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사

 

1. 개요
2. 시기별
2.1. 고대 유럽
2.1.1. 유럽 문명의 시작
2.1.2. 고대 로마국의 성장
2.1.3. 게르만족의 이동과 서로마 제국의 멸망(476년)
2.2. 중세 유럽
2.2.2. 십자군 전쟁: 1069년-1291년
2.2.3. 중세의 끝: 흑사병(1350), 백년전쟁(1337~1453),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1453)
2.3. 근세 유럽: 14 ~ 18세기 중반
2.3.1. 르네상스: 14세기 후반 ~ 16세기 후반
2.3.3. 종교개혁: 1517년 ~
2.3.4. 근세 유럽의 강점: 철학과 경제정책
2.4. 근대 유럽: 제국주의, 모더니즘
2.4.1. 절대왕정의 변화
2.4.1.1. 영국의 절대왕정
2.4.1.2. 프랑스의 절대왕정
2.4.1.3. 독일의 절대왕정
2.4.2. 문화: 모더니즘
2.4.3. 제국주의
2.5. 세계대전
3. 관련 항목


1. 개요




유럽역사.
서양사라고도 불린다. 현대 문명의 요람으로 15세기 대항해시대 이래 과학 혁명, 시민 혁명, 산업 혁명이 일어났고 일련의 사건들을 바탕으로 인류 역사의 흐름을 바꾼 지역이다.
근현대에 전 세계를 호령한 탓에, 의외로 전근대 시기의 역사가 주목받는 경향이 덜하지만 유럽 문명의 시작 시기와 고대 그리스, 헬레니즘 제국, 고대 로마로 대표되는 찬란한 고대 문명 등, 매우 긴 전통을 자랑하는 지역이기도 하다.

2. 시기별



2.1. 고대 유럽



2.1.1. 유럽 문명의 시작


유럽을 비롯한 범 서양 문명의 요람으로 기원전 2000여 년경에 에게 해에서 키클라데스 문화라는 독특한 문화가 발전했다. 이 문화권은 극도로 추상화된 석상과 해양문화라는 특징을 갖는데, 특히 산토리니섬의 아크로티리 유적과 크레타에서 발굴된 벽화는 당시의 풍요로운 해양 문명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게 해주었다.
이후 기원전 800년경부터 그리스 각지에서 도시국가인 폴리스와 에트노스가 성립한다. 이 폴리스들은 기원전 776년경 고대 올림픽을 통해 동족 의식을 다졌지만 하나의 국가로 통합을 이루는 데에는 실패하였다.
대부분의 폴리스는 방어를 위해 세운 성벽을 중심으로 도시를 이루면서 형성되었다. 처음에는 소왕국 형식이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귀족정 형식으로 변화하게 된다. 나중에는 식민 활동의 활성화와 화폐 경제의 도입, 철 가격의 하락 등으로 평민들 역시 무장을 하게 되었다. 이 평민들이 전투의 중심으로 자리잡게 되자 그들의 발언권이 늘어났고 이후 폴리스는 차이는 있을지언정 대다수가 민주정으로 옮겨갔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폴리스로는 아테네와 스파르타, 테베가 있다.
본래 이들의 패권은 페르시아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델로스 동맹을 결성한 아테네에게 있었다. 하지만 못지 않은 세력을 자랑하던 스파르타가 펠로폰네소스 동맹을 결성하고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일으키자 델로스 동맹은 무너지게 된다. 이후 폴리스의 주도권은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스파르타에게 넘어간다. 하지만 레욱트라 전투에서 승리는 테베를 중심으로 한 반 스파르타 연합군의 것이 되었고 패권은 다시금 테베에게 돌아간다.
혼란이 거듭되던 동안, 북쪽에서 힘을 키우던 마케도니아 왕국의 필리포스 2세는 기원전 338년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폴리스군을 격파한다. 고대 그리스는 왕국의 점령을 받기 시작했고 알렉산드로스 3세 시대를 거치면서 완전히 약화되었다. 그 뒤로는 헬레니즘 제국 시대로 접어들며 이전의 문화를 잃어버렸고, 마케도니아 왕국이 고대 로마에 의해 멸망당한 후에는 자치권마저 사라지면서 막을 내린다.

2.1.2. 고대 로마국의 성장


기원전 800년경 도시국가로 시작해 점차 영토를 확장하며 서유럽과 동유럽, 발칸반도와 아나톨리아 반도, 그리고 북아프리카와 이집트까지 고대 지중해 세계를 제패한 국가.[1]
처음에는 미약하게 왕정으로 시작했고, 공화정 (B.C 509년- B.C 27년)이 되어 북아프리카로 (포에니 전쟁), 서유럽 쪽으로 (갈리아 전쟁) 영토를 확장하다가 아우구스투스의 군림 이후 황제를 모시는 로마 '''제국'''이 된다.
초기에 다신교였던 로마 제국은 예수의 사후 점차 기독교도 수가 늘게 되고, 결국 기독교는 313년 콘스탄티누스 1세 때 제국의 합법종교로 공인받게 되며, 380년 테오도시우스 1세가 국교로 선포되게 되면서 로마 제국은 유일신교를 믿는 제국이 되었다. 이후 로마 제국의 역사는 동로마 제국으로 이어지게 된다.

