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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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대한민국의 前 야구 선수. 現 kt wiz 1군 타격코치. 현역 시절 포지션은 1루수.
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
중학교 시절부터 투타 양면에서 모두 두각을 드러냈던 선수이며, 그때부터 연고 팀 KIA 타이거즈의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후 KIA의 성골이라 할 수 있는 광주제일고등학교에 입학해 고교 생활을 하면서 중심 타선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특히 2학년 당시 황금사자기에서 0.538의 맹타율을 보이며 팀 우승에 일조해 두각을 드러냈었으며, 2006년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에서 대한민국이 우승할 당시에도 4번 타자 겸 팀의 주장으로서 활약했다. 고교 시절의 김강은 박병호같은 스타일의 파워 히터가 아닌 김현수같은 스타일의 중장거리 히터에 가까웠다. 좋은 결의 스윙에 힘이 좋아 장타를 양산하는 스타일.
광주제일고 2학년 당시만 해도 당연히 KIA에서 1차 지명을 할 것이라 예상했으나 3학년 때 이렇다 할 좋은 성적을 보여 주지 못한 탓에 밀렸다. 일설에는 변화구 대처 능력이 심각하게 떨어져서 오랜기간 그를 지켜본 KIA에서 그냥 포기했다는 설이 있다고는 하나, 보다 정확한 이유를 들라면 자존심이 센 김강과 김강 아버지의 기질을 들 수 있다. 실제로 2차지명 1라운드 밑에서 지명되면 대학에 가거나 어떻게든 미국에 가겠다고 했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으니….
2.2. 한화 이글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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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차 지명에서도 밀려났고 2차 1지명에서도, 2차 2지명, 3지명에서도 고향팀인 기아에서 지명받지 못하고 밀려났다. 그리고 고향 팀에게 지명받지 못했던 그를 한화 이글스가 2007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2차 3순위로 지명하면서, 프로 생활이 시작된다.[2]
비록 지명 순위는 밀려났지만 워낙에 창창했던 유망주였기에 1군에서 곧 얼굴을 볼 수 있으리라 생각됐지만 오직 검증된 선수만을 쓰는 김인식 감독의 특성상 신인이었던 김강이 다이너마이트 타선으로 대표되는 한화 이글스에서 설 자리는 없었다. 그렇다고 김인식 감독을 깔 수도 없는 것이, 당시 한화에선 어느 별명 많은 야구 선수가 미친듯이 별명 숫자를 늘려가던 중이었다. 태산이 버티고 있으니 유망주로서는 답답할 노릇. 거기다가 백업으로 김태완이라는 만만찮은 오른손 거포가 동일 포지션에서 대기하고 있었으니 김강은 그저 2군에서 묵묵히 인내의 세월을 보낼 뿐이었다. 그러는 동안 2006년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 우승 동기 중 김광현은 팀의 제1에이스로 우뚝 섰고, 양현종 역시 팀의 에이스로 활약하고 있으니 본인도 답답해 미칠 지경. 소문에 의하면 본인이 자청해서 입대하려 했으나, 팀에서 군대에 가는 것을 뜯어말렸다고 한다.
여담으로 2군에서 인내의 세월을 보내던 이 시기 다큐멘터리 3일에 출연하기도 했다. 한화 2군 선수들을 다룬 에피소드에서 주연으로 출연한 것. 외모도 그럭저럭 괜찮은 데다 타지 출신으로서 고향을 떠나 고생하는 스토리성, 한화 2군에선 가장 대형 유망주인지라 조만간 1군에서 활약할 것이란 드라마성까지 3박자를 갖추어 주연이 될 수 있었던 것. 이 당시 김강이 얼마나 주목받는 유망주였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2.2.1. 2010 시즌
2009 시즌을 끝으로 김태균과 이범호가 일본프로야구에 진출하여 팀을 떠났고, 등번호도 53번이 아닌 김태균의 번호인 52번을 달 정도로 한화의 기대주로 떠오르며 김강에게도 기회가 오나 했다. 그러나 신임 한대화 감독은 김태완을 주전 1루수로 기용했다. 그래도 백업의 기회라도 있지 싶었는데 그 해 6월 8일 3:3 트레이드로 '''장성호가 이적해왔다.''' 결국 김강은 '''또''' 2군에서 세월아 내월아 기다리며 묵묵히 기회만을 기다렸다.
