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츠 하버

 

'''1918년 노벨화학상 수상자'''
[image]
1917 - 수상자 없음

'''프리츠 하버'''

1919 - 수상자 없음
''' Fritz Haber
프리츠 하버
'''
[image]
'''본명'''
프리츠 하버
'''출생'''
1868년 12월 9일 북독일 연방 브레슬라우
'''사망'''
1934년 1월 29일 스위스 바젤
'''국적'''
독일 [image]
'''직업'''
화학자
'''분야'''
화학
1. 개요
2. 생애
2.2. 공기로 빵과 폭탄을 만든 과학자
2.3. 어둠의 발명: 독가스
2.4. 전후: 초라한 말년
2.5. 나치당 집권 시기
3. 평가
4. 기타
5. 미디어에서


1. 개요


독일화학자.
질소 정제 방법을 발견하여 인공 비료를 개발함으로써 '''인류의 염원이었던 식량 생산 문제를 해결했지만'''[1], 동시에 조국을 위한 비뚤어진 애국심으로써 1차대전 당시 수많은 목숨을 앗아간 독가스를 개발한 과학자이기도 하다. 생전 그는 순전히 애국심으로 조국인 독일을 도울 발명에 힘썼지만, 1차대전 후 나치당이 집권하면서 유대계라는 이유로 독일에서 추방당한다. 하버 가는 이미 예전에 개신교로 개종한 집안이라 본인이 유대계라는 자각도 없었으나 사회에 광풍처럼 부는 반유대주의 물결은 그런 걸 가리지 않았고, 그가 개발한 독가스는 나중에 홀로코스트에 쓰였던 독가스의 기초가 되어 수많은 유대인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2. 생애



2.1. 맬서스 트랩을 깨다


프리츠 하버는 맬서스 트랩을 깨부숴 1900년대에 16억에 불과하던 인류가 100년이 지난 지금 70억을 넘기게 하는데 가장 큰 기여를 한 과학자이다. 사실 맬서스 트랩 문서에 들어가봐도 알겠지만, 인류가 100억~120억 선에 도달하면 맬서스 트랩이 적용되는 디스토피아적 사회가 도래할 가능성이 높다. UN의 예측에 의하면 대략 2050년에 인구가 97억이 되고, 2100년 쯤에 인구가 109억에 달하며 정점을 찍는다는데 어찌보면 프리츠 하버는 질소비료를 발명함으로써 인류에게 약 150년~200년에 달하는 시간을 벌어다준 셈이다.
프리츠 하버는 맬서스의 인구론이 정설로 통하던 시대에 태어났다. 당시 인류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지만 식량생산은 이를 따라잡지 못하게 된다는 맬서스의 인구론을 정설로 받아 들였으며 '''저소득층의 인구를 줄여야 한다'''는 무시무시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현자로 통하던 시대였다.[2] 이것이 정설로 통한 것은 당시 주요 식량공급원이 농업이고, 농업은 토양의 질소농도에 따라 수확량이 결정되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인데 좀 더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농업에 필요한 비옥한 토지는 질소의 양에 따라 무작위로 결정되는데 질소는 매우 안정적인 물질이라 토양에 질소를 충전하는 방법은 번개가 칠 때 공기중의 질소가 토양에 스며드는 것과, , 자운영 등의 콩과 식물을 심는 방법, 반년 정도 농사를 쉬는 휴경지 재배법 세 가지 였다.[3] 번개는 인력으로 어찌 할 수 없는 부분이니 사실상 콩과 식물을 심는 것과 휴경지 재배법을 사용하는 것말곤 토양에 질소를 충전하는 뾰족한 방법이 없었고 인구는 매년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콩농사와 휴경지 재배법으로 토양의 질을 유지하는 데 한계가 왔을 때 신대륙으로 부터 두 가지가 전해져 유럽인들을 먹여 살렸다.
첫 번째는 신대륙에서 건너온 식물인 감자다. 냉해에 강한 감자는 18세기 유럽을 강타한 소(小)빙하기를 타고 전 유럽에 퍼져 널리 재배되었으며 수많은 생명을 먹여살렸다. 하지만 감자만으론 급속도로 늘어나는 인구를 부양하지 못했다. 감자를 대체식량으로 삼는 것에 한계가 올 즈음, 신대륙에서 또다른 신문물이 유럽에 도래한다.
두 번째는 신대륙, 특히 칠레의 아타카마 사막에서 온 물질인 구아노, 인광석이다. 구아노는 새의 배설물과 알 껍데기가 퇴적되어 만들어진 일종의 광물질로 화약의 제조에 필요한 질산염을 얻는 주요 자원이었다. 그런데 이 구아노를 고효율의 질소비료로 쓸 수 있단 사실이 알려지고 유럽은 몇 해간 풍작을 이어나갔다.
구아노를 사용한 풍작이 계속되며 맬서스 트랩은 과거의 유물이 되나 싶었는데, 구아노는 원래 화약을 만드는 데 사용되는 일종의 군수물자였고 박쥐나 바다새, 펭귄 등의 배설물이 오랜기간 퇴적되어 만들어지는 일종의 생물퇴적물이라 공급량이 금방 바닥나게 된다.[4]
몇 년 간의 풍작 후 바로 찾아온 흉작[5]에 사람들은 기아의 공포에 시달리게 될 때 독일의 한 화학자가 놀라운 사실을 발표한다.

