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오로 3세
1. 개요
제220대 교황. 본명은 알레산드로 파르네세(Alessandro Farnese).
종교개혁이 불꽃처럼 독일에 번지는 가운데 트리엔트 공의회를 소집하는 등 가톨릭에 깊은 영향을 끼치게 되는 개혁운동을 착수한 동시에, 르네상스 예술을 전폭적으로 후원한 교황으로도 유명하다. 전임 교황들이 저지른 친족 등용과 직권 남용을 그대로 이어받아 비판받긴 하지만, 종교개혁의 확산을 막고 전대인 클레멘스 7세가 젊은 혈기로 말미암아 교황령을 둘러싸고 온갖 분란을 벌인 것을 그럭저럭 수습했다는 평을 받는다.
2. 재임 전
이탈리아 카니노 지역의 명문 가문인 파르네제 가문 출신이다. 고대 로마 시대 귀족 후예로 명문가인 오르시니 가문이나, 콜론나 가문만은 못하지만 그럭저걸 뼈대는 있는집안인데 파르네제 가문은 원래 용병대장 출신이다.
그는 로마와 피렌체에서 인본주의 교육을 받았는데, 특히 피렌체에서는 메디치 가문과 연관을 맺으며 공부하였고 훗날 교황 레오 10세가 된 조반니 데 메디치와도 친분을 가졌다.
늙어서 교황이라는 타이틀을 달게 되었지만 소싯적에는 날마다 사교 클럽에 참가하여 수많은 여성들과 교제하는 호색한(!)이었고, 그의 누이 줄리아는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정부(情婦)로 '그리스도의 신부'라는 별칭을 얻을 정도였다. 교황의 애첩인 누이 줄리아 파르네제의 덕으로 25세에 추기경이 되었지만, 이전의 생활은 버리지 않았다. 특히 한 정부와의 사이에서는 4명의 자녀를 보았을 정도였다. 성직자가 되기 전에 낳았다는 쉴드가 있지만 사실무근인 게, 장남 피에로 루이지가 1503년생이다. 그나마 위안거리라면, 사제독신 규정이 느슨한 시기에 한 여인에게서만 낳았다는 점이다. 이 중 장남이자 파르마 대공인 피에로 루이지의 차남 오타비오는 부친의 뒤를 이어 파르마 대공이 되었고, 훗날 교황의 신앙적 파트너인 카를 5세의 서녀와 혼인하게 되며[1] , 장손인 알레산드로 파르네제는 추기경 자리에 오른다.
교황 알렉산데르 6세에게 서품을 받아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마음을 다잡은 후, 로마 교회의 재산 관리자를 거쳐 1493년 추기경으로 임명됐다. 그런데 이런 벼락 출세 뒤에는 그의 누이 줄리아가 알렉산데르 6세가 가장 아끼는 첩실이라는 배경이 크게 작용했다는 흑역사가 있다. 하지만 능력을 인정받아 1509년 알렉산데르 6세와는 원수지간이던 교황 율리오 2세로부터도 파르마의 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
알렉산데르 6세, 비오 3세, 율리오 2세, 레오 10세, 하드리아노 6세, 클레멘스 7세 등 도합 6명의 교황을 모시면서 추기경단 의장으로도 활약했던 바오로 3세는 1534년 교황 클레멘스 7세가 선종하자 67세라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경험과 재치를 인정받아 만장일치로 교황직에 올랐다.
3. 교황 재임기
원래 하드리아노 6세의 선종 후에도 교황 선출이 유력했으나, 누나 줄리아 파르네세가 알렉산데르 6세의 첩실인 인연으로 치맛바람으로 추기경이 된 흑역사에다가, 성직에 있으면서도 사생아를 넷이나 두었기 때문에 에지디오 추기경에게 집중 공격을 받아 무산되었다.
15년 후라 그런 흠에 대한 비판은 약해졌고, 무엇보다 67세에다가 맡은 직책마다 유능했기에 쉽게 선출되었다.
