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고어 멘델

 

[image]
Gregor Johann Mendel
그레고어 요한 멘델
1822년 7월 22일 ~ 1884년 1월 6일

'''언젠가는 나의 시대가 올 것이다.'''

1. 개요
2. 생애
3. 사후 재발견
4. 업적
4.1. 생물학에 통계학 도입
4.2. SBE1과 전이 인자
4.3. 데이터에 대한 의심
5. 이야깃거리
6. 관련 문서


1. 개요


오늘날 체코 지역에 거주하던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소속 수도사제[1]이자 저명한 원예학자이자, '''유전학아버지'''. 하지만 당시에는 그 지역이 오스트리아였고 멘델도 오스트리아 사람으로 간주되었으므로, 멘델의 국적을 보통 오스트리아라고 많이 서술한다. 게다가 멘델은 독일계였으므로 오늘날 오스트리아에서도 당연히 자기 나라 위인으로 여긴다. 독특하게도 사제이면서도 기독교가 아닌 생명과학 분야에서 더 유명한데, 1868년에 발견된 '''멘델의 유전 법칙'''의 선구자이기 때문이다. 속명은 요한, 속성은 멘델, 수도명[2]이 그레고어(그레고리오)이다.

2. 생애


멘델은 1822년 7월 22일, 오스트리아 제국 메렌 지방(현재의 체코)의 작은 읍인 하인젠도르프[3]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으나, 어릴 적부터 농사와 원예 일을 도우며 멘델은 자연스레 자연과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멘델은 본래 자연과학자가 되고 싶어했지만, 17세 때 아버지가 일을 하던 중 크게 다쳐 가세가 기우는 바람에 공부에 매진할 수 없었다. 이로 인해 대학진학을 포기했으나 여동생이 학비를 대준 덕에 전문대에 진학할 수 있었다.
그러나 멘델은 진학 이후에도 학비 문제로 계속해서 고생했다. 수도회에 입회하면 금전적인 걱정 없이 공부할 수 있었기 때문에 결국 (오늘날 체코 땅인) 브르노(Brno)에 있는 성 아우구스티노 수도회에 입회하여 사제서품을 받고 수사 신부가 되었다. 사제가 된 후에도 몇 번씩 교원 자격증에 도전했지만 생물 관련 점수가 부족해서 낙방했다고 하며, 이 와중에도 학문에 관심과 열정이 식지 않아 대학에서 청강하며 공부를 하기도 했다. 이때 수도원장이었던 냅(C. F. Napp)의 추천서가 재미있는데, "멘델은 사제 일은 서툴지만 자연과학에 대한 관심이 출중합니다."(...) 참고로 냅 수도원장도 중, 고등학교에서 물리학을 가르치는 시간 강사 봉사활동을 하곤 했다.
멘델은 농부 집안 출신에 외가가 원예가였기 때문에, 원예 및 육종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있었다. 그 때문에 인공수분을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당시 원예사나 육종가들을 난감하게 했던 '''부모세대에 없던 형질이 왜 자식세대에 나타나기도 하는가''' 하는 주제[4]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거기에 대학 수업을 청강하는 동안 자연과학통계학 등의 지식도 배울 수 있었는데, 이것은 멘델의 법칙을 발견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사족으로 이때 멘델의 물리학 스승은 도플러 효과로 유명한 크리스티안 도플러였다.
대학 청강 도중 멘델은 찰스 로버트 다윈진화론을 접하고는, 수도원에서 진화론을 증명할 실험을 하고자 수도원 뜰에 완두콩을 심었다. 처음엔 로 연구하려 했으나, 쥐로 유전의 법칙을 따지려면 염색체의 교차 때문에 일정한 법칙을 찾을 수 없었고, 수도원이 온통 쥐로 가득 찬 모양새가 볼썽사나워서 지역 주교가 중지시켰다. 반면 완두는 우성과 열성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대표적인 식물이기 때문에 유전의 법칙을 연구하기에 적합했고, 당시 수도원장이 수도원 밭을 쓸 수 있게 허락했을 뿐만 아니라 온실도 만들어 주었다. 사실 멘델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도 지원을 후하게 해주긴 했지만.
