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형왕
1. 개요
금관국 제10대 왕이자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기재된 마지막 왕. 김해 김씨 족보에서는 다음 말왕이 등장하는데 족보는 역사서에 비해 신빙성이 떨어지고 말왕이 즉위해 왕을 했다고 하더라도 단기간에 몰락한 것으로 보여 큰 의미는 없어 보인다.
2. 생애
2.1. 왕위에 오르다
아버지는 겸지왕이고 어머니는 출충(出忠) 각간(角干)의 딸 숙(淑)이라고 한다. 구해왕(仇亥王), 구충왕(仇衝王)이라고도 불리우며 김해 김씨 족보에는 양왕(讓王)[2] 이라고도 불리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에는 "(중략) 김수로의 10세손인 구해(仇亥)에 이르렀는데 구차휴(仇次休)라고도 하며 김유신에게 증조부가 된다. (후략)"이라고 되어 있어서 구차휴라고도 불리었던 듯하다.
왕비는 분질수이질(分叱水爾叱)의 딸인 계화(桂花)이고 아들 3명이 있었다고 한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이름들이 다 다르게 기재되어 있는데 삼국사기에는 첫째가 노종(奴宗), 둘째가 무덕(武德), 셋째가 무력(武力)으로 나와 있으며 삼국유사에는 첫째는 세종(世宗) 각간, 둘째는 무도(茂刀) 각간, 셋째는 무득(茂得) 각간이라고 기록되어 있다.[3] 이름이 다른데 신라 상대 무렵에는 이름을 한자로 표기할 때 조선 시대나 현대처럼 한자가 고정된게 아니고 현대 일본어처럼 음차 표기, 훈차 표기, 섞어 표기를 다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런데 노종 - 세종 등은 문헌과 금석문 등으로 교차검증이 많이 되고 있어 동일 인물임이 거의 확실하다.
2.2. 풍랑이 몰아치는 한반도에서
이 시기에 많은 혼란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미 금관국 대신 고령 지역의 반로국이 가야의 맹주 노릇을 대신하고 있었던 데다가 신라와 백제가 북쪽 전방에서는 고구려와 맞서기 위해 나제동맹을 맺고 있지만 후방의 가야 지역을 서로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524년 신라 법흥왕이 남쪽 지역을 순시하는데 구형왕이 직접 찾아가서 만나는 등 이런 정세에서도 활로를 찾으려 노력했다.
그러다가 가야의 맹주격인 대가야가 주도하던 친신라 정책이 결혼 동맹의 파탄 사건으로 실패하고 낙동강을 경계로 신라와 가장 가까운 김해 금관국이 궁지에 몰리게 된다. 가야 연맹의 생존을 모색하던 도중 열렸던 안라회의도 구형왕 때 열렸다. 하지만 그에 대해 당시 금관국[4] 이 한 일은 기록에 남아 있지 않는다.
안라회의 이후 백제는 가야 서부의 안라국을 쳐서 가야 지역에 대한 세력권을 확대했고 신라는 다급해졌다. 안라회의가 개최된지 1년 후인 532년 신라 법흥왕은 이사부에게 3천의 병력을 주어 가야를 공격하게 하였고 이사부는 다다라원(多多羅原, 현재 부산 다대포)에 주둔하며 3달이나 군사 시위를 하였다. 이는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에도 등장한다.
이러한 군사적 시위에도 가야, 백제, 왜가 반응이 없자 낙동강을 건너 다다라, 수나라(須那羅, 현재 김해), 화다(和多), 비지(費智, 현재 진해 웅천 부근) 등 4촌을 점령하고 점령 주민들을 신라로 이주시켰다. 기록상으로는 자세히 나와 있지는 않은데 금관국은 저항하다가 포기한듯 보인다. 일본서기 흠명기에 백제 성왕의 말을 빌려 "남가라[5] 는 작고 협소하여 갑자기 준비하지 못하고 의탁할 곳을 몰랐기 때문에 멸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도 "중대통(中大通) 4년 임자에 신라 제23대 법흥왕이 군사를 일으켜 가락국을 치니 왕은 친히 군졸을 지휘했으나 저 편은 군사가 많고 이 편은 적어서 맞서 싸울 수 없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이로 인하여 신라는 다시 상신(上臣) 이질부례지간기(伊叱夫禮智干岐)를 보내 무리 3천을 이끌고 와서 조칙 듣기를 청했다. 게나노오미(毛野臣)는 멀리서 병장기에 둘러 싸여 있는 무리 수천을 보고 웅천(熊川)에서 임나(任那) 기질기리성(己叱己利成)에 들어갔다. 이질부례지간기가 다다라(多多羅)벌에 머무르면서 삼가 돌아가지 않고 석달을 기다리며 자주 칙명을 듣고자 청했으나, 끝내 전하지 않았다. (중략) 상신은 4촌【금관(金官),배벌(背伐),안다(安多),위타(委陀)의 네촌이다. 다른 책에서는 수나라(須那羅, 현재 김해), 화다(和多), 비지(費智, 현재 웅천 부근)의 네촌이라고 하였다.】을 약탈하고 사람들을 모두 데리고 그의 본국으로 돌아갔다.
