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곤

 


[image] '''쌍용그룹 회장'''
쌍용그룹 창업

'''초대
김성곤
(1939 ~ 1975)
'''

2대
김석원
(1975 ~ 1995)

'''초대 쌍용그룹 회장
김성곤
金成坤
'''
국적
[image]대한민국
출생
1913년 7월 14일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읍 하리#
사망
1975년 2월 25일 (향년 61세)
본관
김해 김씨
가족
부친 김광도
모친 김봉옥
배우자 김미희
슬하 3남 3녀
서명
[image]
1. 개요
2. 일생
2.1. 출생 ~ 청년기
2.2. 사업가로서
2.3. 정치
2.4. 정계 은퇴 이후 말년
2.5. 사후
3. 유족
4. 미디어에서
5. 선거 이력
6. 논란
7. 수상 경력
8.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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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image]

별일 없제?[1]

1985년 발간 '성곡 일화집' 제목

쌍용그룹의 설립자이자 4, 6, 7, 8대 국회의원이다. 호는 성곡(省谷)이다.

2. 일생



2.1. 출생 ~ 청년기


1913년 7월 14일, 김성곤은 경상북도 달성군 현풍면 하동(현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읍 하리)에서 김광도(金光度)와 김봉옥(金鳳玉)의 5남 1녀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1922년에 현풍보통학교(현 현풍초등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25년 대구로 이사하여 달성보통학교(현 달성초등학교) 4학년에 편입하였다. 1928년 서울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가 1929년 대구고등보통학교(지금의 경북고등학교)에 편입하였으며, 4학년 때 교내 항일운동의 주동으로 퇴학당하여 다시 상경,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1937년 보성전문학교 상과[2]를 졸업하였다. 학창시절엔 유도 선수로 활동했고 정계에 있을 때 대한유도회 회장을 역임한 체육인이기도 하다. 그의 호를 딴 '성곡컵 국제유도대회'가 있다.

2.2. 사업가로서


1939년 비누공장인 삼공유지합자회사를 설립하였다. 1948년에는 고려화재해상보험과 자본금 1억 원의 금성방직을 설립하였다. 1950년 6.25 사변으로 금성방직 안양공장이 불탄 뒤, 1952년 동양통신을 창간하고 1953년 연합신문을 인수하였다. 1956년 태평방직과 아주방직을 인수하였다. 1959년 국민대학을 인수[3]하고, 1962년 쌍용양회를 설립하였다.


2.3. 정치


8.15 광복 직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경북지부에서 활동하였으며, 1946년, 미군정의 친일경찰의 횡포에 의해 일어난 대구 10.1 사건에서 친구 박상희, 황태성과 같이 주요 역할로 활동하였다. 이후 사업가로 활동하다 1958년 달성군에서 자유당소속으로 제4대 민의원에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했다.
4.19 혁명 후에는 한때 정계를 은퇴하였으나 5.16 군사정변 후 다시 정계에 복귀하였다. 민주공화당 소속으로 제 6대, 제7대, 제8대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 민주공화당 내에서 막강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김종필과는 껄끄러운 사이로 4대 중앙정보부김형욱과 함께 김종필을 견제하였다.
박정희의 친위대를 자처하면서 3선개헌에 회의적이던 김종필계와 대다수 공화당 인사들을 강하게 압박해서 3선 개헌을 성사시켰다.[4][5] 이 과정에서 김진만, 백남억, 길재호와 함께 소위 4인체제로 박정희를 대리해서 공화당을 관리하였다. 특히 재벌에게 해외차관과 정부발주공사의 10%를 무조건 자신을 통해서 상납하게 하면서 정권의 정치자금 창구를 단일화하고 이를 바탕으로 정치권과 재벌, 언론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는 그가 쌍용그룹 회장(재벌총수), 동양통신 사장(언론인)이면서 공화당 재정위원장(정치인)이자 박정희의 최측근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특히 김성곤은 학창시절 박정희의 셋째형인 박상희와 절친이었기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박정희를 보아왔으며 사석에서는 박정희와 자녀의 결혼 문제를 상의할 정도로 친밀한 사이였다. 이런 배경 때문에 박정희는 김성곤한테 정치자금을 모으라고 지시하였다는 후일담이있다. 한편 야당 정치인 중 유진산과는 밀월관계를 유지하였다. 또한 김성곤은 자유당 시절에도 국회의원이었으므로 구 자유당 인사들과 이승만 정부의 인사들과도 친분이 깊었다.
그러나 자신의 영향력을 과신한 나머지 1971년 민주공화당의 김진만, 백남억, 길재호 등과 함께 오치성 내무부장관 해임안을 가결시킨 '''10.2 항명 파동'''을 일으켰다. 이에 이후락이 재직하던 중앙정보부에 연행된 김성곤은 길재호를 비롯한 항명에 가담한 여러 의원들과 고문을 당한 후, 정계에서 쫓겨났다. 당시 트레이드 마크인 콧수염이 뽑힐 정도로 수모를 당했고, 심지어 시중에는 두들겨 맞았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훗날 그의 사망 원인이 고문 후유증이라는 얘기도 있다. 이는 신민당이 문제삼으며 정권이 이들을 정치적으로 살해했다고 비판할 정도였다. 3선 개헌 이후에 4인체제의 힘이 커지자 기회만 보고 있던 박정희가 항명파동을 계기로 정리를 한 셈이다. 민주공화당의 견제장치 없이 1인 독주체가 성립됨으로써 집권당 내에선 의미있는 반대계파가 사라졌으며 대한민국 제4공화국을 성립시킨 유신 선포를 수월히 할 수 있게 되는 발판이 되었다.
서울시에 최초로 지하철을 도입하고 공사를 시작할 때, 일본의 기술을 도입해서 진행하기로 결정되었다. 그런데 이 공사비가 당초의 두 배가 되었는데 아사히 신문의 취재 결과 130만 달러가 김성곤과 기시 노부스케에게 흘러들어갔던 것이 파악되었다.