멘델은 이후 무려 8년 동안 완두콩을 심고 관리하며 실험한 후, 그 결과를 바탕으로 '식물잡종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을 작성하여 학계에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 논문은 학계에서 무시당했다. 멘델의 본업이 수도자인데다 학력도 대학 중퇴에 그쳤기 때문이었다. 현대로 따지면 생물교육과 출신이지만 교원 임용에 번번히 탈락한 회사원의 독자연구, 유사과학쯤으로 취급됐다. 하물며, 당시에도 막 발표된 진화론 문제로 격렬하게 싸우던 가톨릭성직자란 점도 한 몫 했을 것이다.
논문을 몇십 부 인쇄하여 당대의 과학자들에게 보낸 적도 있지만 무시당했고, 논문을 받아본 학자들도 뜯지도, 읽지도 않고 내버려두기도 했다. 비슷한 시기 멘델은 진화론의 창시자 찰스 다윈에게도 편지를 보냈으나, 다윈은 멘델의 편지를 읽지 않았다고 추정된다. 당시 생물학자들이 수학, 통계학적인 해석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에[5], 그 결과에 놀라면서도 그 중요성을 간파하지 못했던 것. 20세기 들어서야 재평가되었으니 시대를 몇십 년은 앞선 연구였다.
사실 멘델이 인정받지 못한 이유로는, 멘델 자신이 너무 소심해서 적극적으로 자기 발견을 퍼뜨리려고 하지 않았던 점도 크다. 멘델은 스위스 식물학자 카를 네겔리(Carl Nägeli)하고만 학술적으로 교류하였는데, 네겔리는 멘델의 발견에 흥미를 보이긴 했지만 그 중요성은 이해하지 못했고, 멘델이 직접 실험해 보라면서 완두콩을 보냈지만 건드리지도 않았다. 결정적으로 조밥나물을 가지고 한 실험에서는 완벽하게 실패해 쓰디쓴 좌절감을 맛보았고 이후로는 그냥 수도원장으로 살았다는 점도 있다.
주변 사람들이 보기에 멘델은 과학자라기보다는 평범한 수도자에 가까웠고 매우 뚱뚱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모두 멘델을 인심 후덕한 신부님으로 대했다. 비만의 원인은 수도원에서 밥이 너무 잘 나와서였다. 당대 환경상 농부 집안 아들이 처음부터 뚱뚱할 리가 없다. 교회 에서도 학위도 없고 연구실적도 인정받지 못한 멘델의 완두콩 연구는 그냥 수도자의 원예 취미나 엉뚱한 연구 정도로 여겼다. 생물학자로서는 극히 일부의 인물을 제외하면 인정받지 못했지만, 기상학이나 원예학에서는 당대에서 유명한 인물이었다. 수도원을 강타한 회오리바람에 대해 상세한 기록을 남기고[6], 사과 품종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이후 멘델은 수도원장이 되었다. 그는 수도원장이 되면 조카에게 보낼 학비도 마련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며, 시간강사 일을 하지 않아도 되었기에 실험할 시간이 늘어날 줄 알았다. 하지만 대수도원장으로서 오스트리아 정부의 수도원 세금징수법안을 철회하라고 요구하는데 시간을 많이 빼앗겼으며 재산을 차압당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평소 몸이 약했던 데다가 여러 가지 문제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으며 줄담배를 피워대던 그는 1884년 1월 6일, 만 61세 나이에 만성 신장염으로 선종했다. 멘델이 선종한 후, 그의 뒤를 이은 수도원장은 멘델이 8년간 혼신을 다한 실험결과, 논문, 연구자료의 대부분을 태워버렸다.

