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호

 


觀光號 / Tourism Ex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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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 사진은 월간 한국철도 1969년 2월호에 나온 사진이다.출처
1. 개요
2. 구성
2.1. 기관차
2.2. 객차
2.3. 객차등급
3. 새마을호 개편 후
4. 관련 문서


1. 개요


1969년에 도입된 대한민국의 최상위 열차 등급. 1974년에 새마을호로 개칭되어 현재까지 이어진다. 하지만 당시의 관광호는 현재의 새마을호와 급이 다른 호화 열차였다. 관광호로 처음 도입된 후 외관과 실내는 대체로 1986년 새마을호가 대대적으로 업그레이드될 때까지 큰 변화없이 이어진다.
시속 90km로 달렸으며 서울 ~ 부산 4시간대 소요를 처음으로 기록한 특1등급이다. 속도가 90km 밖에 안된다는 점은 현재 관광호가 비아냥 당하는 주된 원인 중 하나인데, 선형의 한계로 인해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고급 열차라는 명성에 걸맞게 부산역 타는 곳 1번이 전용이었다. 승객들이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는 수고를 덜기 위한 배려였다. 경부고속선경부선 동측으로 병주하다가 금정터널로 들어가기 때문에 KTX가 있는 현재도 ITX-새마을무궁화호, 관광열차가 사용한다. 부산역 또한 1층 통로가 막혀 똑같이 계단을 사용해야 한다. 서울역의 경우도 민자역사가 건설 이전까지는 관광호 및 새마을호 전용 대합실에서 계단 없이 바로 연결되었으나, 1988년 민자역사가 완공된 이후에는 5·6번 승강장이 새마을호 전용이 됨에 따라 하위 열차 승객들과 마찬가지로 계단을 사용해야 했다. 2004년 완공된 서울역 신역사 타는 곳 1·2번은 고상홈으로, 서울역 ~ 신창 간 급행 광역전철이 시종착한다.

2. 구성



2.1. 기관차


관광호는 신칸센을 모방하여 만들었다. 신칸센은 1964년 등장하여 전세계에 충격을 주었고 지금도 철도 교통 역사의 패러다임을 변화시킨 것으로 평가받는다. 관광호는 그러한 신칸센에 영감을 받아 만들어진 열차이다.
이 과정에서 흔히 '''신칸센 기관차'''라고 하는 위 사진 속 7500호대로 추정되는 특대형 기관차가 등장했는데, 저런 기괴한 물건이 등장한 것은 객차를 전부 일본에서 들여오면서 기관차 외관도 열차 이미지에 어울리도록 신칸센 0계 전동차와 유사하게 개조했기 때문이다. 한동안 전용 견인기로 사용되다가 나중에 전두부를 뜯어내고 본래 모습으로 되돌아 가거나[1] 화물도색으로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있던 당시에도 일반 특대형 기관차가 더 많이 쓰였다고 한다. 이후 1971년에 7100호대 기관차가 들어오고, 일부 기관차에 흰색+파랑색으로 도색하고 전용기로 운용하면서 소리소문 없이 사라졌다.
오늘날 저 기관차는 신칸센 짝퉁이라면서 철도 동호인들에게 조롱받기도 한다. 신칸센 기관차는 소수, 그것도 초창기에 좀 운행하다가 사라졌고, 실제로 관광호와 86년 이전까지 새마을호 대부분은 EMD GT26CW가 기관차로 사용되었다.

