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산사
[image]
한자 : 洛山寺 / 로마자 : Naksansa
홈페이지
1. 개요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에 있는 절. 대한불교 조계종 제3교구 본사 신흥사의 말사이다. 관세음보살이 머무른다는 보타락가산(補陀落迦山), 즉 낙산(오봉산)에 있는 사찰로, 신라 문무왕 11년(671년)에 의상(義湘)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한다.'''꿈이 이루어지는 낙산사'''
삼국유사에 수록된 전설에 따르면, 의상이 관세음보살을 만나고자 낙산사 동쪽 벼랑에서 27일 동안 기도를 올렸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여 바다에 투신하려 하였다. 이때 바닷가 굴 속에서 희미하게 관세음보살이 나타나 여의주와 수정염주(水晶念珠)를 건네주며 "내 전신(前身)은 볼 수 없으나 산 위로 수백 걸음 올라가면 대나무 두 그루가 있을 터이니 그곳으로 가보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는데 그곳이 바로 원통보전(圓通寶殿)[1] 터라고 한다. 이를 계기로 오봉산을 관세음보살이 있는 낙산(보타락가산)이라 여겨 '낙산사'라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 이외에 부속건물로 의상대(義湘臺), 홍련암(紅蓮庵) 등이 있으며 일대가 사적 제495호로 지정되었다.
3대 관음기도도량[2] 으로도 손꼽히고 관동팔경의 하나로 유명하다. 경내에는 조선 세조 때 다시 세운 7층석탑을 비롯하여 원통보전과 그것을 에워싸고 있는 담장 및 홍예문 등이 있다.
신라 헌안왕 2년(858년)에 범일(梵日)대사가 중창하였으나 고려 고종 18년(1231년) 몽골 제국의 침입으로 소실되었다. 조선 세조 13년(1467년)에 왕명으로 크게 중창하였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화재를 겪었다. 다시 인조 2년(1624년), 9년(1631년)과 21년(1643년) 재차 중건했지만 정조 원년(1777년)에 화재를 당했다. 이듬해에 다시 중건하였으나 6.25 전쟁으로 소실되어 결국 1953년에 다시 지었다. 이대로 끝났으면 좋았겠지만, 2005년에 산불이 옮겨붙어 또 다시 소실되고 말았다. 자세한 것은 후술한다.
2. 전소
[image]
[image]
'''2005년 4월 5일[3] 에 일어난 큰 산불로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었다.''' 당시 산불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이전부터 낙산사 주변에서 물을 뿌리며 확산을 막던 소방헬기들도 다른 곳의 불을 끄느라 도저히 낙산사로 올 수 없었고 그나마 온 소방차가 오히려 불에 탈 정도였다. 낙산사의 승려와 신도들이 소화기로 불을 꺼보려 했지만 고작 소화기 따위로 이 큰 산불을 막을 수는 없었다. 당시의 뉴스(2016년) 관련기사
이 화재로 보물 제479호로 지정되었던 낙산사 동종이 '''녹아서 소실'''되면서 같은 해 7월 7일 지정해제되었다. 산불에 어떻게 금속 종이 녹아내리나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겠지만, 나무가 탈 때 내는 에너지는 생각보다 많다. 산불 같은 대화재의 겉불꽃(제일 뜨거운 부분)은 천수백°C. 녹는점이 천°C 근처인 구리나 청동은 충분히 녹일 수 있다[4] . 게다가 차라리 종이 넘어져서 땅바닥으로 굴러갔다면 손상은 입어도 녹지 않았을 텐데, 하필이면 종루가 불타서 종을 그대로 덮어버려서 화덕에 들어간 꼴이 되어 녹아버린 것이다.