3. 사후 재발견


그러나 멘델이 선종한 지 16년이 지난 1900년에 기적이 일어났다. 네덜란드의 식물학자 휘호 더 브리스(Hugo de Vries, 1848-1935)가 멘델과 비슷한 주제로 연구를 하던 도중 도서관에 '우연히' 남아 있던 멘델의 논문을 집어 든 것이다. 드 브리스는 자신의 연구 결과를 발표하며 35년전 멘델이 실험한 논문을 첨부했고, 이를 통해 멘델의 논문이 세상에 다시 알려지게 된다.
비슷한 시기, 독일의 과학자 칼 코렌스(Carl Correns, 1864-1933)는 멘델과 비슷한 주제로 연구를 하다 멘델의 논문에 자신이 밝히고자 한 결과가 모두 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연구를 포기하였고, 오스트리아 과학자 에리히 폰 체르마크(Erich von Tschermak,1871~1962)도 유전에 대한 실험결과를 발표하며 멘델의 논문을 첨부하기도 했다. 이를 통해 멘델의 이론은 정설로 받아들여졌고, 과학계에서는 1900년을 '''멘델 법칙 재발견의 해'''로 지정하였다.
이후 이 셋은 멘델의 논문을 표절한 게 아니냐는 의심을 받을 정도로 유사한 실험 결과를 얻었다. 이 셋만 멘델 법칙을 알린 사람으로 알려졌으나 잊힌 인물이 있으니, 미국인 식물 및 농업학자인 윌리엄 재스퍼 스필먼(William Jasper Spillman, 1863-1931)이다. 스펄먼도 비슷한 시기에 콩을 재배하며 비슷한 결과를 발견하여 알아보다가 멘델에 대하여 알았다. 하지만 스펄먼은 나서길 꺼려 이 셋이 멘델 법칙 재발견으로 유명해졌을 때 그리 알려지지 못했다.[7]
이후 1910년에는 멘델의 동상이 세워졌고, 동상이 세워진 광장에는 멘델 광장이라는 이름이 붙는 등, 멘델은 죽고 나서야 유전 법칙을 밝혀낸 과학자로 인정받았다.
멘델 본인도 자신이 죽은 뒤 재평가될 줄 알았는지 죽기 전에 '''"언젠가는 내 시대가 올 것이다 (My time will come)"'''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다만 이 말은 삶의 후반부에 가끔씩 자신이 대화의 화두에 오르면 나지막히 했던 말이지, 자기 과신에서 온 말은 아니다.
멘델은 평생을 오스트리아인으로 살았고 체코어도 일체 할 줄 몰랐지만, 이렇다 할 과학 인물이 없는 체코에서는 그가 살았던 브륀(현 브르노)에 그의 이름을 딴 대학을 세우고, 프라하에도 그의 이름으로 된 박물관을 세우는 등, 자기 나라 사람으로 만들려고 애쓰는 중이다. 민족이 오스트리아인이라고 인정해도 오늘날의 자국 영토에서 태어난 것은 사실이니까.[8]

4. 업적


찰스 다윈과 동시대를 살았고, 그의 유전 법칙은 진화론의 강력한 메커니즘이자 근거가 될 수 있었다.
다윈은 부모의 유전 형질이 반반씩 전해져 내려온다고 생각했는데, 만일 이렇다면 색들을 다 섞으면 칙칙한 회색만 남듯 세대가 내려갈수록 모든 유전적 차이가 사라질 것이기 때문에 공격을 많이 받았다. 다윈은 이 사실에 대해 반박하지 못했지만 이 사실을 반박할 수 있는 멘델의 유전 법칙 덕분에 다윈의 진화론은 확고한 이론이 될 수 있었다.
불행히도 두 생물학계의 거장은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다만 둘이 서로의 이론을 알고 있었다는 증거는 많다. 가령 멘델의 책상 위에서는 종의 기원 초판이 발견되었고, 다윈이 받은 편지 중에는 멘델이 보낸 것이 있다. 하지만, 멘델은 자신의 발견을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다윈은 유전 법칙을 몰랐거나 활용할 줄 몰랐던 것 같았고, 멘델이 보낸 편지는 읽지도 않았다. 게다가 진화론은 다윈이 발표한 직후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오긴 했으나 공식적인 이론으로 자리잡는 것엔 시간이 많이 걸렸고, 유전 법칙은 멘델이 죽고 나서야 겨우 인정되었다.
멘델이 연구 소재로 완두콩을 선택한 것은 정말 운이 좋았다고 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일단 잘 알려진 대로 유전학 연구에 쉬울 정도로 빨리 자라고, 꽃잎이 닫힌 구조라 자가수분이 상대적으로 쉬우며 독립의 법칙[9]을 상당히 잘 지키는(?) 생물이었기 때문. 멘델이 관찰 대상으로 삼은 7가지 형질 유전자 중 일부는 같은 염색체 위에 존재한다. 형질 7개를 따지는데 완두의 염색체가 2n = 14이니 어찌보면 당연한 것. 그러나 두 유전자 사이의 거리가 멀어서 거의 교차 현상이 일어나므로 마치 독립된 염색체 위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던 것. 거기에 7가지 형질 중 완두콩깍지의 모양은,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관여하는 유전자가 2개였다!! 정말 운이 좋다고밖에 표현할 수가 없다. 반면 초파리로 이 실험을 할 때 일부 대립형질끼리는 서로에게 영향을 준다는 것이 발견되었다.
만약 이렇게 대립형질끼리 영향을 주는 것이 많은 생물을 실험소재로 삼았다면 이 연구는 벽에 부딪쳤을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찰스 다윈인데, 다윈이 연구대상으로 삼은 식물은 불행히도 중간유전이 되는 식물이었다. 멘델도 이후에 자라난화, 강낭콩, 옥수수, 분꽃을 이용해 실험하기도 했고, 자신의 유전 법칙을 따르지 않는 식물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는 거기에서 좌절하지 않고 '''다인자 유전과 연관 유전을 예측'''하기도 했으나 입증하진 못하고 가설에 그쳤다. 조밥나물에서는 무성생식이라는 복병을 만나 곤란함에 처하기도 했다. 다르게 말하면 자신의 발견이 무용지물이 될 뻔할 정도로 위기에 처했다고.
그리고 다윈은 점진론적 진화학파였다. 사실 다윈의 실험에서도 약간이나마 불연속적인 유전을 발견했지만 자신의 이론에 해가 된다고 생각해서 그걸 그냥 버렸다(...). 그리고는 유전에 관한 법칙들은 복잡하고 명확하게 분석하기 어렵다는 변명으로 일관했다. 반면 똑같이 점진론적으로 생각했던 멘델은 실험의 결과가 자신의 이론에 완벽하게 엿을 먹인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에도 포기하지 않고, 그 결과에 따라서 다시 규칙을 찾기 시작했다.
특히 멘델은 자신의 연구결과를 수학통계학을 이용해 객관적으로 정리해 놓았다. 이것은 이후 생물학 연구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그 속에서 일정한 규칙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 결과 멘델은 자신의 이론을 남기지는 못했지만 지구상 어디서든 관찰되고 반복되는 법칙을 발견한 것이다.

