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리 브라운

 

[image]
'''성명'''
로렌스 하비 "래리" 브라운
(Lawrence Harvey "Larry" Brown)
'''생년월일'''
1940년 10월 14일 (84세)
'''국적'''
미국
'''출신지'''
뉴욕주 브루클린
'''출신학교'''
노스 캐롤라이나 대학교
'''신체'''
180cm, 72kg
'''선수 시절 포지션'''
포인트 가드
'''드래프트'''
1963년 드래프트 2라운드
(전체 7번, 볼티모어 불리츠)
'''소속팀'''
뉴올리언스 버커니어스 (1967~1968)
오클랜드 오크스 (1968~1969)
워싱턴 캡스 (1969~1970)
버지니아 스콰이어스 (1970~1971)
덴버 너기츠 (1971~1972)
지도자
노스 캐롤라이나 대학교 어시스턴트 코치 (1965~1967)
데이비슨 칼리지 감독 (1969)
캐롤라이나 쿠거스 감독 (1972~1974)
덴버 너기츠 감독 (1974~1979)
UCLA 감독 (1979~1981)
뉴저지 네츠 감독 (1981~1983)
캔자스 대학교 감독 (1983~1988)
샌안토니오 스퍼스 감독 (1988∼1992)
로스앤젤레스 클리퍼스 감독 (1992∼1993)
인디애나 페이서스 감독 (1993~1997)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감독 (1997~2003)
디트로이트 피스톤즈 감독 (2003~2005)
뉴욕 닉스 감독 (2005~2006)
샬럿 밥캣츠 감독 (2008~2010)
서던 메소디스트 대학교 감독 (2012~2016)
옥실리움 토리노(이탈리아)[1] 감독 (2018)
'''국가대표'''
FIBA 아메리카 챔피언십 감독 (1999, 2003)
아테네 올림픽 미국 국가대표팀 감독 (2004)
'''등번호'''
11번
[image]
'''2004'''
'''2001년 NBA 올해의 감독상'''
닥 리버스

'''래리 브라운'''

릭 칼라일
1. 개요
2. 선수 시절
3. 감독 시절
4. 일화(감독 스타일 포함)
5. 관련 문서


1. 개요


미국의 농구인으로, 역대 NBA 최고의 명장을 논할 때 꼭 빠지지 않는 명장. 1275승 935패의 감독 경력이 있으며, 현재까지 NBA 전, 현직 감독 중 유일하게 감독으로서 NCAA와 NBA에서 모두 우승을 경험했다.

2. 선수 시절


[image]
롱 비치 고등학교와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를 거쳤다. 두 학교를 거치면서 명장으로 현재까지 칭송받고 있는 프랭크 맥과이어와 딘 스미스 밑에서 농구선수를 했다. 1964년에는 도쿄 올림픽의 미국국가대표로 뽑히면서 미국팀의 금메달을 안겨주었다. 원래는 1963년 NBA 드래프트에서 볼티모어 불리츠에 2라운드 7순위에 지명되었지만, 탈락되고 나서 모교인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에서 1965년부터 1967년까지 2년동안 어시스던트 코치를 했다. 본격적인 프로데뷔는 1968년 ABA리그에서부터. 선수시절동안 ABA우승도 경험했고, 올스타전 MVP, 3회 올스타, All-ABA Second Team 선정 등 선수시절이 비교적 평범했던 필 잭슨과는 달리 나름대로 화려한 경력을 자랑했다. 1972년 덴버 로켓츠를 끝으로 은퇴한 후 ABA팀인 캐롤라이나 쿠거스 감독으로 취임한다.

