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현(1953)

 

1. 개요
2. 생애
2.1. 어린 시절
2.2. 제주도 장애인 자활 시설 건립 추진
2.3. 파라과이 교민회 총무
2.4. 1년만의 귀국
2.6. 6.10 민주 항쟁과 의문사 진상규명 결의대회
2.8. 그 외 사회운동
2.9. 자연인 '씨돌'의 삶
2.10. 20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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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間으로서 당연한 일.'''

"자신에게 전혀 도움되지 않는데, 왜 그런 삶을 사셨나요?"라는 질문에 대한 답

삼풍백화점에서 생명을 구하기 위해 애썼던 자연인 '씨돌'은 자식을 잃은 부모님들의 지팡이이자 방패가 되주었으며, 정연관 상병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밝혀낸 청년 '요한'이였습니다. 자신만을 위해 싸우는 세상에서 억울하고 서러운 이들을 위해 앞장섰고, 꺼져가는 생명에 가슴 아파하며 대참사의 현장에 뛰어갔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나는 삶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어디에나 있었지만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SBS 스페셜 '요한, 씨돌, 용현 세 삶을 산 남자' 클로징 멘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니, 어둠이 빛을 이기지 못하였다.'''

요한복음 1장 5절[1]


1. 개요


1953년 2월 8일생. 대한민국의 환경농업인이자 민주화 및 사회운동가. 사회운동을 했었던 시기에는 세례명인 '''김요한'''으로, 이후 강원도에 자리를 잡은 후에는 '''김씨돌'''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고 '''김용현'''이라는 본명보다 이 이름이 더 유명하다. 종교는 천주교이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만 11살이던 1964년에 부모를 여의고 대구SOS어린이마을[2]에 위탁됐다. 마침 1964년 한국에 비유럽권 국가로는 처음으로 SOS어린이마을이 생겼고 그중 대구에 처음 어린이마을이 만들어졌다. 김용현은 그렇게 만들어진 SOS어린이마을에 처음 위탁된 아동이었다.
대구중앙고등학교를 다녔다. 1.21 사태 이후 고등학교 과목에 교련이 추가되면서 당시 전국적으로 이에 반대하는 학생들의 시위가 벌어졌는데, 김용현은 이때 학생부 간부로서 교련 반대시위 주동자로 연행된 적도 있었다.
고교 졸업 후 한 섬유회사에 취업해 3년간 경리를 맡았는데, 직원들의 열악한 노동 환경과 당시 회사 임원의 횡령 비리를 알게 되면서 그러한 사회 부조리를 없애고자 법조인이 되기 위해 사법고시를 준비했다. 그러나 1981년 사법시험 면접 탈락 사건 이후 자신도 시위 및 연행 경력 때문에 불합격될 수 있겠다고 생각하고 사법시험을 포기했다.

2.2. 제주도 장애인 자활 시설 건립 추진


사실상 법조인이 되기가 불가능해지면서 김용현은 그대로 사법고시를 포기하고 1982년 제주도로 건너가 장애인 자활 시설을 만들었다. 처음에는 천막으로 임시건물을 지은 것을 시작으로 제대로 된 건물을 지으려고 했으나, 건물이 지어지기 전에 당시 제주도에 있었던 간첩 조작사건[3]에 연루됐다. 당시 제주 보안대에서는 장애인 자활 시설을 짓는 데에 조총련계 자금이 유입된 게 아닌지 의심했었고, 별안간 간첩으로 몰린 김용현은 제주 보안대에 끌려가 고문받았다.
시간이 지나 2005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생기면서 김용현은 이 당시 제주도 보안대에서 당했던 피해에 대해 호소했지만 2007년 각하 결정이 내려졌다. 정확하게는 제대로 된 조사가 이뤄지지 않은 탓에 각하된 것이었는데, 당시 과거사위 조사관 중에는 국정원에서 파견된 직원이 1명 있었는데 하필이면 그 조사관이 김용현의 사건을 담당했다고 한다. 또한 각하 결정 이후 뇌졸중 초기 증상으로 입원한 적이 있는데, 보안대에 끌려가 고문을 받은 게 원인이라는 분석이다.

