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윤동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최윤동
崔允東'''

'''이명'''
최윤동(崔胤東)·최진(崔震)#
'''생몰'''
1897년 7월 3일 ~ 1965년 5월 1일
'''출생지'''
경상북도 대구군 동상면 남성리
(현 대구광역시 중구 남성로)#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제2 묘역
'''본관'''
경주 최씨[1]#
'''별칭'''
해광(海光)
'''직업'''
독립운동가, 정치인
'''참여단체'''
대동청년당
신간회
1. 개요
2. 생애
3. 여담
4. 선거 이력


1. 개요


대한민국의 전 독립운동가, 정치인이다.

2. 생애


1897년 경상북도 대구군 동상면 남성리(현 대구광역시 중구 남성로)에서 태어났다. 이후 계산동2가로 이주하였다. 1909년 대동청년당을 조직하여 안희제, 이수영(李遂榮), 배천택(裵天澤), 남형우, 김동삼, 김사용, 윤세복, 김홍량 등과 함께 비밀리에 항일투쟁을 벌였다.
1916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윈난무관학교에 입학, 1918년 가을에 졸업하였다. 1919년 3.1 운동 직후, 그해 5월 독립운동에 가담하고자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갔다가 그해 9월 임시정부로부터 길림군정사(吉林軍政司)[2]에 파견되어 군무국장에 취임하였다. 그해 10월경 군자금 모금을 위해 입국하여 이수영 등과 조선 내 부호들로부터 군자금을 모집하려고 모의를 하던 중 체포되어, 약 1개월간 경성부 종로경찰서에 유치되었다가 그해 12월경에 풀려났다.
그후 중국으로 다시 돌아가 신흥무관학교 교관에 취임하였고, 1920년 청산리 대첩김좌진 장군 휘하 지대장으로서 전공을 세웠고, 만주지역에서 최진(崔震)이라는 이름으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다가 대한독립군 의용단 대장으로 활약하였다. 1921년 5월에는 동료 배천택의 권유로 북경에서 개최된 해외 소재 조선인 독립운동단체의 대표자 회의격인 군사통일책진회(軍事統一策進會)에 참석하기도 했다.#
1922년 9월경 귀국하여 경성부 인사동의 이수영 자택에 동지들과 회합하여 군자금 모금에 대한 모의를 계속하다가, 군위군 부계면 대율동의 홍정수(洪禎修)를 목표로 삼아 1923년 12월 3일 홍정수의 자택으로 가던 중 경상북도 칠곡군 동명면 구덕리 송림사 근처에서 일본경찰에 체포되었고, 그해 12월 관련자인 송두환·이수영·노기용·정동석(鄭東錫)·정두규·정두은(鄭斗殷)·정내영·김봉규(金鳳奎) 등과 함께 대구지방법원에 송치되었으며#, 이듬해인 1924년 11월 6일 대구지방법원 형사부에서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폭발물취체벌칙 및 총포화약류 취체령 시행규칙 위반·강도 예비 등의 혐의로 징역 2년 6개월(미결구류 90일 산입)을 선고받아# 대구형무소에 투옥되었다가, 1926년 9월 29일 가출옥하였다.#
[image]
1928년 12월 16일, 모 경찰서 형사과에서 촬영된 사진
출옥한 후 다시 중국으로 망명하여 운남육군강무학교에서 공부하였다. 이후 귀국하였는데, 불명의 사건에 연루되어 1928년 9월 11일 경기도경찰부 유치장에 투옥되었다가, 그해 10월 29일 무사 방면되었으며#, 위 사진처럼 이후 한 차례 더 구류되기도 했다.
신간회 대구지부장으로 활동하는 한편, 1928년 중외일보사 창립에 참여하여# 영업국장, 1929년부터 1931년까지 중외일보사 이사##2를, 1934년 상무를 거쳐# 이후 전무취체역에 취임하기도 했으며, 1939년에는 경북상공주식회사 감사를 맡기도 했다.#
8.15 광복 후에는 우익 정치인으로 들어서서 한국민주당에 입당, 중앙본부 연락부장 및 중앙상무위원 등에 취임하였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국민주당 후보로 경상북도 대구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제헌국회에서 국방·외무위원장을 맡았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국민당 후보로 경상북도 대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무소속 조경규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57년 김준연통일당 창당에 참여하였다.
그 밖에 광복회 회장과 육해공군 출신 청년 의용단 단장 등을 역임했다.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3. 여담


특전사 제3특전여단장으로 재임하면서 12.12 군사반란에 가담하고, 부마민주항쟁5.18 민주화운동을 강경진압한 정치군인 최세창이 그의 아들이다. 아버지는 조선 독립을 위해 일본군과 맞서 싸웠는데, 아들은 아버지가 지키려고 한 민주주의를 희롱하고, 아무 죄도 없는 대다수의 평범한 국민들을 고통받게 만든 정치군인이니 호부견자이다.

4. 선거 이력


연도
선거종류
소속정당
득표수(득표율)
당선여부
비고
1948
제헌 국회의원 선거 (경북 제1선거구(대구시 갑))
한국민주당
'''8,577표 (38.52%)'''
'''당선'''

1950
제2대 국회의원 선거 (경북 제1선거구(대구시 갑))
민주국민당
2,052표 (5.9%)
낙선 (5위)


[1] 관가정공파 21세손 '''동(東)''' 갑(甲) 중(重) 엄(嚴) 항렬.[2] 길림군정서(吉林軍政署)라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