2.2. 공기로 빵과 폭탄을 만든 과학자


공기 중에 존재하는 질소를 인공적으로 농축해 암모니아로 합성, '''인공 질소 비료'''를 만드는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6] 안정적인 질소 공급이 가능해지자 더 이상 휴경지나 콩농사, 감자농사를 반복할 필요가 없어졌고, 인공질소비료의 공급 3년만에 식량 생산량은 인구증가량의 2배를 기록, 사실상 맬서스 트랩을 폐기시켰다.[7]
공중질소합성법은 프리츠 하버를 유럽의 구세주로 만들었고, '공기로 빵을 만드는 과학자'라는 명예가 그에게 붙었다. 사실상 현대인들의 태반이 그의 발견이 없었으면 태어나지도 못했을 것이고, 독성 증가나 토양 유실이 아니라 아예 지력 자체가 쇠해서 사막이 되는 땅이 쏟아젔을 것이다. 게다가, 근본적인 생산력 부족으로 인해, 산업으로 인한 공해를 감축할 만한 여유가 생길 정도로 경제 규모가 커질 수도 없었을 태니, 오히려 지구 환경이 더 빨리 인간이 생존할 수 없는 환경이 되면 되었지, 지금 처럼 오염으로 인류 망하네 마네 하는 이야기를 꺼낼 여력이 생길 일 따위 조차 없었을지 모른다. 질소 비료가 없으면 옥수수나 콩을 마구잡이로 기를 수 있을리 없으니 지금 처럼 고기가 펑펑 쏟아지는 일 또한 없었을 것이다.
또한 공중질소고정법으로 생산된 암모니아를 백금촉매로 산화시키는 오스트발트법으로 질산을 만들고 질산은 TNT 등 각종 화약의 원료가 된다. 대부분의 폭약은 질소성분이 포함되어있어 공중질소고정법은 구아노 등 제한된 천연질소광물로 만들던 화약을 값싸게 대량생산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덕분에 광업에 필요한 폭약 제조 비용이 급격히 감소하면서 광업 산출도 대폭 증가하게 된다. 그야말로 공기에서 화약을 만들어 낸 것이다.
물론, 이렇게 쏟아진 폭약은 군사적으로도 혁신을 일으켰다. 질소가 펑펑 쏟아지니, 1차, 2차 대전 중 질소 없어서 폭탄 못 만들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다. 덕분에 폭발적으로 증가한 식량과 인구 덕에 나온 폭발적인 생산력과 인력으로 열심히 군수물자 만들어서 폭발적인 생산과 인구를 열심히 갈아버릴 수 있게 되었다. (...) 진정한 상품 대량생산&소비 를 가능하게 한, 그야말로 현대 자본주의 체계의 근본인 셈이다. 물론 폭약이 전쟁에서만 쓰이는 것은 아니고 건설업계에서도 충분히 필요로 하는 물건이라 폭약을 만들기 쉽게 했다고 질소 고정법 발명이 인류를 죽음으로 몰고 간 발명으로 취급할 수는 없다.
그러니까 만일 프리츠 하버가 여기에서 멈췄다면, '''역사상 최고의 화학자'''이자 '''인류를 기아의 공포에서 해방시킨 성인(聖人)'''으로 불려도 손색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2.3. 어둠의 발명: 독가스