2.1.3. 게르만족의 이동과 서로마 제국의 멸망(476년)


로마 제국의 서쪽 영역으로 395년 분열 이후 80여 년간 짧은 시간 존속했으며, 새로운 이민족인 훈족에게 밀려나 거점을 잃은 게르만족이 대이동을 벌이는 바람에 476년 멸망한다. 흔히 서로마 제국의 멸망을 고대 유럽의 끝으로 본다.
게르만족이 서로마 제국을 멸망시켜가는 과정에서 유럽은 수에비 왕국, 동고트 왕국, 서고트 왕국, 반달 왕국, 부르군트 왕국, 헤룰리 왕국, 게피드 왕국, 루기 왕국, 프랑크 왕국, 랑고바르드 왕국 등 수많은 게르만 왕국들로 채워지게 되고, 이들 나라의 대부분은 로마 제국삼위일체파와는 대립되는 아리우스파의 기독교를 믿고 있었다. 일단 삼위일체보다는 아리우스파의 교리가 더 납득하기 쉬운 데다, 로마 황제 및 교황의 후원을 받는 삼위일체파를 신봉하게 되면 게르만 왕들은 로마 황제와 교황의 영향력 아래 들어가게 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2.2. 중세 유럽


서로마 제국의 멸망 후, 이른바 '중세의 암흑기'에는 경제적인 면이나 생산력 등 많은 분야에 있어서 서유럽이 타 문명 지역보다 나을 게 없던 시기였다고 치부된 적도 있었다. 단적인 예로 칭기즈 칸에 대해 쓴 역사가 잭 웨더포드는, 몽골인들이 서유럽까지 쳐들어왔다면 유럽은 간단히 제압당했겠지만, '''너무 가난해서''' 그냥 돌아갔을 것이다라고 주장할 정도.
다만 이런 인식이 '유럽이 다른 문명권보다 우월하다'는 걸 기본전제로 깔면서, 그중에서 '중세만 예외'라는 근거 없는 주장을 위해 사용되는 레퍼토리로 변질될 수 있다.
최근에는 중세에도 수도원 교육과 철학의 발전, 높은 도시화 비율 등 높은 수준을 자랑하던 분야가 있었다는 의견도 나오는 중이다. 단, 그렇다고 대도시가 많았다는 뜻은 아니다. 그 당시 파리와 런던의 인구가 각각 1만명 정도인데 비해 동아시아장안은 100만명, 서라벌은 20~50만명이었다. 규모면에서는 크지 않았다.

