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리 내전

 

1. 개요
2. 발단
3. 국제사회의 개입
4. 내전의 종식과 여파


1. 개요


2012년 4월 6일 말리 북부의 소수민족인 투아레그족아자와드 공화국을 선포한 후 2013년 6월 19일까지인 줄 알았으나 휴전 협정이 깨져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투아레그족, 이슬람 근본주의자, 말리 정부군 사이의 삼파전.

2. 발단


발단은 투아레그족의 반란으로 말리 북부지방의 도시가 투아레그족 반군에게 넘어간 것으로 시작한다. 투아레그족의 저항과 핍박의 역사는 해당 문서를 참조. 그런데 한때 나름대로 성공한 민주국가 취급을 받던 말리는 군사 쿠데타로 정치나 군사나 망해버리고 마침 들고 일어난 투아레그족의 반란도 제대로 진압 못해 북부지방 거의 대부분을 빼앗기게 된다.
마침 제1차 리비아 내전으로 리비아군의 인력과 리비아의 러시아/미국 혼합식 장비가 투아레그족으로 상당수 유입되었고[1] 혼란을 거듭하던 정부군 측의 병력들도 여럿 반군에 투항한 탓에 반군은 강해지고 정부군은 약해지는 상황을 낳아 그야말로 털려버린 것.
[image]
픽업 트럭에 기관총을 달아놓은 투아레그족 전사.
그런데 그 투아레그족은 외부(=알 카에다)의 지원을 받는 이슬람 근본주의자들, 흔히 말하는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에게 기껏 점령한 북부지방 대부분을 다시 뺏겨버리고 결국은 정부군-투아레그족-알 카에다의 3파전으로 전개되었다. 말리 정부는 투아레그족 반군이 알 카에다의 지원을 받는다고 주장했으나, 정확히는 독립할 때까지는 협력관계였는데, 투아레그족이 나중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이다(…). 말리 정부의 주장엔 서방세계의 도움을 끌어내기 위한 프로파간다적인 성격이 섞였을 확률이 높다.

