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시 빌럽스
[clearfix]
1. 소개
NBA의 전 농구선수. 커리어 동안 수많은 이적을 하면서 저니맨 시절부터 정상의 자리, 경험 많은 조연까지 온갖 위치를 다 경험해본 베테랑 가드. 별명은 Mr. Big Shot.
2. 플레이스타일
패스를 하지 않고도 리딩을 하는 선수[4]
리그에서 가장 특이한 1번 중 하나다. 시야가 엄청나 킬 패스를 날리는 선수가 아니며, 이타적이나 슛을 아끼는 선수는 아니며 즉흥적으로 팀 오펜스를 조율하는 것을 즐기는 편도 아니다. 이 선수의 특징은, 다른 뛰어난 1번과는 달리 '자신의 손으로 어시스트를 뿌리지 않아도 공만 잘 돌면 상관없다'는 마인드에 있다. 때문에 팀의 패스가 잘 돌아가면 굳이 직접 쥐고 흔들기보다는 3:3을 통해 컷인이나 오프 더 볼 무브로 어시스트를 받아 슛을 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때문에 빌럽스 개인의 장점은 오히려 팀 공격이 삐걱거릴 때 발휘된다. 특히 상대 포인트 가드에 비해 좋은 덩치를 이용한 포스트업이 일품이었고, 능숙한 파울유도와 90%에 가까운 자유투 성공률의 시너지가 매우 뛰어났다. 자유투를 뜯어내는 속칭 '자삥' 능력도 상당했다. 선수의 최전성기였던 디트로이트, 덴버 2시즌 동안은 FTr 48%를 기록한 적도 있었다.
패스를 찔러줄 팀메이트가 없을때는 과감한 외곽 슛을 잘 날렸는데, 중요한 순간에 족족 들어가는 모습을 보여줘 '미스터 빅샷' 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특히 2003~04 파이널에서 전당포 LA 레이커스를 상대할 때 극대화되었다. 게리 페이튼을 사이즈로 압도하고 코비 브라이언트가 팀의 주 공격수 리차드 해밀턴을 밀착마크하는 틈을 잘 이용해 빈 공간에서 결정적인 슛과 패스로 농락하는 보이지 않는 리딩으로 팀의 우승을 이끌었다. 수비력도 디펜시브 팀에 들어갈 만큼 강력했고 개성 강한 팀원들을 조율하는 리더십도 갖추고 있다.
이 때문에 빌럽스는 1번이 직접 공을 들고 전권을 쥐는 오펜스보다는 모션 오펜스, 스윙 오펜스 등 팀 오펜스의 틀이 잡혀 있을 때 부품으로 더 유용하고, 또한 그것이 통하지 않을 때 1:1로 해결을 보는 해결사로서 뛰어난 재능을 가진 선수이다. 쉽게 말하면, 한국농구의 이상민이 보여주는 리딩과 비슷하다. 좀 더 슈팅이 업그레이드된 이상민. 이 때문에 탑의 1번 푸쉬를 절대적으로 중요시하는 래리 브라운식 스윙 오펜스와 아주 궁합이 잘 맞는 선수였고, 결국 브라운은 빌럽스를 중심으로 우승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부상에 시달리면서 발이 느려지거나 슛이 부정확해지는 등 어쩔 수 없는 기량 저하가 진행 중인데, 특히 전 소속 팀이었던 클리퍼스는 피스톤즈만큼 꽉 짜인 오펜스를 구사하지 않는 팀이라 그의 장점을 희생하고 슈터로만 활용하다시피 했는데 전성기 때처럼 클러치 타임 때 자신이 쏘는 스타일을 바꾸지 않았기 때문에 비난을 받기도 했다.
3. 커리어
3.1. 떠돌이 신인 시절
천시 빌럽스는 콜로라도 덴버에서 태어났다. 조지 워싱턴 고등학교 재학중 93년에서 95년까지 세번 연속으로 Mr. Colorado Basketball 지위를 차지할 정도로 전도유망한 모습을 보여줬고 콜로라도 대학교에 진학한 뒤에도 대학농구판에서 1학년때는 평균 17.9점, 2학년때는 19.1점을 기록하면서 NBA에서도 좋은 재목이 될 수 있을거라는 예상을 받으며 1997년 드래프트에 참가한다.