2.2.1. 프랑크 왕국신성 로마 제국의 등장


476년 서로마 제국이 완전히 멸망하자 프랑크 왕국은 스스로 '가톨릭의 보호자'를 칭하며 교황의 종교적 권위를 등에 업고 "동로마 제국의 황제와 대등한 지배권을 구축할 수 있다"고 주장하게 된다. 또한 가톨릭의 보호자로 나서면서 가톨릭을 믿는 서유럽인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기도 했다.
이런 정치적 상황에서, 496년에는 프랑크 왕국의 클로비스[2]가 가톨릭 교도로 개종[3]하여 강성해지고, 프랑크 왕국과 동로마 제국이 아리우스파 게르만 왕국들을 공격하여 약화 쇠멸시키자, 남은 게르만족 왕국들도 상쟁하다가 멸망하거나, 국가안정을 위해 동로마인과의 융합을 도모하며 결국 가톨릭으로 전향하면서, 아리우스파는 사라진다.
그리고 두 개의 정통파 교회인 가톨릭정교회는 처음에는 서로 협력하는 관계였으나, 신학적·정치적·문화적인 다양한 문제로 인해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양대 총대주교구를 중심으로 세력이 나뉘면서 7세기에 상대적으로 안정을 되찾은 후에는 서로 자신의 우월성을 입증하려 하기 시작했다.
당시 로마의 교황이 갖고 있던 정치·사회적인 권위는 강하지 않았다. 초기에는 여전히 강성한 동로마 제국의 황제가 수호자로 남아 지원하던,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가 권력에 있어서 더 우위에 있었다.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에도 오랜 기간 동로마 제국의 라벤나 총독부가 여전히 이탈리아 반도에 남아있었고, 535년부터 시작된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이탈리아 원정으로, 이탈리아 반도가 동로마에 수복되며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는 로마 황제의 눈치를 봐야 했던 시기도 꽤 길었다.[4]
그래도 로마 교회는 이전부터 총대주교구들 중 첫 번째 지위를 가지고 있었기에, 서방에서의 교황권 강화를 계기로 삼아 로마 교황이 전체 기독교 교회를 지배한다고 천명했고, 동로마 황제가 비호하는 콘스탄티노폴리스[5]에서는 로마 교황이 단지 다섯 총대주교 중 1명일 뿐이라고 반박하며 자신의 칭호에 '전 기독교 세계의 총대주교'를 덧붙였다.
하지만 726년, 동로마 황제 레오 3세성상파괴령을 내리자 양 교회의 사이는 더욱 벌어졌다. 당시의 교황 그레고리오 3세는 동로마 황제의 성상파괴령을 단호히 거부했으며, 동로마 제국에서 한 세기가 넘은 내전 끝에 843년에는 성상이 재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두 교회의 결합은 요원해 보였다. 정치적으로는 포티우스 분열 등의 사건이 발생했으며, 특히, 동로마 제국이 내전에 시달리는 중이던 서기 800년, 로마 교황 레오 3세프랑크 왕국의 왕 카롤루스 대제[6], 즉 샤를마뉴를 서방의 새로운 황제(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등극시킴으로써 두 교회 중심지의 골은 이제 메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던 와중 프랑크 왕국은 843년 베르됭 조약으로 분할되고 만다. 카롤루스 대제까지는 프랑크의 세속군주가 가톨릭의 교황보다 더 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의 사후 아들들이 제국을 분할 상속[7] 받으며 제국은 한 세대 만에 분열되었고, 이후 북쪽에서부터 바이킹이 침공해와 정착하며, 서유럽은 봉건 사회로 접어들게 된다. 이 시기 교황의 권위와 권력이 급격히 증가하였으며, 동시에 교황령 또한 크게 늘어나게 됐다.
845년에는 마자르족아르파드가 동유럽의 판노니아 평원으로 정복활동을 벌인 후, 정착해 나라를 세운다. 이후 그의 손자와 증손자에 의해 10세기 초 가톨릭으로 귀의한 뒤 대공의 지위를 얻으면서 헝가리 대공국이 된다.
962년 독일 왕국오토 1세이탈리아 왕국을 병합하고 신성 로마 황제로 임명되면서 새로운 신성 로마 제국이 건국되었다.
헝가리 대공국의 군주 이슈트반 1세는 신성 로마 황제 오토 3세로부터 왕의 칭호를 받으며 1000년에 헝가리 대공국은 헝가리 왕국이 된다.
신성 로마 제국과 프랑스 왕국, 잉글랜드 왕국(과 노르망디 공국)의 사상·종교·사회·정치에 있어서 교황은 막대한 권위와 권력을 지니게 됐다. 특히 교황의 권한이 세속 국가들을 압도할 정도로 커졌음을 잘 보여주는 것이 1077년의 하인리히 4세를 굴복시킨 카노사의 굴욕과 잉글랜드 왕국의 국왕을 굴복시킨 존 왕에 대한 파문 사건(1209년) 등이 있다.
당시 교황의 힘은 단지 종교계의 정신적 지주로서의 영적 권력뿐만 아니라, 교황령이라는 이탈리아의 노른자위 땅+각국의 교회에서 걷히는 세금을 바탕으로 한 세속 권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교황이 황제나 왕과 직접 군사력으로 맞서는 것까지는 불가능했지만, 당시 황제나 왕들도 자국 내에 자기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는 왕 못지않게 강력한 대영주들이 많이 있었고, 그들의 눈치를 계속해서 봐야 했다. '''교황은 이들에게 황제나 왕의 관을 씌워줄 권한'''이 있었고, 현직 황제나 왕보다는 약간 못 미치는 세력의 이들을 지원해 줄 '''군대와 돈'''이 있었기에 이렇게 강력한 교황권이 가능했던 것이다.
흔히 교황과 황제의 대립 과정에서 황제들이 옹립한 대립교황들의 존재가 유명하지만, 실제로는 교황이 이런 목적에서 세운 대립왕(Contrarex, 다른 번역명으로는 반왕)들도 많았다. 카를 4세가 교황이 세운 대립황제가 황제가 된 대표적 예이며 프리드리히 2세, 콘라트 3세 등도 유명한 대립황제 출신 황제들이다. 이렇게 교황의 지원을 받은 황제들은 당연히 교황의 눈치를 잔뜩 볼 수밖에 없었고 성직 임명권, 교회 과세권 등을 넘겨주며 교황권을 강화시키게 된다.
이렇게 종교의 사회적 지위나 권력이 올라가자 한때 교황들이 유럽의 왕이나 황제보다도 강력한 실존하는 권력을 뽐낸 적도 있다. 1305년부터 1978년까지 모든 교황은 삼중관이라는 관을 썼는데 왕관 3개가 쌓여 있는 형태이다. 이 삼중관은 서유럽, 더 나아가 전체 가톨릭 세계의 왕과 황제, 대통령, 총리 등의 세속 지도자들보다도 교황의 권위와 권세가 높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상징적인 장치였다.
이렇게 중세르네상스 시기에 교황령의 통치권과 세속 국가들의 정신을 지배할 수 있는 성직 서품권 등으로 교황권이 매우 막강하다보니 교황 자리를 놓고 암투가 벌어지곤 했으며, 이런 암투 끝에 오른 교황들이 성품이나 자질에서 막장인 사람이 많았다는 점이 비판받기도 한다.

