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코타 메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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横田めぐみ(1964.10.5 - 1994?) 북한에선 1994년에 사망했다고 발표했으나, 의문점이 많은 상황이라 일본에선 인정하지 않고 있다.
1. 개요
2. 생존설
3. 요코타 메구미를 납치한 이유
4. 딸 김은경의 존재
5. 음모론
6. 대중매체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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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치되기 전 요코타 메구미의 부모가 찍은 사진.
1977년 11월 15일, 일본 니가타에서 북한 공작원에게 납북납북 일본인. 당시 13세의 여중생이었다. 생존해 있다면 현재 60세. 니가타시 출신. 메구미의 부모인 요코타 시게루와 요코타 사키에는 딸의 실종 후 납북 일본인들의 생환을 위해 수많은 활동을 하게 되었으나, 아버지 시게루는 2020년 6월 5일 결국 생전에 딸을 만나보지 못 하고 세상을 떠났다.
메구미는 하굣길에 실종된 것으로 알려졌으며 당시 일본 경찰은 단순 실종으로 처리하여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의문의 실종 사건으로만 치부되었다. 그러다 1997년 1월 망명한 북한 공작원(으로 주장하는) 안명진으로부터 그녀가 실종이 아닌 납북된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어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1] 안명진의 주장에 따르면 요코타 메구미는 니가타현의 해안가로 끌려 공작선에 태워져 40시간이 넘게 배 안에 감금되었으며, 격렬하게 울부짖고 선실 벽에 손톱을 너무 심하게 긁어대 북한에 도착할 즈음엔 손이 뻘겋게 피로 물들어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기사: "'메구미 목격' 증언한 안명진 구속의 파장"
요코타 메구미를 납치한 건 납북 일본인 피해자 하라 타다아키(原敕晁)를 납치한 '신광수(辛光洙)'[2]이며 "배드민턴부 연습이 끝나고 돌아가는 길에 집 근처 길 모퉁이에서 남자에게 붙잡혀 끌려왔다. 너무 무서웠다"고 요코타 본인이 얘기한 것을 같은 납북 피해자이자 그녀와 북한의 숙소에서 함께 지냈던 소가 히토미(曽我ひとみ)가 증언했다. 요코타 메구미는 소가 히토미와 7개월 가량 평양에서 함께 살다가 1980년부터 84년까지 또 다른 납북 피해자 다구치 야에코(田口八重子)와 함께 살았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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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코타 메구미가 납치된 장소. 오른쪽 표지판 부근에서 공작원에게 납치된 곳으로 추정되고 있다.
납치 직후부터 1986년까지 북한의 초대소(招待所)에서 조선어(북한어)를 배우거나 공작원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치고 북한 문화 주입과 세뇌 교육을 시켰는데, 조선어를 배우면 본국에 돌려보낸다고 꼬드겼으나 그게 거짓 약속임을 깨닫고 좌절해 신경쇠약으로 2차례나 병원에 입원했다. 그녀는 90년대 들어 자주 "일본에 돌아가고 싶다"고 읆조렸고 같은 납북인 하스이케 카오루(蓮池薰)[4]는 "(돌아갈 때까지) 조금 남았으니 참자"고 다독였다고 한다. 그리고 결국 자살을 시도하여 정신이 불안정하니 입원이 필요하다는 판정을 받았고 입원 준비를 하스이케 부부가 도와줬다고 증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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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측에서 공개한 요코타 메구미의 사진.
1986년 8월 한국인 김영남(金英南)[5]과 결혼, 1987년 김은경을 낳았으며 1993년 3월 평양 승호 구역 49 예방원에서 우울증으로 입퇴원을 반복하다 병원에서 목을 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게 북한의 주장이다.
2000년대 초반에 들어와 납북 일본인 문제가 크게 대두되며 일본북한의 외교가 마찰을 빚었고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가 2002년 9월 북일 정상회담을 위해 방북했을 때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면전에서 사실 여부를 확인했다. 김정일은 '''북한의 특수기관들의 조총련계 공작원들이 공모하여 일본인 13명을 납치한 것을 인정, 사과하였다.'''
2000년대 초반 납북 일본인에 대한 문제가 거론되기 훨씬 전에 한국 정보부에서 납북 일본인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일본 정부에 알렸으나 무시당했다는 주장이 있다. 이때 요코타 메구미로 추정되는 일본인 여성에 대해서도 이야기가 있었다고.
미국 측에서도 북한 정권의 잔악성을 상징하는 인물로 알려져 있으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북한 규탄 연설에서도 언급되었다.
그녀의 아버지인 요코타 시게루(1932~2020)와 요코타 사키에는 납치 피해자 모임이라는 단체를 결성하고 대표를 지내기도 했다. 민간단체이긴 하지만 적극적으로 일본 국민에게 지산의 딸 뿐만 아니라 다른 납치 피해자의 상황을 알리고 정치권에 송환요청을 한 결과, 몇몇 피해자는 실제로 일본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의 딸은 아직까지도 못 돌아오고 있는 상황.
그리고 2020년 6월에 요코타 시게루는 87세를 일기로 결국 딸과 재회하지 못하고 노환으로 별세했다. 이 때문에 일본 내에서는 더 시간이 지나기 전에 납치피해자 문제를 해결 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매우 강하게 불고 있다.