'''《일본서기》계체기 23년 4월조.'''
일본서기에서 529년 일본에 직접 넘어가 신라의 침입에 대비한 지원군을 요청한 가야의 왕 기능말다간기가 구형왕과 동일인이라는 설이 있지만 대가야왕 이뇌왕 설이나 탁순국왕 아리사등 설도 있다. 설령 구형왕 설을 따라 구형왕이 지원을 요청했다 하더라도 일본의 지원은 받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2.3. 망국의 군주
이사부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은 금관국(남가라)은 더이상의 저항을 그만두고 항복을 선택했다.
이후 구형왕은 신라 수도인 서라벌에서 진골 귀족으로 살면서 식읍 김해에서 나오는 조세를 받으며 생활하다 그곳에서 죽었을 것으로 추정된다.19년[6]
, 금관국(金官國)의 왕 김구해(金仇亥)가 왕비와 세 아들인 맏아들 노종(奴宗), 둘째 아들 무덕(武德), 막내 아들 무력(武力)과 더불어 자기 나라의 보물을 가지고 항복하였다. 임금이 예를 갖추어 대접하고 상등(上等)의 직위를 주었으며, 금관국을 식읍(食邑)으로 삼게 하였다. 아들 무력은 벼슬이 각간(角干)에 이르렀다.
구형왕의 막내 아들 김무력이 진흥왕의 한강 유역 정벌과 관산성 전투에서 활약을 했고 장남 노리부도 동생만큼 눈에 띄지는 않아도 활약했기에 구형왕은 신라 전쟁 영웅들의 아버지로서 최소한 말년이 비참하지는 않았을 듯하다. 이후 김무력의 손자 김유신이 신라 진지왕의 손자 김춘추와 축국을 하다가 옷고름을 밟는 바람에 김유신의 여동생인 김문희와 김춘추가 만나 결혼하여 문무왕을 낳아서 신라 왕실에 대대로 구형왕의 혈통이 들어가게 되었으니 결과적으로는 역사의 승리자일지도 모른다.
2.3.1. 멸망 시기
《삼국유사》의 실수 중 하나가 구형왕과 관련된 부분인데 반파국과 헷갈려서 기록했다. 《삼국유사》 가락국기 사관은 논한다를 보면
라고 적어 놨는데 562년은 대가야국의 멸망 시기이다. 일연이 기록을 하다 착각해서인지 아니면 가야국기에 금관국 외에 다른 나라 기록들도 있어서 혼재되어 있었는지 실수를 한 부분이다.사관은 논한다. 《삼국사》를 상고해보면 '구형왕이 양나라 중대통 4년에 임자를 국토로 바치고 신라에 투항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수로왕이 처음 즉위한 동한(東漢) 건무 18년인 임인부터 구형왕 말년의 임자까지 490년이나 된다. 만약 이 기록을 가지고 상고한다면 국토를 바친 것은 원위(元魏)[7]
보정 2년 임오이니 30년을 더해 모두 520년이나 된다. 이제 두 설을 모두 기록해둔다.
2.4. 가야 멸망 후
신라에 투항한 후의 구형왕의 행적은 기록에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진골 귀족으로 편입됐고, 아들 무력이 왕경 6부 중 하나인 사탁부 소속이라는 점을 감안해 서라벌의 사탁부에서 거주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8] 조선 헌종 8년(1842년) 편찬된 《각간선생실기(角干先生實記)》에는 구형왕이 경주 북쪽 50리 지점에 있는 기계현(杞溪縣)[9] 에 살았다고 하였다.
신라에 귀순 후 "상등(上等)"의 직책을 받았다고 되어있는데, 이것이 상대등을 말하는 것이라는 설도 있다. 만약 상대등이라면 법흥왕이 처음 임명한 초대 상대등인 철부에 이어 2대 상대등에 오른 셈이지만, 아무리 상대등이 귀족의 대표가 오르는 자리라고 해도 국정을 총괄하는 재상직이란 점에서 이제 막 투항한 외국 왕이 상대등에 올랐음을 상상하기는 어렵다. 만약 상등=상대등이었다고 해도 아직 상대등직의 성격이 확립되지 못한 초창기라서 그랬거나, 명목상이고 실권은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신라 내에 상대등 외에 실질적으로 구형왕을 우대해줄만한 명예 관직 자체가 없었고, 구형왕이 끝까지 저항하다가 망한게 아니라 일정부분 자발적으로 투항한 것이라면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그동안 (전쟁으로 정복한 나라를 제외하고) 순순히 신라에 투항, 합병되었던 모든 세력들 중에서는 가장 큰 세력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구형왕의 후손들이 구형왕 당대와 이후 신라에 크게 공헌한 것을 생각하면 단순한 정복이 아니라, 신라가 우위에 있는 일종의 동업관계에 가까운 관계였을 수 있다. 애당초 고대 한반도 국가들의 왕권은 결국 연합정권이지 그렇게 절대적으로 강력한 것이 아니었고, 신라의 경우 비담, 알천 같은 다른 계파를 누르고 태종 무열왕이 즉위하면서부터 전성기의 강한 왕권을 완성하게 되는데 이 왕권 강화에도 러닝메이트로서 구형왕 가문의 대표자인 김유신이 활약한다.