2.2. 객차


객차는 속도를 제외한 모든 면에서 신칸센에 견줄 수 있도록 최고급으로 만들어졌다. 이전까지 오로지 수송이라는 측면에만 집중해왔던 한국 철도청이 처음으로 승격들의 쾌적한 여행이라는 개념을 실현한 패러다임의 변화를 가져온 열차였다. 당시에는 무궁화호도 없었고 오로지 일반 열차(통일호급)만 있던 시절이었다. 때문에 당시 저런 호화 열차가 등장한 것은 사람들에게 큰 충격이었다.
"고급 of 고급"을 추구했기 때문에 객차가 전부 일본산(히타치 제작소, 일본차량제조)이었다. 구입시 들었던 돈은 원조 자금이 아닌, 정부가 보유한 외환 자금이었다고. 차축 발전기로 선풍기 돌리고 간신히 전등이나 켜던 시절에 전용 발전차를 달아놓고 에어컨을 장비했다. 지금이야 지하철에도 다 달려있지만 1970년대에 에어컨이라고 하면 부의 상징이라 일컬어질 정도로, 정말 정말 고급 물품이었고 대중화는 1990년대에 가능했던 일이었다.[2] 또한 유선/장대형 새마을호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전용 컴파트먼트[3]까지 딸렸는데 집안에 냉장고와 텔레비전이 있으면 잘사는 집안 취급받던 시절에 서민들에게 있어서 커다란 사치였다.
좀 더 자세한 내부모습과 당시 상황에 대해 잘 나온 선데이서울의 기사가 있다.

2월 8일 하오 1시 20분 -「관광호」가 시험운행을 시작함으로써 24년 만에 우리나라에 1등 객차가 부활되었다.「살롱·카」「비즈니스·룸」등「딜럭스」시설을 갖춘 이「달리는 응접실」은 오는 4월부터 경부(京釜)간을 4시간 45분에 달려「꿈의 초특급」구실을 할 예정.

엷은「오린지」빛 바탕에 하늘색 띠를 두른 이「딜럭스」열차는 특1등 1량, 1등 8량,「살롱·카」1량, 발전차 1량 모두 11량으로 편성된 호화판 객차로 우선 그 내부시설을 살펴보면 -

◇ 특1등 = 푸른「카페트」가 깔려 있고 전기「히터」32개와「쿨러」(냉방시설) 6개가 달려 있어 자동온도조절. 좌석마다 안내원을 불러낼 수 있는 초인종이 달려있고 베개, 휴지통, 간이탁자 등이 있다. 뒤에 마련된 3석의「비즈니스·룸」에선 사무를 볼 수 있는 탁자와 칸막이 시설이 되어 있으며 변소는 양식(洋式).

◇ 1등 = 종래 1량에 72좌석이던 2등에 비해 좌석 56개로 좌석 간격이 넓어서 좋다. 모든 시설이 특1등과 같으나 초인종,「비즈니스·룸」, 베개가 없으며 변소는 재래식.

◇ 발전차 = 종래의 객차발전은 객차마다 직류전원이 달려 있었으나「관광호」엔 따로 발전차량을 달아 4백kw의 발전량으로 전력 공급. 이 전력은 2천 세대가 충분히 쓸 수 있는 것.

이「관광호」의 모든 객차, 발전차는 새로 일본에서 도입된 것으로(총 236량)「관광호」의 도입값을 따져보면, 특1등 1량 2,250만원, 1등 8량(1량 2천만원) 1억 6천만원, 발전차 1량 3,598만원,「살롱·카」1량 2,520만원으로 총 2억 4,368만원이 된다. 가위 시설뿐만 아니라 가격면에서도「수퍼·딜럭스」열차.

철도청은 관광「시즌」에 대비, 외국인 국내관광객이 단체로 이용할 때에는 전세 운행도 할 방침. 한편 이「관광호」의 운행에 앞서 철도청은 12만 7천 입방m의 도상(道床)자갈을 보강하고 경부간만 약 12만개의 PC침목을 바꾸어 끼어 침목의 84%를 PC화 했다. 또 앞으로 1등 객차엔 그 시끄럽던 이동판매원을 타지 못하게 할 방침이라고.

8일, 서울과 부산에서 동시에 떠난「관광호」의 행운의 첫 시승(試乘)기관사는, 서울은 경력 15년에 32만여km를 무사고로 달린 김교원씨(서울기관차사무소소속), 부산에선 경력 16년에 70만km를 무사고로 달린 이동진씨(부산기관차사무소소속)[4]

가 몰았다.

