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려동물
1. 개요
伴侶動物, Companion animal
정서적으로 의지하고자 가까이 두고 기르는 동물. 1983년 오스트리아에서 처음 나온 Pet→Companion animal 개칭 제안이 국내에 들어와, 애완동물이라는 표현에 대한 정치적 올바름에 대해 논의가 이루어졌다. 완구(장난감)처럼 유희의 대상이라는 뉘앙스 때문이다. 이에 '애완동물'을 대체할 용어로 등장했으며, 표준국어대사전에 등록되고 법령에서 공식적으로 사용되는 등 용어의 입지가 넓어지며 '애완동물'과 비슷한 수준으로 사용되고 있는 말이다.
애완동물과 정서적 교감을 하여 '동무'처럼 가깝게 느껴진다면 반려동물이 될 것이다. 손님이 기분 나쁘게 느껴지면 손놈이 되는 어감차이와 비슷하다. 본디 반려란 '짝이 되는 동무'란 뜻이나 실제로는 캣맘[1] 처럼 자녀를 입양하여 '보호자'가 되는 위치에 가까우며, 법적으로도 미성년자가 사고치면 보호자인 친권자가 법적 책임을 지듯 반려동물이 사고치면 보호자인 주인이 법적 책임을 진다. 따라서 문자 그대로 '반려관계인 동물'을 뜻한다기보다는, 동등한 반려관계처럼 동물을 대우해줘야한다는 뉘앙스가 강하다. 한때 언론에서 장애인이란 표현 대신 '벗 우'자를 써서 장애우로 쓰던 상황과 유사하다.[2]
2. 용어의 정의
2.1. 표준국어대사전
표준국어대사전의 '반려동물'의 정의는 위와 같다. 한편, '애완동물'의 정의는 아래와 같다.사람이 정서적으로 의지하고자 가까이 두고 기르는 동물. 개, 고양이, 새 따위가 있다.
두 단어의 정의를 비교해보면 표현상의 차이만 약간 있을 뿐 가까이 두고 기르는 동물이라는 점에서 맥락을 같이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좋아하여 가까이 두고 귀여워하며 기르는 동물. 개, 고양이, 새, 금붕어 따위가 있다.
2.2. 동물보호법 시행규칙
대한민국 동물보호법 제8조 제2항 "누구든지 동물에 대하여 다음 각 호의 학대행위를 하여서는 아니 된다."에서 제3호의2 "'''반려(伴侶) 목적으로 기르는 개, 고양이 등 농림축산식품부령으로 정하는 동물'''에게 최소한의 사육공간 제공 등 농림축산식품부령으로 정하는 사육ㆍ관리 의무를 위반하여 상해를 입히거나 질병을 유발시키는 행위"가 있다. 이 호의 시행 규칙은 "제8조제2항제3호의2에서 "'''반려(伴侶) 목적으로 기르는 개, 고양이 등 농림축산식품부령으로 정하는 동물'''"이란 '''개, 고양이, 토끼, 페럿, 기니피그 및 햄스터를 말한다.'''"라고 나와 있다. 반려동물의 기준이 특정 동물들로 한정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외의 법령에서도 이런 동물들을 지칭할 때는 '애완동물'이 아닌 '반려동물'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3. 용어 관련 논란
애완동물(pet)의 '완'자가 '완구류'할 때의 완(玩), 즉 동물을 희롱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기에 반려동물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주장이다. 현재는 이 단어가 어느 정도 대체하는데에 성공해서 반려동물과 애완동물이라는 두 단어가 공존하고 있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이 자신이 쓰는 단어를 강제하는 행보를 보여 작은 논쟁이 가끔씩 일고있다.
다음 웹툰 개와 토끼의 주인 작가가 이 문제에 대해 '근래의 애견가들이 자신들 사이에서 쓰이는 반려동물이라는 신조어를 애완동물이라는 말을 쓰는 사람들에게 강요하면서 감정의 골을 만들고 있다.'고 주장하는 내용을 그렸다가 '반려동물'이라는 말을 주장하는 이들과 만화 내용을 지지하는 이들 사이에 논란이 일어난 적이 있다.
참고로 상단의 만화에서 주된 주제로 삼은 내용은 본 문서에도 상기되어 있는 반려라는 단어에 대한 부적절함과, 반려동물이라는 말을 주장하는 사람들에 의해 애완동물이라는 말의 의미가 변질되었다는 주장이다. 작가는 본래 쓰이고 있는 '반려'라는 의미와는 달리 '인간에 의한 일방적인 관계'라는 점, 더해서 실제로 쓰이는 '반려'라는 의미와는 달리 관계의 성립이 너무나도 가볍다는 점을 언급하였으며, 애완은 가지고 논다는 말이 아니라 사랑하고 놀아주는 관계라는 말이라고 해석하고 있다고 썼다.