독가스의 아버지: 프리츠 하버
프리츠 하버는 강경한 주전주의자 겸 국수주의자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승리를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면모를 보였다. 결국 하버는 공기로 그냥 폭탄만 만드는게 아니라 ''좀 다른 폭탄'', 바로 '''독가스'''를 만들어 내었다.
하버가 독가스의 제조이론을 완성할 즈음, 같은 화학자이자 부인이던 클라라 임머바르는[8] 남편이 완성한 독가스의 위험성을 파악하고 더이상 연구하면 안된다는 의사를 밝혔지만 하버는 이를 무시했고 클라라 임머바르는 비탄에 빠져 자살해버렸다. 아내의 자살은 오히려 독가스의 개발을 억제하는 사람이 없어진 프리츠 하버의 연구를 진척시키는 촉매가 되었고 하버는 독가스의 실험검증을 마치게 된다. 실험검증을 통해 유효성을 확인한 하버는 전쟁에서 적극적으로 독가스를 사용해야 한다는 제안을 군상층부에 뿌리고 다녔다.
하버가 독가스 사용을 주장한 시대엔 ABC무기의 개념이 정립되지 않았던 시기지만 살상목적의 독극물사용은 1899년 국제법으로 금지[9]되어있었다. 하지만 이는 화포류에 국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하버는 독가스(염소 가스)를 통나무에 넣어 묻어놓고 적들이 근처에 오면 병사들이 가서 터트리는 방법을 제안했고 독일 제국군은 이 방법을 통해 교묘히 국제법을 피해갈 수 있었다. 게다가 프랑스군도 독일군의 진격을 막기 위해 최루탄을 사용한 전적이 있기에 명분도 있어 신나게 공격을 하곤 했다.
국제법을 피해갈 수 있지만 반인륜적이라는 비난은 피할 수 없었고, 후에 하버 스스로도 이를 반성했다. 게다가 제1차 세계 대전1914년 7월 28일 시작되었으므로 하버는 조국인 독일이 국제법을 위반해야 한다는 강요를 하고 다닌 것이다. 하버가 대놓고 국제법을 위반하자는 제안을 하고 다닐 수 있었던 건 그의 업적으로 독일의 모든 체제가 유지되었기 때문이다. 하버가 확립한 공중질소고정법은 화약을 만드는 데도 필요했고, 농업에 필수적인 비료를 만드는 데도 필요했다. 독일은 식량과 무기, 비밀병기를 모두 하버의 화학기술에 기반을 두고 있었던 셈. 게다가 1차 대전 당시 독일 본토는 영국 해군에 가로막혀 해상으로 물자 보급이 막힌 상태였으니 하버의 업적이 없었다면 독일은 전선유지는커녕 빠르게 고사했을지도 모른다.
독가스를 사용하자는 하버의 제안을 확인한 독일군 상층부는 종전 후 국제법 위반을 한 것에 대한 책임론이 제기될 것이라 예측, 하버의 제안을 이런저런 핑계로 거절했고 최종적으론 전쟁은 사람이 하는 것이란 고정관념을 내세워 하버의 독가스 사용 제안을 근본적으로 부정했다. 하지만 하버는 군대의 상층부에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할 수 있는 업적을 쌓아 올린 인물이고 전선고착이 장기화되자 상층부에서도 "이길 수 있다면 무슨 짓이건 못하겠는가?" 라는 강경론자들의 주도로 독가스가 전쟁터에 투입된다.
그리고 엄청난 효과[10]를 거두며 하버의 뜻대로 독가스는 고착된 전선[11]에 새바람을 일으켰다. 당시 주요 전술이던 참호전을 근본적으로 뒤집어 버린 독가스의 유용성은 독일과 대치중이던 연합군도 인정해 최초의 독가스 투입 후 6개월 뒤 연합군도 독일군의 참호에 독가스를 뿌려댔다.[12] 결국 독가스로 인해 양측은 엄청난 인명피해가 나왔고 오죽하면 1차 세계대전에서 사용한 초탄 중 30%는 가스탄[13]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이처럼 하버는 1차 세계대전 당시 대량 살상병기의 제작과 국제법 위반으로 인해 전범으로 취급받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종전 즈음 찾아온 유럽의 식량위기를 질소비료로 해결할 수 있다는 주장을 전 유럽이 인정해 주었고 독가스의 제작과 투입에 대한 책임문제는 연합군도 똑같이 독가스를 사용하게 되어 유야무야 넘어갔다.
결국 하버는 1차 대전이 종전한 해인 1918년노벨화학상을 수상한다.

