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마모토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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熊 本 城 / 구마모토 성 / Kumamoto-jo
일본 규슈 구마모토현 구마모토시 주오구에 위치한 성. 일본 3대 성[1] 으로 알려져 있다. 성의 역사를 설명한 아래 단락을 읽다보면 알겠지만 성의 주요 시설은 외형만 복원한지라 고전 건축물을 기대하고 내부에 들어갔다가 크게 실망할수도 있다. 별칭은 '은행성(銀杏城)'. 농성전(籠城戰)을 대비해서 그 열매가 식량이 될 수 있는 은행나무를 성내에 많이 심어서 붙여진 별명이다.
한국인들에게는 가토 기요마사의 성으로 유명하지만, 일본에서는 서남전쟁의 무대로 유명하다. 구마모토 성 내부에 있는 박물관에 있는 유물 중 상당수가 서남 전쟁에 쓰인 것들이 많다. 세이난 전쟁 당시 사이고 다카모리가 "정부군에게 진 것이 아니라 세이쇼 공(가토 기요마사의 '清正'의 음독)에게 진 것이다"라고 평했을 정도로 견고한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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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토 기요마사가 임진왜란에 참전하면서 얻은 축성술을 바탕으로 만든 성으로 알려져 있지만, 완전히 새로 지은 성은 아니다. 무로마치 막부 중기인 15세기 중엽에 히고국(肥後国)의 수호직을 맡고 있던 이데타 히데노부(出田秀信)에 의하여 '지바 성(千葉城)'이란 이름으로 축성되었다. 이후 이데타 씨가 몰락하면서 여러 번 주인이 바뀌는 과정에서 '구마모토 성'으로 이름도 바뀌게 되었다. 이때는 한자가 '隈本'으로 약간 달랐다.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 전역을 통일한 뒤인 1591년 가토 기요마사가 구마모토로 전봉하게 된다. 기요마사는 기존의 구마모토 성 주변 구릉 일대에 성벽을 두르게 하였고, 이때 구마모토의 한자를 지금의 '熊本'으로 고치도록 하였다. 특히 임진왜란 참전 후 축성의 달인(…)이 되어[2] 돌아온 후부터는 울산성 전투 당시 식량과 식수 부족에 고생한 경험을 살려, 식용 가능한 토란 줄기[3] 로 만든 다다미를 짜고 성벽에는 조롱박으로 도배를 했고, 성 안에는 우물을 120개나 팠다.[4]
구마모토 성을 쌓는 데 동원된 사람 중에는 가토 기요마사가 납치한 조선인들도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실제로 구마모토 성의 기와는 조선식에 가깝다. 사진 그리고 지금도 구마모토 현의 구마모토 시에는 울산정역(우루산마치역)이 있는데, 울산인들이 이 지역에 정착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기요마사가 열과 성을 다해 열심히 지어 놓은 구마모토 성은 그의 아들 가토 타다히로 시절에 개역(改易, 가이에키)을 당하면서 막부에 성과 영지를 몰수당하게 되었고, 이후 호소카와 타다오키의 아들 호소카와 타다토시가 이봉되어 들어온다. 현재 남아있는 성은 가토 기요마사가 개축한 그대로의 모습이 아니라 후에 성이 호소카와 가문에게 넘어간 다음에 10년에 걸쳐 80곳을 수리했다. 실은 1623년에 큰 지진으로 천수각과 건물이 무너지고 망가졌다. 7년 뒤에 호소카와 타다토시가 막상 성에 들어와 보니, 천장에서 빗물이 줄줄 새고 무너진 성벽이 방치된 상태였다. 구마모토 지역은 지진이 빈번한 곳이라 그 뒤로도 8차례의 대지진을 겪었고, 그래서 성주들은 막대한 돈을 들여 에도 시대를 걸쳐 수리를 계속했다. 특히 1854년 지진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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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2년.
전쟁에 대비해 난공불락의 성을 쌓았건만, 정작 지진으로 무너지기만 하더니, 1877년부터 시작된 서남전쟁에서는 제대로 그 위력을 발휘했다. 가고시마의 사이고 다카모리는 메이지 정부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고, 구마모토 성에서 농성전이 펼쳐졌다. 정부군은 57일간 성 안에서 농성을 벌어 결국 승리했다. 다카모리의 군대는 성 안으로는 한발짝도 들어가보지도 못하고 패했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나는 관군에게 진 것이 아니다. 기요마사 공에게 진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이 전투에서 원인 불명의 화재가 발생, 대, 소천수각을 비롯한 저택 등 혼마루의 건물들이 불에 타서 소실되었다. 지금의 천수각은 1960년에 철근 콘크리트로 외부만 복원한 것이다.