3. 복원
[image]
전소 이후 복원불사를 진행하기로 했다. 다만 불타기 전의 낙산사는 한국전쟁으로 소실된 뒤 성급하게 지어져 꽤나 난잡한 상태였기에 바로 복원하지는 않았고 발굴 조사를 통해 통일신라부터 조선시대까지의 낙산사 유구를 발견했다. 그 중 낙산사가 가장 번성하였던 조선시대의 모습으로 복원하기로 결정이 났고, 김홍도의 낙산사도를 참고하여 복원불사에 착수하여 2007년 4월 5일 복원이 완료되었다.
복원 과정에서 형태가 바뀐 전각도 여럿 있으며, 저번처럼 타버리지 않게 불에 강한 나무를 심거나 바람길을 뚫는 등 화재에 보다 대비했다. 또한 화재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인지 화재 이전보다 고압수방수 살포장비 등 비상대응 장비를 여기저기에 설치하였다.
화재 이전의 낙산사는 거의 숲이라고 봐도 될 정도로 나무가 많았었는데, 복원된 뒤에는 약간 휑하게 보일 정도로 경내에 나무가 없어졌다. 그래도 산불 이후 15년이 지난 2020년 현재에 와선 어느 정도 나무들이 커지긴 했다.
낙산사 동종 역시 예전의 형태대로 복원되었지만 문화재로 등재되지는 못했다. 앞서 서술했듯이 문화재청이 문화재 가치를 잃었다고 하여 보물에서 지정해제되었기 때문이다.
절 초입에는 낙산사 산불재난 안전 체험장을 조성하여 불타버린 범종루를 형상화한 모형을 가져다 놓았다.
4. 가람
4.1. 홍예문
[image]
조선 세조 13년(1467)에 왕이 친히 낙산사에 행차하여 세운 무지개 형태의 석문.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 33호로 지정되어 있다. 근처 강에서 나온 돌들을 사용해 쌓았는데, 홍예를 조성하는 석재 스물여섯 개는 당시 강원도의 고을 수를 표시한 것이라고 전한다. 홍예 위에는 1962년에 세운 문루가 있었다.
2005년 화재 때 문루가 불타 홍예만 남았으며, 문루를 복원할 때 이번에는 산에서 가져온 돌을 사용하여 홍예를 보수했다.
4.2. 사천왕문
[image]
낙산사의 사천왕문. 2005년 화재의 피해를 입지 않은 극소수 건축물이다. 다만 다들 복원하는데 혼자 그냥 두긴 뭐했는지 복원 과정에서 사천왕상을 개금하였다.
4.3. 범종루
[image]
보물 제 479호 낙산사 동종이 걸려 있던 누각. 2005년 화재 때 불타면서 안에 있던 동종까지 모조리 녹아버렸다.[5] 현재는 동종을 예전 형태대로 복원해서 걸어 놨다. 복원 전후의 외양 차이가 다른 전각에 비해 상당히 큰 편이다.
하루 2번 이곳에서 타종을 한다고 하니 보고 싶다면 시간을 잘 맞추길 바란다.
4.4. 원통보전
[image]
다른 절들의 대웅전 위치에 있는 건물. 석가모니불 대신 관세음보살을 모신다. 2005년 화재로 모조리 불탔지만 안에 있던 관음불상은 미리 옮겨놨기에 화를 면했다. 이후 복원하면서 예전엔 청기와 건물이었던 것을 일반적인 기와를 올린 건물로 바꿨다.
삼국유사 탑상편에 기록된 조신의 꿈 이야기가 낙산사 원통보전에서 기도하다 일어난 일이다. 현재의 원통보전에 있는 관세음보살상은 삼국시대가 아니라 조선시대에 만든 것이지만... 조신의 꿈 이야기를 아는 사람이라면 원통보전을 더 눈여겨 보게 될 것이다.