2.4. 전후: 초라한 말년


조국을 위해 일한 자신에게 책임을 전가하려고 한 독일 상층부의 움직임에도 하버의 애국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베르사유 조약으로 부과된 독일의 패전배상금을 해결할 방도를 찾아내기 위해 바다에서 을 찾는 방법을 연구하고 이론을 완성시킨다. 이를 위해 발트해, 미국 연안까지 다 찾아보지만 막상 쏟아부은 엄청난 시간과 노력에 비해서 실망스러운 결과가 나와버렸다. 그가 채산성을 계산하는 근거가 되었던 과거 논문과 자료에 있는 양보다 훨씬 작은 양의 금이 있었던 것이다. 이 사실을 확인한 하버는 채산성 문제[14]를 검토하여 적자가 확실시되자, 연구를 포기했다. 열성적으로 임하던 금 추출연구를 갑자기 관둬버리자 주변에선 “죽은 마누라가 말렸냐?”라고 비아냥 거리기도 했다고 한다.

2.5. 나치당 집권 시기


나치당이 집권하던 때, 그에게 위험이 닥친다. 1933년까지 카이저빌헬름 물리화학·전기화학연구소의 소장으로 재임하며 독일 화학의 발달을 주도하였던 그는 나치가 유대인[15] 공직 추방 명령을 발동하며 인생이 꼬인다. 당시의 지식인들은 말도 안 되는 요구라며 거절했고, 하버도 처음에는 거절하며 시간을 끌어 자기 휘하 유대인들을 미국이나 영국같은 나라로 탈출시키는 걸 도와준다. 이 때 하버는 1차대전 당시 독가스를 이용하게 만든 경력을 인정받아[16] 나가지 않아도 됐으나 대부분의 훌륭한 과학자가 유대인이었던 독일인 만큼 연구소는 망했다고 판단, 조국의 명령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인다는 말과 함께 자기 연구실을 뒤집어 엎고 연구소장직을 떠난다. 그의 하야 소식을 접한 케임브리지 대학교는 그를 교수로 초빙했고 유대인 박해가 심해지자, 애국심이 동난건지 하버는 독일을 떠나 영국으로 향했다.
하지만 하필 출퇴근하는 곳 주변이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자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던 동네라 심신이 시달렸고 대학 내에서도 혹평을 받았다. 시달림을 참지 못하고 연구직에서 물러날 것을 생각하던 하버에게 같은 화학자이자 이후 이스라엘의 초대 대통령이 되는 하임 바이츠만(Chaim Weizmann, 1874∼1952)[17]에게 새로 창립되는 다니엘 시프 연구소[18]의 소장을 맡아 달라는 제안을 받아 영국을 떠난다.
영국을 떠난 하버는 연구소의 개소식에 참석하기 위한 여정 도중 스위스바젤(Basel)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19] 장례는 화장으로 치러졌고 유골은 바젤 근교에 있는 회른리(Hörnli) 공동묘지에 봉안되어 파란만장한 인생을 마무리한다.