2. 생존설


북한은 제3차 북일실무자회의에서 요코타 메구미의 남편으로 알려진 김영남이 평양에서 가져온 요코타 메구미의 유골을 일본 측에 넘겨줬으나, '''DNA 검사 결과 요코타 메구미 본인의 것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다.''' 감식은 테이쿄 대학 법의학 연구실에서 맡았으며 유골에는 복수의 DNA가 검출되었다고 한다.[6]
하지만 1994년까지 그녀를 보았다는 같은 납북 일본인 하스이케 카오루의 증언과 그녀가 입원했다는 49 예방원은 외국인은 들어갈 수 없었다는 찰스 로버트 젱킨스의 증언, 1995년경 김정일의 아들(김정은이나 김정남)에게 일본어를 가르쳤다는 목격담, 요코타 메구미가 화장된 '오봉산 화장소'가 1999년에야 건설됐다는 여타 탈북자들의 증언, 조선로동당의 일본 담당자로부터 요코타 메구미가 2004년 초까지 살아 있었다고 했다는 탈북자 이용수(가명)의 증언, 이 외에 함경남도에 있는 요덕 수용소에 적어도 2003년까지 중년의 일본인 여성이 수용돼 있었다는 다수의 증언으로 적어도 2000년대 초반까지 요코타 메구미가 생존해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북한은 이러한 의문에 1993년 사망했다는 발표를 1994년 4월로 정정하는 행적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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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 입퇴원 대장'이 너무나 허술하게 '사망'으로 수정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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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코타 메구미의 병원 차트 기록. 당시의 연령, 정보와 맞지 않는 부분이 다수 보였다.
북한 공작원이자 18살 때부터 한국에서 간첩 활동을 벌이다 체포당하고 현재 한국에 귀화한 김동식(金東植)의 말에 따르면 공작원 시절 연락부에 있었을 때 카메이(亀井)나, 다나카(田中)라는 이름을 쓰는 일본인 교사가 있었으며 공작원들의 얼굴과 이름 등을 알고있기때문에 일본에 되돌려보내면 북한의 어마어마한 국가 기밀이 노출될 염려가 크다는 이유로 '사망확인서'를 조작하여 죽었다고 거짓말하면서까지 돌려보내지 않고있는 것이라 얘기했다.
이용수씨의 증언 또한 2004년 초 무렵 조선로동당 일본 담당자와 회식할 때 메구미 씨에 관해 '''"알아서는 안 될 것을 너무 많이 알았기 때문에 돌려보내고 싶어도 돌려보낼 수 없다. 실은 살아있다. 그 외에도 납치되어 온 일본 여성 4명[7]은 더 알고 있다"'''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한 술 더 해 2011년 11월 7일 자 주간조선은 2005년 평양 시민의 데이터 중 요코타 메구미와 생년월일과 가족명이 일치하는 여성이 있다고 보도했다. 요코타 메구미는 1994년 사망한 것으로 공표되었기 때문에 논란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대목. 참고 기사: "납북된 메구미 2005년까지는 생존"

3. 요코타 메구미를 납치한 이유


북한일본인을 납치한 이유는 당시 '''한국인과 용모가 비슷하면서 세계 각국으로의 입국이 쉬운 여권을 갖고 있는 일본인으로 위장하여 한국에 잠입하는 것이 꽤 획기적인 방법'''이라 생각하였고, '''공작원에게 일본어를 가르칠 교육관이 필요하여 일본인을 납치한 것'''이라고 2002년 북일정상회담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직접 밝혔다.
다만 교관으로 쓰기 위한 것이라면 13살밖에 안 되는 여중생보다는 좀 더 나이가 있는 대상을 납치하는 것이 효율적이었지 않겠냐는 말도 있는데,[8] 어두울 때 납치를 해서 확인해보니 어린애였지만 도로 풀어줄 수도 없어서 그냥 데리고 올라갔다는 설도 있다. 다 떠나서 한국어/일본어 모두 능통한 조총련계 인사들이 이미 일본에 버젓이 있는 마당에 왜 굳이 국제적 논란까지 자초하며 납치를 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만.(...) 공작원이 마침 지나가던 요코타 메구미에게 자신의 정체가 노출됐다고 여겼기 때문에 그녀를 납치했다는 설도 있다.