3. 감독 시절


[image]
[image]
ABA 시절 그가 선보인 기상천외한 옷차림들. 물론 1976년 NBA 합병 이후 이러한 것들을 선보이지 않았다.[2]
1969년 여름 오프시즌 동안 아주 잠시 데이비슨 대학교의 지휘봉을 잡았던 브라운은 선수 은퇴 후인 1972년에 ABA팀인 캐롤라이나 쿠거스 감독으로 2년간 팀을 지휘해서 전 시즌에 약팀이었던 팀을 2번 모두 플레이오프에 진출시켰다. 그후 1974년 당시 ABA 소속이었던 덴버 너겟츠를 두시즌동안 60승을 거두게 하면서 플레이오프 진출. 그후 너겟츠가 NBA에 합류한 이후 3시즌더 감독을 맡았다. 저 기간동안 브라운은 ABA 올해의 감독상을 3번이나 수상해 스타 감독이 되었다.
[image]
캔자스 대학교 감독 시절.[3]
1979년 너겟츠 감독직에서 물러난 후 1979년부터 81년까지 UCLA의 감독으로 재직한 후 다시 NBA로 돌아와 2시즌 정도 뉴저지 넷츠의 감독으로 재직하고 다시 대학으로 돌아가 캔자스 대학교를 83년부터 88년까지 지휘하면서 88년에 캔자스 대학교를 NCAA 챔피언에 올려놓았다. 브라운은 이 공로로 네이스미스 올해의 대학감독상을 받았다.
[image]
샌안토니오 스퍼스 감독 시절
88년에는 NBA팀인 샌안토니오 스퍼스의 감독으로 취임해서 4년간 감독생활을 하며 팀을 2번정도 플레이오프에 올려놓았다. 샌안토니오 스퍼스에 있는동안 저 유명한 데이비드 로빈슨을 지도했는데, 그가 있는 내내 성적은 양호했으나 팀 선수들에게 욕설을 하는 등 비매너적인 모습을 보여 비호감 이미지가 되기도 했다.
[image]
인디애나 페이서스 감독 시절.[4]
91-92시즌에 스퍼스 감독에서 중도에 물러나고 같은 시즌에 로스앤젤레스 클리퍼스의 감독으로 취임, 론 하퍼, 대니 매닝, 게리 그랜트를 앞세워 5할승률을 못하던 팀을 단숨에 5할승률로 끌어올려 팀을 플레이오프에 진출시켰고, 92-93시즌에도 팀을 플레이오프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팀 투자에 인색한 구단주 도널드 스털링 때문에 재계약도 못 하고 물러났다.
그 뒤에 허브 시몬스 구단주의 부름을 받아 인디애나 페이서스의 감독으로 취임하여 데틀레프 슈렘프를 시애틀 슈퍼소닉스로 팔고, 데릭 맥키와 안토니오 데이비스 같은 베테랑과 신인을 각각 등용해 레지 밀러릭 스미츠, 데일 데이비스 등 기존 스쿼드를 받쳐주게 하여 최강 전력을 만들었다. 94-95시즌에는 팀을 컨퍼런스 파이널까지 올려서 당시 동부 최강팀이었던 올랜도 매직을 7차전까지 물고 늘어졌지만 아쉽게 파이널 진출에는 실패했다. 96-97시즌에 팀이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지 못한 책임을 지고 사임한 브라운은 97년에 돌파구가 필요했던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의 감독으로 취임한다.
[image]
앨런 아이버슨에게 지시를 내리는 브라운 감독.
[image]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감독 시절.
브라운 감독의 필라델피아 행은 여러모로 뉴스거리가 되었다.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앨런 아이버슨과의 만남이었다. 농구를 대하는 가치관이 완전히 달랐고, 자기 농구관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있었던 이 둘의 만남은 여러모로 사람들의 기대와 우려를 동시에 나타냈다. 브라운 감독은 아이버슨의 플레이에 상당한 흥미를 가지게 되었고, 97-98시즌을 지나고 난후, 브라운 감독은 아이버슨을 슈팅가드로 쓰겠다고 공표했다. 