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하르트 조르게
Richard Sorge/Рихард Зорге
(1895년 10월 4일~1944년 11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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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 대전에서는 독일 제국군 병사로, 제2차 세계 대전에선 소련군 소속으로 활약한 독일계 러시아인 스파이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 제국에서 스파이 활동을 벌여 소련이 승전국이 되는 데 기여하였다.
리하르트 조르게는 당시 러시아 제국의 영토였던, 현재 아제르바이잔의 바쿠 근처인 사분치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독일인 유전 기술자였고, 어머니는 러시아인이었다. 아버지는 캅카스 석유회사에 고용된 기술자였으나, 계약이 해지되어 독일 제국의 베를린으로 돌아왔다. 리하르트 조르게의 친조부의 형제였던 프리드리히 조르게는 공산주의 이론가인 카를 마르크스의 동지였으며 제1인터네셔널의 총서기이자 미국 마르크스주의운동의 시초격인 인물이었다.
1914년 10월, 리하르트 조르게는 제1차 세계 대전에 학도자원병으로 참전하였다. 그는 서부전선에 파견되어 크게 부상당했는데, 손가락 세 개를 잃고 평생 다리를 절게 되었다. 그는 상병으로 진급해 철십자 훈장을 받았지만, 이러한 부상 때문에 제대를 했다. 그는 부상 회복 기간 동안 마르크스의 서적을 읽고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그는 나머지 전쟁기간 중에 베를린, 킬, 함부르크에 있는 대학교에서 경제학을 공부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농업과 포병술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1919년에 리하르트 조르게는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교사로 일하면서 독일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 활동 때문에 직업을 잃고, 모스크바로 가서 코민테른의 요원이 되었다.
리하르트 조르게는 소련에 의해 첩보요원으로 선발되어 신문기자로 신분을 위장하고 유럽의 여러 나라에 파견되었다. 그는 1920년부터 1924년까지 독일에서 머물렀는데, 1921년에 그는 옛 스승 알베르트 게어라흐의 아내였던 크리스티네와 결혼을 했다. 이후 여러 공작에 가담하였고, 1924년 모스크바로 돌아와서 소련의 첩보기관인 국가정치부에서 정보분석자로 일했다. 그는 일 때문에 가정을 돌보지 않아서 이혼하게 된다.
1929년에 리하르트 조르게는 소련군의 제4국 (GRU, 군사정보국)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이후 죽을 때까지 이 부서의 요원으로 일했다. 그는 이 해에 영국으로 파견되어 정보를 수집하였다. 다시 독일로 가서 좌익활동에 연루되지 말고 나치당에 가입하라는 지령을 받고 이에 따랐다. 그는 신분을 위장하기 위해 농업신문인 도이체 게트라이드차이퉁(Deutsche Getreide-Zeitung)에 기자로 취직하였다.
1930년에 리하르트 조르게는 중국의 상하이로 가서 정보수집과 혁명공작을 하였다. 공식적으로 그는 한 독일의 통신사의 편집인과 프랑크푸르터 차이퉁의 특파원의 직함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서 그는 저명한 좌익 저널리스트인 아그네스 스메들리를 만나서 그녀와 잠시 사귀었으며, 그녀는 리하르트 조르게에게 일본 기자들을 소개하였다. 그는 일본 기자인 오자키 호츠미를 포섭하여 정보원으로 삼았다. 그는 농업전문가로 행세하여 중국 각지를 여행하면서, 당시 장제스의 대대적인 탄압을 피해서 지하로 숨어 있던 중국공산당의 당원들과 접촉할 수 있었다. 1932년에 그는 일본군과 중국군이 싸운 제1차 상하이 사변을 취재하였고, 이 해 12월에 모스크바로 소환되었다.