[image]
97년 드래프트 1순위는 100% 웨이크포레스트의 팀 던컨으로 확정되어 있었고, 샌안토니오 스퍼스가 1픽을 차지하면서 던컨을 데려간다. 이어서 뉴저지 네츠에서 유타 대학교의 키스 밴 혼을 지명한다. 상위픽 2개가 3픽과 6픽이 되며 던컨을 놓친 보스턴 셀틱스가 3순위로 빌럽스를 지명하면서 빌럽스는 셀틱스에서 NBA 리거생활을 시작한다. 뛰어난 유망주였지만 프로의 벽은 높았던걸까, 빌럽스는 평균 11득점 정도와 4할이 안되는 필드골 성공률이라는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며 보스턴의 기대를 충족시켜주지 못했고, 루키시즌 도중에 당시 감독 릭 피티노에게 항명했다가 찍혀서 토론토 랩터스의 노장 포인트 가드 케니 앤더슨과 트레이드되는 굴욕을 당한다.
99년 1월 고향팀인 덴버 너기츠로 이적했지만 여기서도 특별한 활약은 없었다. 1년이 지나고 2000년 2월 1일 올랜도 매직으로 또다시 트레이드됐으나 어깨 부상으로 잔여 시즌 동안 한게임도 뛰지 않았다. 이때까지의 빌럽스는 어정쩡한 트위너에 불과했으며 실패한 로터리 픽 선수로 평가받고 있었다. 그리고 빌럽스는 2000년 8월에 미네소타 팀버울브스와 계약한다.
3.2. 미네소타 팀버울브스
[image]
케빈 가넷이 한창 고생하고 있던 당시 미네소타에는 올스타 출신 포인트 가드인 테럴 브랜든이 있었기 때문에 빌럽스는 여전히 벤치멤버로 뛰어야 했다. 그래도 브랜든은 빌럽스의 좋은 멘토가 되어주었고, 빌럽스는 많은것을 배워나가며 처음으로 잠깐이나마 플레이오프에서 뛰어보기도 한다. 그리고 다음 시즌, 빌럽스에게 기회가 찾아온다. 테럴 브랜든이 2002년 2월 치명적인 무릎 부상을 당해 시즌 아웃된 것.
테럴 브랜든은 이 부상 이후 코트에 돌아오지 못하고 은퇴하게 되며, 빌럽스는 남은 시즌 동안 주전 포인트 가드로 뛰기 시작하면서 두각을 보이기 시작한다. 플레이오프에서 댈러스 매버릭스와 만나 0-3으로 스윕당하기는 했지만[5] 평균 22득점을 올리는 기염을 토하며 포텐셜이 터지기 시작한다. 2002년 플레이오프가 끝나고 빌럽스는 FA로 풀려났고 샐러리캡 때문에 그를 잡을 수 없었던 미네소타를 떠난다.
3.3. 디트로이트 피스톤즈
빌럽스에게 눈독을 들인 건 조 듀마스 단장 취임 후 개혁의 길을 걷고 있던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였다. 포인트 가드 포지션의 강화를 원했던 디트로이트는 미드 레벨 익셉션을 사용해 6년 $35M로 빌럽스와 계약하며, 원래 등번호인 4번은 조 듀마스의 영구결번이라 1번을 달고 뛰게 된다. 수비왕 센터인 벤 월러스가 있던 팀에 빌럽스와 리처드 해밀턴, 드래프트 23픽 테이션 프린스등이 합류하면서 디트로이트는 독특한 색깔의 강팀이 된다.
빌럽스는 스타팅 포인트 가드로 뛰면서 드디어 제대로 실력 발휘를 하게 된다. 2003년 플레이오프에서 뉴저지 네츠에게 스윕당한 후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에서 떠난 래리 브라운 감독을 영입하고 03-04 시즌 중반에 라쉬드 월러스까지 받으면서 이른바 '배드 보이즈 2기'가 완성된다. 1기들처럼 험악한 플레이를 했던 건 아니고, 원조 배드 보이즈를 추억하던 한국 팬들이 붙여준 별명. 천시는 평균 16.9 득점 5.7 어시스트 3.5 리바운드를 찍으며 디트로이트를 동부 3위로 이끌었으며, 플레이오프에서 밀워키 벅스, 뉴저지 네츠, 인디애나 페이서스를 차례로 격파한다.