나무위키에서도 애완동물 문서의 표제어를 반려동물로 변경하려는 주제의 토론이 수차례 발제되었지만 애완동물이 사용할 수 없는 단어임을 증명하지 못해 무산되었고, 결국 반려동물 문서가 별개 문서로 신설되었다.
3.1. 반려(伴侶)라는 단어의 적절성 여부
동물자유연대 조사에 따르면 현재 한국의 경우 애완동물을 입양 후 '''동물이 죽을 때까지 키우는 비율은 12% 정도'''에 불과하며, 88%가 도중에 애완동물을 유기, 파양, 재분양한다. 이 같은 통계 수치에 따르면 반려동물이라 불릴 수 있는 경우는 극소수인 12%에 불과하기 때문에 모든 애완동물에게 반려동물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가당치도 않은 것이 된다. 대다수의 애완동물은 늙거나 병들거나 직장이나 이사나 휴가 등 생활이 바뀌어 키우기 어려워지거나 귀찮아지거나 싫증이 나서 버려진다. 특히 여름 휴가철에 많이 버려진다. 한국에서 애완동물의 수는 대략 200만을 넘는다고 추산하는데[3] 그중에서 버려지는 동물의 수는 한 해에 10만 마리가 훨씬 넘는다. 매년 5%가 넘는 비율이다. 이는 동물보호소 등에 통계로 잡히는 수일 뿐이고 실제는 이보다 훨씬 더 많다. 개가 병들거나 실증나기 전 한창 어리고 귀여울 때는 '''가족이네, 반려동물이네 하지만 결국 대한민국 애완동물 중 열에 아홉은 버려지고 만다.''' 몇몇 동물들이 버려지는 게 아니라 대부분이 결국은 유기되니 한국의 애완동물의 지위는 반려자나 companion과는 한참 거리가 멀고 귀여울 때는 키우다가 낡으면 버리는 사실상 살아있는 장난감일 뿐이다.
이러한 '반려동물'이라는 단어에 거부감을 표시하는 사람도 많다. 짝이 되는 친구라는 뜻의 반려(동반자, 반려자)란 단어가 과연 사람과 동물의 권력관계를 공정하게 나타내는 용어냐는 의문이다. 언뜻 '미물이 인간의 반려자가 될 수 있겠냐'는 인간우월주의에서 나온 발언이라 착각할 수 있지만 오히려 정반대이다. 사람과 동물의 관계는 대개 사람이 동물을 고르고 돈을 주거나 분양받아서 시작하게 된다. 반대로 동물이 스스로 사람을 고르는 경우는 일부 길고양이의 주인 간택 같은 일화가 있지만 결국 극소수이다. '''동물의 의사는 거의 무시되는 이 관계를 '반려'라고 부르는 것이 오히려 인간 중심이며 관계 왜곡이라는 것'''이다. 동물의 입장에서 생각해봐야 한다는 의미다.
견주들은 자신이 애견에게 가하는 모든 행동들이 다 애견을 위해서라고 말한다. 하지만 실상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에 불과하며 진정으로 애견들이 원하는 것은 거의 없다. 먹이를 주는 것과 함께 놀아주는 것을 제외하면 견주들이 하는 행동의 대부분은 개들이 싫어하는 것들이다. 대표적으로 견주들이 둘째 강아지를 데려올 때 한결같이 하는 말이 첫째가 혼자 있을 때 외로워 해서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애견 전문가들은 개들은 혼자서 키워질 때 가장 행복하며 둘째가 새로 들어오면 극도로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한다. 자신이 혼자 누리던 주인의 사람과 집 공간에서 갑자기 어디서 굴러온 낯선 개가 들어오면 칩입자, 훼방꾼으로 여길 뿐이다. 첫째 개는 죽을(거나 유기될) 때까지 언젠가는 둘째가 원래 자기 집으로 돌아갈 것을 염원하며 산다고 한다. 견주들은 첫째가 커가면서 외모가 못생겨지게 되자 더 귀여운 강아지를 키워보려는 욕구에서 둘째를 들이지만 이를 첫째의 외로움을 덜어주기 위해서라고 핑계대며 스스로를 합리한다고 애견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견주들의 이같은 위선은 강아지를 훈련시키고 규제시키는 거의 모든 행동에 녹아 있다.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사람과 동물의 ''''주종 관계''''다.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외모와 성격을 지닌 동물을 직접 골라서 선택할 수 있지만, 동물은 자신과 함께할 사람이 잘생겼건 못생겼건, 성격이 좋건 드럽건 간에 고르지 못하며 싫든 좋든 일방적으로 선택당하는 입장이다. 어쩌면 동물은 인간과 같이 사는 것 자체를 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 설령 인간과 같이 살길 원하는 동물이라 하더라도 그 많은 인간 중에서 당신과 같은 인간과 같이 살길 원하는지는 결코 알 수 없다. 물론 처음에 그 주인이 맘에 들었건 안 들었건 개는 결국 주인에게 복종하고 따르게 되어 있다. 이는 '''복종 훈련'''을 필수적으로 거치기 때문이다.