4.1. 생물학에 통계학 도입


가장 중요한 업적으로는 생물학물리학화학과 같은 통계학을 도입, 생물학 연구에서 그 누구도 행하지 못했던 연구 계획 수립을 해낸 인물이었다. 이 당시의 생물학 연구라고는 기껏해야 박물학 수준을 넘어서지 못해 변경지대의 과학에 가까웠으나 그의 연구로 어엿한 과학의 영역으로 진입하게 된 것이다.
멘델유전통계학을 도입하여 유전학의 시작을 연 것은 맞지만 최초라는 한계로 인하여 유전자표현형을 명확하게 구분하지 못 하였다. 그래서 그 당시 독일어로 출판된 멘델의 논문은 모호하고 명확하지 않은 내용이 많았다. 휴고 드 브리스(Hugo de Vries), 칼 코렌스(Carl Correns), 에릭 폰 체르마크(Erich von Tschermak)에 의해 유전학 원칙들이 밝혀진 후 영국 생물학자 윌리엄 베이트슨에 의해 멘델 논문이 영어로 번역되면서 그 당시 유전학 지식을 반영하여 불명료한 부분들을 수정함으로써 멘델의 논문이 현대와 같은 형태로 이해되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멘델은 유전자라는 개념과 그 유전자에 의해 표현되는 형질의 차이를 명확하게 몰랐다는 것이다. [연재] '이야기꾼들이 만들어낸 멘델' ..몇가지 오해 2010. 03. 30

4.2. SBE1과 전이 인자


멘델이 연구한 형질 중 하나인 완두콩의 모양을 결정하는 유전자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밝혀졌다. starch-branching enzyme I(SBE1)을 만들어내는 유전자전이인자가 끼어 들어가 돌연변이가 생기면 주름진 완두콩이 생긴다. 아밀로즈아밀로펙틴이라는 가지가 있는 녹말로 만드는 게 SBE1 효소이다. 따라서 이 효소가 있으면 완두콩이 정상적인 둥근 모양이지만 이 효소가 없으면 가지가 없는 녹말이 만들어져 콩의 표면의 탄력이 없어져 주름진 콩이 된다. [생물나라] 멘델의 유전법칙 : 분리의 법칙
전이 인자(transposable element)는 염색체핵산 사이를 이동하는 작은 DNA 조각으로 아무데나 끼어 들어간다. 만약 다른 유전자 속에 끼어 들어가면 그 유전자의 기능이 파괴된다. 전이인자바버라 맥클린톡이 옥수수에서 발견하였으며 그 연구로 노벨상을 수상하였다.

