기록으로 보건데 유화부인을 아내로 삼았을 가능성도 있다.[9] 참조 [10] 태조대왕 본인의 어머니 부여태후도 부여 출신이고, 대무신왕에게 시집온 차비 해씨도 부여 출신인 등 고구려 초기에는 부여 왕실과의 통혼이 이루어지기도 했던 듯.[11] 사실 '유화(柳花)'라는 이름부터가 버들꽃이라는 뜻이다.[12] 그러나 당연하겠지만 끼워맞추기다. 사례로 "고려가 천년을 갈 수 있었는데 북한산에 기가 막혀 5백년만 가게 되었다"고 도선대사가 예언을 했다는 야사가 있는데, 실제로 고려는 474년만에 망했다. 그러나 이것은 구왕조를 무너뜨린 신왕조의 프로파간다일 가능성이 높다. 아무려면 그래도 자기 아들에게 빈말로나마 "천년이고 만년이고 영원해라" 라고 하지 "천년유지? 걍 적당히 해" 라고 말할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