그래도 2군에 관심 없는 한화 이글스에서 어느 세월에 빛을 보나 했지만 김강은 2군 남부리그 85경기에 출장해 312타수 86안타, 타율 0.276, 14홈런 61타점으로 남부리그 홈런 및 타점왕에 오르며 물먹은 다이너마이트 타선이 된 한화 이글스의 유망주로 떠올랐다.
결국 시즌 말 엔트리 확대 제도의 혜택을 받아 9월 '''드디어''' 1군에 합류했다. 장성호의 부상과 김태완의 부진을 틈타 14경기에 출장해 24타수 10안타 타율 0.417의 경악할 타격을 보여주었다. 시즌 말이고 14경기 한정이긴 하지만 규정타석을 채운 타자 중 3할 타자가 딱 1명인 2010시즌 한화 이글스로서는 진흙 속의 진주인 셈.
2.2.2. 2011 시즌
결국 그대로 1군에 자리박는데 성공하여 2011 시즌에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1군에서 시즌을 보낼 것으로 보인다. 장성호는 부상으로 복귀가 늦어지고 있고, 김태완은 2010 시즌 후 공익근무요원으로 복무하고 있었기 때문에 1루수 주전경쟁에서 무리 없이 이길 것으로 보인다. 다만 감독이 신인 스위치 타자 김용호에게 김강보다 높은 평가를 주고 있어서 이번에도 밀릴 위험도 없지 않아 있다. 시범경기에서 별 임팩트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어 그럴 가능성이 상당히 농후해지고 있었으나 최종적으로 낙점받아 개막전에 선발 출장하게 된다.
그리고 충격과 공포의 응원가가 나왔다. 모두 함께 들어보자. 그리고 이 응원가를 예견한 성지가 있다. 게다가 이 짤은 뉴스도 탔다! 역시 한화는 응원가밖에 없다! 참고로 간때문이야를 개사한 응원가는 넥센 히어로즈의 김민우 선수에게도 있다.
그렇게 신뢰를 받으며 밀어줬지만 개막전, 그것도 '''류현진 등판일'''에 만루상황에서 1루쪽 타구를 못 잡아내어 류현진 강판의 빌미를 제공하는 바람에 한화 이글스 갤러리에서 역적 수준으로 까이고 있다. 사실 이건 수비코치 잘못이긴 하지만... 1군 6경기에 나와서 17타수 2안타에 0.118이라는 처참한 타율에 삼진 6개를 기록했다. 경기 때마다 어떨땐 어설픈 스윙으로 폭삼을 당하고 어떨 땐 그냥 데꿀멍상태로 삼진을 당해 버리니... 물론 투수 유망주보다 야수 유망주 키우는 게 훨씬 힘들다는 걸 보여 준 반면교사이기도 하지만... 특히 '''야구 인생 내내 1루수를 봤음에도 1루 수비가 지옥급'''이다. 결국 4월 11일자로 2군으로 강등당했다.
그리고 5월 5일 어린이날에 1군으로 돌아와 그 날 SK전에서 1루수로 선발 출장했으나, 1회초 1아웃 상황에서 역시 1루쪽 타구를 못 잡아내어 김혁민이 적시타와 쓰리런 홈런을 맞는 빌미를 제공한다. 덕분에 김혁민은 '''4실점 무자책'''으로 패전 투수가 되었다. 안습. 그리하여 다음 날 5월 6일 다시 2군으로 강등당했다. 이후 정원석이 1루를 안정적으로 보고 있고, 장성호가 지명타자로 중압감을 더해 주면서 김강이 설 자리는 다시 사라졌다. '''결국 그 날이 한화 이글스 1군에서의 마지막 출장이 되었다'''. 2011 시즌 종료 후 나이도 있기 때문에 군 문제를 먼저 해결하기 위해 상무에 지원하여 합격했다.
나름 이때 유입 한화팬과 고정 한화팬을 가르는 척도 같은 선수기도 했다. 한화가 현재처럼 몰락하기 전에 김강은 한화팬들 사이에서 분명 터질 거라고 믿던 유망주였으나, 결국은 터지지 못한 채 두산으로 이적했다.