1889년에는 또 한 차례 대지진으로 성은 크게 파손, 60개였던 야구라(방어용 탑 櫓)은 이때 4분의 3이 무너졌다. 이 뒤로는 거의 수리하지 않고 방치되었다.
1927년에 우토 야구라를 복원했고, 1950년대부터 전국적으로 성의 복원 활동이 일어났고, 구마모토 성도 본격적으로 성을 복원하기 시작했다. 지금의 대부분은 이때의 복원 작업으로 성을 거의 새로 지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현존하는 우토 야구라(宇土櫓)(제3의 천수각이라고 불리운다) 등의 야구라(櫓)와 성문, 담 13동은 국가 중요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며, 성터는 '구마모토 성터'로서 국가 특별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천수각의 각 내부 중 구마모토 시립 구마모토 박물관의 분관에 전시관이 있다. 대형 주차장에서 천수각 방향으로 올라가는 길의 돌벽을 살펴보면 구멍이나 땜질이 되어있는 부분이 보인다. 서남 전쟁 당시의 총탄에 의한 흔적이라고 하는데 진위는 불명.
2016년 4월 14일 구마모토 전역에서 발생한 규모 6.8과 규모 7.3의 지진으로 인해 성곽이 일부 붕괴되고 성 전체에서 먼지 구름이 치솟는 모습이 발견되었다. 또한 16일 새벽에 발생한 지진으로 구마모토 성의 주요 망루인 '히가시주하치켄야구라(東十八間櫓)'와 '기타주하치켄야구라(北十八間櫓)'가 완전히 붕괴되었다. 이들은 모두 국가 중요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건축물이다. 현재 피해 상황이 정확하게 어느 정도인지 조사에 들어간 단계는 아니지만, 심각할 경우 완전 복구에 최대 20년 정도가 걸릴 수도 있다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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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수각은 버텨냈으나 떨어져 나간 기와와 돌담 복구에 3년, 무너진 성벽과 망루 등 성 전체를 복구하는데는 20년이 걸린다는 보도가 나왔다. 복구에 사용되는 사업비는 적어도 600억엔이 넘을 것으로 보고있다. 전체적인 피해 상황은 구글 어스에서 3차원 모델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2020년 9월에 내부 공사가 완료하였으며, 2021년 3월에 전면 재개장을 가진다.#
서남 전쟁 때 불 탄 이후 꾸준히 복원되어 왔으나 지진으로 말짱 도루묵 크리. 천수각이 복원된 이후 성의 주요 건물들이 차례로 다시 들어섰었다. 2009년에는 혼마루 어전까지 복원되었다. 최근에 복원된 어전에서는 옛 맛은 느낄 수 없지만 거실인 오오히로마나 접견실로 쓰였던 쇼쿤노마(昭君之間) 등이 볼만하다. 앞으로도 망루와 성문, 성벽 등을 꾸준히 다시 세울 계획이지만 향후 40년은 지나야 옛 모습으로 완전히 복원될 것으로 보인다. 니노마루와 산노마루 지역에는 광장과 박물관, 미술관 등이 들어서 있다. 산노마루 북서쪽에는 호소카와 교부 저택을 이축해 놓았다.
JR 구마모토역에서 접근하려면 역 앞에서 구마모토 시영 전차를 타고 구마모토죠·시야쿠쇼마에역(구마모토 성·시청 앞역)에서 내린다. 입장료는 500엔. 이 외에도 성 바로 앞에서 내려주는 버스와, 성 내에서 운행하는 셔틀 버스 등이 있으니 유용하게 이용하면 좋다.
대다수 버스의 종점인 구마모토 사쿠라마치 버스터미널에서는 도보로 5분 ~ 10분만 걸으면 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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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일본침몰을 원작으로 한, 2006년 개봉한 영화 일본침몰과 만화 일본침몰에서는 인근 아소산의 대규모 분화로 인해 날아오는 화산탄에 직격으로 맞아 파괴된다.
1. 개요
일본 규슈 구마모토현 구마모토시 주오구에 위치한 성. 일본 3대 성[1] 으로 알려져 있다. 성의 역사를 설명한 아래 단락을 읽다보면 알겠지만 성의 주요 시설은 외형만 복원한지라 고전 건축물을 기대하고 내부에 들어갔다가 크게 실망할수도 있다. 별칭은 '은행성(銀杏城)'. 농성전(籠城戰)을 대비해서 그 열매가 식량이 될 수 있는 은행나무를 성내에 많이 심어서 붙여진 별명이다.