2.2.2. 십자군 전쟁: 1069년-1291년


결국, 점차 강해지던 교황권에 의해 십자군 전쟁이 시작된다. 이 종교전쟁은 오래 지속되었지만 4차(1204년 4월 13일,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에 이르렀을 때에는, 성지인 예루살렘 탈환은 커녕 목적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던 동로마 제국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해 버림으로써, 정교회와의 연을 끊어버리는 등, 사실상 유럽권이 패배한 전쟁이 되었다.
전쟁이 교황의 예상과 달리 실패했기 때문에, 교황권의 몰락과 신앙의 약화를 가져왔고, 결정적으로 1350년대에 유럽을 덮친 흑사병이 치명적으로 작용하면서 교회의 권위가 떨어졌다.[8] 이로써, 기사와 영지를 기반으로 한 장원경제의 붕괴가 찾아왔고, 동방으로 향하는 무역로를 새롭게 개척할 수 있었기 때문에, 도시경제와 화폐경제가 발달하게 되었다. 즉, 중앙집권적인 근대국가가 탄생할 기반이 만들어진 것이다.
지금까지는 군주들이 신, 즉 교황의 마음에 들으려 노력했던 시기였다면, 이제부터는 '''내가 받을 것도 없는 대상에게 왜 그래야 하지?''' 라는 마음이 들게 된 것이다. 이제는 종교라는 구속에서 벗어나, 문화(르네상스), 과학, 탐험(대항해시대)을 통해 팽창하는 근세가 시작된 것이다.

2.2.3. 중세의 끝: 흑사병(1350), 백년전쟁(1337~1453),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1453)


백년전쟁은 당사국인 영국프랑스 양국 모두에게 중세 봉건시대의 종언과 절대왕정의 시작을 알리는 심대한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19세기 초엽까지 가는 오랜 라이벌 대결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우연히도 같은 1453년에 동쪽에서는 콘스탄티노폴리스오스만 베이국에게 함락당하면서, 1453년은 중세와 근세를 가르는 분기점이 된다.
이 시기 오스만 제국은 최전성기를 누리며, 유럽으로의 진출을 꾀하고 있었다. 이를 막기 위해 헝가리 왕국, 왈라키아 공국, 몰다비아 공국들이 최선을 다 했으나, 결국 헝가리 왕국모하치 전투(1526) 이후, 나라가 분열되고, 왈라키아 공국(1522)과 몰다비아 공국(1476)은 오스만 투르크의 속국이 된다.
'''흑사병(1350) 때문에 사람들은 떼죽음'''을 당하고, 거리에는 웬 사람들이 죄를 씻자고 채찍질을 하며 돌아다니다가 폭도로 돌변해 마을을 약탈하고, '''영국과 프랑스에서는 100년 동안 전쟁 삼매경(1337 ~ 1453)'''에 빠져 있고, 교황들은 서로 싸워대니 못 믿겠다는 사람들만 남고, 농민들도 못 살겠다고 봉기하고, 저 멀리 동쪽에서는 '''오스만이라는 이교도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넘어(1453) 유럽으로 달려드는 상황'''이다.

2.3. 근세 유럽: 14 ~ 18세기 중반


중세의 봉건제도가 끝을 맞이하며, 왕 중심의 중앙집권적인 정치체제가 등장하는 시기이다. 봉건제에서 비롯된 각 지역끼리의 다툼과 혼란이 국가별로 안정적이고 강력해진 국가권력을 중심으로 정리되어간 시기라고 볼 수 있다.