소련 정보당국은 리하르트 조르게에게 일본으로 가서 첩보망을 구성하도록 명령했다. 그리하여 조르게는 일단 독일로 돌아가서 철저한 나치스로 위장하고, 새로운 신문사에 들어갔다. 특히 취중에 신분을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서 좋아하던 술까지 끊었다.
1933년 9월 6일, 리하르트 조르게는 요코하마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그는 일본인과 외국인, 그리고 사업가와 신문기자 등으로 구성된 첩보망을 조직하였다. 그의 요원들은 일본의 저명한 정치가들과 접촉하여 일본의 대외정책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였다. 그는 공식적으로 나치의 열렬한 지지자로 위장했기 때문에 주일 독일대사관에 쉽게 접근할 수 있었고, 그곳에서도 고급 정보를 수집할 수 있었다. 그는 독일 대사였던 오이겐 오트(Eugen Ott)[2] 와 매우 친밀했고, 오트의 아내와도 내연의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러나 첩보활동에 따른 스트레스 때문에 그는 폭음하기 시작했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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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자키 호츠미(尾崎秀実)
조르게를 적극적으로 도와준 인물로 고노에 후미마로 내각의 외무부에서 일하던 오자키 호츠미가 있다. 공산당원 휴우노 아라오의 영향을 받은 호츠미는 중국의 좌익 작가인 샤엔이나 루쉰과 교류를 했던 전력이 있다. 호츠미는 중국에서 조르게를 만났고 그의 주선으로 모스크바로 가 중국 난징 정부의 동향에 대한 레포트를 제출했다. 그리고 미국 공산당 소속으로 상하이에 있던 태평양 노동조합 서기국에 파견되어 만철 산하의 운송업체에 들어가 첩보활동을 벌였다. 주로 관동군의 동향을 파악했다.
리하르트 조르게는 이러한 첩보망을 통해 독일-이탈리아-일본의 방공 협정, 독일-일본 협약, 진주만 공격의 정보를 빼내 소련에 전달했다. 특히 1941년엔 일본 주재 독일 무관에게서 정보를 빼내, 독일의 소련 침공계획인 바르바로사 작전의 정확한 개시 일자[4] 를 전달했으나, 이오시프 스탈린은 이를 무시하여 소련군의 대패를 초래하였다.
소련은 서쪽을 침공한 나치 독일에 발맞추어 동맹국인 일본 제국도 아시아 쪽에서 협공할 것을 우려했다. 그러던 1941년 9월 14일에 리하르트 조르게는 일본군의 동향을 전달하였는데, 독일군이 모스크바를 함락시키기 전까지 일본군은 소련을 공격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대신에 일본군은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남방으로 향한다는 정보를 전달하였다. 이 첩보에 근거하여 소련군은 일본 관동군에 맞서 극동에 배치된 정예부대들을 빼내서[5] 동부전선으로 돌렸고, 이 병력은 모스크바 공방전에 투입되어 동부전선에서 소련군이 독일군을 패퇴시키는 데 공헌하였다.[6] 바르바로사 작전 정보와 더불어 리하르트 조르게의 활동 중 가장 유명한 사례이다.
일본 제국이 전시국면으로 치달을수록 리하르트 조르게가 첩보활동을 벌이는 것은 매우 위험해졌다. 그러나 전쟁은 중대국면으로 치닫고 있었기 때문에 조르게는 첩보활동을 계속했다. 소련에서 쓰이던 1회용 암호표에 의한 무선량이 대폭 늘어났기 때문에 일본의 방첩기관(특별고등경찰)은 이를 인지했고 엄중한 감시를 하고 있었다. 조르게의 요원이었던 오자키 호츠미는 1941년 10월 14일에 먼저 체포되었고, 리하르트 조르게는 10월 18일에 도쿄에서 체포되었다.