한국인들에게는 가토 기요마사의 성으로 유명하지만, 일본에서는 서남전쟁의 무대로 유명하다. 구마모토 성 내부에 있는 박물관에 있는 유물 중 상당수가 서남 전쟁에 쓰인 것들이 많다. 세이난 전쟁 당시 사이고 다카모리가 "정부군에게 진 것이 아니라 세이쇼 공(가토 기요마사의 '清正'의 음독)에게 진 것이다"라고 평했을 정도로 견고한 성.
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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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토 기요마사가 임진왜란에 참전하면서 얻은 축성술을 바탕으로 만든 성으로 알려져 있지만, 완전히 새로 지은 성은 아니다. 무로마치 막부 중기인 15세기 중엽에 히고국(肥後国)의 수호직을 맡고 있던 이데타 히데노부(出田秀信)에 의하여 '지바 성(千葉城)'이란 이름으로 축성되었다. 이후 이데타 씨가 몰락하면서 여러 번 주인이 바뀌는 과정에서 '구마모토 성'으로 이름도 바뀌게 되었다. 이때는 한자가 '隈本'으로 약간 달랐다.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 전역을 통일한 뒤인 1591년 가토 기요마사가 구마모토로 전봉하게 된다. 기요마사는 기존의 구마모토 성 주변 구릉 일대에 성벽을 두르게 하였고, 이때 구마모토의 한자를 지금의 '熊本'으로 고치도록 하였다. 특히 임진왜란 참전 후 축성의 달인(…)이 되어[2] 돌아온 후부터는 울산성 전투 당시 식량과 식수 부족에 고생한 경험을 살려, 식용 가능한 토란 줄기[3] 로 만든 다다미를 짜고 성벽에는 조롱박으로 도배를 했고, 성 안에는 우물을 120개나 팠다.[4]
구마모토 성을 쌓는 데 동원된 사람 중에는 가토 기요마사가 납치한 조선인들도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실제로 구마모토 성의 기와는 조선식에 가깝다. 사진 그리고 지금도 구마모토 현의 구마모토 시에는 울산정역(우루산마치역)이 있는데, 울산인들이 이 지역에 정착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기요마사가 열과 성을 다해 열심히 지어 놓은 구마모토 성은 그의 아들 가토 타다히로 시절에 개역(改易, 가이에키)을 당하면서 막부에 성과 영지를 몰수당하게 되었고, 이후 호소카와 타다오키의 아들 호소카와 타다토시가 이봉되어 들어온다. 현재 남아있는 성은 가토 기요마사가 개축한 그대로의 모습이 아니라 후에 성이 호소카와 가문에게 넘어간 다음에 10년에 걸쳐 80곳을 수리했다. 실은 1623년에 큰 지진으로 천수각과 건물이 무너지고 망가졌다. 7년 뒤에 호소카와 타다토시가 막상 성에 들어와 보니, 천장에서 빗물이 줄줄 새고 무너진 성벽이 방치된 상태였다. 구마모토 지역은 지진이 빈번한 곳이라 그 뒤로도 8차례의 대지진을 겪었고, 그래서 성주들은 막대한 돈을 들여 에도 시대를 걸쳐 수리를 계속했다. 특히 1854년 지진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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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2년.
전쟁에 대비해 난공불락의 성을 쌓았건만, 정작 지진으로 무너지기만 하더니, 1877년부터 시작된 서남전쟁에서는 제대로 그 위력을 발휘했다. 가고시마의 사이고 다카모리는 메이지 정부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고, 구마모토 성에서 농성전이 펼쳐졌다. 정부군은 57일간 성 안에서 농성을 벌어 결국 승리했다. 다카모리의 군대는 성 안으로는 한발짝도 들어가보지도 못하고 패했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나는 관군에게 진 것이 아니다. 기요마사 공에게 진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이 전투에서 원인 불명의 화재가 발생, 대, 소천수각을 비롯한 저택 등 혼마루의 건물들이 불에 타서 소실되었다. 지금의 천수각은 1960년에 철근 콘크리트로 외부만 복원한 것이다.
1889년에는 또 한 차례 대지진으로 성은 크게 파손, 60개였던 야구라(방어용 탑 櫓)은 이때 4분의 3이 무너졌다. 이 뒤로는 거의 수리하지 않고 방치되었다.
1927년에 우토 야구라를 복원했고, 1950년대부터 전국적으로 성의 복원 활동이 일어났고, 구마모토 성도 본격적으로 성을 복원하기 시작했다. 지금의 대부분은 이때의 복원 작업으로 성을 거의 새로 지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현존하는 우토 야구라(宇土櫓)(제3의 천수각이라고 불리운다) 등의 야구라(櫓)와 성문, 담 13동은 국가 중요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며, 성터는 '구마모토 성터'로서 국가 특별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천수각의 각 내부 중 구마모토 시립 구마모토 박물관의 분관에 전시관이 있다. 대형 주차장에서 천수각 방향으로 올라가는 길의 돌벽을 살펴보면 구멍이나 땜질이 되어있는 부분이 보인다. 서남 전쟁 당시의 총탄에 의한 흔적이라고 하는데 진위는 불명.