주인은 동물을 데려온 후 오랜 기간 동안 동물을 훈련시킨다. 특히 개의 경우 주인이 개보다 서열이 위라는 것을 확실히 인식시키기 위해서 엄격한 복종 훈련을 거친다. 그밖에도 인간의 편의를 위해 강제적인 배변 훈련, 짖음 방지 훈련, 입질 훈련 등을 거친다. 모두 동물의 자연스럽고 본능적인 행동을 억제하도록 강제하는 것들이다. 간혹 이러한 복종 훈련에 거부감을 느끼는 견주도 있지만 애견전문가들은 복종 훈련은 개를 사랑하기 때문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훈련들은 전적으로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훈련일 뿐, 애견인들이 말하는 바와는 달리 개를 위한 것이 아니다. 개 자신을 위해서라면 이런 훈련은 필요없다. 개는 자신의 본능에 따라 행동할뿐이고, 그런 행동들은 개의 입장에서는 전혀 나쁜 행동이 아니며 자연에서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발달시켜야 할 좋은 본능들이다. 다만 사람의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일 뿐이다.
물론 이러한 훈련을 통해 주변의 인간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개가 되어야 비로소 그 개는 인간사회에 섞여살며 동물권을 보장받고 보호받으며 살 수 있기에, 그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훈련은 개를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4] , 이는 결국 '''견주의 만족을 위해''' 애완견을 사람 사회에서 살게 해야 한다는 전제 하에서 개를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일 뿐이지, 애완동물과 인간의 관계 자체가, 동물이 야생에서 살아가는 상태보다 행복하게 만들어 준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설령 개념있는 주인을 만나 애정어린 보살핌을 받고 야생에 비해 안락한 삶을 누리며 결과적으로 행복을 느낀다 하더라도 동등한 입장의 반려라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다고 볼 수 있다.
또 주인은 자신의 편의에 따라 동물의 의사와 관계없이 중성화수술, 즉 성 기능 제거 수술을 행한다. 성은 인간을 비롯한 모든 동물의 삶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종족 번식의 욕구는 개체 보존의 욕구와 더불어 모든 생물에게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본능이다. 특히 본능이 강하게 지배하는 동물에게 있어서 성은 삶 그 자체의 목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며, 개체 보존보다 종족 번식이 우선하는 경우도 흔히 볼 수 있다. 곤충의 경우 성행위를 하고 나서 일생을 마치는 경우가 흔하다. 동물 뿐만 아니라 인간에게도 성욕을 충족하는 과정은 가장 큰 쾌락과 즐거움 중 하나로 간주된다. 인간은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성기를 제거당하는 것을 죽는 것 다음으로 수치스럽게 여긴다. 그러나 죽도록 수치스러운 행위를 자신의 소위 반려동물에게는 별 가책없이 행한다. 이렇게 강제로 성기능을 제거당하고 나면 대부분 성격과 행동 양식에 변화가 생긴다. 반려라고 부르면서도 애완동물의 주거환경을 위해 자신의 성기능을 제거하는 경우는 없을것이다. 오히려 출산을 위해서 키우던 개나 고양이를 남에게 맡기거나 아예 내다버리는 경우는 흔하다.
중성화수술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반려동물을 위한 배려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주인이 짝을 지어줄 형편이 된다면야 굳이 중성화 수술을 시행하진 않으나, 대부분 형편이 여의치 않은 경우에 시행한다. 과거엔 정신지체나 중증의 장애인들에게는 이런 시술을 국가적 차원에서 행하던 시절도 있었으나, 결국 인권문제로 폐기되었단 걸 상기해보자. 그 동물이 애초 인간과 살고 싶어하는 지도 확실치 않은데, 자기 마음대로 쇼핑하듯 데려와서 '''강제 모태솔로'''로 만들어놓고 고통이라도 제거해주겠다고 중성화 수술까지 시킨다는 것은, 동물의 의사는 상관없이 인간들의 만족을 위한 '기쁨조'일 뿐, 동등한 반려관계는 아니다. '''엄연히 '갑'은 인간이기에 맘에 안들면 파양'''된다.