독일대사인 오이겐 오토는 이를 듣고 놀랐다. 리하르트 조르게는 소련을 위한 첩보활동을 하면서 일부 정보를 독일대사관 측에도 제공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이겐 오토는 조르게의 체포를 일본의 과민반응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처음에 일본 제국은 조르게를 해외방첩청(Abwehr)의 요원으로 생각하고 있었으나 첩보국은 이를 부인했다. 뿐만 아니라 리하르트 조르게는 고문에도 불구하고 소련과의 연관을 부정했고, 소련도 조르게를 자국의 요원이라고 인정하지 않았다.
일본 제국은 리하르트 조르게를 소련에서 붙잡힌 일본 간첩과 교환하려고 하였으나, 소련은 조르게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아 성사되지 않았다. 리하르트 조르게는 스가모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1944년 11월 7일에 교수형으로 스가모에서 처형되었다. 그의 요원이었던 오자키 호츠미는 그보다 조금 이른 시간에 처형되었다.[7] 리하르트 조르게는 일단 스가모 형무소 내의 묘원에 묻혔다가 도쿄의 타마 공동묘지로 이장되었다. 그의 일본인 연인이었던 이시이 하나코는 그녀가 살아있던 2000년까지 계속 리하르트 조르게의 묘를 찾았다.
1961년에 리하르트 조르게의 활약상을 각색한 영화 《Qui êtes-vous, Monsieur Sorge?》 (조르게씨, 당신은 누구요?)가 프랑스, 서독, 이탈리아, 일본 합작으로 만들어졌다. 이 영화는 소련에서도 개봉되어 인기를 끌었고, 영화를 관람한 소련 공산당 서기장 니키타 흐루쇼프는 첩보기관이었던 국가보안위원회(KGB)에게 이 영화가 사실에 근거한 것이냐고 물었다. 리하르트 조르게가 실존 인물임을 확인한 니키타 흐루쇼프는 1964년 조르게에게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수여했고, 조르게가 공식적으로 자국요원임을 인정하였다. 또한 리하르트 조르게의 일본인 연인 이시이 하나코에게 연금을 주었다. 한편 주일본 소련 대사는 부임 후 그의 묘소를 찾는 것이 관례였고, 소련이 붕괴된 후에 러시아 대사도 마찬가지로 그의 묘소를 찾는다.
앨빈 토플러는 '권력이동'에서 리하르트 조르게를 언급하면서, 조르게는 숙련된 프로 스파이었지만, 앞으로의 사회는 숙련된 프로 스파이 1인을 길러내는 방식 보다는, 비숙련 아마추어 스파이들의 대량투입을 통해 정보를 대량으로 입수하고, 이를 국가기관인 정보부에서 가공하는 방식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산업혁명 이전의 숙련된 수공업자의 방식이 아니라 산업화된 공장의 대량생산 방식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는 중국에 의해 매우 효과적이라는 것이 증명되고 말있다.
동독에서도 파시스트 체제에 대항했던 리하르트 조르게를 높이 평가하여 그의 전기가 발표되고 기념우표를 발행하는 등의 기념사업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일본과 폴란드에서는 그를 다룬 만화가 출판되었다.
2003년에는 일본에서는 그의 인생을 다룬 '스파이 조르게'라는 영화가 만들어졌다. 주연은 이언 글렌.[8] 일본 뉴웨이브 영화를 이끌었던 거장 시노다 마사히로가 만들어 기술적인 완성도는 높으나, 전반적으로 지루하다는 평이 대다수. 2020년 시점에서는 시노다 마사히로의 마지막 영화기도 하다. 성우 츠다 켄지로가 무명 시절 단역으로 출연했다고 한다.
이외에도 그를 소재로 다룬 여러 권의 책이 출간되었다. 데즈카 오사무 역시 아돌프에게 고한다가 리하르트 조르게를 그려보고 싶어서 시작한 작품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런데 등장분량은 잘 해야 조연 수준이다. 게다가 리하르트 조르게의 암호명인 스파이 '람제이' 이야기 역시 중요한 듯하지만 별로 안 중요한 떡밥으로 끝난다.