2.3. 파라과이 교민회 총무


제주 보안대에 풀려난 후 김용현이 선택한 곳은 아무런 연고도 없던 지구 반대편 파라과이였다. 1986년 파라과이로 건너가 교민회 총무를 맡았다. 총무로서 민원실을 만들어서 한인 교민들의 민원을 해결했고, 먹을 물이 없는 파라과이 현지인들을 위해 우물을 파기도 했고, 교민들을 상대로 장애인 성금 모금에도 앞장섰다.[4]
1986년 그 해는 유독 파라과이로 이민 온 사람들이 많아서 교민 간의 갈등도 잦아 다들 교민회 활동을 꺼리는 가운데, 그는 월급도 박봉이고 일도 많은 교민회 총무 일을 도맡아 했다. 교민회 민원실 의자에 앉아 쪽잠을 잤을 정도였다고. 한편 당시 파라과이 역시 독재정권이 장악하고 있었는데, 정권에 맞서 수녀들이 농토를 현지 주민들에 돌려달라는 시위를 하다가 군인들에게 살해당한 사건이 있었다. 파라과이 정권에서는 본보기로 삼기 위해 수녀들의 시신을 그대로 방치하라고 군인들에게 명령했지만 김용현이 수녀들의 시신을 수습했다고 한다. 그는 30여년이 흐른 후에도 이때 일을 회상하면서 수녀님이 너무 불쌍했다며 펑펑 울었다.

2.4. 1년만의 귀국


그러다가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소식을 접하고 김용현은 그 즉시 귀국했다. 이후 청년들의 의문사 진상규명 활동을 시작했다. 원래 박종철과는 일면식도 없었지만 이를 계기로 박종철의 아버지 박정기 씨와는 오랜 기간 인연을 이어갔다.

늘 요한 씨만 생각나면 어떤 환경에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하는 숙제가 남고 있으니 마음 같아서는 금방이라도 한번 가보고 싶을 때가 많지요. (중략) 강원도에서 만날 날이 있기를 기대해 보면서 소식을 전합니다.

박정기 씨가 1998년 김용현에게 보낸 편지 중


2.5. 정연관 상병 구타 사망사건


1987년, 정연관 상병이 부대 내에서 사망했다. 군 내부에서는 사인을 훈련 중 급사로 밝혔다. 수상한 점은 많지만 이렇다 할 조치를 취할 수 없는 가족들은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김용현이 가족들의 집을 방문했다. 서슬 퍼런 보안부대의 감시를 피해 담을 넘으며 집을 방문한 그는 아들이 훈련 중 급사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바로 군 내 부정투표로 인해 발생한 구타가 사인이였다.'''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는 처음으로 직선제로 대통령을 뽑게 된 선거였다. 군 내에서도 부재자 투표를 진행했는데, 문제는 대놓고 여당을 찍으라고 압박을 주거나 비밀투표를 보장하지 않고 이 나라처럼 감독관이 보는 앞에서 도장을 찍는 등 윗선에서 대놓고 여당을 밀어줄 것을 강요하고 있었는데 정연관 상병은 이에 굴하지 않고 야당에 투표를 해버렸다. 이에 중대장이 선임들을 불러 야당 표가 나왔다고 질책했고, 선임들이 기합을 준다고 정연관 상병을 구타해 결국 사망에 이른 것. 김용현은 가족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을 뿐만 아니라 구타를 한 선임들의 증언을 녹취하면서까지 증거자료를 모았다.
또한 가족들과 함께 13대 국회의원이였던 이철용, 최규하 전 대통령, 김영삼 민주당 총재, 김대중, 노무현 변호사와 접촉을 진행하면서 정연관 상병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고자 했다. 하지만 진상규명은 쉽지 않았다. 이 부정투표를 인정하면 노태우의 대통령 당선이 무효화가 될 수 있기에 여당에서 필사적으로 진상규명을 방해했다. 당시 여당인 민주정의당 소속의 이상득 의원[5]이 ''''그 자리에 있던 사람도 아니였고, 당신이랑 직접 관련이 있는 사람도 아니지 않느냐?''''며 논점을 흐리며 방해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김용현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진실을 밝히려고 했고 17년이 흐른 2004년 7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정연관 상병이 야당에 투표했다는 이유로 구타를 당해 사망한 것이 마침내 인정되었다. 이 때 김용현이 수집한 자료들이 결정적인 증거가 되었다. 정연관 상병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김용현. 그러나 그는 정연관 상병의 어머니를 찾아가 한 번 포옹을 한 뒤 자취를 감추었다. 갑자기 아무 말 없이 사라져버려 유족들은 그렇게 고생했는데 우리가 아무 보상도 해준 게 없으니 섭섭해서 떠난 게 아닌가 하는 오해도 했다고 한다.