[image]
2004 NBA 파이널의 상대는 샤킬 오닐과 코비 브라이언트 듀오에 우승반지를 위해 칼 말론과 게리 페이튼이 합류한 전당포 레이커스. 많은 사람들이 LA 레이커스의 우승을 점쳤지만 디트로이트의 조직력은 레이커스를 꽁꽁 묶었으며, 빌럽스는 늙은 페이튼을 압도하면서 클러치 타임에 빅샷을 꽂아넣으며 평균 21.0득점 5.2 어시스트의 활약을 해 레이커스를 4-1로 침몰시키며 2004 NBA 파이널 MVP를 차지한다.
이듬해에도 배드 보이즈 2기는 승승장구하며 동부의 패자가 되었고, 2년 연속 파이널에 진출하게 된다. 파이널에서 만난 상대는 드래프트 동기 팀 던컨이 리더로 있는 샌안토니오 스퍼스. 디트로이트는 배드 보이즈 1기처럼 험악한 수비를 펼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에 못지 않은 끈끈함을 가진 팀이었고, 악명 높던 브루스 보웬이 있던 샌안토니오 스퍼스의 수비는 그야말로 험악했다. 양팀은 극악의 수비대결을 펼친 끝에 3-4로 아쉽게 챔피언 자리를 넘겨주고 말았다. 한편 당시 방송국과 NBA총재 (디트로이트, 샌안토니오를 제외한 전 북미 시청자 포함)는 극수비팀끼리의 파이널 경기로 시청률 저하를 우려했는데, 실제로 역대 최저급의 파이널 시청률을 기록했다.[6] 이후에도 빌럽스는 올스타, NBA 디펜스 팀, 올 NBA 팀 등을 계속 차지하면서 디트로이트의 리더로서 팀을 적어도 컨퍼런스 파이널까지는 견인했지만, 디트로이트는 주축멤버들이 나이가 들면서 조금씩 힘이 빠져갔고 천시는 리빌딩을 위해 덴버 너기츠의 앨런 아이버슨과 트레이드되면서 고향팀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디트로이트 피스톤즈는 빌럽스와 쉬드가 빠진 자리를 벤 고든이나 찰리 빌리누에바 같은 선수로 채웠다가 이들이 망하면서 나락 테크를 타게 된다.
3.4. 덴버 너기츠 2기
[image]
30대가 된 빌럽스는 다시 한번 덴버에서 뛰게 되었다. 풋내기였을 때하고는 달리 이 때의 빌럽스는 노련하고 실력 있는 가드였고, 덴버의 에이스였던 카멜로 앤써니를 보좌하면서 팀내 젊은 선수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주었다. 팀도 54승 28패라는 좋은 성적을 냈으며 뉴올리언스 호네츠와 댈러스 매버릭스를 격파하며 컨퍼런스 파이널까지 진출해 코비 브라이언트와 파우 가솔의 LA 레이커스와 만나 탈락. 덤으로 이 시즌에 빌럽스는 스포츠맨십상도 받았다. 너겟츠는 NBA 입성 이후 1978년과 1985년 그리고 2009년 딱 3번 컨퍼런스 파이널에 진출했는데 그 중 하나를 홈보이 빌럽스가 달성한 것이다. 본인에겐 여러 감정이 드는 순간이었을 듯.
09-10 시즌에 빌럽스는 적지 않은 나이임에도 시즌 평균 커리어 하이 득점인 19.5점을 찍으며 건재함을 과시했으나 감독 조지 칼이 암 수술을 받으면서 뒤숭숭해져서였는지 플레이오프에서는 유타 재즈에게 덜미를 잡히며 1라운드에서 탈락했다. 그리고 그 다음 시즌, 빌럽스는 덴버에서 커리어를 끝내고 싶어했지만 팀을 떠난다는 루머가 돌고 있던 멜로와 함께 뉴욕-미네소타-덴버 간 3각 트레이드에 들어가면서 뉴욕 닉스으로 가게 된다.
3.5. 수난의 황혼기
[image]
계약 기간이 끝나는 해 잔여 시즌 동안 빌럽스는 뉴욕에서 뛰었지만, 슬슬 전성기가 지나고 있음에도 앤써니나 아마레 스타더마이어 같은 강력한 공격수들에게 양보하지 않고 슛을 쏘는 그는 조금씩 까이기 시작했고 보스턴과의 플레이오프 1라운드 1차전에서 무릎부상을 당하고 플레이오프 아웃을 당했다. 그래도 1년 정도는 뉴욕과 더 같이 가나 했지만, 뉴욕은 좋은 수비형 센터 타이슨 챈들러을 영입하기 위해 사면 룰로 빌럽스를 방출시켜버렸다. 이에 빌럽스는 크게 분노했다고.