블랙 불릿의 등장인물들 중 한 명인 안드레이 리트빈체프를 비유할 때도 리하르트 조르게의 이름이 언급되는 경우가 있을 정도로 큰 인지도를 가지고 있다.[스포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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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키 하야오의 바람이 분다에서는 조르게를 모티브로 한 '카스토프'라는 단역 캐릭터가 등장한다.[9] 독일인으로 호텔에서 주인공을 만나 일본과 독일의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발언을 하는데 며칠 후 경찰에게 쫓기게 되며 주인공도 엮여서 봉변을 당할 뻔 한다.
위의 이력에서 보듯이 여성편력이 대단했는데, 이는 이언 플레밍의 제임스 본드에 계승되었다는 평가가 있다. 전상으로 손가락을 잃고, 다리를 절었음에도 불구하고 위장신분이 언론인이었을 정도로 말빨이 좋고, 박사까지 딸 정도로 지성인에다가, 장신에 미남이었기 때문에[10] 여자를 유혹하는 데는 그다지 어려움을 겪지 않았던 듯.
호이4의 라 레지스탕스 DLC가 나온 이후 소련 간첩으로 등장한다.
(1895년 10월 4일~1944년 11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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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코드네임 Ramsay."나는 1차대전에 아버지 조국을 위해 목숨바쳐 싸웠지만 나는 내 어머니 조국을 더 사랑하기 때문에 일말의 후회도 없다."
- 체포 당시 명언[1]
제1차 세계 대전에서는 독일 제국군 병사로, 제2차 세계 대전에선 소련군 소속으로 활약한 독일계 러시아인 스파이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 제국에서 스파이 활동을 벌여 소련이 승전국이 되는 데 기여하였다.
2. 유년기
리하르트 조르게는 당시 러시아 제국의 영토였던, 현재 아제르바이잔의 바쿠 근처인 사분치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독일인 유전 기술자였고, 어머니는 러시아인이었다. 아버지는 캅카스 석유회사에 고용된 기술자였으나, 계약이 해지되어 독일 제국의 베를린으로 돌아왔다. 리하르트 조르게의 친조부의 형제였던 프리드리히 조르게는 공산주의 이론가인 카를 마르크스의 동지였으며 제1인터네셔널의 총서기이자 미국 마르크스주의운동의 시초격인 인물이었다.
1914년 10월, 리하르트 조르게는 제1차 세계 대전에 학도자원병으로 참전하였다. 그는 서부전선에 파견되어 크게 부상당했는데, 손가락 세 개를 잃고 평생 다리를 절게 되었다. 그는 상병으로 진급해 철십자 훈장을 받았지만, 이러한 부상 때문에 제대를 했다. 그는 부상 회복 기간 동안 마르크스의 서적을 읽고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그는 나머지 전쟁기간 중에 베를린, 킬, 함부르크에 있는 대학교에서 경제학을 공부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농업과 포병술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1919년에 리하르트 조르게는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교사로 일하면서 독일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 활동 때문에 직업을 잃고, 모스크바로 가서 코민테른의 요원이 되었다.
3. 간첩이 되다
리하르트 조르게는 소련에 의해 첩보요원으로 선발되어 신문기자로 신분을 위장하고 유럽의 여러 나라에 파견되었다. 그는 1920년부터 1924년까지 독일에서 머물렀는데, 1921년에 그는 옛 스승 알베르트 게어라흐의 아내였던 크리스티네와 결혼을 했다. 이후 여러 공작에 가담하였고, 1924년 모스크바로 돌아와서 소련의 첩보기관인 국가정치부에서 정보분석자로 일했다. 그는 일 때문에 가정을 돌보지 않아서 이혼하게 된다.