3. 평가


멜서스 트랩에서 인류를 구원한 과학자이며 결과적으로 수십억의 생명을 인류에게 선물하였지만 동시에 대량살상 병기를 만들어내고 1차대전기 독일의 반인륜적 행위를 조장했다. 보는 시점에 따라서는 조국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으나 결국 조국에게 배신당한 비운의 과학자이기도 하며, 광적인 군국/국수주의의 허망함을 뼈저리게 가르친 양차대전의 상징적인 사례로 속한다.
조국인 독일에게 엄청난 애국심이 있었고, 독일의 발전과 번영, 위상을 위해 동분서주하였고 노력과 걸맞는 성과도 거두었지만 주변국들로부터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반인륜적 대량살상병기를 만들었다고 평생 비판받았다. 제1차 세계 대전 참전국 중 가스병기를 사용하지 않은 진영은 없었지만 사용이 금지된 살상용 독가스를 최초로 사용한 것은 독일이다.

4. 기타


  • 나치가 하버를 내쫓으려고 할 때, 막스 플랑크아돌프 히틀러에게 "유대인이라도 유능한 사람들은 인정해주어야 한다"며 하버를 비롯한 과학자들을 추방시키지 말라고 탄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유대인은 뭘 해도 유대인일 뿐"이라며 플랑크의 제안을 거절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히틀러는 유대인의 학살에는 하버가 개발자로 참여한[20] 치클론 B를 열심히 써먹었다. 그리고 하버의 친척들이 이 독가스로 학살을 당한다.
  • 과학사에서는 앙투안 라부아지에와 함께 과학자윤리을 설명할 때 단골로 나온다.[21] 대비되는 경우는 조너스 소크. 소크 박사의 소아마비 백신 개발은 사회적으로는 대단한 업적이지만 과학사적으로는 그리 대단한 업적이 아니었다. 소크 박사가 대범하게 소아마비 백신의 특허권을 포기하면서 세계보건기구는 100원이라는 어마어마한 가격으로 소아마비 백신을 전세계에 배포했고, 소아마비는 세계 대부분의 지역에서 자취를 감춘다. 소아마비 백신 자체는 소크 박사의 사백신 말고도 앨버트 세이빈 박사가 개발한 생백신이 있다는 것을 고려할때 소크 박사의 명성은 그의 업적보다는 고결한 도덕성 덕분이라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 1924년에 세계여행을 다니면서 당시 일제강점기였던 조선을 방문한 적이 있다.
  • 하버의 유해가 묻힌 봉안묘에는 19년전 남편의 독가스 개발을 비관하며 먼저 세상을 등졌던 클라라의 유해도 같이 묻혀있다.(#)

5. 미디어에서


서프라이즈 2013년 1월 6일 방영분에서 다뤘다.
흑집사에서 현재 고인이 된 지클린데 설리번의 아버지가 이 인물을 모티브로 한 것으로 추정된다.
푸른 강철의 아르페지오의 설정에서 하버가 배상금을 갚기 위해 바닷물에서 금을 추출하던 시도가 실패하고 이후 남은 데이터를 정리하다 나노 마테리얼이 발견되었다고 언급 된다.