2.4. 정계 은퇴 이후 말년


1973년 대한상공회의소 제8대 회장에 취임하였고 1974년 대한양회를 인수, 한국신문연구소 회장에 취임하는 등 활동을 재개했다.

2.5. 사후


[image]
김성곤 묘비 제막식 (1975.11. 06.)

성곡선생 서거특집 모음 (1975. 02)
  • 2월 25일 밤 11시
    • 0분 00초 ~ 1분 54초 : 김성곤 사망 소식
    • 1분 54초 ~ 3분 04초 : 빈소 현황
    • 3분 04초 ~ 4분 19초 : 김성곤 사망원인과 사망 과정
    • 4분 19초 ~ 13분 20초 : 김성곤에 대한 평가
    • 13분 20초 ~ 15분 06초 : 성곡 김성곤 인터뷰
  • 2월 26, 27, 28일
    • 15분 06초 ~ 17분 11초 : 김성곤의 빈소 조문 현황
    • 17분 11초 ~ 19분 04초 : 김성곤의 발자취
  • 2월 28일 밤 10시 30분
    • 19분 04초 ~ 31분 34초 : 김성곤의 생애
    • 31분 34초 ~ 34분 05초 : 성곡 김성곤 인터뷰(위 인터뷰와 같다)
    • 34분 05초 ~ 50분 35초 : 배영호 전 법무부 장관의 김성곤 평가
  • 50분 35초 ~ 55분 21초 : 김성곤 영결식[6]
그러나 1975년 2월 24일 고려대학교 교우회장 자격으로 졸업식 축사를 준비하고 잠들었다 다음날 아침 깨어났는데 오른쪽 다리가 잘 움직이지 않는 등 뇌졸중 증세를 보여 순천향대학교병원의 주치의를 불러 진단을 받고 별거 아니니 쉬라는 판정을 받고 있다가 오후 2시에 상태가 악화되어 그날 저녁 8시 50분경 순천향병원에서 사망했다.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으며, 그의 묘는 원래 가족장으로 국민대학교 뒷산[7]에 안장되었다가 1984년 강원도 평창군에 이장되었고, 2014년 고향인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으로 재이장되었다.
국민대학교 본부관 앞에는 그의 어록비와 좌상이 자리잡고 있다.

3. 유족


출처
  • 장녀 : 김인숙 (1941년생) / 사위 : 조해형 (나라기획 회장)
    • 외손자 : 조현진
    • 외손자 : 조현찬[8]
    • 외손녀 : 조은영
  • 차녀 : 김의정 / 사위 : 이승원
    • 외손자 : 이용훈
    • 외손자 : 이진휴
    • 외손자 : 이성훈
    • 외손녀 : 이원희
  • 장남 : 김석원(1945년생, 전 쌍용그룹 회장) / 전처 / 후처 박문순(1955 ~ ) 성곡미술관 관장[10]
    • 손자 : 김지용[9] (1973년생) /
    • 손자 : 김지강 (1977 ~ 2011) 자살
    • 손자 : 김지명
    • 손자 : 김지태
    • 손녀 : 김지수
  • 삼녀 : 김의령
  • 차남 : 김석준 (1953년생, 쌍용건설 회장) / 이혼
    • 손자 : 김지성
    • 손자 : 김지운 셰프, 이튼 칼리지 진학
    • 손녀 : 김지연
  • 삼남 : 김석동(1960년생, 전 굿모닝증권 사장) / 妻 한준희
    • 손자 : 김지호
    • 손자 : 김지원
    • 손녀 : 김지영

4. 미디어에서


제3공화국, 삼김시대에서 배우 박규채가 김 회장을 연기했다.