1929년에 리하르트 조르게는 소련군의 제4국 (GRU, 군사정보국)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이후 죽을 때까지 이 부서의 요원으로 일했다. 그는 이 해에 영국으로 파견되어 정보를 수집하였다. 다시 독일로 가서 좌익활동에 연루되지 말고 나치당에 가입하라는 지령을 받고 이에 따랐다. 그는 신분을 위장하기 위해 농업신문인 도이체 게트라이드차이퉁(Deutsche Getreide-Zeitung)에 기자로 취직하였다.
1930년에 리하르트 조르게는 중국의 상하이로 가서 정보수집과 혁명공작을 하였다. 공식적으로 그는 한 독일의 통신사의 편집인과 프랑크푸르터 차이퉁의 특파원의 직함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서 그는 저명한 좌익 저널리스트인 아그네스 스메들리를 만나서 그녀와 잠시 사귀었으며, 그녀는 리하르트 조르게에게 일본 기자들을 소개하였다. 그는 일본 기자인 오자키 호츠미를 포섭하여 정보원으로 삼았다. 그는 농업전문가로 행세하여 중국 각지를 여행하면서, 당시 장제스의 대대적인 탄압을 피해서 지하로 숨어 있던 중국공산당의 당원들과 접촉할 수 있었다. 1932년에 그는 일본군과 중국군이 싸운 제1차 상하이 사변을 취재하였고, 이 해 12월에 모스크바로 소환되었다.
4. 대일본 첩보활동
소련 정보당국은 리하르트 조르게에게 일본으로 가서 첩보망을 구성하도록 명령했다. 그리하여 조르게는 일단 독일로 돌아가서 철저한 나치스로 위장하고, 새로운 신문사에 들어갔다. 특히 취중에 신분을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서 좋아하던 술까지 끊었다.
1933년 9월 6일, 리하르트 조르게는 요코하마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그는 일본인과 외국인, 그리고 사업가와 신문기자 등으로 구성된 첩보망을 조직하였다. 그의 요원들은 일본의 저명한 정치가들과 접촉하여 일본의 대외정책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였다. 그는 공식적으로 나치의 열렬한 지지자로 위장했기 때문에 주일 독일대사관에 쉽게 접근할 수 있었고, 그곳에서도 고급 정보를 수집할 수 있었다. 그는 독일 대사였던 오이겐 오트(Eugen Ott)[2] 와 매우 친밀했고, 오트의 아내와도 내연의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러나 첩보활동에 따른 스트레스 때문에 그는 폭음하기 시작했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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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자키 호츠미(尾崎秀実)
조르게를 적극적으로 도와준 인물로 고노에 후미마로 내각의 외무부에서 일하던 오자키 호츠미가 있다. 공산당원 휴우노 아라오의 영향을 받은 호츠미는 중국의 좌익 작가인 샤엔이나 루쉰과 교류를 했던 전력이 있다. 호츠미는 중국에서 조르게를 만났고 그의 주선으로 모스크바로 가 중국 난징 정부의 동향에 대한 레포트를 제출했다. 그리고 미국 공산당 소속으로 상하이에 있던 태평양 노동조합 서기국에 파견되어 만철 산하의 운송업체에 들어가 첩보활동을 벌였다. 주로 관동군의 동향을 파악했다.
리하르트 조르게는 이러한 첩보망을 통해 독일-이탈리아-일본의 방공 협정, 독일-일본 협약, 진주만 공격의 정보를 빼내 소련에 전달했다. 특히 1941년엔 일본 주재 독일 무관에게서 정보를 빼내, 독일의 소련 침공계획인 바르바로사 작전의 정확한 개시 일자[4] 를 전달했으나, 이오시프 스탈린은 이를 무시하여 소련군의 대패를 초래하였다.