시승 당일 철도청은 국내외 귀빈들을 초청, 시승케 하고 여행용「백」, 기념「메달」, 맥주, 「토스트」, 「코피」[5]

, 「카라멜」, 신탄진 담배, 과자 등 푸짐한 선물. 여기에 든 비용만 6백만원이란 얘기다.[6]

운행 도중 시승권 추첨놀이를 하여 가수 김「세레나」양이 추첨결과 1등 1377번의 이한용씨가 당첨, 3개월간 전선(全線)무임승차권[7]

을 받고 2등은 1258번, 3등엔 1053번 등이 각각 당첨.

최연소 시승객은 L국회의원 아드님인 6살짜리 꼬마.[8]

이 꼬마귀빈은 수원역을 지나자 그만 잠에 골아 떨어져「카라멜」을 손에 쥔 채 특1등객차 2좌석을 점령하고 단잠에 녹아 떨어졌다.

한편 철도병원에서 나온 의무반(의사 1명, 간호원 2명)에 첫 신세를 진 사람은 17세인 소하물(小荷物)운반원 서(徐)모군.[9]

서군은 나르다 왼손 식지 끝을 다쳐 응급처치를 받았다.

김기형 과기처장관, 이훈섭(李勳燮) 철도청장, 김「세레나」양이 한편에서 한담을 나누는가 하면 가수 최희준,「디자이너」「조세핀」조(趙), 김비함씨 등이 모여 앉아 폭소를 터뜨리기도.

하지만 경부간 특1등 4,700원, 1등 4,200원으로 보리쌀 한 가마 값이 넘는 이 엄청난 운행요금은 서민(庶民)들에겐 아직 그림의 떡.

- 선데이서울 69년 2/16 제2권 7호 통권 제21호

경향신문은 이 호화열차를 비판한 바 있다. 1969년 5월 1일 철길을 횡단하던 농부와 충돌하는 것을 막으려고 급정차하다가 탈선한 사고를 예를 들며 선로개량 등 조치없이 운행속도를 높이는 것은 모험이며,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3등석이나 2등석을 폐지한 것은 서민들에게 철도 이용을 어렵게 하며 소외감을 준다고 지적했고 초특급 열차 운행중지와 3등석을 늘리라고 요구했다. 당대 경제사정을 고려했을 때 부유층이나 자주 이용할 수 있고, 중산층들 이하 계층은 어쩌다 한번 타는 수준의 무조건 빠른 열차보다 서민 수송을 더 늘리라는 지적은 타당한 것이었다.