[image]
2011년 12월, 빌럽스는 LA 클리퍼스와 계약한다. 클리퍼스의 1번은 리그 최고의 포인트 가드인 크리스 폴이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슈팅 가드로서 뛰게 되었다. $2M이라는 연봉으로 실력 대비 최고급 효율이었으나 맞지 않는 포지션과 떨어진 기량, 여전한 슛욕심으로 고전하면서 욕을 먹다 이듬해 2월 아킬레스건 파열이라는 큰 부상을 당하고 시즌 아웃당한다. 1년 재계약한 12-13 시즌에는 이런 저런 자잘한 부상으로 자유투를 제외하면 커리어 로우급 시즌을 보냈다. 유일한 낙이라면 새로 창설된 '올해의 동료상'을 수상했다는 것 정도?
클리퍼스에서 떠난 빌럽스는 2년 $5M로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와 계약, 영광의 순간을 함께했던 팀에서 말년을 보내게 되었다. 그러나 이미 제대로 코트에 서기도 힘든 몸이 되었기 때문에 13-14 시즌이 끝난 직후에 디트로이트가 팀 옵션을 사용하지 않으면서 방출,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와 워크아웃을 가졌으나 별 성과가 없었던 건지 2014년 9월에 그대로 은퇴를 선언하면서 17년간의 NBA 선수 생활을 마쳤다.
빅벤에 이어 2016년 2월 10일 영구결번식을 가졌다.
4. 선수 은퇴 이후
2020년 10월 16일, 타이론 루가 로스앤젤레스 클리퍼스 감독으로 취임하면서 래리 드류와 함께 어시스턴트 코치로 합류했다. 그전에는 주로 단장직 등 구단 프런트에 합류하고 싶어하였으나[7] 여의치 않자 코칭 스태프쪽으로 노선을 변경한 것으로 보인다.
5. 여담
- 스포츠에 천적 관계가 있듯이 천시 빌럽스는 마이클 조던, 코비 브라이언트, 르브론 제임스의 천적이었다. 조던, 브라이언트, 제임스는 빌럽스만 만나면 약한 모습을 보였고, 빌럽스는 현역 시절 이들 3명의 슈퍼스타를 이긴 유일한 선수로 남게 됐다. #[8]
- 마이클 조던 vs 빌럽스 10전 4승 6패
- 르브론 제임스 vs 빌럽스 39전 17승 22패
- 코비 브라이언트 vs 빌럽스 46전 21승 25패
6. 관련 문서
[1] 공식 신장이며 맨발 신장.[2] 2011년 로스앤젤레스 클리퍼스 입단 당시[3] 나중에 피스톤스로 들어온 레지 잭슨에게 자신의 1번 져지를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해 줬다.[4] 본문의 주어는 베노 우드리히라는 가드지만, 천시 빌럽스가 똑같은 방식으로 더 잘한다고 보면 된다.[5] 2002년까지는 플레이오프 1라운드는 5전제였다.[6] 물론 수비팀이라서만 그런건 아니고 디트로이트 피스톤즈, 샌안토니오 스퍼스는 둘 다 스몰마켓이고 비인기 팀이라 인기가 많을수가 없는 시리즈였다. 2000년대 초반 밀워키 벅스는 화끈한 공격팀이었음에도 스몰마켓이라 인기가 없었다. 게다가 중계측면에서는 중부지방이 끼면 서부보다 2시간 빠르고, 동부보다 한 시간 느리기 때문에 중간에 낀 애매한 시간으로 미국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동부와 서부 시청자들을 많이 놓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시청률 측면에서 가장 유리한 것은 서부 해안의 팀과 동부 해안의 팀이 맞붙는 것, 두 팀이 인기팀이기까지 하면 금상첨화다.[7] 실제 오프시즌 한때 디트로이트 피스톤스 부단장으로 선임될 것이라는 예측도 있었다.[8] 물론 이런 건 재미로만 보는 거지, 서로 직접 막지도 않는 선수들에겐 아무 의미로 없다. 예를 들어 조던의 경우 개인 기록은 조던이 평균 25.1점 7.1리바운드 3.5어시스트 2.1스틸 1.1블럭, 빌럽스가 13.3점 3.1리바운드 4어시스트 0.8스틸 0.1블럭으로 비교도 안 되며, 특히 초반 빌럽스의 보스턴 시절 첫 두 경기는 그가 17분, 14분 밖에 안 뛰었다. 다른 선수들과도 마찬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