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키 스팀보트
1. 프로필
2. 소개
전 WWE, NWA, WCW 소속의 프로레슬러. 브렛 하트에 앞서 인기를 끌었던 체구 작은 슈퍼스타로, 브렛 하트의 공식 신장인 185cm보다 작은 178cm다. 브렛 하트는 인터뷰에서 리키 스팀보트와 마초맨 랜디 새비지가 작은 체구의 선수들이 활약할 수 있게 기회를 만들어준 인물들로, 깊이 존경한다고 밝혔다.
현역 시절에 리키 스팀보트의 경기를 프로레슬링이 아닌 서커스라고 폄하하는 부류들도 있었다. 21세기에도 WWE 밖의 경기들을 서커스 혹은 프로레슬링이 아니라며 폄하하는 부류들을 비판할 때 데이브 멜처는 리키 스팀보트의 사례를 들며 프로레슬링의 진화는 변화에서 온다고 말했다.
릭 플레어는 리키 스팀보트가 경기력, 신체 능력, 인성 모두 훌륭하다면서 프로레슬링 역사상 최고의 선역으로 꼽았다. 릭 플레어는 인터뷰에서 자신이 가졌던 최고의 대립으로 리키 스팀보트와의 퓨드를 언급하곤 한다.[3]
3. 커리어
본명은 리처드 헨리 블러드로, 미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1978년에는 보디빌딩 대회에서 우승할 정도로 보디빌딩에 열심이었고, 아마추어 레슬링에서도 두각을 드러냈다. 그러다 번 가니에의 훈련을 받고 AWA에서 본명인 릭 블러드로 프로레슬링에 데뷔했다. 그러나 에디 그레이엄의 권유로 다소 악역같은 이름의 릭 블러드가 아닌 리키 스팀보트[4] 를 링네임으로 사용했다. 그리고 NWA에서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전반까지 본인처럼 떠오르는 유망주였던 릭 플레어와의 라이벌리를 구축한다.
1985년, WWF에 데뷔할 때 어머니의 혈통 덕에 동양인 같은 외모를 가지고 있어 무술가 기믹의 '''더 드래곤'''이란 별칭을 얻었다. 그리고 미스터 푸지[5] 나 허큘리즈, 제이크 더 스네이크 로버츠 등과 대립하다가 마초맨 랜디 새비지와 WWF 레슬매니아 3에서 WWF 인터컨티넨탈 챔피언십 매치를 가져 '''명경기를 만들며''' 조지 "디 애니멀" 스틸의 도움으로 승리해 인터컨티넨탈 챔피언이 된다. 역대 최초로 레슬매니아에서 인터컨티넨탈 챔피언이 바뀌었으며, 당일 메인 이벤트인 헐크 호건 대 앙드레 더 자이언트를 뛰어넘는 평가를 받았다.[6]
그렉 "더 해머" 발렌타인에게 패배해 WWF 인터컨티넨탈 타이틀을 잃은 뒤 NWA-WCW로 돌아가 NWA 월드 헤비웨이트 챔피언에 등극하지만 1989년 한 해만 활동한 후 신일본 프로레슬링을 거쳐 다시 WWF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시 WCW로 가서 1994년에 은퇴했다. 릭 플레어와의 라이벌리를 다시금 불태운 1989년에는 5성 경기를 세 번 만든 한편 레슬링 옵저버 뉴스레터 선정 1989년 올해의 경기 1위~3위를 독식했다. 그 과정에서 1989년 4월 2일엔 NWA-WCW 클래쉬 오브 챔피언스 6 : 레이징 카준에서 릭 플레어를 더블 암 치킨 윙으로 항복시켜 그때 기준으로 '''유일하게 릭 플레어를 항복시킨 사나이'''라는 영예도 거머쥐었다. WWE 선정 죽기 전에 꼭 봐야할 경기 100선 4위에 이름을 올렸으며, 레슬링 옵저버 뉴스레터 선정 1989년 올해의 경기다.