소련은 서쪽을 침공한 나치 독일에 발맞추어 동맹국인 일본 제국도 아시아 쪽에서 협공할 것을 우려했다. 그러던 1941년 9월 14일에 리하르트 조르게는 일본군의 동향을 전달하였는데, 독일군이 모스크바를 함락시키기 전까지 일본군은 소련을 공격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대신에 일본군은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남방으로 향한다는 정보를 전달하였다. 이 첩보에 근거하여 소련군은 일본 관동군에 맞서 극동에 배치된 정예부대들을 빼내서[5] 동부전선으로 돌렸고, 이 병력은 모스크바 공방전에 투입되어 동부전선에서 소련군이 독일군을 패퇴시키는 데 공헌하였다.[6] 바르바로사 작전 정보와 더불어 리하르트 조르게의 활동 중 가장 유명한 사례이다.
5. 처형
일본 제국이 전시국면으로 치달을수록 리하르트 조르게가 첩보활동을 벌이는 것은 매우 위험해졌다. 그러나 전쟁은 중대국면으로 치닫고 있었기 때문에 조르게는 첩보활동을 계속했다. 소련에서 쓰이던 1회용 암호표에 의한 무선량이 대폭 늘어났기 때문에 일본의 방첩기관(특별고등경찰)은 이를 인지했고 엄중한 감시를 하고 있었다. 조르게의 요원이었던 오자키 호츠미는 1941년 10월 14일에 먼저 체포되었고, 리하르트 조르게는 10월 18일에 도쿄에서 체포되었다.
독일대사인 오이겐 오토는 이를 듣고 놀랐다. 리하르트 조르게는 소련을 위한 첩보활동을 하면서 일부 정보를 독일대사관 측에도 제공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이겐 오토는 조르게의 체포를 일본의 과민반응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처음에 일본 제국은 조르게를 해외방첩청(Abwehr)의 요원으로 생각하고 있었으나 첩보국은 이를 부인했다. 뿐만 아니라 리하르트 조르게는 고문에도 불구하고 소련과의 연관을 부정했고, 소련도 조르게를 자국의 요원이라고 인정하지 않았다.
일본 제국은 리하르트 조르게를 소련에서 붙잡힌 일본 간첩과 교환하려고 하였으나, 소련은 조르게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아 성사되지 않았다. 리하르트 조르게는 스가모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1944년 11월 7일에 교수형으로 스가모에서 처형되었다. 그의 요원이었던 오자키 호츠미는 그보다 조금 이른 시간에 처형되었다.[7] 리하르트 조르게는 일단 스가모 형무소 내의 묘원에 묻혔다가 도쿄의 타마 공동묘지로 이장되었다. 그의 일본인 연인이었던 이시이 하나코는 그녀가 살아있던 2000년까지 계속 리하르트 조르게의 묘를 찾았다.
6. 사후
1961년에 리하르트 조르게의 활약상을 각색한 영화 《Qui êtes-vous, Monsieur Sorge?》 (조르게씨, 당신은 누구요?)가 프랑스, 서독, 이탈리아, 일본 합작으로 만들어졌다. 이 영화는 소련에서도 개봉되어 인기를 끌었고, 영화를 관람한 소련 공산당 서기장 니키타 흐루쇼프는 첩보기관이었던 국가보안위원회(KGB)에게 이 영화가 사실에 근거한 것이냐고 물었다. 리하르트 조르게가 실존 인물임을 확인한 니키타 흐루쇼프는 1964년 조르게에게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수여했고, 조르게가 공식적으로 자국요원임을 인정하였다. 또한 리하르트 조르게의 일본인 연인 이시이 하나코에게 연금을 주었다. 한편 주일본 소련 대사는 부임 후 그의 묘소를 찾는 것이 관례였고, 소련이 붕괴된 후에 러시아 대사도 마찬가지로 그의 묘소를 찾는다.