삼국유사에서는 "말왕"이라는 표기가 나오는데 삼국유사 왕력에 등장한다. 하지만 거기서 나오는 말왕은 구형왕. 말왕 구형왕이 정광 2년에 즉위하여 42년 간 통치하고는 보정 2년 9월 신라 진흥왕 대에 정벌당함에 탈지이질금을 남겨두고 신라에 투항했다고 하여, 진흥왕 23년(562)년에 망한 대가야의 멸망 년도와 혼동하여 기록해 놨다.
이 때문에 구형왕의 다른 명칭이라는 설이 유력하지만, 그가 항복했을 때 수도에 남기고 온 동생 김탈지(金脫知)를 뜻하는 것이라는 설도 존재한다.이 포스팅 참조. 가야사에 대해서는 자료가 많지 않아 앞으로 발굴 조사 등을 통해 연구가 더 필요한 상황.
3. 전 구형왕릉
[image]
참고로 앞에 보이는 비석과 석물은 비교적 최근에 중건(?)한 것이다.
경상남도 산청군에 있는 "구형왕릉으로 전한다"라는 석조 건조물. 자세한 내용은 전 구형왕릉 문서 참조.
4. 기록
4.1. 《삼국유사》 가락국기
김씨이다. 정광 2년에 즉위해 42년 동안 다스렸다. 보정 2년[10]
임오 9월에 신라 24대 진흥왕이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 오자 왕이 친히 군졸을 지휘했다, 그러나 저편은 군사가 많고 이편은 적어 맞싸울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우 탈지이질금(탈지잇금, 脫知爾叱今)을 보내 나라에 머물게 하고, 왕자와 장손 졸지공(卒支公)등과 항복해 신라로 들어갔다. 왕비는 분질수이질(分叱水爾叱)의 딸 계화(桂花)인데, 아들 셋을 낳았다. 첫째는 세종(世宗) 각간(角干)이고, 둘째는 무도(茂刀) 각간, 셋째는 무득(茂得) 각간이다. 《개황록》에는 "양나라 중대통 4년 임자[11] 에 신라에 항복했다"고 했다.사관은 논한다. 《삼국사》를 상고해보면 '구형왕이 양나라 중대통 4년에 임자를 국토로 바치고 신라에 투항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수로왕이 처음 즉위한 동한(東漢) 건무 18년인 임인부터 구형왕 말년의 임자까지 490년이나 된다. 만약 이 기록을 가지고 상고한다면 국토를 바친 것은 원위(元魏) 보정 2년 임오이니 30년을 더해 모두 520년이나 된다. 이제 두 설을 모두 기록해둔다.
仇衡王 金氏 正光二年卽位 治四十二年 保定二年壬午九月 新羅第二十四君眞興王 興兵薄伐 王使親軍卒 彼衆我寡 不堪對戰也 仍遣同氣脫知爾叱今 留在於國 王子上孫卒支公等 降入新羅 王妃分叱水爾叱女桂花 生三子 一世宗角干 二茂刀角干 三茂得角干 開皇錄云 梁中大通四年壬子 降于新羅
議曰 案三國史 仇衡以梁中大通四年壬子 納土投羅 則計自首露初卽位東漢建武十八年壬寅 至仇衡末壬子 得四百九十年矣 若以此記考之 納土在元魏保定二年壬午 則更三十年 總五百二十年矣 今兩存之
4.2. 《삼국유사》 왕력
제10대 구형왕(仇衡王)
겸지왕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12]
의 딸이다. 신축년(521년)에 즉위하여 43년 동안 다스렸다. 중대통 4년 임자년(532년)에 영토를 바치고 신라에 투항하였다. 수로왕 임인년(42년)으로부터 임자년(532년)까지 도합 490년이다.第十 仇衡王
鉗知子母▨女辛丑立理四十三年中大通四年壬子納土投羅自首露王壬寅至壬子合四百九十年
4.3. 《삼국사기》
19년[13]
, 금관국(金官國)의 왕 김구해(金仇亥)가 왕비와 세 아들인 맏아들 노종(奴宗), 둘째 아들 무덕(武德), 막내 아들 무력(武力)과 더불어 자기 나라의 보물을 가지고 항복하였다. 임금이 예를 갖추어 대접하고 상등(上等)의 직위를 주었으며, 금관국을 식읍(食邑)으로 삼게 하였다. 아들 무력은 벼슬이 각간(角干)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