5. 선거 이력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연도
선거종류
소속정당
득표수(득표율)
당선여부
비고
1958
제4대 국회의원 선거 (경북 제10선거구)
자유당
'''23,518표 (72.75%)'''
'''당선'''

1963
제6대 국회의원 선거 (경북 제8선거구)
민주공화당
'''44,674표 (64.75%)'''
'''당선'''

1967
제7대 국회의원 선거 (경북 제8선거구)
민주공화당
'''62,354표 (73.96%)'''
'''당선'''

1971
제8대 국회의원 선거 (경북 제10선거구)
민주공화당
''' 56,751표 (73.87%)'''
'''당선'''


6. 논란


재미교포 문명자[11] 기자가 취재한 내용에 의하면, 김성곤은 일제 때는 남대구경찰서 순사로 칼을 차고 다니더니 해방 후에는 남로당 비밀당원으로 들어가[12] 대구 10.1 사건 때 경북도 인민위원회 재정부장을 지냈고, 부인 김미희는 여성동맹 위원장을 했다고 한다. 또한 김성곤은 경북 지역의 유명한 사회주의자들인 박정희의 형 박상희, 황태성과도 친한 사이였고, 6.25 때 북한군 장교 계급장을 달고 서울 거리를 활보 하는 걸 본 사람도 있다고 한다.출처
그런데 문명자 기자의 취재록에 의하면 김성곤은 그런 좌익 경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6.25 때 이기붕이 대구로 피난 오자 친분 자유당이 몰락할 때까지 재정부장을 지냈다. 아울러 김성곤은 이기붕과의 친분에다 한국 운크라(UNKRA - 국제연합 한국통일 부흥위원단) 단장 콜트 장군과의 친분을 이용해 금성방직을 설립해서 기업가로 승승장구 했다고 한다.출처 이후 자녀들을 미국에 유학보내면서 본인과 가족들의 미국 시민권 취득을 알아봤다는 증언도 있다.
김종필의 증언에 따르더라도, 적어도 남로당 활동을 했다는 기록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출처
위의 증언들이 진실이라고 한다면 친일파 -> 좌익활동 -> 친미보수우익으로 정말 기가막히게 변신을 거듭해온 기회주의자라고 할 수 있겠다.

7. 수상 경력


  • 대통령 표창 (1967)
  • 국민훈장 무궁화장 (1975)

8. 관련 문서



[1] 김성곤이 생전 자주 쓰던 말이었다.[2] 지금의 고려대학교 경영학과의 전신. 김성곤은 나중에 고려대학교 교우회장을 맡기도 했다.[3] 보성전문학교 상과 시절 인촌 김성수가 보성전문학교 교정에서 밀짚모자를 쓰고 교정에서 풀을 뽑는 모습에 감명을 받아 이때부터 육영사업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덕분에 국민대에서는 김성곤을 학교 설립자인 해공 신익희와 함께 양대 건학 공로자로 기념, 추모하고 있다.[4] 3선개헌이 처음 불거졌을때 김종필을 선두로 해서 대다수 공화당 정치인들은 이를 반대했다. 장기집권한 이승만의 최후를 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1969년부터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공화당 국회의원들을 회유, 협박해서 결국 모두 찬성으로 돌려놨다. 당내에 막강한 독자계보를 가지고 있던 김종필을 압박하는데 선봉에 선게 김성곤, 김진만, 백남억, 길재호 4인방[5] 한때 60명이 넘던 공화당내 개헌반대파 국회의원은 결국 3명 정구영, 예춘호, 이만섭만이 남았고, 결국 정구영-강제 정계은퇴, 예춘호-제명, 이만섭-낙선으로 모두 숙청되었다. 예춘호는 야당으로 넘어가서 1980년대 재야 민주화 운동에 투신했고, 이만섭은 야인으로 지내다가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다시 당선되었다. 그리고 전두환의 집권 이후 한국국민당 총재로 재기했다.[6] 51분 18초쯤에 고인의 영전에 술을 따르는 이가 장남 김석원, 51분 50초쯤에 절하는 이들은 김성곤의 외손주들이나 차남 김석준, 삼남 김석동으로 추정된다. 53분 36초에 미망인 김미희 여사, 그 옆에 세 아들이 보인다. [7] 이 장소는 이장 이후, 현재 성곡동산으로 불리며 학생들의 쉼터로 사용되고 있다.[8] 무한궤도의 드러머, 공일오비의 객원보컬이었던 그 분 맞다.[9] 김성곤이 생전에 유일하게 본 친손자였으나 그가 2살 때인 1975년에 김성곤이 사망했으므로 기억에도 없을 것이다. 현재 국민대학교 이사장. [10] 장남, 차남은 전처가 낳은 자식들이고 3남, 4남, 외동딸은 박문순이 낳은 자식이다. [11] 미국식 이름은 줄리 문으로, 주로 박정희 정부의 고위 인사들에 얽힌 부정과 비리 기사들을 집중적으로 취재했다. 당연히 박정희 본인이나 그 주위 사람들한테는 매우 눈엣가시 같은 인물이었으나, 문명자 본인이 미국 정계의 고위 인사들과 친밀한 인맥을 지녔기에 무사할 수 있었다.[12] 사실 이건 김성곤만 그랬던 게 아니라, 당장 박정희나 박상희 및 황태성 같이 경북에서 웬만큼 이름이 있었던 사람들 대부분은 거의 다 해당되었다. 그래서 경북 대구의 별명이 조선의 모스크바일만큼, 좌익세가 강한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