7. 평가
"내 평생 그보다 위대한 인간은 만나보지 못했다." (요시카와 마쓰사다, 조르게를 기소한 일본검사)
"조르게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첩보원이다." (톰 클랜시, 미국의 첩보소설 작가)
"눈부신 첩보활동이 만들어낼 수 있는 결정적인 사례이다." (더글러스 맥아더, 미국의 육군 원수)
말할것도 없이 스파이계의 전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남자. 그가 해온 공작들이 소련에게 얼마나 많은 도움이 되었는지 생각해보면, 정말로 1명이 할 수 있는 일 중에서 가장 많은 일을 한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수준이다."스탈린의 제임스 본드" (르 피가로, 프랑스의 주요일간지)
앨빈 토플러는 '권력이동'에서 리하르트 조르게를 언급하면서, 조르게는 숙련된 프로 스파이었지만, 앞으로의 사회는 숙련된 프로 스파이 1인을 길러내는 방식 보다는, 비숙련 아마추어 스파이들의 대량투입을 통해 정보를 대량으로 입수하고, 이를 국가기관인 정보부에서 가공하는 방식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산업혁명 이전의 숙련된 수공업자의 방식이 아니라 산업화된 공장의 대량생산 방식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는 중국에 의해 매우 효과적이라는 것이 증명되고 말있다.
8. 기타
동독에서도 파시스트 체제에 대항했던 리하르트 조르게를 높이 평가하여 그의 전기가 발표되고 기념우표를 발행하는 등의 기념사업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일본과 폴란드에서는 그를 다룬 만화가 출판되었다.
2003년에는 일본에서는 그의 인생을 다룬 '스파이 조르게'라는 영화가 만들어졌다. 주연은 이언 글렌.[8] 일본 뉴웨이브 영화를 이끌었던 거장 시노다 마사히로가 만들어 기술적인 완성도는 높으나, 전반적으로 지루하다는 평이 대다수. 2020년 시점에서는 시노다 마사히로의 마지막 영화기도 하다. 성우 츠다 켄지로가 무명 시절 단역으로 출연했다고 한다.
이외에도 그를 소재로 다룬 여러 권의 책이 출간되었다. 데즈카 오사무 역시 아돌프에게 고한다가 리하르트 조르게를 그려보고 싶어서 시작한 작품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런데 등장분량은 잘 해야 조연 수준이다. 게다가 리하르트 조르게의 암호명인 스파이 '람제이' 이야기 역시 중요한 듯하지만 별로 안 중요한 떡밥으로 끝난다.
블랙 불릿의 등장인물들 중 한 명인 안드레이 리트빈체프를 비유할 때도 리하르트 조르게의 이름이 언급되는 경우가 있을 정도로 큰 인지도를 가지고 있다.[스포일러]
[image]
미야자키 하야오의 바람이 분다에서는 조르게를 모티브로 한 '카스토프'라는 단역 캐릭터가 등장한다.[9] 독일인으로 호텔에서 주인공을 만나 일본과 독일의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발언을 하는데 며칠 후 경찰에게 쫓기게 되며 주인공도 엮여서 봉변을 당할 뻔 한다.
위의 이력에서 보듯이 여성편력이 대단했는데, 이는 이언 플레밍의 제임스 본드에 계승되었다는 평가가 있다. 전상으로 손가락을 잃고, 다리를 절었음에도 불구하고 위장신분이 언론인이었을 정도로 말빨이 좋고, 박사까지 딸 정도로 지성인에다가, 장신에 미남이었기 때문에[10] 여자를 유혹하는 데는 그다지 어려움을 겪지 않았던 듯.
호이4의 라 레지스탕스 DLC가 나온 이후 소련 간첩으로 등장한다.