4.5. 낙산사 칠층석탑
보물 제499호. 위의 사진처럼 원통보전 앞에 세워져 있다. 다만 정중앙이 아닌 약간 어긋난 위치에 있다. 석탑의 재질은 화강석이며 청동제 상륜을 달았다. 원래는 3층이었지만 조선 세조 13년(1467)에 탑을 중수하면서 7층으로 층수를 늘렸다. 6.25전쟁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지만 전쟁을 겪으면서 한쪽 귀퉁이가 뭉텅 잘려나가는 손상을 입었다. 다른 석탑들에 비해 독특한 양식으로 만들어졌다.
어째서인지 사람들이 동전을 던져 탑에 안착시키면 소원을 이룰 수 있다고 여겨 수십개의 동전이 탑에 얹혀졌고 지금도 그 개수는 늘어나고 있다.
4.6. 보타전
[image]
원통보전에서 해수관음상 쪽으로 가다 보면 아래쪽에 보이는 눈에 띄게 거대한 건물. 원래 있던 건물은 아니고 근래에 지어진 것이다. 낙산사가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관음성지임을 상징하는 건물로, 건물 안에는 관음상 1500좌를 봉안하였다. 천수천안 관음상을 비롯하여 얼굴과 팔이 여럿인 불상이 다수 있어서 꽤나 이국적으로 보인다. 한국 불교에 힌두교가 살짝 가미된 느낌. 앞쪽에는 낙산사 7층 석탑을 본따 새로 지은 탑과 보타락이라는 이름의 2층 누각, 연꽃이 가득 있는 연못이 있다.
4.7. 해수관음상
[image]
절 끝자락에 위치한 거대한 관음불상. 1977년까지만 해도 동양 최대의 불상이었다. 근처에는 종각이 있어 누구든지 한번씩 종을 쳐볼 수 있다. 비용은 불전함에 내는데, 액수는 자율적이다. 양심껏 내자. 아래쪽으로 약간 내려가면 관음전이 있다. 관음전 내부에는 불상이 따로 없고, 대신 불상이 있음직한 자리에 통창이 나 있다. 통창으로 외부의 해수관음이 정면으로 보이는 구조. 외부의 해수관음을 향해 실내에서 기도를 할 수 있는 건물이다. 한켠에 넓다란 바위가 있는데, 그곳에 올라가면 울산바위를 조망할 수 있다.
강화 석모도 보문사, 남해 보리암과 함께 3대 해수 관음기도 도량으로 꼽힌다.
4.8. 의상기념관
[image]
절의 설립자로 알려진 의상대사와 관련된 것들을 전시하기 위해 세운 건물. 낙산사의 옛 모습과 의상에 대한 전시물들을 볼 수 있으며, 언제부터인가 2005년에 있었던 화재에 휩쓸려 흉측하게 녹아버린 동종을 전시 중에 있다.
4.9. 의상대
[image]
의상이 좌선수행을 했던 곳이라 전해지는 곳. 원래는 암자가 있었다고 하나 폐허로 변해버렸고 이후 1925년에 그 자리에 정자를 세우고 의상대라 이름붙였다. 1974년 9월 9일 강원유형문화재 제48호로 지정되었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일출은 아름답기로 유명하며 그 덕인지 양양 8경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4.10. 홍련암
[image]
상당히 외진 곳에 위치해 있는 암자. 절벽 끝에 세워져 있다. 의상대에서 옆으로 빠져서 한참을 가면 도착할 수 있다. 옛날에 의상대사가 참배를 할 때 갑자기 푸른 새가 나타나자 기이하게 여겨 따라가다가 어떤 석굴 속에서 자취를 감추자 그 앞에서 7일 밤낮을 기도하였고, 그러자 앞바다에 연꽃이 나타나 관세음보살이 현신하였다고 한다. 이후 그곳에 터를 닦고 암자를 세워 이름을 홍련암이라 지었다.