3. 국제사회의 개입


[image]
말리 상공에서 공중급유를 받는 프랑스 공군 미라주 2000D 전투기.
가장 먼저 내전에 개입한 것은 프랑스였다. 투아레그나 이슬람주의자나 말리 정부에 비하면 서방에 적대적인 건 마찬가지기에, 프랑스는 말리 정부에 대한 지지를 선언했다. 총 4,000여명 규모의 프랑스군이 우크라이나제 대형 수송기 An-124까지 빌려서 말리로 급전개되었다. 이후 프랑스군 6명이 전사하였고, 그들 중 1명은 프랑스 외인부대 소속이었다.[2] 또한 2013년 1월 11일부터 미라주 2000라팔차드의 수도 은자메나 기지를 거점으로 삼아 프랑스 지상군과 정부군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작전명은 '세르발'(Opération Serval).
사태 초기엔 중장비를 바로 동원하긴 힘들었는지, 장갑차량은 비교적 경장갑의 VAB와 90mm 포를 탑재한 ERC 90 장갑차 등 차륜형 장갑차들을 위주로 대동하였으나,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VBCI 보병전투차[3]나 케사르 자주포를 투입하기 시작하였다. 1월 20일에는 미스트랄급 강습상륙함 3번함인 Dixmude에 VBCI 장륜 장갑차 16대와 지휘형 4대, 케사르 자주포 6대 외 105mm 포를 탑재한 AMX-10RC 차륜형 장갑차까지 탑재하고 22일 말리로 항해를 시작하였다.
[image]
말리에 증파되는 프랑스군 차량들. 수송기는 우크라이나제 An-124. 세계에서 두번째로 큰 수송기다.
리비아 때와 유사하게 국제사회의 고른 지지를 받으며 참전, 심지어 이번에는 그 러시아조차도 지지했다!!! 다만 무슬림 형제단 출신의 이집트 대통령 무함마드 무르시는 프랑스의 무력개입을 반대했다.
이 와중에도 속수무책으로 밀리던 정부군은 2013년 1월 10일 코나를 빼앗겼고, 북부 진격의 거점으로 삼았던 거점도시 몹티까지 반군이 몰려왔다. 프랑스군이 참전할 가을 즈음에 프랑스군과 함께 밀어버리려고 준비하고 있던 전략거점을 빼앗길 위기에 처하자 말리 정부는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프랑스군이 조기 참전해 특수부대와 공군력을 동원해서 반군의 진격을 저지하고 12일 코나를 탈환했다. 그렇게 한숨 돌리나 했는데...
[image]
[image]
말리에 도착한 프랑스군 증원병력. 맨 위의 장갑차는 VAB, 중간의 장갑차는 ERC-90, 맨 아래의 헬기는 가젤 무장헬기.
페이큰지 임기응변인지 반군이 몹티나 코나와는 한참 떨어진 디아발리에 갑툭튀, 주둔하던 말리군을 끔살시키고(주둔군에서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고 한다. 기습에 당한 모양) 남쪽에 있는 세구로 진격했다. 이슬람 반군 지도자인 오마르 울드 바하마는 디아발리 점령 이후 라디오와의 인터뷰에서 프랑스는 아프가니스탄 못지 않은 지옥에 빠질 것이라고 주장했으며, 프랑스군의 공습을 비웃으며 지상전으로 덤비라고 조롱했다. 디아발리는 바마코에서 200km 남짓 떨어진 곳인데다 여기를 뺏기면 코나와 몹티 지역이 수도 지역과 차단되어 포위당하므로 프랑스군 입장에선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 2013년 1월 16일 프랑스 특수부대가 말리군과 함께 디아발리 탈환을 위해 시내로 진입, 시가전을 벌였다. 이 날, 스페인에서는 수송기를 파견하는 것을 승인했고 독일C-160 수송기를 파견하는 것을 승인했다. 결국 세구까지 진출한 반군은 격퇴되었으며, 1월 18일에는 코나와 디아발리가 다시 프랑스군과 정부군의 수중에 들어왔다.
[image]
말리에 도착한 나이지리아군 병력.
또한 아프리카 연합에서도 프랑스를 지지하며 나이지리아, 토고, 세네갈, 부르키나파소, 차드 등 9개 국가에서 지원군을 파견했다. 미국과 영국도 C-17 수송기와 무인정찰기를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알 카에다 반군과 연관되어 있던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들은 격렬하게 반발했다. 1월 16일부터 19일까지 알제리 인아메나스 가스전에서 이슬람 무장세력에 의한 인질극이 발생했는데, 이들은 말리 내전에 대한 프랑스의 개입중단을 요구하며 파병한 아프리카 국가들에 대해서도 추가적인 테러를 하겠다고 경고했다.
프랑스의 말리 내전 개입과 동시에 소말리아에 억류되어있던 프랑스 정보요원을 구하기 위해 특수부대가 출동했는데(이 과정에서 미군의 도움이 있었다는 듯) 결과는 블랙 호크 다운까지는 아니지만 실패. 민병대와의 격전 끝에 특수부대원 1명 사망, 1명 실종, 정보요원도 사살됐다고 한다. 그런데 민병대 쪽에선 정보원이 살아있다고 주장했다. 두 작전이 동시에 벌어진된 것으로 보아 연관관계가 있다는 추측이 있다.
[image]
파괴된 알 카에다 반군의 BRDM-2 장갑차들.
2013년 1월 27일 프랑스군-말리 정부군 연합군이 북부 최대도시인 가오를 탈환하고 1월 28일에는 유서 깊은 도시 팀북투까지 탈환했다. 팀북투는 15세기 북아프리카 이슬람 문화의 중심지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곳으로, 반군이 퇴각하기 전에 이곳 도서관에 있던 귀중한 고문서 수만 점을 불살랐다는 보도가 있어 전 세계 문화계의 분노를 샀으나 다행히 대부분의 고문서는 안전한 곳으로 옮겨져 화를 면했다고 한다.
1월 29일 영국은 200여명의 병력을 추가적으로 지원하기로 결정했고,[4] 미국일본 등의 선진국에서 총 4억 5500만 달러를 지원하기로 했다. 아프리카 연합 역시 5000만 달러를 지원하기로 결의했다.