2.6. 6.10 민주 항쟁과 의문사 진상규명 결의대회


'''요한 선생님은 우리들이 아무것도 몰랐을 때, 투쟁 현장의 제일 앞에서 우리들을 인도한 사람이에요.'''

배은심 여사[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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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6월 뉴스위크, 타임지 어깨동무 사진 앞줄 맨 오른쪽 남색 상의, 안경 = 나, 김용현'''

1987년 6월 29일, 타임지에 실린 최루탄 반대 시위 사진에서 자신의 위치를 설명

6월 항쟁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가 최루탄 반대 시위에서 연좌농성 맨 앞줄에 앉아 다른 시위대와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모습이 외신기자의 사진에 찍혀 타임지, 뉴스위크에 실리기도 했다. 맨 앞줄에 있는 모습이 실려 있다. 이후 노태우가 당선은 되지만 곳곳에서 부정 투표 관련 문제가 터져 나오자 민정당의 부정선거를 알리는 대자보를 곳곳에 붙이며 투쟁했고, 대선 당시에도 성당 지하실에 컴퓨터를 쌓아두고 '공정선거감시단'을 스스로 결성해 실시간으로 감시를 했을 정도로 민주화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이후 의문사 진상규명 결의대회가 벌어졌고, 억울하게 자식들을 잃은 부모들을 위해 항상 시위대 선두에 위치해 있었다.
그러나 그런 행동으로 인해 경찰들의 과잉 폭력 진압으로 온몸을 짓밟히고 경찰에게 고문 및 가혹행위, 미행을 당했다. 고문가혹행위로 인해 김용현의 몸은 돌아올 수 없을 정도의 심각한 부상을 당할 정도로 엄청난 고통을 받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김용현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이 때 민주화 운동의 한 축이였던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대표 김승훈 신부와도 인연이 있었다. 수배령이 내려져 있는 김용현을 김승훈 신부가 받아줬고, 김용현은 그를 보필하면서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이후 김승훈 신부에게 세례를 받아 김용현의 이름 중 하나인 '요한'이란 세례명을 받았고 이를 자신의 가명으로 쓰기도 했다.

2.7.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1995년, 대한민국의 비극 중 하나인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때도 강원도의 자연인이였던 그는 김씨돌이란 이름으로 구조 활동을 했다. 붕괴 사고 민간구조단[7]장인 고진광 씨도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8] 김용현은 붕괴 현장에서 사람을 열성적으로 구조하려고 애썼고, 22세의 이모 씨를 구출하는 데 성공했다. 당시 구조 영상에서도 '''"산소호흡기! 산소호흡기 가져와!"'''라는 그의 다급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구출한 이모 씨는 병원으로 옮겨진 후 사망했다. 김용현은 그냥 넘어가지 않고, 언론사와 서울특별시 소방본부장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 이런 비극이 없어야 한다고 대책을 요구했고, 소방본부장은 김용현에게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며 회신을 보내기도 했다. 이후 사고가 수습이 되고, 기자들이 영웅인 김용현을 취재하려고 하자 '''"전 괜찮아요."'''라는 말과 함께 또 다시 홀연히 사라졌다.

2.8. 그 외 사회운동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까지 벌어졌던 구미 산동 골프장 사태 때 당시 골프장 건설 반대 운동을 펼치던 농민들을 도왔다. 당시 아무도 농민들의 편에 서지 않았을 때 직접 야당 의원도 초청했고 정치권에서 관심을 가지면서 언론에서도 무분별한 산지 개발과 그에 따른 환경오염을 문제삼으며, 6년이 넘게 지속된 논쟁이 지속되었다. ...하지만 결국 산동 골프장은 건설됐다.
정선군 봉화치 마을에 자리 잡은 이후에도 1997년 우리밀 살리기 운동, 1999년 토종벌 폐사 사건 진상조사, 1999년 영월댐 건설 저지 운동 등에 참여했다.