2.3.1. 르네상스: 14세기 후반 ~ 16세기 후반


이슬람 세력과 지속적으로 군사적인 면에서 대립하면서도 유럽은 꾸준하게 무역 등을 통해 부를 축적하기 시작했고, 14세기 이후 부를 축적한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르네상스를 통해 로마의 문화적 유산을 찾는 것에 집중하게 된다. 이 시기부터 유럽은 문화적, 과학적으로 급격한 발전을 이루게 된다.
유럽의 중세 초기는 서로마 멸망과 혼돈으로 인하여 분명히 어두운 시기가 있었으나, 중세 중기부터 서유럽은 급격한 발전으로 인해 1인당 GDP에서 타 대륙에 비해 앞서 나가기 시작했으며 중세 후기에는 그 차이를 더욱 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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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 대항해시대(1415 ~ 1642), 과학혁명


무엇보다 '''15세기에 벌어졌던 해외로의 진출은 유럽이 타 문명을 앞지르는 중요한 경제적인 요인'''이 된다. 이슬람 세력과의 대립으로 육지를 통한 무역길이 막히자 해양를 통한 진출을 노리게 되었고, 바스코 다 가마콜럼버스의 발견이 이루어진다. 인도와의 향신료 무역이나 중국과의 무역, 신대륙을 약탈해 얻어지는 막대한 은은 유럽이 막대한 경제적인 힘을 축적할 수 있게 해줬다.[9]
뿐만 아니라 특유의 정치 사상과 지리적인 요인 등으로 인해 항상 분열해 있었던 유럽은 무역 경쟁이 심화되었고, 이 과정에서 국가는 상업과 과학기술을 중요시하게 된다. 송원대 중국 문명의 산물들인 화약, 종이, 도자기, 나침반 등은 유럽의 것보다 뛰어나 유럽은 그것을 수입하던 처지였지만,[10] 이 시기에 빠르게 진행된 유럽의 발전은 14세기 정도면 중국이 기술적으로 유럽보다 우월한 것은 거의 없게 만들어 버리며 비슷한 물건들이 역수출되기 시작한다.
또한 이슬람 세력(오스만 제국)과 중국(명나라) 등 주요한 타 문명은 유럽과 달리 쇄국 정책, 전란, 지나친 중앙집권적 정치, 혁신을 용납하지 못하는 사회 구조 등으로 인해 정체되어 유럽은 점점 더 타 지역과의 격차를 벌리게 된다.[11] 사실상 유럽은 15세기 정도면 경제적, 기술적, 군사적인 면에서 다른 모든 지역과 동등하거나 우위에 있었고 이슬람과 인도, 중국은 유럽 문명과 기술의 일방적인 수혜자로 전락하게 된다.[12]

2.3.3. 종교개혁: 1517년 ~


개혁이 시작되었던 신성 로마 제국은 폭풍이 지나간 뒤, 후대의 볼테르의 말마따나 더이상 신성하지도 않고, 로마도 아니고, 제국도 아니게 되었다. 교황의 속권과 황제의 힘이 세트로 약해지면서, 교황이 주는 황제의 권위라는 것 자체가 무색하게 되었고, 제국을 구성하던 제후들은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를 통해 종교의 자치권을 얻은 것을 시작으로, 점차 거의 완전한 자치권을 얻어, 더이상 하나의 제국이 아닌 일종의 연방과 비슷한 형태가 되었다. 여기에 30년 전쟁의 폭풍이 지나가면서 독일 인구의 상당수가 죽었고, 결국 독일은 이후 프로이센이 부상할 때까지 유럽의 무대에 등장하지 못하게 된다. 제국을 다스리던 합스부르크가는 오스트리아가 되어 독자노선을 걷기 시작한다. 아이러니한 것은, 프로이센이 등장할 수 있던 배경이 신성 로마 제국의 몰락에 있었다는 것.
또한 종교개혁은 근대 독일어를 만들었다시피 할 수 있는 사건이기도 하다. 이에는 마르틴 루터의 공헌이 컸는데, 루터 본인이 번역한 성경은 독일 전역에 퍼지면서 그 자체로 근대 독일어의 기반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과거와 달리 르네상스 시대에 처음 등장한 인쇄술에 힘입어 막대한 파급력을 갖고 있었고, 결과적으로 루터라는 한 사람에 의해 근대 독일어가 완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게 되었다.
개신교 개혁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은 것은 독일 지역이었지만, 다른 나라에도 개신교 개혁은 큰 영향을 미쳤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영국은 칼뱅파의 교리를 일부 빌려 성공회를 만들어 독립하였고, 프랑스위그노가 중요한 사회 세력으로 떠올라 위그노 전쟁이라는 홍역을 앓게 되고, 결과적으로 발루아 왕조가 몰락하고 부르봉 왕조가 등장하게 되는 기원이 되었다. 다만 영국프랑스는 직접적으로는 큰 30년 전쟁에 휘말리지 않았기에 영국엘리자베스 1세 치세에서 중흥을 맞았고, 프랑스는 한 세대 일찍 국내의 갈등을 봉합한 뒤, 30년 전쟁을 정치적으로 잘 이용한 루이 13세리슐리외를 통해 절대왕정을 완성하고 한동안 유럽의 최강국으로 자리매김한다.