전문가들과 팬들은 그의 결정에 대해 포인트가드로서도 단신인 아이버슨이 슈팅가드로는 무리라며 만류하는 분위기였지만, 브라운은 '''"두고 봐라. 오히려 상대팀이 우리한테 쩔쩔맬거다."''' 라며 자신있는 분위기였다. 그리고 그의 선택은 옳았다. 아이버슨은 자신보다 10cm이상 큰 슈팅가드를 스피드와 드리블로 농락하며 엄청나게 활약했다. 아이버슨의 백코트 파트너로는 키 크고 수비력이 좋은 에릭 스노와 애런 맥키를 1번에 배치하고 수비시에 아이버슨이 상대팀 포인트가드를 막고 스노와 맥키가 상대팀 슈팅가드를 막는 형식으로 나갔다. 98-99시즌 필라델피아는 8년만에 플레이오프에 진출했고, 아이버슨은 그해 득점왕에 올랐다. 그 다음해에도 팀은 컨퍼런스 세미파이널까지 올랐다.
하지만 이때부터 아이버슨과 브라운 감독간의 불화가 생겼다. 아이버슨의 잦은 연습지각 심지어 불참까지 하게 되면서 브라운 감독은 아이버슨에게 불만이 쌓이기 시작했고, 한 인터뷰에서도 '''"당신이 한 회사의 상사인데 맨날 출근시간에 지각하고 때로는 나오지 않는 부하직원이 좋겠습니까?"''' 라며 아이버슨에게 우회적으로 불만을 표시했고, 아이버슨도 지지 않고 맞섰다. 이에 필라델피아가 '''아이버슨을 디트로이트 피스톤스로 트레이드를 시도했다.''' 이 트레이드는 거의 성사단계까지 갔다가 양 팀의 입장차이로 인해서 성사되지는 못했지만, 자신이 필라델피아를 떠날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느낀 아이버슨이 래리 브라운에게 찾아가 사과하면서 달라지겠다고 약속했고, 브라운도 아이버슨을 믿고 다시 함께 하기로 결정한다.
00-01시즌. 필라델피아는 개막 후 10연승을 달리는 등 상승세를 타면서 동부전체 1위를 차지해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아이버슨은 정규시즌 MVP. 브라운 감독은 올해의 감독상을, 애런 맥키는 올해의 식스맨 상을, 디켐베 무톰보는 올해의 수비수상을 수상하는 등 그야말로 경사였다. 플레이오프에서 그야말로 대접전을 벌이면서 파이널에 진출했다. 상대는 파이널전까지 전승으로 올라온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어느 누구도 필라델피아의 우승은커녕 승리도 못 거둘 것이라는 예상을 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1차전에서 예상을 깨고 먼저 1승을 따냈지만 이내 레이커스를 당해내지 못하고 내리 4연패하면서 우승에는 실패한다.
[image]
디트로이트 피스톤즈 감독 시절.
이후 02-03시즌까지 식서스의 감독을 맡았던 브라운은 2003년 디트로이트 피스톤스의 감독으로 취임했다. 이른바 베드 보이스 2기의 탄생. 그리고 2004 NBA 파이널에 팀을 올려놓고 그리고 모두의 예상을 깨고 당시 전당포 라인업으로 구성된 레이커스를 4승1패로 떡실신 시키며, 처음으로 NBA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04-05시즌에도 팀을 파이널에 올려놓았지만 아쉽게도 샌안토니오 스퍼스에 패해 준우승에 머물렀다. 근데 이 시즌 말미에 디트로이트 구단과 브라운 감독간에 마찰이 있었다. 바로 브라운의 건강문제였다. 방광이상으로 플레이오프 기간 동안에도 병원을 계속 다녀야 할 정도였다. 디트로이트 구단은 그의 건강에 의구심을 품었고, 브라운도 마이애미 히트와의 컨퍼런스 결승전부터 자신의 향후거취를 고민하는 등 마음은 편치 못했다. 결국 시즌이 끝나고 브라운 감독은 디트로이트 구단과 결별했고, 그가 떠남으로 해서 배드 보이스 2기는 사실상 해체 수순을 밟았다. 그리고 그의 향후거취가 어떻게 될 것인가 여론이 궁금해 하는 가운데 브라운은 얼마 후 뉴욕 닉스의 감독에 취임해서 모두를 놀라게 했다.
[image]
뉴욕 닉스 감독 시절. 아이재 아 토마스 단장과 함께