2.9. 자연인 '씨돌'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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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80-90년대 민주화 운동 시절 목숨을 희생한 친구들에게 세속에서 살아가는 건 인간의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해 속세를 떠나고 자연을 택했다. 강원도 정선군 봉화치 마을로 들어가 자연인의 삶을 시작한 그는 이 때도 그는 가만히 있지 않았고, 봉화치에 있는 산불감시 초소에 매일 한 시간 반 씩 산불 감시를 했다. 이로 인해 '''30년간 봉화치는 산불에 매우 취약한 강원도에 위치한 산임에도 산불 피해가 없었고''', 산림청으로부터 표창상을 받기도 했다.
또한 1999년 정선군 일대에 토종벌이 단체로 폐사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김용현은 농민들을 대신해 직접 사건을 조사하고, 보고서를 직접 작성했다. 또한 농민들을 대신해 각종 언론들을 찾아다니며 대책을 요구하는 인터뷰도 했다. 산 속에서 살고, 웃통을 벗고 다니며 지게를 짊어지는 자연인의 모습에 괴짜라 생각할 수 있었지만 주민들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과 순하고 인정넘치는 모습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정말 좋아했다고 한다. 같은 마을에서 살고 있는 30년 지기 할머니도 김용현이 소식 없이 사라진 후 그를 그리워하며 걱정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 때는 자연인이라는 말을 잘 몰랐던 시절이라, 김씨돌 씨야말로 지금 생각해보면 원조 자연인이다.'''

임성훈

이후 2012년,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에 모습을 드러내며 주목받았다. 갑자기 옷을 훌렁훌렁 벗는 모습, 산에 있는 지렁이를 먹는 모습이 나와 괴짜인가 싶었지만 그의 아픈 과거가 밝혀지고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하고 순수한 모습, 그리고 진정으로 자연을 아끼고 사랑하며 직접 재배한 작물들을 매년 참여연대에 기부하고 자신이 살던 집을 사후 기증하겠다는 등 아낌없이 나누는 모습에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다.
사실 고문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그의 몸의 상태는 말이 아니였는데 발바닥을 지압해 고통을 줄이려고 맨발로 걸어다녔고, 잠을 잘 때는 솔잎을 방에다 깔고 청할 정도였다. 세상에 이런 일이 외에도 JTBC 오감도, KBS 남자의 자격, MBN 나는 자연인이다에도 출연하며 사람들에게 얼굴을 비춘 그는 갑자기 홀연 집을 비우고 다시 사라져 버렸다.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하던 와중, 2019년 SBS 스페셜에서 그의 현황을 찾아나서다 마침내 그를 찾게 되었다.
'''그런데...'''

2.10. 2019년



SBS 스페셜에서 그를 찾은 건 다른 곳이 아니라 어느 요양원이였다. 또한 예전의 활동적이고 밝은 모습은 어디가고 휠체어에 앉아 몸을 가누지 못 하는 모습이였다. 고문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평소에도 혈압이 높았는데, 갑작스럽게 뇌출혈이 터져 쓰러졌다. 안타깝게도 사람의 손길이 뻗지 않는 오지에서 살고 있었기에 뇌출혈을 일으킨 후 한참 지난 뒤에야 지나가던 등산인에게 발견되어 병원에 후송되었다. 그나마 등산객에게 발견되어 다행이지만 이미 때는 너무 늦어서 왼손을 제외하고 온 몸이 마비가 되었으며 언어장애로 인해 의사소통도 20%밖에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몸의 상태는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해져 의사도 회복을 기대하기 어렵고, 그나마 살아 있는 왼손으로 오른쪽의 장애를 극복할 수 있는 재활 치료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다고 밝혔다. 복지사가 손톱을 깎아주려고 해도 후유증으로 인한 통증 때문에 손을 심하게 떨어 결국 손톱도 깎지 못 하는 안타까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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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정연관 상병의 유족들과의 상봉도 이루어졌다. 김용현은 자신의 이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다며 반대했지만, 유족들이 그에게 감사를 표하기도 전에 홀연히 사라져 15년 동안 그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더 크기에 PD가 만남을 주선했다. 갑작스럽게 사라진 뒤 다시 나타나지 않았기에 유족들은 그가 그가 정연관 상병을 잊은 것인지, 아무런 보상도 해주지 못한 것이 서운해서 떠난 것인지 오해하기도 했지만 이 날 상봉으로 '''그런 오해는 싹 사라졌다.''' 김용현은 불편한 몸으로 유족들을 만나자 대성통곡을 했고, 그를 침착하게 만나려고 한 유족들도 그의 모습을 보고 눈물을 참지 못 하고 쏟아내는 장면은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게 했다. 후에 유족들과 김용현과 함께 정연관 상병의 영정을 들고 다같이 사진을 찍었다.[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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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다 할 소득도 없어 기초수급자 생활을 이어가고 있으며 재활 치료를 받을 여건도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나마 신부와 수녀들의 도움으로 치료는 받고 있지만 그 이상의 재활 치료는 아직 못 받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정확한 대학교의 이름은 나오지 않았지만 서울권 명문 사립대에 재학하고 있던 엘리트였기에 만약 이런 길을 걷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어렵게 살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전혀 후회하거나 자신의 현재 삶을 개탄하지 않았다. 당신에게 전혀 도움되지 않는데, 왜 그렇게 어렵게 살아왔느냐는 PD의 질문에 왼손으로 삐뚤빼뚤하게 '''"人間으로서 당연한 일"'''이라고 적으며 의연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또한, 인터뷰를 끝내고 멀어지는 카메라를 향해 유일하게 쓸 수 있는 왼손으로 힘겹지만 힘차게 주먹을 들어올리며 '''진정한 의인의 모습이 무엇인지 보여주었다.'''
2019년 9월, SBS 세상에 이런일이의 유튜브 채널 '우와한 비디오'에서 김용현의 근황을 다뤘다. # 국내 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후원이 이어졌으며, 이전에는 요양원에서 단순 요양만 받는 수준이였다면 이후에는 재활 전문 치료병원에서 재활을 받고 있다고 알렸다. 연하장애[11] 때문에 음식을 먹는 것은 고사하고 침도 제대로 삼키지 못 해 질질 흘리는 심각한 상태였으며, 연하치료와 더불어 노래치료를 통해 아직은 부족하지만 노래를 부를 수 있는 등, 재활 효과가 좋다고 한다. SBS 스페셜 촬영 당시에는 말도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였다고.
2019년 12월에 SBS 스페셜에서 김용현에 대해 다시 다뤘다.