2.3. 객차등급


2등칸 3등칸 '''따위''' 근본없는 등급은 다 자르고 '''특1등칸과 1등칸'''이라는 구성으로 짜여져 있었으며, 서울 ~ 부산 간 특1등칸 4700원, 1등칸 4200원이었다. 참고로 1973년 오일쇼크 직전 평균 생계비가 3만원 정도했고, 공장직이나 안내양같은 저임금 직종은 월급이 1만 몇천원 정도 받는 수준이었으니 '''서울 ~ 부산 간 왕복 요금이 40만~50만원'''정도 하는 셈이다.[10]
비교를 위해 설명하자면, 2020년 기준으로 서울 ~ 부산 간 고속버스 왕복은 우등 7만 2000원, 프리미엄 9만 3600원이고 동서울 ~ 부산은 우등 7만 2400원, 서울 ~ 부산사상이 우등 7만 3400원, 프리미엄 9만 5400원, 동서울 ~ 부산사상은 우등 7만 3800원이다. 여기에 서울보다 거리가 더 되는 인천 ~ 부산은 우등 7만 5800원, 프리미엄 9만 8400원, 인천공항 ~ 김해는 우등 8만 9400원, 프리미엄 10만 4600원이고 시외노선인 인천공항 ~ 부산도 8만 9800원이다. 그리고 KTX 서울 ~ 부산 간 왕복은 일반실 11만 9600원, 특실 16만 7400원이고 ITX-새마을 왕복 8만 5200원, SRT 수서 ~ 부산 간 왕복은 일반실 10만 4000원, 특실 15만 1600원이다.
위에서도 설명했듯 지금 물가로도 충분히 사치스러운 가격인 데다가 내부에 달린 에어컨이란 물건 자체가 가정에 거의 보급되지 않던 1960 ~ 70년대 대한민국 경제수준을 감안하자면 말 그대로 상위 1%만을 위한 열차라고 부르기에 손색이 없다.
지금 물가로 환산해 본다면 편도 요금만으로도 동남아시아 여행을 다녀올 수 있고, 왕복 요금이면 , 사이판까지도 갈 수 있는 수준이다. 굳이 지금으로 따지자면 해랑 정도가 이 열차와 비슷한 포지션이라 할 수 있겠다. 해랑도 전국투어 스탠다드 룸(4인) 패키지가 300만원이다. 대신 2박 3일 동안 머물면서 음식도 대부분이 공짜기 때문에...해랑 가격을 나누어보면 3일동안 갔다오니 하루에 100만원, 4인기준이니 25만원, 훨씬 싸다. 게다가 해랑은 전국을 돌아다니는데 300만원이지만 관광호는 편도가 40만원이니 정말 비싼 셈. 2인실이 290만원인데 이것도 계산해 보면 1인당 약 48만원... '''이것도 하루 머물러 있는 거다.''' 가격만 봐도 관광호가 얼마나 호화스러운 열차인지 알 수 있다. 관광호 후신인 새마을호가 1980년대 당시에는 초특급 호화열차였던 걸 보면...
이 당시에 국내에 에어컨이 달린 곳이라면 몇몇 연구소, 대형병원 특실, 외국계 특급호텔, 경주 석굴암[11], 관광호, 여객기(정확히는 여압장치)정도 뿐이었고 청와대조차도 없었다. 에어컨 바람을 쐬었다는 것만으로도 지금으로 따지면 금수저이었던 시절이다. 고속버스도 그 당시에 에어컨이 있다 보니 '''부가가치세 과세 대상''', 즉 초호화 교통수단이었고 경쟁 대상이었다.
타 봤다거나, 1980년대에 새마을호를 타 봤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재벌이나 대기업 임원, 고위 공무원이나 국회의원 같은 금수저 반열에 오를 만한 사람들이었다 보면 될 정도로 수준 높은 열차였다. 1970년대 초반 고위 공무원 월급이 2~3만원대였으니 9급 공무원 초봉이 편도(...)운임 수준이었다고 보면 된다. 가전제품 하나씩 사들고 온다는 월남전 파병 병사 월급이 1.5만원 정도였으니 얼마나 비싼건지 감이 올 듯. 물론 평범한 상위권 서민층이나 중산층이면서도 회사에서 내주는 돈을 타거나 아니면 몇년 간 매달 조금씩 저축해서 편도로 질러본 사람도 있을 것이다. 당연히 자주 탈수야 없겠지만 항공기 퍼스트 글래스처럼 몇년에 한번이면 타는 것이 아주 불가능하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3. 새마을호 개편 후


1974년에 새마을호로 개편되고 객차와 기관차들이 그대로 인수인계되었으며, 새마을호로 개명 이후에도 동일한 객차는 1982년까지 꾸준히 도입되었다. 1986년 유선형 새마을호와 1987년 PMC 신형 동차 도입 이후에도 대부분 새마을호로 운행하다가 1992년에 무궁화호 특실 객차로 전환되어 사용되다 내구연한이 도래해서 퇴역된다. 당시에는 구형 새마을호 객차에서 파랑색 도색만 주황색으로 덧칠하면 무궁화호가 될 정도로 도색 디자인이 매우 심플했다. 통일호도 디자인 구성은 똑같아서 그 부분만 녹색으로 칠하면 된다. 관광호 시절에 제작된 차량은 1990년대 초중반에 이미 퇴역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야기에 의하면 그중 한 량이 시험차 성격으로 무궁화호 도색에 99xxx호를 부여받고 끝까지 살아남았었다고도 한다. 이를 추적한 어느 철덕에 의하면 해당 차량은 1968년 일반실로 도입된 11060호로, 1976년에 시험차 전환된 뒤 1980년에 99311호로, 1997년에 99991호로 차량번호가 변경되었다는 것.# 후일담으로는 2005년 차적삭제되었다고.[12] 그 중 한량은 곡성 기차마을에 가면 볼 수 있다.
직각 새마을호 시절 차량 중 1982년 12월[13]에 제작된 마지막 한 대가 2007년 12월까지 현역으로 영업 운행에 투입되었다. 옛 정선아리랑 유람열차 객차가 그 주인공이다. 통일호 등급으로 출범했지만 2004년 3월 통일호 등급 폐지 이후 통근열차로 재조정되어 2007년 12월 31일까지 운행되었다. 운행 중단 이후 2008년 당시 로지스에서 갑자기 조회 결과가 사라져 한때 폐차 해체설이 돌았으나 차적 말소 후 구절리역에서 정선 농산물 식품 홍보관으로 운영하고 있다고.[14] 자세한 것은 철도차량 보존 현황 문서로.
그리고 관광호와 직각형 새마을호 차량을 착각해 직각형 새마을호 객차 전체를 싸잡아 관광호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적절치 못하다. 직각형 새마을호 차량 상당수는 1974년에 새마을호로 개명된 이후 1982년도까지 도입되었으며 제작연도가 차이나는 만큼 스펙에 있어서도 차이가 난다. 이는 마치 351000호대 전동차 중 수인선 뱀눈이까지 전부 싸잡아 2030호대 전동차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것이다.