뉴욕 닉스는 90년대 후반과 2000년도까지 동부의 강호였지만, 제프 반 건디의 사임이후로 그야말로 나락으로 떨어졌다. 전임 단장이었던 스캇 레이든의 병맛 넘치는 삽질에 팬들은 이미 지쳐버렸고, 당시 단장이었던 아이재아 토마스는 돌파구가 필요했다. 그러다가 실업자가 된 브라운을 보고 그에게 달려가 장시간 대화를 나누었고 브라운 감독은 이를 수락했다. 계약금액은 확실히 밝혀진 건 없었지만 약 5천만 달러에서 6천만 달러 선으로 알려졌다. 브라운 본인은 '''"뉴욕 닉스 감독은 내가 어린 시절부터 꿈꾸던 자리"''' 라며 기쁨을 표시했다. 하지만 그때당시의 뉴욕로스터는 워낙 막장이었고 이건 제아무리 명장인 브라운도 어떻게 할 수 없었다. 도저히 단시간 내에 팀을 정리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또한 팀이 포인트가드였던 스테판 마베리를 비롯한 여러 선수들 간의 불화가 겹쳤고, 여기서 성적도 좋지 않았고 결국 브라운은 한 시즌만에 해고되었다.
[image]
샬럿 밥캣츠 감독 시절.
그리고 잠시 야인모드로 돌아가 있다가 2008년 샬럿 밥캣츠의 구단주이자 자신의 대학후배인 마이클 조던의 요청으로 샬럿 밥캣츠의 감독이 되었다. 밥캣츠는 그의 NBA감독생활에서 9번째 팀이었다. 그릭 부임 2년째 되는 해 팀을 처음으로 5할 승률로 끌어올리고 플레이오프에 진출시켰다. 다만 1라운드에서 너무 힘없이 4전전패를 해 광속 탈락했다. 그러나 다음시즌에는 성적이 좋지 않았다. 28경기 동안 9승 19패로 부진했고, 또 팀 내 선수들인 제랄드 월라스와 스티븐 잭슨과의 불화가 겹치자, 조던 구단주는 성적부진을 이유로 그를 해고했다.
그후 다시 야인모드로 돌아와 쉬고 있다가 위에 언급한 서던 메소디스트 대학농구팀의 감독으로 복귀해서 2014/15 시즌 때 팀을 22년만에 NCAA 전국 토너먼트로 올려놨고, 2015/16 시즌을 마지막으로 잠정 은퇴했다가, 2018년 이탈리아 LBA 팀 옥실리움 토리노 감독을 잠깐 맡았다.