[1] 김용현의 세례명 '요한'과 그의 삶에 가장 잘 어울리는 성경 구절.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의 가사 첫 줄도 여기에서 따온 것이다. SBS 스페셜에도 등장했다[2] 평범한 보육원이 아니라, 수도자처럼 평생 결혼하지 않기로 서약한 여성들이 일반적인 보모가 아니라 아이들에게 엄마라 불리며 친어머니처럼 아이들을 돌보는 곳이다.[3] 처음에는 제주도 간첩사건으로 알려졌으나, 추후 정권에서 조작한 사건이었다는 게 드러났다.[4] '뗄레똔'이라는, 파라과이 현지에서 장애인을 상대로 한 모금 활동이 있었는데 당시에는 교민들은 자기 먹고 살기 바쁜 터라 김용현이 나서기 전까지 남을 돕는다는 생각을 거의 못했었다고 한다.[5] 이명박의 친형이다.[6] 이한열 열사의 생모[7] 전국 각지에서 몰려온, 장비나 기술을 갖고 있으며 아무런 대가도 받지도 바라지도 않고, 그저 사람을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온 이들로 이루어졌다. 참고로 세월호 참사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자원봉사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잠수사들 역시 아무 대가도 약속받지 않고 몸이 망가질 정도로 헌신했다. 씨돌 본인도 세월호 때도 마음같아서는 팽목항에 가고 싶었다고 말할 정도. 하지만 그때는 나이도 많고 건강이 좋지 않아 가지 못했다고 한다.[8] 삼풍백화점에 도착한 날짜까지 기억하고 있으며, 사건 발생 다음 날 (6월 30일)에 도착해 어디서 왔냐는 질문에 '강원도에서 오느라 늦었고, 아직 구조할 사람이 더 필요할까 해서 왔다'고 답변해서 기억에 남는다고 밝혔다.[9] 그나마 밝은 표정의 김용현과는 대비되게 유족들의 표정은 매우 어두운 것을 넘어 거의 울기 직전인 걸 볼 수 있다. 17년 동안 친족도 아니면서 정연관 상병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려고 고군분투 했는데, 어렵게 15년 만에 만나 감사를 표하려고 했는데 현재 그가 고통받고 있는 걸 보면 유족들의 표정도 어두울 수 밖에 없을 것이다.[10] 유족들도 상당히 놀란 듯 하다. 그를 보자마자 (몸 상태가)왜 이러느냐는 말을 반복했고, 정연관 상병의 친형도 김용현을 상봉했지만 감정을 주체하지 못 하고 밖에서 '''"나도 만나고 싶었는데 저 모습일 줄은 진짜 상상도 못 했다... 진짜 상상도 못 한 일이야... 왜 저래 도대체가..."'''라며 눈물을 흘리며 슬퍼했다. 몇 년 전 방송에 나온 그를 우연히 보고 반가웠었다고 하는데, 얼마나 지났다고 완전히 다른 모습이 되어있으니 더욱...[11] 음식을 삼키는 기능에 문제가 생긴 상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