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태(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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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龍泰
대한민국의 전 정치인. 1926년 12월 9일 - 2005년 4월 2일.
1926년 충청남도 대덕군 기성면 산직리(현 대전광역시 서구 산직동)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김해 김씨[1] 다. 김종필과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사회교육과 동창으로 인연을 맺었다.[2]
1950년 6.25 전쟁 때는 김종필을 통해 박정희와 인연을 맺었고 이후 박정희의 셋째 형 박상희의 차녀 박계옥과 결혼하여 둘째 사위가 되어 슬하에 아들 김병규(金秉奎)를 두고 있다.[3] 이러한 인연으로, 민간인 신분으로 1961년 5.16 군사정변에 재정을 지원하여 참여하였다. [4] 이후 중앙정보부 고문을 역임하였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충청남도 대덕군-연기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4년 동안 민주공화당 원내총무를 역임하였다. 1965~1966년까지 초대 매헌윤봉길기념사업회 회장까지 맡았다. 당연히 친구이자 동서지간인 JP와 가까운 민주공화당 중진 의원으로 여당 의원임에도 불구하고 대통령과 당에 대해서 쓴소리와 직언을 많이 했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민주공화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김종필과 친하다는 이유로 정권 내에서 김형욱 중앙정보부장, 김성곤 민주공화당 재정위원장 등으로부터 견제를 받았다. 1968년에는 '''국민복지회'''라는 연구 모임을 만들었다가 그 모임이 박정희의 후계자로 김종필을 옹립하려 한다는 이유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민주공화당에서 제명되었다.(...) 복당 후에도 3선 개헌 때도 처음에는 반대를 하다가 박정희의 요청으로 찬성으로 돌아섰다.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민주공화당에 복당하여 충청남도 대전시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충청남도 대전시 선거구에 출마하여 민주통일당 박병배 후보[5] 와 동반 당선되었다. 같은 해부터 1979년 초까지 민주공화당 원내총무, 대한민국 국회 운영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친여 무소속 임호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1979년 무임소장관에 임명되었다.
1980년 전두환의 신군부가 등장하면서 부정축재 의혹으로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고 정치규제를 당했다. 1987년 정치규제에서 풀리면서 김종필의 권유로 신민주공화당에 입당하여 상임고문과 선거대책본부장을 맡기도 했다. 하지만 정치권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2005년 4월 4일 숙환으로 별세하였다.
MBC 제3공화국에서는 배우 정한헌[6] 이, 제4공화국에서는 노주현[7] 이 그를 연기했다.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金龍泰
1. 개요
대한민국의 전 정치인. 1926년 12월 9일 - 2005년 4월 2일.
2. 생애
1926년 충청남도 대덕군 기성면 산직리(현 대전광역시 서구 산직동)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김해 김씨[1] 다. 김종필과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사회교육과 동창으로 인연을 맺었다.[2]
1950년 6.25 전쟁 때는 김종필을 통해 박정희와 인연을 맺었고 이후 박정희의 셋째 형 박상희의 차녀 박계옥과 결혼하여 둘째 사위가 되어 슬하에 아들 김병규(金秉奎)를 두고 있다.[3] 이러한 인연으로, 민간인 신분으로 1961년 5.16 군사정변에 재정을 지원하여 참여하였다. [4] 이후 중앙정보부 고문을 역임하였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충청남도 대덕군-연기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4년 동안 민주공화당 원내총무를 역임하였다. 1965~1966년까지 초대 매헌윤봉길기념사업회 회장까지 맡았다. 당연히 친구이자 동서지간인 JP와 가까운 민주공화당 중진 의원으로 여당 의원임에도 불구하고 대통령과 당에 대해서 쓴소리와 직언을 많이 했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민주공화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김종필과 친하다는 이유로 정권 내에서 김형욱 중앙정보부장, 김성곤 민주공화당 재정위원장 등으로부터 견제를 받았다. 1968년에는 '''국민복지회'''라는 연구 모임을 만들었다가 그 모임이 박정희의 후계자로 김종필을 옹립하려 한다는 이유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민주공화당에서 제명되었다.(...) 복당 후에도 3선 개헌 때도 처음에는 반대를 하다가 박정희의 요청으로 찬성으로 돌아섰다.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민주공화당에 복당하여 충청남도 대전시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충청남도 대전시 선거구에 출마하여 민주통일당 박병배 후보[5] 와 동반 당선되었다. 같은 해부터 1979년 초까지 민주공화당 원내총무, 대한민국 국회 운영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친여 무소속 임호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1979년 무임소장관에 임명되었다.
1980년 전두환의 신군부가 등장하면서 부정축재 의혹으로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고 정치규제를 당했다. 1987년 정치규제에서 풀리면서 김종필의 권유로 신민주공화당에 입당하여 상임고문과 선거대책본부장을 맡기도 했다. 하지만 정치권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2005년 4월 4일 숙환으로 별세하였다.
3. 매체에서
MBC 제3공화국에서는 배우 정한헌[6] 이, 제4공화국에서는 노주현[7] 이 그를 연기했다.
4. 선거이력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