4.3. 데이터에 대한 의심


멘델의 데이터를 p-해킹으로 의심하는 학자들도 꽤 있다. 영국농학자, 유전학자, 통계학자로널드 피셔 경을 중심으로 멘델의 완두콩 실험 데이터를 카이 제곱 검정이란 통계 검정법으로 검사해보니 '''숫자들이 지나치게 예쁘게 나왔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자신의 학설을 위해 숫자를 속였지 않았냐는 말이다. 이 주장의 경우 카이 제곱 검정이 이런 데이터를 검정할 때 적합하지 않다는 점과, 멘델의 재발견자들이 한 때 멘델의 논문을 표절했냐는 소리를 들었을 정도로 멘델의 실험과 거의 흡사한 실험결과를 얻어냈고, 멘델의 추가 실험 데이터가 발견된데다 결정적으로 피셔가 종자의 발아율을 계산에 넣지 않았다는 오류가 발견되었다.
또한 멘델이 자신의 유전법칙에 맞지 않는 식물이 있음을 발견하여 거기서 연관 유전이나 다인자 유전을 예측했다는 점, 특히 멘델 자신이 완두콩 이후에 실험한 조밥나물 실험에서는 완두콩과는 결과가 전혀 달라 '자신의 이론이 무용지물이 되는 것이 아닐까 진지하게 걱정이 될 정도로' 철저하게 실패했다고 솔직하게 인정하는 태도를 보였다는 점에서 실제로 데이터를 조작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는 것으로 본다. 이는 조밥나물이 단성생식도 한다는 특징 때문이다.
생물생식세포에서 감수분열(meiosis)이 일어날 때 우선 상동염색체(homologous chromosomes)인 A 유전자를 가진 염색체(chromosome)와 a 유전자를 가진 염색체가 스스로를 복제하여 자매염색분체(sister chromatid)를 만든다. 그러면 그들은 AA의 유전자와 aa의 유전자를 갖는다. 이런 염색체 1쌍이 서로 붙어서 염색체의 팔을 서로 교환하는데 그것을 염색체 교차(hromosomal crossover)라고 부른다. 만약 교차에서 유전자의 교환이 일어날 경우 한쪽 염색체는 Aa의 유전자를 갖고, 다른쪽 염색체도 Aa의 유전자를 갖는다. 그러면 각각 A, a, A, a 유전자를 갖는 4개의 염색분체(chromatid)가 생성된다. 정자라면 정자 4개가 생긴다고 생각하면 된다.
교차율교차(crossover)에 의해서 새로운 유전자 조합을 갖는 배우자가 출현하는 빈도이다. 즉, AA 유전자를 갖는 염색체와 aa 유전자를 갖는 염색체가 교차를 하여 Aa 유전자를 갖는 염색체를 만드는 비율을 말한다. 교차율은 0~50 사이의 값이며, 다른 염색체 위에 있는 2개의 유전자는 50%의 값을 갖는다. 같은 염색체 위에 있는 두 개의 유전자의 경우 가까이 있으면 교차율이 낮고, 멀리 있으면 높다. 이렇게 하나의 염색체 위에 가까이 있는 2개의 유전자가 서로 같이 다니는 경향성을 연관(linkage)이라고 부른다.
완두(Pisum sativum)의 7가지 대립 형질에 대한 교배 실험 결과
특징
부모 세대(P)
잡종 1대(F1)
잡종 2대(F2)
우성 순종 × 열성 순종
우성:열성
비율
씨의 색깔
황색 × 녹색
황색
황색:녹색 = 6022:2001
3.01:1
꽃 색깔
보라색 × 흰색
보라색
보라색:흰색 = 705:224
3.15:1
콩깍지 모양
매끈하다 × 잘록하다
매끈하다
매끈하다:잘록하다 = 882:299
2.95:1
꽃이 피는 위치
잎 겨드랑이 × 줄기 끝
잎 겨드랑이
잎 겨드랑이:줄기 끝 = 651:207
3.14:1
완두의 키
크다 × 작다
크다
크다:작다 = 787:277
2.84:1
콩깍지 색깔
녹색 × 황색
녹색
녹색:황색 = 428:152
2.82:1
씨의 모양
둥글다 × 주름지다
둥글다
둥글다:주름지다 = 5474:1850
2.96:1
표 출처: http://study.zum.com/book/18094
씨 색(노랑, 녹색)과 씨 껍질과 꽃(색이 있음, 흰색)은 1번 염색체, 성숙한 콩깍지(매끄럽게 확장, 쭈글거리고 들어감)와 꽃이 핌(잎 겨드랑이, 줄기 끝)과 식물 키(1m 이상, 0.5m 정도)는 4번 염색체, 익지 않은 콩깍지(녹색, 노란색)는 5번 염색체, 성숙한 씨(매끄럽다, 쭈글거림)는 7번 염색체에 있는 유전자표현형이다. Mendel's 7 genes and their locations on pea chromosomes.
위 7개의 형질이 독립의 법칙을 나타내려면 각 형질의 유전자가 모두 다른 염색체에 존재하거나 같은 염색체 안에 존재하더라도 유전자들 사이의 거리가 아주 멀어 다른 염색체 위에 있을 때처럼 교차율이 아주 높아야 한다. 멘델이 실험한 결과의 상당수는 같은 염색체 위에 존재하지만 실제로 연관을 보일 수 있는 유전자는 두 쌍, 그리고 그 중 한쌍은 교차율이 높아서 작은 샘플로는 연관을 관찰하기 어렵다. [10] 나머지 한 쌍은 교차가 관찰되었어야 하는데 멘델은 이 부분에 대한 실험을 더 깊게 다루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미국 캘리포니아대학 연구원 김우재 - [연재] 멘델과 황우석… 네이처 논문 Why didn't Gregor Mendel find linkage? https://naldc.nal.usda.gov/download/53940/PDF