4. 일화(감독 스타일 포함)


감독 스타일은 전형적은 올드스쿨형 감독. 자신의 농구철학을 자신이 맡은 농구팀에 그대로 주입시키는 타입이며 패배에만 젖은 팀을 다시 일으키는 재주를 지닌다. 그리고 늘 단기간에 성적을 뽑기보다는 자신이 맡은 팀에 있는 로스터를 굴려보고 필요한 선수는 그대로 두고, 자신의 농구철학에 맞지 않는 선수는 트레이드시켜서 자신이 원하는 선수를 데려온다. 물론 단기간에 하위팀을 플레이오프에 올려놓는 재주도 있다. 91-92시즌만 하더라도 시즌 중에 샌안토니오 감독직에서 물러났다가 같은 시즌에 클리퍼스 감독을 맡아서 선수파악도 제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서 팀을 플레이오프에 올려놓는 걸 보면 보통 비범한 사람은 아닌 듯. 단 뉴욕 닉스 감독 시절은 본인에게는 흑역사일지도. 애초에 브라운 감독은 단기간에 팀 성적을 끌어올리는 것보다는 단계를 밟아가면서 팀 성적은 천천히 끌어올리는 타입이다 보니, 단기간의 성적향상을 기대하는 뉴욕 닉스에게는 어쩌면 안 맞는 감독이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당시 뉴욕 닉스의 로스터 상태가 워낙 막장이라 브라운 감독이라도 무리였을지 모른다. 스퍼스 때 행보에서 보듯 본인의 성격이 감정적이라 일이 안 풀리면 선수들에게 온갖 욕설을 하는 등 비매너스런 모습을 보였기에 팀에 오래 있는 때가 많지 않았다.
마이클 조던의 등장과 3점슛 제도를 통해 득세한 스윙맨 중심시대에도 전통적인 팀플레이를 바탕으로 한 스윙 오펜스를 구사하는 감독이다. 그래서 그의 로스터에는 항상 앨런 아이버슨, 레지 밀러, 리차드 해밀턴같은 뛰어난 득점원과 그를 보좌하는 가드진 시스템이 확립되어있었으며 이를 중심으로 끝없이 볼을 돌리며 오픈 찬스를 만들고 돌리는 협력플레이로 한번의 찬스를 만들어 공격하고 수비하는데 능한 감독이다. 가장 특이한 것은 1번의 활용인데, 래리 브라운 시스템에서 1번은 항상 리그 평균 1번들보다 크고 힘이 센 선수를 중용하며, 언제든지 탑에서 포스트업으로 상대 1번을 등짝으로 밀고 들어가 공간을 잡아먹고 다른 슈터의 이동 경로를 확보하는 역할을 한다. 보통의 1번에게 지시하는 볼핸들러, 컨트롤 타워, 패서, 심지어 현시대 픽앤롤 중심 오펜스에선 주득점원까지 맡는 역할이 아니라 팀 공격의 윤활유나 미끼 등 팀플레이어로서의 활용을 강조하는 편.
이를 비유하자면, 풍차 돌리기라고 할 수 있다. 스윙 오펜스의 기본 세팅은 포인트가드가 최대한 상대 코트 가운데까지 밀고 들어가 버티면서 공간을 확보하고, 주 득점원인 슈터들은 포인트가드를 중심으로 베이스라인과 골밑 주변을 빙빙 돌면서 오프 더 볼 무브로 찬스를 잡아서 슛을 날리고, 빅맨은 슈터를 지원하도록 스크린을 걸어주는 기본적인 움직임에서 오펜스를 확장해나간다.
선수시절 포인트가드를 해서인지 포인트가드 포지션의 선수들에게 엄하고, 또한 혹독하게 조련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시스템상 보통의 농구스타일과 확연하게 다른 포인트가드 운영을 하기 때문에 그만큼 적응하기도 어렵다. 인디애나 감독 시절에 마크 잭슨은 그래도 어느정도 숙성되어있었고, 래리 브라운의 스타일에 원래도 잘 들어맞는 가드였던지 딱히 크게 터치는 하지 않았던듯. 그래도 필라델피아 시절에 에릭 스노나 애런 맥키를 성장시키고 디트로이트 시절에는 단지 득점력만 준수했던 듀얼가드에 불과했던 천시 빌럽스를 리그에 수준급 포인트가드로 성장시켰다. 그 결과 천시 빌럽스는 04년 파이널 MVP를 거머쥐었다.
샬럿 밥캣츠의 레이먼트 펠튼이나 D.J 어거스틴은 애초부터 마크 잭슨, 천시 빌럽스 급의 떡대를 갖추지 못한데다 그들의 보조를 받아 득점해줄 해결사 부재를 끝내 극복하지 못하고 보통의 롤플레이어로 끝나고 만다.