2.3.4. 근세 유럽의 강점: 철학과 경제정책


중근세 유럽의 발전을 이야기할 때 중요한 것은 신학과 다른 방향으로 신에게 접근할 수 있다는 철학(논리학, 형이상학 등) 분야의 발달,[13] 그리고 상인의 정치 참여를 점차 수용하게 만든 중상주의적인 경제 정책이다.
이슬람 문화권의 경우 튀르크인의 유입과 십자군 전쟁, 그리고 아바스 왕조의 분열로 인한 왕조간의 전쟁으로 인해, 정치 문화가 점차 경직되고, 상업 구조가 착취적으로 변하면서, 이전의 유연성을 점차 상실해갔다. 중국의 경우, 대 수력방적기, 강철, 석탄을 제조 사용하는 등, 세계적인 규모의 선진국이었다는 것은 인정받지만, 몽골 침입을 거치면서 이러한 경제 구조는 대개 파괴되었으며, 계몽시대 유럽에서 중국의 고전 등을 수입했다고 하지만 이는 지식인의 유희 거리 혹은 자국을 까기 위한 외국 띄우기에 불과했다.[14] 물론 정말 침략자들이 말 타고 배 타고 유럽에서 뛰놀고 약탈하던 5~10세기 소위 '암흑시대' 유럽의 경우 높이 평가하기 어렵지만, 11세기(중세 중반) 이후, 특히 13세기 고중세 이후 유럽 문명의 발전은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근세에 접어들면 명백히 어느 면에서나 가장 선진적인 문명으로 발달한다.

2.4. 근대 유럽: 제국주의, 모더니즘


절대왕정이 완성된 상황에서 유럽은 타 지역을 식민지로 삼아 경제적인 약탈을 가속화했고, 이와 맞물려 18세기 후반에 들어서는 정치적인 혁명과 산업혁명, 자본주의 등이 발달하면서 유럽은 근대 국가로 변신하게 된다. 이후 19세기에는 제국주의가 대두되며 유럽은 제국으로서 전통의 라이벌인 오스만 제국중국 등을 군사적으로 다스리며, 전 세계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러한 양상은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이어지며 유럽은 명실상부한 세계의 지배자로 군림한다.

2.4.1. 절대왕정의 변화



2.4.1.1. 영국의 절대왕정

헨리 8세엘리자베스 1세 때를 정점으로 하고, 명예 혁명(1688)을 겪으면서 입헌체제 확립. 후에 빅토리아 시대를 거치며 의회 주도로 산업혁명, 제국주의로 이어짐.

2.4.1.2. 프랑스의 절대왕정

루이 14세(집권: 1643년 ~ 1715년) 때 전성기 이후, 프랑스 대혁명(1789, 바스티유 감옥 습격사건)으로 왕과 귀족을 처형. 후에 나폴레옹 등장.

2.4.1.3. 독일의 절대왕정

프로이센 왕국의 계몽군주, 프리드리히 대왕(즉위: 1740)과 이후, 철혈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에 의해 독일 제국의 건국(1871)으로 이어짐.
후에 빌헬름 2세에 의해 1차 세계대전(1914)을 일으킴.

2.4.2. 문화: 모더니즘


이 시기에서 유럽이 행한 것의 가장 중요한 점으로 그들 스스로 전통적인 문화와의 단절을 꾀한 모더니즘 사상의 대두를 꼽을 수 있다. 이를 통해 새로운 방식의 문화가 발달되고, 이것이 세계로 전파되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문명의 직접적인 뿌리가 된다. 문화적으로도 20세기의 유럽은 전 세계를 지배했다고 할 수 있다.

2.4.3. 제국주의


[image]
남색으로 칠해진 모든 영토가 한때 유럽식민지였다. 하늘색으로 칠해진 곳은 식민지는 아니었더라도 유럽의 영향권 아래에 있던 영토.
단, 이 지도는 관점에 따라 오류라고 볼 수 있는 지점이 존재한다. 직접적으로는 오스만 제국이 해당되는데, 당시의 수도를 기준으로 하면 유럽 국가가 맞는 셈이니 오스만 제국의 영토 역시 유럽의 지배하에 있다 볼 수 있지만 반대로 오스만을 아시아로 본다면 잘못된 지도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러시아의 경우 수도 모스크바는 유럽이고 시베리아는 아시아니, 러시아와 오스만을 같은 기준으로 적용한다면 일단 위 지도는 틀리진 않았다.
또 미국의 오리건을 비롯한 서북부 역시 독특한 이유로 식민지배로 간주되지 않은 것인데, 서구 열강들이 국경선 긋기 놀이할 때 서로 제대로 합의를 못해서 무주공산이었단 이유로(...)
그 외의 특이사항은 조선으로, 조선은 유럽이 아닌 일본 제국에 의해 지배 당하여 유럽에게 지배 당한 적이 없는 몇 안 되는 국가에 해당된다.