절벽 아래에 앞서 언급된 자연 석굴이 있는데, 용이 살고 있다는 전설이 있다. 관음굴이라 불리우는데, 암자 바닥에 관음굴을 볼 수 있는 작은 유리창이 뚫려 있다. 이 유리창을 통해 아래를 내려다 봤을때 용이 보이면 소원이 이루어 진다나? 실제로 보면 절벽과 석굴에 부서지는 하얀 파도만 보인다. 이러한 전설 덕분에 오세암과 더불어서 흔히들 말하는 '''기도빨 죽이는 암자'''로 유명하다. 이로 인해 홍련암을 찾는 불자들이 많은데, 낙산사는 관광지로도 유명하기 때문에 불자들이 기도를 하고 있으면 얼른 나오라고 보채는 몰상식한 관광객들[6] 을 만나기도 한다.
5. 교통
- 주차장은 일주문 쪽의 대형 주차장과 의상대 쪽의 소형 주차장이 있으며, 두 곳 모두 유료다. 주차하는 데 돈 쓰기 싫다면 의상대 쪽의 주차장으로 가는 언덕길 아래의 공영주차장을 이용하면 되긴 한데, 언덕길을 걸어서 올라가야 한다. 그래도 크게 힘든 코스는 아니다.
- 800 m 정도 걸어가면 낙산시외버스터미널이 있다. 매표는 바로 옆의 편의점에서 무인발권기로 가능하다. 규모는 무지막지하게 작지만 의외로 노선이 많다.
- 속초고속버스터미널이나 양양고속시외버스터미널에서 속초 버스 9를 타면 낙산시외버스터미널에 갈 수 있다.
6. 기타
- 삼국유사에 수록된 조신의 꿈 이야기의 주요 배경이 바로 이곳, 낙산사이다. 조신은 낙산사 관세음보살상 앞에서 기도했다고 한다. 물론 절이 여러 번 불타 재건하기를 반복했으므로, 조신의 꿈 이야기의 시대배경인 9세기 시절과는 많이 다르다.
- 사찰의 규모도 꽤 큰 편이고, 바닷가에 붙어있기 때문에 경관이 좋아 관동지방 여행의 필수코스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또한 설악산, 동해 해변, 대관령 양때목장과 함께 강원도 수학여행의 목적지로도 유명해서 수학여행 시즌이면 학생들을 가득 태운 관광버스들을 볼 수 있다.
- 홍예문에서 사천왕문으로 가는 길에서는 각계각층에서 식재한 소나무들을 볼 수 있다.
- 원통보전에서 해수관음상으로 가는 길은 원래는 하나뿐이었는데, 나중에 휠체어를 위한 무장애 탐방로가 조성되었다.
- 일주문 쪽 주차장 근처에는 해산물을 판매하는 매장들이 잔뜩 늘어서 있다.
- 인근 관광지로는 낙산해수욕장과 연어로 유명한 남대천이 있다.
- 인근에 동해북부선의 낙산사역이 있었으나 동해북부선이 제진역~감호역 구간을 제외하고 전부 폐선되어 지금은 이용할 수 없다. 역 터는 강현면 정암리 448-2번지에 있다. 다만 직선거리로만 3km가 넘게 떨어져 있기에 걸어서 가긴 많이 힘들 것이다.[7]
[1] 관세음보살을 모신 건물에 붙이는 이름들 중 하나. 관세음보살을 원통대사(圓通大師)라고 부르기도 하기 때문에 원통보전이라고 한다.[2] 강화군 보문사, 남해군 보리암, 낙산사 홍련암[3] 이 날은 마지막 공휴일로 지정된 식목일이기도 하다.[4] 여담으로, 반대로 용암은 의외로 800°C 언저리다.[5] 녹아서 흉측하게 변해버린 동종은 의상기념관에서 전시 중이다.[6] "왜 이렇게 절을 오래 해?"라거나 "거 삼배만 하고 얼른얼른 나와야지!"라며 야유를 퍼붓기도 한다. 낙산사는 관광지이기 전에 사찰인데, 이를 망각한 어이없는 행동이다.[7] 버스를 타면 30분 정도에 주파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