4. 내전의 종식과 여파


2013년 1월 31일 연합군이 반군의 마지막 거점인 카달을 탈환하며 10개월여에 걸친 내전은 종결되었다. 내전에 가장 적극적으로 개입해 4,000명이 넘는 정예부대(아프가니스탄에서 본국으로 철수했던 부대와 외인부대로 구성되었다고 알려져 있다)를 파견한 프랑스군은 내전 개입 결과 가젤 헬기 조종사 한명, IED에 의한 전사자 다섯명, 총격으로 인한 전사자 두명으로 총 8명이 전사한 반면, 말리 정부군은 최소한 300여명이 전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반면에 반란군은 천여명이 넘게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프랑스군 개입 이후 이슬람 반군이 너무나 무력하게 패퇴하자 겁을 먹었는지 투아레그족 반군 역시 말리 정부와 협상을 벌여 6월 18일 정전협정을 체결했다.
전후 말리는 디온쿤다 트레오레 대통령을 수반으로 하는 과도정부를 구성해 정부수립 준비를 갖추고, 2013년 7월 28일 트라오레를 제외한 27명의 후보자가 출마한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다.[5] 여기서 과반득표가 나오지 않아 8월 11일 결선투표를 하여 이브라임 부바카르 케이타 전 총리가 당선되었다. 말리 안정화를 위해 주둔하던 프랑스군은 단계적으로 철수하고 이를 대신해 유엔이 아프리카 연합군으로 구성된 평화유지군을 1만 1200명으로 증파하였다.
그러나 내전의 여파는 심각한 상황이다. 이슬람 반군은 비록 전면전에서는 패배했지만 여전히 산악지대에서 은거하여 게릴라전과 테러를 반복하고 있으며 2013년 2월경에는 가오로 일부 병력이 재침투해 시가전을 시도하는 등 그 영향력이 남아 있다. 또한 북부의 투아레그족 역시 여전히 분리독립을 원하는 움직임이 있어 언제 다시 내전이 발생할지 모르는 상황이다. 실제로 2013년 9월 26일 정부와 투아레그족 간의 평화협상이 결렬되자 29일과 30일에 걸쳐 양측의 총격전이 발생하는 등 긴장상태는 여전하다. 게다가 장기간에 걸친 내전으로 약 48만명의 난민이 발생하여 이들의 복귀와 재활 역시 중요한 문제로 남아있다.
말리 내전에서 정부의 형편없는 지원에 반란군에게 영토의 절반을 빼앗기자 이에 분노해[6] 쿠데타를 주도한 대위는 국제사회의 개입을 이끌어낸 과도정부 수반에 의해 일약 한번에 중장으로 진급했다고 한다(…).
2014년 개봉한 영화 팀북투는 말리 내전 당시 이슬람 근본주의 반군들의 강압적인 샤리아 통치로 자유와 삶이 파괴되어가는 말리 민간인들의 비참한 삶을 조명한 작품으로 주목을 받았다.

[1] 투아레그족 문서를 참조하면 알겠지만, 카다피가 투아레그족의 독립운동을 지원해줬기에 카다피에 대해 호의적인 반응이 많고 용병도 다수 보냈다.[2] 이걸 가지고 프랑스군은 수송기도 없는 안습한 상황이라고 주장을 펼치는 모습을 간혹 볼 수 있는데, 미군도 아프간에서 서방측 수송기로 실어나르기 힘든 물건을 러시아제 수송기를 임대해서 수송하곤 했다. 게다가 무엇보다 급히 전개해야 하는 상황에서 중장비를 투입할 수 있는 대형 수송기라면 빌리든 구걸하든 어떻게든 구해와야 하는 것이 맞고, 결과적으로 프랑스군은 목표 달성에 성공했다.[3] 이쪽도 일단 차륜형이긴 하지만, 먼저 전개되었던 VAB 같은 물건들과 달리 본격적인 IFV이다.[4] 전투병력은 아니고 물류, 첩보, 정찰 분야에 투입될 병력이라고 한다.[5] 이슬람 세력의 선거방해를 막기 위해 6천여명의 병력이 배치되었다.[6] 말리는 아프리카 국가 중에서는 상당히 민주적인 정부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