앨런 아이버슨과는 애증의 관계. 또는 엄격한 호랑이 선생님과 반항기 넘치는 그렇지만 재능은 출중한 불량학생 관계정도. 브라운은 아이버슨을 처음부터 안 좋게 본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플레이를 보면서 굉장한 흥미를 느꼈던 모양. 아이버슨의 공식 다큐멘터리인 '''The Answer'''에서도 브라운은 아이버슨을 '''"재능은 있는데 플레이할 줄은 모르는군."''' 이라고 평했다. 그로서는 아이버슨을 꼭 제대로 된 선수로 키우고 싶은 욕망이 강했던 듯 하다. 이 둘의 관계과 가장 좋았던 건 00-01시즌. 아이버슨이 2001년 올스타전 MVP를 수상한 후 인터뷰에서 가장 먼저 했던 말은 '''"Where is My Coach"'''였다.동영상 링크[5]
그 후 두 사람은 한 프로그램에 동반출연했는데, 이때 브라운이 아이버슨에 대해 좋은 말을 건네자 아이버슨이 눈물을 흘리는 짠한 장면도 있었다.동영상 링크[6] 후에 브라운 감독과 결별한 후 아이버슨은 그를 훌륭한 감독이라고 말했고, 그때 브라운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고 발언한 바 있다. 브라운 감독도 한 인터뷰에서 "가끔은 의자에 앉아서 아이버슨이 하고 싶은 대로 놔둬야 할 때도 있다." 라고 한 바 있다. 아이버슨이 무적상태로 갈 곳이 없을 때 앨런을 다시 데려와서 가르치고 싶다고 발언한 것을 보면 브라운도 아이버슨에 대한 애정을 많이 가지고 있는 듯 하다.
반면 스테판 마베리와는 물과 기름같은 관계. 이미 아테네 올림픽에서 같이 있는 동안에 둘은 설전을 벌인 적도 있다. 브라운이 뉴욕 닉스에 감독으로 왔을 때 가장 우려되었던 부분이 바로 스테판 마베리와의 갈등 때문이었다. 실제로 마베리는 브라운 감독에게 "나도 아이버슨처럼 공격하고 싶으니 시켜달라"고 요청했을 때 브라운 감독은 "이 세상에 아이버슨처럼 플레이할 수 있는 건 아이버슨밖에 없다. 넌 안된다."라고 그의 의견을 묵살했고, 마베리는 삐쳤는지 어쨌는지는 몰라도 그 후부터 커리어에 내리막을 탔다.
레지 밀러와는 비교적 잘 지냈다. 사실 위에 두 사람과 달리 코트 위에서의 성격은 불 같았지만, 래리 브라운의 지시에는 고분고분 따라주었다. [7] 물론 가끔씩 충돌도 있었지만 그건 어느 직장에 상사나 부하직원이 가질 수 있는 흔한 의견충돌 수준이었고 결코 그 이상 넘어가지 않았다. 레지 밀러의 마지막 경기인 2005년 컨퍼런스 세미파이널 6차전 때 경기가 거의 끝나갈 무렵에 작전타임을 불러서 밀러의 마지막 경기를 아쉬워하면서 그에게 경의를 표한 사람은 바로 브라운 감독이었고, 경기가 끝난 후 밀러가 가장 먼저 찾아가 포옹한 사람도 브라운 감독이었다.
사실 밀러는 불같은 성격과 별개로 감독의 권위를 잘 인정하는 보수적인 스타일이다. 실제로 그는 아이재아 토마스처럼 잠깐이라도 본인을 감독한 사람과 같이 패널로 출연하면, 본인과 나이 차이가 별로 나지 않음에도 (4살) "감독님 (Coach)"라고 부를때가 많다. 미국에선 어느 정도 친분이 있거나 비슷한 위치면 그냥 말을 놓는데도 저렇게 하는 것. 밀러는 조던과도 주먹다짐을 하고, 스파이크 리나 존 스탁스한테도 공격적으로 트래쉬토킹을 하는 만만찮은 성깔의 소유자였지만, 결코 감독한테 대드는 법은 없는 올드스쿨 성격의 소유자였다.(스파이크 리는 본인보다 8살이나 연장자였지만 밀러는 나중에 사이가 좋아졌을때도 그를 결코 윗사람으로 대하지 않았다. 미국은 한국처럼 무조건 나이로 서열을 매기지 않고 본인과의 위치에 따라 서열을 정립하는데, 밀러 입장에서 그냥 팬인 리를 윗사람 취급할 이유가 없는 것. 물론 미국에서도 나이가 넘사벽으로 많으면 어르신 대접은 해주지만, 한국처럼 무조건 나이 많으면 형님 대접은 안 한다.) 오히려 아이버슨의 경우 싸운 적이 커리어 통틀어 손에 꼽을 정도로 성격이 과격하지 않고 올스타전 때는 나서서 친목질할 정도로 다정한 편인데, 자기를 엄격하게 통제하는 권위적인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기질의 선수라 충돌이 있었던 것. 이는 마베리도 마찬가지였다. 여하튼 이런 상황에서 보수적인 밀러가 본인이 능력도, 경력도 인정하는데다 까마득한 업계 선배인 브라운 감독에게 대들리가 없는 것.
참고로 래리 브라운의 형인 허브 브라운도 농구인인데, 래리가 '04년 우승을 해낸 디트로이트 피스톤스 감독일 당시, 허브 브라운은 헤드 어시스턴트 코치였기에 형제가 함께 팀 운영을 이끌었다.
2002년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5. 관련 문서