2.3. 두산 베어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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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1월 22일 2차 드래프트 2라운드 13순위에서 두산 베어스의 지명을 받아 이적하였다. 당시 2차 드래프트 때 한화 이글스에서 보호선수 명단에서 제외하여 올린 선수들 중 유일하게 지명을 받아 팀을 옮겼다. 그만큼 한화 이글스의 열악한 2군 현실을 보여 준 셈이었다. 다만 일주일도 안 되어 김강 본인은 11월 28일에 발표된 상무의 최종 합격자에 포함되어 군 복무를 시작하게 되었으므로, 실질적으로 두산 베어스의 유니폼을 입고 뛰는 것은 '''2014 시즌'''부터이다.
2013년 9월 군 복무를 마치고 제대하였으며, 9월 30일 고양 국가대표 야구훈련장에서 열렸던 두산 베어스 2군과 동아시아경기대회 야구 국가대표팀과의 연습경기를 통하여 백넘버가 없는 두산 베어스 유니폼을 입고 첫 선을 보였다. 어차피 시즌이 끝나갈 시점이고 11월 22일에 룰5 2차 드래프트가 있기 때문에 등록하지 않고 군보류로 묶어 놓은 듯하다. 그 연습경기에서 한때 상무에서 함께했던 투수 서진용을 상대로 홈런을 쳤다. 그리고 좌완투수 정대현 등과 함께 더그아웃에서 하이파이브를 하는 사진이 기사에 실렸다.
2016년에는 2군에서 최영진[3] 과 함께 자주 나오고 있는데 심지어 어떤 분의 대타로도 나온다.
그러나 두산 소속으로는 단 한번도 1군 무대를 밟지 못하고 2016년 9월 구단 공홈의 선수단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10월 19일 조인식 기자의 트위터를 통해 오장훈, 김명성, 최영진과 함께 웨이버 공시된 것이 확인되었다.
3. 지도자 경력
은퇴 후 2군 코치로 발탁되었다. 이로써 2017 시즌 기준 KBO리그 최연소 코치로 기록되었다. 코치직을 맡은 직후인 2017년 초 결혼했다.
2018년 11월 13일, 이강철 신임 kt wiz 감독을 따라 kt 타격보조코치로 옮기기로 하면서 두산 베어스를 떠나게 되었다.
2019년 시즌 후에 한해동안 타격보조코치로 인정을 받아 2020년부터는 1군 메인 타격코치직을 수행한다. # 팬들은 게레로 코치가 팀을 떠날 당시 불만이 많았지만 기사에도 나와있듯이 세부 코칭은 김강이 도맡았었다고 한다. 기사가 나간 이후 팬들의 불만은 어느정도 사그라들었으며 기대를 받고 있다.
2019년 골든글러브 시상식에서, 멜 로하스 주니어 선수를 대신해 골든글러브를 수상하였다.
2020년 kt wiz의 타선이 그간의 고통 끝에 리그 최고 수준의 강타선이 되며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김강 코치의 합류 전까지의 kt wiz는 모두가 알고 있었던 리그 최하위급 타선이었기 때문에 그의 지도력이 더욱 두드러지고 있다. 6월 3일 기준으로 리그 팀 득점 10개 구단 중 1위에 팀 wRC+ 리그 1위, 팀 홈런 리그 2위에 리그 최다 2루타에 리그 최소 병살, 그리고 팀 타격 WAR에서 리그 1위를 기록하고 있다.
또,
2020년 골든글러브 시상식에서도, 멜 로하스 주니어선수를 대신해 골든글러브를 수상하였다.
4. 연도별 주요 성적
[1] '''강 때문이야~ 강 때문이야~ (김강!) 승리는 강때문이야~ 강 때문이야~ 강 때문이야~ (김강!) 한화의 강때문이야~X4'''[2] 재미있게도 2년 뒤 마찬가지로 중학교 시절에 광주지역에서 두각을 드러낸 뒤 광주일고에 진학하나 기대치만큼 성장하지 않아 마찬가지로 연고 팀에게 지명받지 못한 투수가 한화에 지명된다. 또 거기서 2년 뒤 그해 최대어인 같은 학교 후배가 두각을 드러내면서 그해 드래프트 최대어가 되어 한화에 1차 지명을 받게 된다. 현재 광주일고 3인방 중 살아남은 건 장민재 뿐.[3] 삼성에서 지금 주전으로 뛰고 있는 그 최영진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