또 인간은 자신을 위해 동물의 발톱을 자르거나 목줄을 채우기도 한다. 동물에게 발톱은 야생에서 생존에 있어 결정적으로 중요한 수단 중 하나다. 때문에 동물들은 스스로 발톱을 가는 등 자신의 방식대로 관리하며 중시 여긴다. 때문에 어린 시절 동물의 발톱을 자를 때 크게 반항하는 경우가 많은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목은 당연히 동물에게 가장 약한 부분이다. 개는 본능적으로 이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사람이나 다른 동물을 공격할 때 본능적으로 항상 목을 공격한다. 목줄을 채운다는 것은 무척 불편할 뿐만 아니라 동물 입장에서도 매우 수치스럽게 느껴질 수 있는 것이다. 또 인간은 자신의 편의에 따라 제모나 염색을 시키기도 한다. 심지어 힘들다 싶으면 동물을 내치고 버리기도 한다.
키우는 동물을 자유롭게 놔두면 이웃에게 피해를 줄 수 있어 동물의 행동은 어쩔 수 없이 통제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사람은 이웃에게 피해를 주는 것과 무관한 부분에서도 동물의 행동을 제한하고 동물이 싫어하는 행동을 강요하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개들이 생존을 위해 본능적으로 이곳저곳에 행하는 마킹(소변)을 금하는 것이 그러하다.
이렇게 사람은 동물의 신체와 자유를 사람의 사정과 편의에 따라 강제로 구속, 억압해왔다. 이런 강제성을 외면하고 동물을 반려자 취급하는 행위는 위선적으로 보일 수 있다. '원했든 원치 않았든 동물을 편의에 따라 고르고 제어하지만 삶의 동반자로서 사랑하고 아낀다.'라는 모순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다른 존재를 돈을 주거나 해서 구해 기르는 관계가 '반려'라고 할 수 있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렇기에 이 관계의 강제성을 인정하고 가책을 느끼는 사람들은 '반려동물'이라는 말을 거부한다. '애완동물'이란 표현에는 주종 관계의 의미가 들어 있다. 이는 사람이 동물을 아래에 두고 입맛에 맞게 다룬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표현이다.
대개 짝인 동물의 의지와는 관련없이 오로지 인간이 동물을 골라서 기른다. 동물이 자신의 입장을 파악하고 개입과 강요 없이 자유의지에 따라 사람과 삶을 함께하기로 결심했다면, 이를 이상적인 '반려동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동물이 언어를 쓸 줄 안다면 모를까 동물의 의사 확인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이런 관계를 '반려 관계'라고 부른다면 반드시 논쟁의 꼬리표가 붙을 것이다. 반려는 엄연히 양측의 합의가 있어야 성립하는 표현이다.
반려동물이란 단어 사용 비판에 유독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은 인간과 애완동물 사이의 감성적 교감을 인격을 가진 존재들의 교류로 치환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당장 개고기를 반대하는 다수는 "반려동물로 분류되는 특정 생명체를 먹는 이들은 식인종과 똑같은 야만인이다."라고 전제한다. 이는 개와 같은 특정 생명체를 천부인권을 부여받은, 즉 인격을 지닌 존재로 격상시키기에 가능한 귀결이다. 더군다나 이들은 감성 이데올로기, 즉 애완동물 체계 및 극소수의 애완동물들에 대한 특별 대우를 보편적인 절대선으로 단정해서 이를 모든 사회에다 관철시키겠다는 신념으로 무장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애완동물 제도 자체에 대한 비판을 미개함으로 취급해 이를 미리 봉쇄하거나, 자신들의 감수성을 충족시키는 '반려동물'이란 단어 사용을 다른 사람에게도 강제하는 경향이 생긴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런 감성 이데올로기를 공유하는 집단이 애완동물 분양률의 급속한 증가에 맞물려 거대해지고 있으며, 자신의 감성 이데올로기를 충족시키고자 적극적으로 정치적 개입을 꾀하고 있다.