[1] 21세기인 지금도 기아 문제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이미 지구 전체의 식량의 생산량은 소비량을 한참 웃돈지가 오래다. 단지 식량을 살 돈이 없는 사람들이 많을 뿐이다.[2] 실제로 영국은 이 주장을 받아들여 빈민구제국의 폐지를 논의했고, 폐지까지 하지는 않았지만 예산을 대폭 깎아버렸다.[3] 거름을 뿌리는 방법도 있지만, 당시 거름은 비위생적이었고 성능이 영 안 좋았다.[4] 채집을 하려면 퇴적물을 만드는 생물이 서식하는 곳을 찾아가야 하는데 방문과 채집을 하는 과정에서 생물의 서식환경이 파괴되고 개체수가 줄어들어 최종적으론 생산환경 자체가 파괴된다.[5] 엄밀히 말해 평작.[6] '''하버-보슈 질소고정법'''은 '''고1 과학'''에도 나올만큼 유명한 화학식이다.[7] 원래 질소고정법은 하버 이전에도 연구되고 있던 분야였고, 1903년 노르웨이에서도 크리스티안 비르켈란(Kristian Birkeland)이란 이름의 공학자가 질소고정법을 개발했다. 하지만 비르켈란 방식은 매우 비효율적이었고(이 때문에 수력발전소 하나를 새로 세워야 했을 지경) 불안정했기 때문에 하버 방식에 밀려 도태되었다.[8] 하버와 마찬가지로 유태계였고, 브레슬라우 대학에서 화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최초의 여성이었을 정도로 뛰어난 인물이었다.[9] 1899년 헤이그 조약 제3장 제2조 23항#. Besides the prohibitions provided by special Conventions, '''it is especially prohibited: To employ poison or poisoned arms'''; To kill or wound treacherously individuals belonging to the hostile nation or army; To kill or wound an enemy who, having laid down arms, or having no longer means of defence, has surrendered at discretion; To declare that no quarter will be given; To employ arms, projectiles, or material of a nature to cause superfluous injury; To make improper use of a flag of truce, the national flag, or military ensigns and the enemy's uniform, as well as the distinctive badges of the Geneva Convention; To destroy or seize the enemy's property, unless such destruction or seizure be imperatively demanded by the necessities of war.[10] 살상 능력 이전에 당시 막 보급되던 연막탄을 독가스인양 자신만만하게 쏴대면 상대측이 쫄아서 도망치는 일종의 공포효과가 나왔다.[11] 당시 주요 전술은 참호전이었는데 독가스를 참호에 뿌리면 안에 있는 사람들이 다 죽어버린다. 독가스가 오면 좋건 싫건 참호전을 더 이어갈 수 없는 셈.[12] 이때 연합군의 가스전을 주도한 사람이 1912년 노벨화학상 수상자인 빅토르 그리냐르(Victor Grignard)[13] 물론 모두 독가스탄은 아니다. 연막이나 신호연막등도 이에 포함된다.[14] 독일의 부채를 탕감하기 위해 진행하니 무조건 흑자가 나야한다.[15] 프리츠 하버는 유대인이었으나 이미 어린 시절에 개신교로 개종해서 유대인이라는 자각이 전혀 없었다.[16] 나치 초기에는 1차대전 때 군인으로 참전했던 유대인은 건드리지 않았다. 나중에는 그런 거 없었지만. 단적인 예로 안네 프랑크의 아버지인 오토 프랑크가 포병 장교로 1차대전을 참전했었다.[17] 바이츠만은 영국 태생 유대인으로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화약 제조에 필수적인 아세톤 생산법을 개선한 공로가 있었다. 진영은 반대였지만 같은 유대인인데다가 하버와 똑같은 일을 한 것이라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18] Daniel Sieff Research Institute, 현재 이스라엘의 Weizmann Institute of Science.[19] 머물고 있었던 호텔에서 수면 중 심장마비로 사망했다.[20] 하버 개인의 발명이 아니고 다른 화학자들과 공동으로 연구 개발한 것이다.[21] 약간의 차이는 있다. 하버는 전쟁범죄에 자신의 과학적 지식과 업적을 자진해서 적극적으로 이용하였고, 라부아지에는 가혹한 수탈자였지만 이는 그의 학문적 성취와는 무관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