2.5. 세계대전


이후 유럽인들은 새로운 시대에 대한 잘못된 판단, 그리고 떨어지는 생산성으로 적자로 돌아선 식민지 체제 등으로 말미암아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며 큰 충격을 받게 된다.
뒤이어 유럽 문명의 자식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이 1차 세계대전 이후 최강자로 떠오르기 시작했으며, 반대로 유럽은 20세기 중반에 들어서 식민지 등을 포기하고, 국제연맹 해체 후 유엔으로 재설립되면서 본부가 미국 뉴욕으로 옮겨지는 등 세계의 주도권을 미국소련에 넘겨줄 수밖에 없는 현실을 직시하게 된다.

2.6. 유럽연합


세계대전과 같은 공멸의 위험성에 대한 반성과 유럽을 뛰어넘는 새로운 '초강대국'들과의 경쟁에 대처하기 위해 유럽연합이 발족하게 되었긴 하지만, 유럽 특유의 분열 지향적 전통과 그것이 실제로 장점으로 작용했다는 점을 그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완전한 통합으로 가지는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유럽연합이 어떠한 방식으로 유럽통일을 이뤄내야 할지에 대해서는 유럽연합 내부에서도 유럽연합이 처음 발족했을 당시부터 여러모로 의견이 갈리고 있다. 미국이나 러시아 등과 같은 완전한 연방제 국가로 통합하는 방식으로 지역의 통일을 이뤄내야 한다는 의견과, 그렇게 완전한 연방제 국가로 가는 걸 반대하고 대신 지금과 같은 국가연합 단계의 통합을 형식상 유지한 상태에서 유럽연합의 실질적인 권한과 권력을 연방제 국가와 비슷한 수준으로 강화하는 방식으로 지역의 통일을 이뤄내야 한다는 의견으로 갈리고 있고, 전통적으로 완전한 연방제 국가로 통합하는 것을 반대하고 국가연합 단계의 통합을 유지하면서 지역의 통일을 추진해야 한다는 후자의 의견이 우세한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때문에 유럽연합이 궁극적으로 어떠한 방식의 통일을 최종적인 목표로 설정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는 공식적인 발표는 딱히 행해지지 않고 있다. 유럽연합이 처음 발족했을 때부터 이 부분에 대해서는 유럽 지역 전체의 통합을 추구한다는 두루뭉실하고 애매한 목표 이상으로는 명확하게 무언가가 결정된 바가 없어서 구체적으로 어떠한 방식의 통일을 최종적인 목표로 하는가에 대해서는 그다지 확실하게 표명된 것이 없었고, 지금도 점진적인 통합을 추구하는 유럽연합의 특성 덕에 확실한 결정은 내려지지 않고 있다.
2010년대 이후 유럽연합은 유로화 사태, 유럽 난민 사태,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라는 악재가 잇따라 겹치며 분열될지도 모르는 어두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로마 제국 이래 누렸던 과거의 영광을 두 번 다시 회복할 수 없을 것이란 전망까지 나오는 상황이다.