4. 관련 문서



[1] 초창기에는 7500호대 기관차도 새마을호 도색을 한 경우가 있었다.[2] 한국 최초 에어컨은 LG전자(당시 금성사)에서 1969년에 출시했다.[3] 이후 KTX 산천에서 부활했으나 스낵바 철거로 인해 같이 없어졌다.[4] 나중에 국내 최초로 100만km 무사고를 갱신하셨다.[5] 지금은 생소한 표기이지만 이 당시만 하더라도 일제강점기 영향이 남아있고 일본어 책을 중역하는 일도 허다했기에 일본식 어투가 많이 남아있던 시기였다. 실제로도 검정 고무신에서도 '냉장고와 코오피'라는 제목인 에피소드가 있기도 하고.[6] 보면 알겠지만 모두 당시로서는 부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인 음식들이었다. 상기한 주석에서 언급한 검정 에피소드에서도 커피는 미국에서 온 기영이 엄마 후배가 사 온 귀한 물건으로 묘사된다. 비록 1950년대 이후로 다방이 각 지방에 널리 퍼지기 시작했기는 했지만 애시당초에 전량 수입품이었기 때문에 커피값이 결코 싸지 않았고, 1960년대 당시에 커피 수입을 일시적으로 금지시키면서 콩가루를 볶아만든 콩피같은 정체불명인 음료수가 나오는 웃지못할 일도 벌어졌다. 서민적인(?) 이미지 취급받게 된 것은 1988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커피 자판기를 대거 설치하면서부터였다.. 즉 서울 올림픽 즈음해서 한국 서민 음료로 확산되었다는 이야기다.[7] 여기서 전선은 아마도 모든 열차, 즉 경부선이든 경원선이든 모든 곳을 돈 안내고 무료로 탄다는 뜻인듯 하다. 과장을 좀 더해서 말하자면 서울 ~ 부산 ktx 특실을 3달동안 무료로 탈 수 있다는 뜻이다.[8] 기사가 쓰여진 1969년 당시 기준이므로 1962 ~ 63년생, 세는 나이 기준이라면 1964년생이다.[9] 마찬가지로 기사가 쓰여진 1969년 기준 나이이므로 1951 ~ 1952년생, 세는 나이라면 1953년생이다.[10] 그 시절에 서울 ~ 부산 여행은 지금의 해외 여행과 비견될 정도로 먼 거리였다.[11] 부실복원에 의한 이슬맺힘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였다.[12] 진위 여부 확인이 필요한 소문에 의하면 이 차량은 용산국제업무지구 개발 사업이 막 시작되어 용산정비창이 해체될 때까지 한쪽 구석에 방치되어 있었다고도 한다.[13] 차번은 11035호였고 마지막으로 생산된 10량 특실 차량 중에서 최초로 셰브론 고무 에어 서스펜션 대차가 적용되었다.[14] 다만 측면이 심하게 개조되어서 객차였다는 것을 알아보기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