전임 교황들의 오점인 친족 등용과 가문 퍼주기라는 잘못을 바오로 3세도 저질렀다. 자신의 가문인 파르네제 가문의 퍼주기의 일환으로 나이가 고작 16살, 14살에 불과한 두 손자를 추기경단에 입회시켰고, 알렉산데르 6세가 체사레에게 퍼주었듯이 차남 피에르 루이지를 교황령 군대의 최고 지휘관에 임명했다. 그리고 아들들에게 파르마와 피에첸차를 퍼주려고 전쟁을 벌인 것은 큰 오점으로 꼽힌다. 피에르 루이지의 아들 오타비오를 카메리노 군주에 심어주고 메디치 가문의 마르게리타와 결혼시키기도 했다. 어쨌든 파르마와 피아첸차는 200년간 파르네제 가문이 다스리게 되었다.[2]
기존에 폐지된 사육제(謝肉祭)[3] 를 1536년 부활시켜서 로마에서 투우 경기를 열고 무도회와 연회를 벌였고, 건축 분야에선 로마 줄리아 거리에 팔라초 파르네제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에게 캄피돌리오 광장의 설계를 맡겼고 안토니오 상갈로에게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을 맡긴다. 마르쿠스 아울렐리우스 상을 캄피돌리오 광장 한가운데 옮긴 것도 이 시기의 일.
재임 초기의 그는 개신교에 대해 강경책 대신 유화책을 사용하여 관대하게 처우하는 한편, 수십년 간 지켜봐 온 교황청 내부의 부조리를 바로잡고자 내부적인 개혁에 착수하여 추기경단을 물갈이하고 수도회를 일신시켰다. 또한 전임 교황인 클레멘스 7세가 세속 군주인 카를 5세와 맞서다 처참하게 개발살난 꼴도 목격했기 때문인지, 가급적 원만한 관계를 지키도록 노력했다. 그 결과 교황령에서 종교로 말미암은 폭동이 일어나는 사태는 미연에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수장령을 선포하여 영국 국교회를 설립하고 교황청에서 독립하여 국가교회화 시킨 헨리 8세에게는 매우 단호하게 대처했다.[4] 사건의 발단이 된 앤 불린과 헨리 8세의 결혼은 이미 전대 클레멘스 7세 시절에 있었지만, 그로 말미암은 잉글랜드와 교황청의 불화는 바오로 3세 재임기에 극대화되었다. 헨리 8세가 수장령을 선포하자 불같이 화를 낸 바오로 3세는, 1538년 즉각 파문 조치를 취하여 잉글랜드의 왕을 이단자로 단죄하였다.
이 시기 이후 바오로 3세는 처음의 관대한 모습에서 강경파로 돌변한다. 1542년에 로마에 이단심문소를 창설하여 교황청 차원의 개신교 교인 색출 및 처벌이 진행되었으며, 독일의 루터회 신자들과 대치 중인 카를 5세에게도 적극적인 활약을 주문했다. 한편으로 스페인에서 창설된 예수회를 공인하여 가톨릭의 강경화 및 국외 포교에 적극적으로 힘을 실어주었다.
그리고 개신교에 맞서 가톨릭을 결속하기 위해 1545년 반(反)종교개혁 차원에서 트리엔트 공의회를 소집하여 가톨릭 내부의 혼란과 분열을 수습하고 각종 규범을 확립하여 그간 안습한 모습을 보여준 가톨릭을 쇄신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가톨릭은 더욱 결연한 태도로 개신교와 맞서게 되었고 교황청의 입지는 탄탄해진다.
이 과정에서 개혁을 위한 특별 위원회를 구성하는데 훗날 바오로 4세가 되는 카라파 추기경도 있었다. 카라파 추기경의 보고서는 성직매매와 면벌부, 주교관할구에서 축재등 기존 관행에 대한 비판을 넘어서 교황에게도 직격탄을 날렸다. 친족 등용과 가문 퍼주기를 대놓고 비판했다.