3. 관련 항목



[1] 우리나라에선 고대 로마를 제국주의 성향을 띤 국가로 오해해서 무식하게 전쟁만 치르면서 노예 부려먹고, 속주인들 학대하는 그런 국가로 착각하는데 절대 아니다. 오히려 지금봐도 대단한 식민 정책을 펼쳤다. 항목 참조.[2] 갈리아의 투르네 지방에 정착한 클로비스 1세(466년 ~ 511년). 메로빙거 왕조를 세움.[3] 클로비스는 보통 게르만의 전통 종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 여겨지지만, 아리우스파로 개종도 고려했거나, 아리우스파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했다는 설도 있다.[4] 사실 이 시기는 동로마 제국이 랑고바르드족 등 적대적 이민족들로부터 군사적으로 로마를 지켜주던 시기라 황제의 권위가 강할 수밖에 없었다.[5] 물론 로마 황제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가 항상 같은 편이었던 것은 아니고, 로마 황제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를 견제하기 위해 로마 교황을 끌어오는 경우도 있었다.[6] 궁재 출신의 카롤링거 가문이 메로빙거 가문의 왕을 몰아내고, 스스로 카롤링거 왕조를 세운 후, 카롤루스 대제(768년 ~ 814년) 때 전성기를 맞이함.[7] 동프랑크 왕국, 서프랑크 왕국, 중프랑크 왕국[8] 이때 아비뇽 유수도 발생한다.[9] 물론 뒤에서 설명하듯 해로를 통한 무역은 이슬람이 먼저 시작했다. 인도, 중국, 동남아시아, 아프리카까지 유럽은 이슬람을 모방했다. 왜 이슬람의 무역과 혁신이 단절 둔화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10] 사실 일반화시켜 이야기하는 것일 뿐 실제로는 중세에 이미 후진성의 문제가 대부분 극복되었다. 언급된 물건 중 화약은 13세기 초에 이미 수입되었고, 기계식 시계는 소형화되지 않은 중세에는 수출품이 아니었으며 중국과 비슷한 시기 유럽에서 발명되어 16세기 이후에는 오히려 동양에 수출되었다. 나침반 또한 근래에는 중국에서 발명된 것과는 별개로 기술적인 영향을 받지 않고 13세기경 유럽에서 독자적으로 발명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또한 고형 나침반의 경우 확실하게 유럽에서 동양으로 역수출된 것이다). 종이의 경우 '유럽'이라기에 애매하기는 하나 11세기 이베리아 반도에 이미 전파되었으며 15세기에는 중부 유럽을 포함한 각지에서 이미 공장식 제지소가 돌아가며 이전의 양피지를 대체하고 출판 혁명을 일으켰다 (이 시기 유럽은 아랍에까지 대량으로 찍어낸 종이와 서적을 수출할 정도였으며 베니스의 출판사는 쿠란을 인쇄하여 이슬람권에 공급했다). 남은 것은 도자기 정도인데, 이는 18세기 정도나 되어서야 유럽산이 우위를 점하지만 유럽과 아시아간에 오고 갈 정도의 도자기는 특수 기술이 필요한 사치품에 가까운 것이므로 문명 수준을 논하기에는 큰 의미가 없다. 마야 문명의 1년이 유라시아의 1년보다 정확했다고 해서 16세기까지 마야 문명이 유라시아 문명보다 발전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 아닌가?[11] 사실 유럽과 타 문명권의 격차가 벌어진 경위는 지금까지 풀리지 않는 난제다. 유럽은 세계에서 인구에 영향을 줄 정도의 대규모 전쟁이 가장 많이 벌어진 지역이며 또다른 주요 문명권인 아랍과 인도 역시 거의 항상 분열되어 있었다. 쇄국 정책 또한 중국 문명에만 해당되는 이야기이며 아랍과 인도는 유럽과 계속해서 교류했다.[12] 흔히 산업혁명 전까진 동양이 앞서 있었는데 산업혁명 이후로 추월당했다는 인식이 있지만 그 전에도 이미 거의 모든 분야에서 유럽이 앞서 있었다. 기술적 분야에서는 그야말로 넘사벽. 정화의 함선보다 산타마리아 호가 작으니 더 기술력이 떨어진다는 의견도 있는데, '''더 작은 함선으로 더 먼 거리를 항해했으니 오히려 그 반대다.''' 이 시기 중국이 유럽과 대등하다고 할 수 있는 분야는 인구 부양과 직결된 농경 정도이며 오스만은 전적으로 유럽에서 수입되는 기술과 유럽 출신 개종자에 의존하게 된다.[13] 물론 중세의 종교성은 근대 이후 무수한 비판을 받아온 존재이며 스콜라 철학이 신학의 '시녀'라는 말도 있지만, 10세기 이전 이미 정치 권력과 일체화된 신학과는 다른 길이 뚫려있다는 주장은 충분히 급진적이다. 현대에 비교하면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아닌 다른 정치의 길이 존재한다'면서 그런 정치학을 대학에서 공공연히 강의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당연히 요즘 이러면 국정원 같은 곳에서 전화가 걸려 오듯(...) 대학 교수들이나 스콜라 철학을 연구한 신학자들이 정치적 상황에 따라 이단으로 몰려 파문당하기도 했다.[14] 이러한 관념을 '고귀한 야만인(noble savage)'이라고 한다. 타국을 멸시하면서도 자국의 이상주의를 타국에 투영해 타국을 외면상 칭찬하는 것이다. 아메리카 원주민에게서 근본적인 인류의 순수함을 찾을 수 있다거나, 동양의 <논어>, <맹자>, <주역> 등에 도덕, 수학 등 분야의 순수성이 갖추어져 있다거나 하는 식의 주장을 일컫는 관념이다. 이를 기반으로 '아니 저 동양인들은 저렇게 순수한데 하느님 믿는 우리가 이러면 되나염?'하는 것이 기본적인 논리 구조. 이런 얘기할 때 가장 많이 끌려 나오는 라이프니츠가 강희제 시대의 중국을 찬탄한 것은 시기적으로 재정 지출이 말 그대로 심각했던 군주인 루이 14세의 프랑스를 보고 프랑스를 비판하기 위해 이런 말을 한 것이었고, 볼테르몽테스키외가 청이나 페르시아를 찬탄한 것은 프랑스 혁명 전야의 프랑스를 비판하기 위해 그런 말을 한 것이었다. 이러한 배경 없이 단순히 이들이 동양을 찬탄했다고 보는 것은 매우 단편적인 해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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