후에 도미니언 2017에서 케니 오메가 대 오카다 카즈치카의 경기에 데이브 멜처가 6.25성을 준 뒤 1989년 3월 18일에 메릴랜드에서 NWA가 개최한 하우스쇼에서 있었던 리키 스팀보트 대 릭 플레어는 5.5성~6성을 받아야된다고 언급했다. 그리고 케이지매치넷에서는 데이브 멜처가 6성을 줬다고 등록하면서 리키 스팀보트와 릭 플레어가 역사상 최초로 데이브 멜처 기준 5성 만점을 초과한 경기를 만든 것으로 기록되었다. 또 데이브 멜처는 이 6성 경기를 언급하는 동시에 1989년 3월 27일에 필라델피아에서 NWA가 개최한 하우스쇼에서 있었던 리키 스팀보트 대 릭 플레어는 9일 전보다는 못했지만 그래도 훌륭한 경기였다며 4.75성을 주면서 릭 플레어와 리키 스팀보트의 라이벌리가 전설적인 퓨드임을 다시금 입증했다.
ROH에선 오만한 CM 펑크의 멘토를 맡은 이후 2005년에 다시 WWE로 복귀한다. 2009년에 WWE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한편[7] WWE 레슬매니아 25에서 크리스 제리코와 맞서 싸우는 레전드 프로레슬러 중 한 명으로 등장해 50이 훌쩍 넘은 나이에 공중기까지 시전했으며, 지미 스누카와 로디 파이퍼가 초반에 제거되면서 사실상 1:1로 크리스 제리코를 상대해 분전했다. WWE 백 래쉬(2009)에서는 크리스 제리코와 1:1로 10분이 넘는 경기를 소화했다. 이 시기 하우스쇼에서도 경기 상대로 나섰던 크리스 제리코는 인터뷰에서 리키 스팀보트가 웬만한 현역 프로레슬러 85%보다 경기력이 뛰어나다며 존경심을 표했다.
2010년에 뇌출혈로 쓰러진 후 80% 정도까지 회복했지만 기존처럼 링 위에서 WWE의 산하단체 선수들을 상대로 낙법을 취하는 대신 링 밖에서 조언을 하며 가르친다. FCW가 NXT로 개편된 후엔 RAW와 스맥다운의 프로듀서로 근무한다.
4. 둘러보기
[1] 아들은 리키 스팀보트 주니어로, 리키 스팀보트가 NWA에서 활동할 때 어린 아들에게 드래곤 동물 옷을 입히고 부인과 함께 등장한 적 있다. 한때 여러 인디 단체에서 활동하다가 리치 스팀보트란 링네임으로 NXT에서 활약했지만, 부상으로인한 수술 때문에 활동이 더 이상 불가능해졌다.[2] 2003년에 1년 계약을 맺고 WWE에서 활동한 울티모 드래곤이 본인의 테마곡으로 쓴 적 있다. 2009년에 리키 스팀보트가 크리스 제리코를 상대하기 위해 잠시 WWE의 링에서 활동할 때 현역 시절의 테마곡 대신 이 곡을 사용했다.[3] 보통 NWA에서 있었던 리키 스팀보트 vs 릭 플레어 2연전 경기나 WWE 레슬매니아 3에서 있었던 리키 스팀보트 vs 랜디 새비지 경기는 1980년대 최고의 경기로 꼽을 만한 명경기들이다.[4] 하와이 프로레슬러인 새미 스팀보트와 흡사하게 생겨서 붙은 이름[5] 훗날 요코주나의 매니저가 되는 프로레슬러[6] WWE선정 죽기 전에 꼭 봐야할 경기 100선 3위이자 레슬링 옵저버 뉴스레터 선정 '''1987년 올해의 경기'''다. 헐크 호건 vs 앙드레 더 자이언트의 경기에서 헐크 호건이 앙드레 더 자이언트를 바디슬램으로 링에 메치는 장면은 역사적인 장면으로 회자되지만 데이브 멜처가 이 경기에 마이너스 4성을 줬을 정도로 전체적인 경기를 보면 좋은 평은 안 나오는 편이다. 레슬매니아 3 뒤풀이 때 있었던 일을 리키 스팀보트가 회고하길, WWF 인터컨티넨탈 챔피언십 경기를 뛴 두 선수에겐 축하 인사가 끊이질 않았지만 헐크 호건 쪽 자리엔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7] 헌액자는 평생의 라이벌이었던 릭 플레어였다.[★] A B 밑줄이 우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