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명수
* 정치인/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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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明秀
1927년 4월 29일 ~ 2020년 7월 1일
대한민국의 전 정치인이다. 본관은 창원(昌原)#.
1927년 충청남도 아산군에서 태어났다. 양정고등학교, 동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였다.
이후 민주당, 민정당, 민중당, 신민당 등에 몸담으면서 유진산계 정치인으로 활동하였다.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충청남도 아산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공화당 김세배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충청남도 천안시-천원군-아산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민주공화당 김종철 국회의원과 동반 당선되었다. 1974년 9월 신민당 김영삼 총재 체제가 출범하자 총무국장에 임명되어 1976년까지 역임하였다. 1978년 변호사법 위반으로 대법원에서 국회의원직 상실 판결을 받았다.
1980년 말 민주한국당 창당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전두환 정권이 충청남도 천안시-천원군-아산군 선거구를 한국국민당 김종철 총재를 위한 정책지구로 남겨두어 다른 야당이 후보를 내지 않게 하자 이에 반발하여 민주한국당을 탈당하여 무소속으로 해당 지역구에 출마하여 민주정의당 정선호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1] 이후 현직 국회의원 신분으로 가택연금을 당한 김영삼을 자주 방문하였다. 1984년 민주화추진협의회에 참여한 다음 신한민주당에 입당하였고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민주당 후보로 해당 지역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정의당 정선호 후보와 민주한국당 정재원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87년 신한민주당을 탈당하여 통일민주당에 입당하였다.
1988년 통일민주당 후보로 충청남도 온양시-아산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 5월 통일민주당 부총재에 임명되었다. 1989년 통일민주당 원내총무가 된 이기택의 뒤를 이어 대한민국 국회 제5공화국비리특별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1990년 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에 합류하였다. 같은 해 대한민국 국회 보건사회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93년 민주자유당 사무총장에 임명되었다. 1994년 대한민국 국회 국방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국당 후보로 충청남도 아산시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자유민주연합 이상만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97년 국민신당에 합류하였다. 1998년 다시 새정치국민회의 소속이 되었다.
2001년 경부고속철도 차량 선정 로비 사건과 관련해 최만석씨로부터 사례금 4억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기소되었다. 이후 2002년 3월 징역 2년6월에 집행유예 4년, 추징금 4억원이 확정됐다.
2020년 7월 1일 별세했다.
소위 주둥이를 인두로 지진다는 인두발언이 논란이 되었었다. 민주자유당 사무총장 시절에 기자가 민주당 이기택 대표가 중대 발언을 한다는데 하고 질문을 하자 하는 말이 "하겠다는데,그 주둥이를 인두로 지질 수도 없고." 였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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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明秀
1927년 4월 29일 ~ 2020년 7월 1일
1. 개요
대한민국의 전 정치인이다. 본관은 창원(昌原)#.
2. 생애
1927년 충청남도 아산군에서 태어났다. 양정고등학교, 동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였다.
이후 민주당, 민정당, 민중당, 신민당 등에 몸담으면서 유진산계 정치인으로 활동하였다.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충청남도 아산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공화당 김세배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충청남도 천안시-천원군-아산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민주공화당 김종철 국회의원과 동반 당선되었다. 1974년 9월 신민당 김영삼 총재 체제가 출범하자 총무국장에 임명되어 1976년까지 역임하였다. 1978년 변호사법 위반으로 대법원에서 국회의원직 상실 판결을 받았다.
1980년 말 민주한국당 창당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전두환 정권이 충청남도 천안시-천원군-아산군 선거구를 한국국민당 김종철 총재를 위한 정책지구로 남겨두어 다른 야당이 후보를 내지 않게 하자 이에 반발하여 민주한국당을 탈당하여 무소속으로 해당 지역구에 출마하여 민주정의당 정선호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1] 이후 현직 국회의원 신분으로 가택연금을 당한 김영삼을 자주 방문하였다. 1984년 민주화추진협의회에 참여한 다음 신한민주당에 입당하였고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민주당 후보로 해당 지역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정의당 정선호 후보와 민주한국당 정재원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87년 신한민주당을 탈당하여 통일민주당에 입당하였다.
1988년 통일민주당 후보로 충청남도 온양시-아산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 5월 통일민주당 부총재에 임명되었다. 1989년 통일민주당 원내총무가 된 이기택의 뒤를 이어 대한민국 국회 제5공화국비리특별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1990년 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에 합류하였다. 같은 해 대한민국 국회 보건사회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93년 민주자유당 사무총장에 임명되었다. 1994년 대한민국 국회 국방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국당 후보로 충청남도 아산시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자유민주연합 이상만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97년 국민신당에 합류하였다. 1998년 다시 새정치국민회의 소속이 되었다.
2001년 경부고속철도 차량 선정 로비 사건과 관련해 최만석씨로부터 사례금 4억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기소되었다. 이후 2002년 3월 징역 2년6월에 집행유예 4년, 추징금 4억원이 확정됐다.
2020년 7월 1일 별세했다.
3. 사건사고
소위 주둥이를 인두로 지진다는 인두발언이 논란이 되었었다. 민주자유당 사무총장 시절에 기자가 민주당 이기택 대표가 중대 발언을 한다는데 하고 질문을 하자 하는 말이 "하겠다는데,그 주둥이를 인두로 지질 수도 없고." 였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