4. 딸 김은경의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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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시절 김은경의 사진.
1987년 출생한 요코타 메구미의 딸 김은경[9]은 2002년 이루어진 북일정상회담에서 일본 측 관계자, 요코타 메구미의 부모와 만남을 가졌다. 김은경은 엘리트 코스에 속하는 외국어전문학교를 다니고 있었으며 외모가 어머니 쪽, 특히 외할아버지인 요코타 시게루 씨와 많이 닮아서 그녀가 메구미의 딸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별다른 의문이 없었으며 DNA 조사 또한 요코타의 딸이 맞는 것으로 검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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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요코타 시게루, 사키에의 김은경 면회 직후 열린 기자회견 모습.
김은경은 컴퓨터 관계의 대학원을 졸업하고 취업한 뒤 결혼하여 자녀를 낳았으며 2014년 3월 중순부터 5일간 몽골울란바토르에서 김은경 가족과 요코타의 부모 시게루, 사키에의 면회가 이루어졌다. 요코타 부모의 말에 따르면 김은경은 굉장히 좋은 어머니가 되어 있었고, 아이는 생후 10개월 밖에 되지 않았는데 무려 11kg(...)라는 초우량아였다고 한다. 또한 지금껏 '김은경'이냐, '김혜경'이냐 논란이 있었던 자신의 이름에 대해 '''"저는 처음부터 김은경이었는데, 일본에서는 왜 저를 혜경이라 말하는지 모르겠다"'''고 본인이 스스로 얘기했다고도 한다.
이 면회는 한국일본외교부 직원이 함께 동행하였지만 정치색 없이 그저 손녀를 보러간 외조부와 외조모로서 김은경을 만났으며 높으신 분들도 그에 맞게 상당히 신경을 써주었다고 요코타 부모가 기자회견에서 얘기했다. 대화는 각자 통역사가 붙어서 전달하는 식으로 얘기를 나눴고 묵은 숙소는 4층이 김은경 가족, 3층이 요코타 부모의 방으로 나눠졌다. 김은경 가족에게 그곳의 생활은 어떤지 걱정이 된다고 말하자 가방에서 일본의 사탕을 보여주며 "북한에서는 없는 것이 없습니다. 뭐든지 다 있습니다"라고 김은경의 남편이 대답했다고 한다. 북한이 단단히 관리했겠지만 겉보기에도 상당히 풍족하게 사는 것 같았기에 "일본으로 되돌아오지 못하는 사람들도 적어도 당신 가족 분들 정도로 풍족하게 생활하고 있다면 정말 기쁠 것 같다"고 전했으며 이 얘기는 꽤 민감한 발언이었기에 말한 것을 조금 후회했다고 요코타 사키에는 전했다. 물론 북한 측에도 민감한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김은경은 어머니 요코타 메구미에 대한 얘기 또한 자세히 말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엔 가족끼리 사진을 찍었으나 그 사진은 '''외부에 공개하지 말라는 약속'''이 있었으며 김은경 본인도 사진이 찍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했다. 참고로 이 면회는 2002년 만남 이후 12년 만에 이루어진 재회이며 그 사이 동안 당연하게 김은경과는 어떠한 소식도 주고받지 못했었다고.
알려진 정보에 의하면 김은경은 현재 평양에 거주하며 북한 고위층과 인맥을 형성하고 있다고 한다. 특히 김정은의 여동생 김여정과 각별한 관계이며, 두 사람이 조선로동당의 노조 조직 지도부에서 근무하고 있다는 것이 2012년 한국의 언론을 통해 알려졌다. 다만 순수한 우정이라기보다는 북한 당국이 김여정을 통해 김은경을 감시하고 있는 것 아니냔 설도 있긴 하다. 또 김은경은 후일 일본과의 외교협상 카드로 사용될 가능성도 있다.