[1] 조국을 뜻하는 말로 많이 쓰이는 표현이 독어로는 Vaterland로 아버지가 들어가고 러시아어로는 Родина로 어머니가 들어가는 말이다. 리하르트 조르게는 '''진짜로''' 독일인 아버지와 러시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조르게의 증조부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친구 사이였다. '''두 개의 조국'''이라는 개념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소련이 민족주의적, 패권주의적 성향을 강하게 드러내기 이전까지의 공산주의자들에게 아주 중요한 관념이었다. 실제 자신이 태어난 나라가 민족적 조국이라면 소련은 계급과 사상의 조국이고, 따라서 소련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것이 매국행위가 아니라는 것이다. 2차 세계대전 이전(독-소 불가침조약 이전)의 소련은 명목상 '민족 집단과 영토의 제약을 받지 않는 국가'로 여겨졌고, 소련의 국체 역시 명목상으로는 자유로운 주권을 가진 소비에트 공화국들의 연합체였다. 결국, 범 세계적 혁명을 통해 모든 나라를 소비에트 공화국으로 재편한다면, 이 형제 소비에트 공화국들이 하나의 연합체를 이룸으로써 영구적인 평화를 이룩할 수 있다는 것이 당시 공산주의자들의 꿈이었다. 그러나 이 꿈은...[2] 오이겐은 1938년부터 1942년까지 주일 독일 대사를 역임했다.[3] 조르게는 술과 여자를 매우 좋아했다. 그는 두번째 부인과 도쿄에서 살면서 러시아에 있는 첫번째 아내에게 자주 연애편지를 썼다. 술은 종류를 가리지 않고 좋아하여 같이 도쿄서 근무하던 독일인 동료들에게 충격을 주기도 했다.[4] 1941년 6월 22일, 혹은 그보다 앞선 6월 20일로 전달했다는 설도 있다. 대규모 작전 계획의 개시일자를 며칠 차이로 알아냈다는 건 세계 스파이 역사상 최대의 성과 중 하나다.[5] 극동에 위치했던 정예부대들을 독소전으로 돌린 것이지, 극동에 있던 병력을 대규모로 이동시켜 재배치 한 것은 아니다. 일본군이 소련을 공격하지 않는다는 결정은 소련군의 규모를 고려한 것이고, 대규모로 병력을 빼면 일본 제국도 생각을 바꿀 수 있었다. 그래서 독소전이 가장 치열하게 벌어지던 와중에도 소련은 극동에 항상 30개 사단이 넘는 대규모 군대를 유지했다. 조금만 크게 붙었다 하면 한 전투에만 100사단 단위로 붙던 독소전의 규모를 본다면 30개 사단은 고작 소리가 나올 만큼 적어보이지만 이건 독소전이 워낙에 인류역사상 최대의 전투가 많았던 곳이라 그런 것이고 30개 사단이란 숫자는 독소전이 아닌 북아프리카에 가져다둔다면 30개 사단이 도착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전선이 종결될만한 대병력이다. 북아프리카 전선의 유명한 대전투들이라는게 고작 몇개 사단들끼리 치고박는 정도였다.[6] 이때 극동에 배치된 소련 해군보병 일부가 동부전선으로 보내졌고 그 중에 하나가 바실리 자이체프였다.[7] 리하르트 조르게와 오자키 호츠미가 소련으로 송신한 비밀 무선의 내용을 일본 특별고등경찰은 끝끝내 해석하지 못했다고 한다. 1회용 암호표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소련과 리하르트 조르게가 사전에 정한 해석 코드를 발견하는 게 필수였는데, 이것을 못 찾았기 때문이다. 호츠미는 혹독한 고문과 심문으로 머리가 하얗게 변색되어 버렸다.[8] 한국인들에게는 왕좌의 게임 조라 모르몬트역으로 알려져 있다.[스포일러] 안드레이 리트민체프는 어처구니 없는 이유로 잡히긴 했지만 특수부대 출신에다가 강력한 무장세력을 지휘하는 테러리스트다. 리하르트 조르게에게 비유될 정도로 쉽게 잡히지 않던 인물로, 작중에서 그의 부하들의 도움으로 탈주하는 데 성공한다.[9] 큰 코와 바짝 올라간 눈썹, 주름살등을 통해 대놓고 따왔다는 걸 알 수 있다.[10] 위의 사진으로는 알 수 없지만, 젊었을 때의 사진#을 보면 외모가 대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