[1] 2019년 파산으로 해체됨.[2] 신생리그였던 ABA와 달리 NBA는 상당히 보수적이다. 젊은 시절 자유분방했던 필 잭슨은 80년대 초에 시카고 불스에 어시스턴트 코치로 취직할 기회가 있었는데, 면접 때 북실북실한 수염을 달고 갔다가 당장 탈락했다. 이후 잭슨은 CBA에서 감독생활 후 농구를 접을까하는 고민을 하던 차에(잭슨의 CBA생활은 우승도 하는 등 매우 성공적이었지만 미국 하위리그에서 대접은 처참하다) 불스가 다시 부르자, 이번에는 깔끔하게 콧수염만 남기고 면접보러 가 취업에 성공했다. 이후 팬들에게 잘 알다시피 잭슨은 콧수염에 정장차림을 계속 유지하는데, 젊었을때 히피였다는게 믿기지 않을 정도.[3] 같이 있는 선수는 88년 캔자스 대학교 우승 주역이자, 89년 NBA 드래프트 전체 1위로 로스앤젤레스 클리퍼스에 입단해 15년 현역으로 활동하여 올스타 2회 식스맨 어워드 1회를 차지하고, 은퇴한 뒤 2008년 모교 캔자스 대학교의 어시스턴트 코치로 일하면서 우승을 경험한 뒤, 2015년 현재는 ACC의 웨이크 포레스트 대학교 감독으로 있는 포워드 대니 매닝이다.[4] 같이 있는 선수는 마크 잭슨 前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 감독이다. 잭슨의 선수시절에 대해서는 아래 문단 참조.[5] 이를 두고 전 필라델피아의 사장이었고 직접 앨런 아이버슨을 지명했던 팻 크로스는 ''''"마치 영화 록키에서 록키가 에이드리안을 부른 것과 같다."''' 라고 말했다.[6] 해당 프로그램은 ESPN의 Quite Frankly라는 토크쇼인데 두 사람이 동반 출연한건 아니고 브라운 감독이 아이버슨보다 먼저 출연했다. 아이버슨의 인터뷰 도중에 아이버슨이 래리 브라운은 훌륭한 감독님이라고 말하자 사회자가 브라운이 한 얘기를 들어보자며 자료화면을 보여주었는데 여기에서 브라운은 '''"아이버슨은 매일 밤 열정적으로 뛴다. 그리고 늘 승리하기위해 노력한다. 물론 가끔 실수도 하지만 그걸 이겨내고 그는 지금의 자리에 올 수 있었다."'''라고 말했고, 아이버슨은 눈물을 흘렸다.[7] 이 점은 마베리나 아이버슨과는 달리 밀러가 올드스쿨 타입의 슈팅가드였던 점이 크다. 마이클 조던 이후 득점과 리딩, 리바운드 가담까지 골고루 하는 올라운드형 슈팅가드들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했지만 이전까지는 외곽에서 화력을 지원하는 비교적 제한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실제로 조던 이전까지 MVP를 탄 슈팅가드는 단 한명도 없었다. 65년생인 밀러는 화려한 개인기를 자제하고 볼소유를 최소화하면서 스크린을 타고 나와 캐치 앤 슈팅을 하는 올드스쿨 스타일의 플레이에 익숙한 선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