그 외에 끝물로 접어든 르네상스를 후원하였으며 이를 통해 '르네상스를 후원한 마지막 교황'이라는 평가도 받고 있다. 또한 클레멘스 7세에 이어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최후의 심판을 완성할 수 있게끔 지원했고, 바티칸 도서관을 확충하였으며 교황의 긴급 피난처인 산탄젤로성을 프레스코화로 세련되게 꾸몄다. 미켈란젤로에게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 책임을 맡기면서 그에게 설계에 관한 전권을 부여하기도 했다.
그는 재임 15년만인 1549년에 82살의 고령으로 선종했다. 말년은 평온하지 못했다. 1547년 아들 피에르 루이지의 영지 피아첸차에서 폭동이 일어나 아들이 살해당했고, 게다가 파르마도 바오로 3세에 항거하여 도시에서 반란이 일어난데다가, 교황령의 보복을 염려하여 도시를 통째로 합스부르크 황제 카를 5세에 들어바치려고 했다. 이에 관계된 추기경을 로마로 소환하여 추궁하고 그의 모자를 뺏어 집어던지고 격분한지 몇 시간 후 선종했다고 한다.
이같은 바오로 3세의 업적은 교회 개혁, 학문과 예술의 진흥, 트리엔트 공의회 소집 등 크게 3가지로 정리된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그의 재임기에 크게 결속한 가톨릭은 후대로 가면서 더더욱 강경해져 개신교와 격렬한 대립각을 세우게 된다.
4. 기타 매체의 바오로 3세
교황청 비밀 도서관에 있는 마법서를 읽다가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채 마법서를 비밀 도서관 가장 깊은 곳에 숨기라고 다시 명령했다는 이야기가 있는 교황이 이 바오르 3세이다.
4.1. 튜더스에서
배우는 아일랜드의 대배우 피터 오툴.
시즌 1에서는 언급만 되다가 시즌 2에 특별 게스트로 간간히 등장. "우리에게는 헨리 8세나 카를 5세와 같은 군대는 없지만, 그 대신 다른 힘이 있다"며 노회하고 경륜있는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사람 앞에서는 로마를 순례중인 프랑스의 왕 프랑수아 1세가 어버버할 때 "이교도 때려잡을 거지?" 하면서 등떠밀었는데 분위기상 어쩌지 못하는 모습이 나온다. [5]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에게 벽화를 그리게 하는 장면에 미켈란젤로가 아주 짤막하게 지나간다. 회의 와중에 장손 알레산드로[6] 가 방문하자 무척 반가워하면서 다른 추기경들에게 손자가 좋은 추기경이 될 것이라 말한다. 또한 반종교개혁의 일환으로서 예수회를 적극 지지하며 지원하는 장면도 나온다.
여기에서 그의 모습을 확인하자.
[1] 그 아들이 스페인 제국군의 명장 파르마 공 알레산드로 파르네제[2] 파르네제 가문이 대가 끊긴 후 통치권은 열강들의 승인을 받아 합스부르크 왕가로 넘어간다.[3] 가톨릭 국가에서 사순시기 직전의 3일 동안 술과 고기를 먹으며 가면을 쓰고 행렬하거나 연극과 놀이로 즐거이 노는 날. 사순시기는 재의 수요일부터 부활절까지의 약 40일간으로, 예수의 수난을 생각하며 회개와 보속과 절제로 경건하게 보내는 시기이다. (한국 가톨릭에서는 이때 판공성사도 본다.) 때문에 사순시기가 시작되기 직전에 실컷 놀자는 것.[4] 당시 영국 국교회는 현재의 성공회와 같다고 보긴 어렵다. 거의 모든 교리가 가톨릭과 일치했고, 분열이 영구적이리라고 본 견해도 많지 않았다. 영국 국교회에서 성공회로 이름이 바뀐 것도 19세기 이후.[5] 실제로 가톨릭 군주 황제 카를 5세에 대항하려고 이교도인 오스만투르크와 손을 잡아서 교황청을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다.[6] 이름은 교황의 속명과 같은 알레산드로 파르네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