5. 음모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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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측에서 공개한 요코타 메구미의 사진은 합성, 위조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첫 번째 사진 상 1번과 2번을 보면 확대시켜 픽셀이 깨져 있는 다른 부분에 비해 새로 덧댄 것 같은 정사각형이 보이는 점과 3번의 구두 부분에 하얀 빛 같은 것이 비춰보인다는 점, 또한 요코타 메구미의 그림자와 나무의 그림자 방향이 다르다는 점 등이다. 2번째 사진은 피사체와 배경이 겹치는 부분에 하얀 테두리 같은 것이 쳐져 있고 결정적으로 '''요코타 메구미가 서 있는 자리만 그림자가 없다.''' 때문에 어떠한 이유에선지 모르지만 피사체에 배경을 따로 합성했다는 의문점이 제기되고 있다.
한편, 일본에서는 김정은의 생모가 사실 고용희가 아닌 요코타 메구미라는 주장이 널리 퍼져있다.(...) 김정은(金正恩)의 '은'자가 일본에서는 '메구미'로 읽히는 지라 요코타 메구미를 뜻하는 게 아니냐는 주장이다. 좀 더 썰을 풀자면 요코타 메구미는 사실 일본 천황 가문의 후손으로 고귀한 혈통의 아내를 바라던 김정일이 납치하여 북으로 데려왔고 고귀한 일본 천황의 혈통을 이어받은 김정은을 낳았으며 그러므로 김정은은 일본에 호의를 가지고 있다는 한 편의 판타지 소설까지 발견될 정도. 소설 참조. 이 충공깽한 얘기는 일본 내에서 상당히 그럴 듯한 썰로 다루어지는 듯하다.
2014년 11월, 한국동아일보에서 '''요코타 메구미는 북한에 의해 약물과다투여로 사실상 타살되었다'''라는 보도가 나와 일본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동아일보는 '''일본 정부가 이미 요코타 메구미의 사망 사실을 알고 있다'''라고 보도하기도 했다. 일본 정부가 은밀히 내각관방소속 납북자 대책위의 기획관과 내각사무관 2명이 납북자 가족 대책위의 최성용씨와 함께 요코타 메구미의 사망 배경을 조사하고 보고서를 작성했다는 것.
일단 일본 정부는 이 보도가 사실무근이라고 부인했으나, 이 보고서의 유출이 일본의 출구 전략이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즉, 이미 요코타 메구미가 사망한 이상 일본 국민들이 받을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한 포석이라는 것. 허나 자칫 잘못하면 아베 신조 총리의 정권 자체가 흔들릴 수 있는 엄청난 파급력을 지닌 사안이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이러한 사태에 대해서 수십 년간 행방이 묘연한 딸을 찾아 헤매던 메구미 양의 부모 요코타 시게루, 사키에는 "자살했다는 북한 측 주장은 거짓이며 그녀의 남편과 딸을 인질로 협박해서 죽은 것처럼 위장하고 비밀 임무에 종사시키고 있다"고 생존설을 주장하고 있으며 요코타 메구미 문제는 현재도 계속 논란 중인 사안이다.

6. 대중매체


  • 니혼 TV 메구미씨의 소원의 재회 (카타세 나나[10], 후쿠다 마유코[11], 2006년 作)
[1] 피랍 주장 후에도 한동안 한국일본의 일부 종북주의자들은 비슷한 시기에 밝혀진 니가타 소녀 감금사건을 들어 메구미도 이런 범죄 피해를 당한 것이지 북한에 납치된 게 절대 아니라고 생떼를 쓰기도 했으나, 김정일이 일본인 납치를 직접 시인하면서 데꿀멍하게 되었다.[2] 1927년 시즈오카 출신의 재일 한국인으로 1950년 조선의용군에 입대해 공작원이 되었다. 일본을 제 집처럼 들락날락 하다가 한국에서 체포당해 사형 판결을 받았으나 한국의 민주화 이후 일본 사민당의 탄원서를 받은 김대중 정부가 1999년 북송함.[3] 단 다구치 야에코와 동거한 건 북한 측 주장이며, 김현희는 자신도 다구치 야에코와 동거했다고 증언했다.[4] 1978년 중학시절 납북. 21세기가 되어서야 일본으로 귀환했다.[5] 최초엔 북한인 '김철준'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1978년 전북 군산 선유도 해안가에서 납북된 고교생 김영남인 것으로 판명났다. 2006년 이산가족상봉에서 부모와 극적으로 재회하였고, 현재 그에 대한 한국 송환 압박도 강해지고 있다.[6] 그러나 감식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유골이 가짜라는 뉘앙스로 일본 언론이 보도했던 것을 들어 실제 진위여부와 상관없이 일본 정부가 처음부터 가짜로 몰고 가려고 했다는 의심이 있다.[7] 이들의 구체적인 정보는 밝히지 않았다.[8] 참고로 요코타의 남편인 한국인 납북자 김영남도 북한에서 한동안 대남 공작원을 통솔하는 교관으로 근무했었다.[9] 예전에는 김혜경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혜경이라는 이름은 아명이고, 현재 이름은 은경이 확실해 보인다.[10] 성인 역[11] 아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