5. 이야깃거리


[image]
2011년 7월 20일에는 구글에서 멘델의 탄생을 기념하 는 로고를 만들었다.
원예학자이기도 해서 큰 종묘회사의 대표인 아이쉬링이 수도원을 찾아왔을 때, 자신의 콩 모종판을 보여줬는데 열매의 종류나 키에 따라서 여러 가지 종류의 콩 모종을 분류해 만들었다고 한다. 어떻게 했냐고 물었더니 '약간 재주를 부렸을 뿐입니다. 다 말하자면 너무 길어서 말할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자신의 유전 법칙을 이용할 줄도 알았던 것이다.
고등학교에서 강연을 하면서 식물의 생식에 대해 신부님이 하기엔 좀 거시기한 용어 를 써서 학생들이 난처해했다고 하는데, 그럴 때 마다 '자연의 법칙이 그런 것인데'라면서 역정을 냈다고 한다.
독일흑역사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멘델의 유전 법칙 중 우성 유전자와 열성 유전자론을 바탕으로 '인종청소'가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실제론 전혀 아무런 연관도 없음에도''' 인종박해나 유전자 조작을 소재로 삼은 미디어에서 배경으로 심심찮게 등장하기도 하였다. 기동전사 건담 SEED에서 키라 야마토를 비롯한 코디네이터가 처음 태어난 곳도 일종의 생물학 연구소인 멘델 콜로니였다.

6. 관련 문서


[1] 수도회 소속의 사제. 성직자이면서 동시에 수도자이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2] 수도명(修道名)은 수도회에 입회 하고 장상으로부터 새로 받는 이름이다.[3] 체코어로는 힌치체(Hynčice)라고 한다.[4] 지금은 중학생도 아는 우성과 열성 유전 내용이다.[5] 하디-바인베르크 법칙의 일화에서 보듯 간단한 수학공식으로 풀 수 있는 자연법칙을 발견하지 못하는 수준이었고, 당대 과학계에서는 생물학을 자연과학이 아니라 우표수집학으로 봐야 한다는 우스개소리가 있을 정도였다.[6] 최초로 토네이도에 대한 관찰기록을 작성했다고 한다.[7] 스펄먼이 이름 없이 사라진 인물은 아니다. 미국 농업학회장이 되었으며 미주리 대학 교수 및 미국 농업계에 큰 기여를 한 인물로 미국에서 유명세를 떨쳤다. 하지만, 제2차세계대전 이전 미국의 과학은 세계 어디서도 알아 주지 않았다.[8] 비슷한 사례로 독일어를 모어로 쓴 체코 출신 유대인인 프란츠 카프카가 있긴 한데 1차 세계대전 이후 체코슬로바키아의 시민이 되었으므로 멘델과는 달리 체코에 정체성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오스트리아인이라기 보다는 독일어를 쓰는 체코인이라고 보면 될 듯.[9] 각각의 대립형질은 서로에게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법칙[10] 교차율 36% 기준으로 유전형은 9.6 9:3:3:1 대신 9.6:2.4:2.4:1.6으로 나오는데,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결과가 나오려면 이 연관쌍에 대해 2000개 정도의 관찰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