3. 재손상
2016년 4월 14일 구마모토 전역에서 발생한 규모 6.8과 규모 7.3의 지진으로 인해 성곽이 일부 붕괴되고 성 전체에서 먼지 구름이 치솟는 모습이 발견되었다. 또한 16일 새벽에 발생한 지진으로 구마모토 성의 주요 망루인 '히가시주하치켄야구라(東十八間櫓)'와 '기타주하치켄야구라(北十八間櫓)'가 완전히 붕괴되었다. 이들은 모두 국가 중요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건축물이다. 현재 피해 상황이 정확하게 어느 정도인지 조사에 들어간 단계는 아니지만, 심각할 경우 완전 복구에 최대 20년 정도가 걸릴 수도 있다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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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수각은 버텨냈으나 떨어져 나간 기와와 돌담 복구에 3년, 무너진 성벽과 망루 등 성 전체를 복구하는데는 20년이 걸린다는 보도가 나왔다. 복구에 사용되는 사업비는 적어도 600억엔이 넘을 것으로 보고있다. 전체적인 피해 상황은 구글 어스에서 3차원 모델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2020년 9월에 내부 공사가 완료하였으며, 2021년 3월에 전면 재개장을 가진다.#
4. 구조
서남 전쟁 때 불 탄 이후 꾸준히 복원되어 왔으나 지진으로 말짱 도루묵 크리. 천수각이 복원된 이후 성의 주요 건물들이 차례로 다시 들어섰었다. 2009년에는 혼마루 어전까지 복원되었다. 최근에 복원된 어전에서는 옛 맛은 느낄 수 없지만 거실인 오오히로마나 접견실로 쓰였던 쇼쿤노마(昭君之間) 등이 볼만하다. 앞으로도 망루와 성문, 성벽 등을 꾸준히 다시 세울 계획이지만 향후 40년은 지나야 옛 모습으로 완전히 복원될 것으로 보인다. 니노마루와 산노마루 지역에는 광장과 박물관, 미술관 등이 들어서 있다. 산노마루 북서쪽에는 호소카와 교부 저택을 이축해 놓았다.
5. 찾아가는 길
JR 구마모토역에서 접근하려면 역 앞에서 구마모토 시영 전차를 타고 구마모토죠·시야쿠쇼마에역(구마모토 성·시청 앞역)에서 내린다. 입장료는 500엔. 이 외에도 성 바로 앞에서 내려주는 버스와, 성 내에서 운행하는 셔틀 버스 등이 있으니 유용하게 이용하면 좋다.
대다수 버스의 종점인 구마모토 사쿠라마치 버스터미널에서는 도보로 5분 ~ 10분만 걸으면 갈 수 있다.
6. 대중 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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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일본침몰을 원작으로 한, 2006년 개봉한 영화 일본침몰과 만화 일본침몰에서는 인근 아소산의 대규모 분화로 인해 날아오는 화산탄에 직격으로 맞아 파괴된다.
7. 여담
8. 관련 항목
9. 관련 문서
[1] 구마모토 성, 오사카 성, 나머지 하나는 히메지 성을 꼽는 곳도 있고, 나고야 성을 꼽는 곳도 있다[2] 실제로 이후 구마모토 성에서 보여준 기요마사의 축성 형태는 에도 후기 병학자들에게 아예 '기요마사류(清正流)'란 이름으로 독자적인 양식으로 인정받기에 이른다.[3] 가마쿠라 시대부터 일본에서 야전 전투 식량으로 많이 썼다. '이모가라나와(芋がら縄)'라고 해서 토란 줄기를 잘라 된장으로 조린 후 말려서 노끈처럼 엮은 것. 허리에 감고 다니다가 노끈 대용으로도 쓰고 숙영지에서 끓이면 즉석 된장국이 되니 이걸 먹었다. 국내에는 이게 고구마 줄기로 잘못 알려져있는데 과거 KBS 역사스페셜에서 울산성 전투를 다루며 고구마 줄기라고 잘못 알린 탓이다.[4] 다만 공성전에 대비하여 식수의 고갈을 막기 위한 방책으로 우물을 파 두는 건 다른 성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해서 쌓았던 대성산성에서도 전설에는 99개의 연못이 있었다는데 발굴 조사 결과 '''170개'''의 연못이 확인되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