국립국어원에서는 '반려를 짝이 되는 동무(어떤 일을 짝이 되어 함께 하는 사람)로 뜻풀이하고 있으므로 반려동물은 의미적 호응이 부자연스럽지만, 현실적으로 반려동물이 쓰인다는 점을 고려할 때 반려의 확장적 쓰임으로 판단됩니다.'라고 한다. 출처 참고로, 현행법에서도 "애완동물"이라는 표현과 "반려동물"이라는 표현이 혼용되고 있다.[5]
다만 반려라는 단어의 기본 전제가 자신과 모든 것을 평생 함께 누리는 동등한 지위의 관계여야 한다는 주장이 있으나 '''반려는 원래 동료, 친구라는 뜻이다.''' 옛 한시나 고전 산문 등에서도 伴侶는 절친히 어울리는 벗, 길동무 정도로 쓰이고 배우자의 의미로 쓰이는 경우가 오히려 훨씬 드물다. 물론 시대에 따라 뜻이 변하는 경우는 흔하지만 현대 국어사전에도 '반려'는 '짝이 되는 동무'를 기본 의미로 둔다. 즉 절친이나 선후배간을 반려라고 하지 않는다(표현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히 오류다. 물론 인간과 인간이 기르는 동물이 진정한 의미에서 반려(친구)일 수 있는지는 다른 차원의 문제므로 제쳐두고, 뜻이 통하여 깊이 어울리는 사람 대 사람의 관계는 모두 '반려'라고 할 수 있다.
3.2. 반려동물이 주인을 사랑하는지에 대한 여부
과연 개나 고양이 같은 반려동물들이 정말로 주인을 사랑하는지, 아니면 먹이를 주니까 좋아하는 척 하는 지는 예전부터 관련 학계에서 논의되어 왔던 궁금중 중 하나였다.
다만, 이는 동물에게 '사랑'이란게 존재하냐는 근원적인 문제가 있다. 실제 동물들이 '부부'처럼 결혼하여 살지도 않고, 그냥 교미 한번 하고 헤어지기도 하며 본능대로 행동하는데 인간에게라고 다르지 않을테니, 어디까지를 '사랑'의 범위로 봐야하는가하는 문제가 있다.
다람쥐나 햄스터처럼 철저히 먹이로만 핸들링이 가능하며 며칠만 떨어져도 핸들링이 어려워지는 동물과는 달리, 개와 고양이는 그 이상의 교감은 가능하다. 즉, 오래 떨어져 있어도 옛 주인을 알아본다는 것이며, 주인이 혼자 자고 있을 때 스스로 주인 옆에 와서 자기도 한다는 것이다. 학대당한 동물은 주인을 보면 무서워하거나 불안해하고 옆에 가려하지 않으려 하므로, 굳이 스스로 주인 옆에 가서 잔다는 것 자체가 주인 옆에서 편안함을 느끼며 좋아한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멜로물에서는 실연당한 여성이 집에 와서 자신을 반기는 반려동물에게 "넌 나를 떠나지 않겠지? 계속 내 곁에 있어 줄거지?"라며 껴안고 엉엉 울며 상처받은 마음을 위로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여성을 잠깐 데리고 놀거나 이용해먹다가 미련없이 손절해버린 옛 연인보다는 오히려 반려동물이 주인을 더 사랑한다고 볼 수도 있다. 실제로 세진컴퓨터랜드의 CF모델로도 뛰었던 하얀마음 백구처럼 충성심이 강한 개는 새로운 주인이 더 멋진 환경과 먹이를 제공해도 원주인을 못잊어 탈출하여 원주인 집을 험난한 여정 끝에 거지 꼴이 되어 다시 찾아가 주인이 감동하여 다시 키우게 된 미담이 보도되기도 할 정도니, 이는 이권때문에 배신을 밥먹듯이 하는 인간들에게 상처받은 뒤 인간보다 개를 더 좋아하게 된 사람들의 주된 원인으로 꼽히기도 한다.
악당의 편에선 ‘고양이’ 수난시대 기사처럼 카리스마있는 악당들이 고양이를 '오른팔 격'인 동반자로 데리고 있는 경우가 많다. 아무래도 설정상 '인간 혐오자'에 가깝게 차가운 포스를 뿜어내는 악당이므로, 애교가 많고 살가운 개보다는 얌전한 고양이가 어울려서인지 고독한 악당의 곁에는 고양이가 따라붙는 경우가 많다. 스머프의 악당 마법사인 가가멜은 물론, 형사 가제트의 악당 닥터 클로우도 고양이를 기른다. 부하들에게 뒤통수를 하도 맞으며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조직의 보스가 부하들에게는 선뜻 마음을 주지 못하고 '''배신을 하지 않는 동물'''에게 마음을 주기도 한다. 항상 주변을 경계하여 불안하고 지친 마음을 동물을 통해 위로하는 것이다. 영화 '디시에르토'에서는 불법 밀입국자들을 '취미'로 사냥하며 죽이던 미국의 백인 아재가, 자신의 유일한 가족이자 친구같았던 셰퍼드가 밀입국자에게 달려들다 죽자 절규하며 "넌 죽은 목숨이야! 죽여버릴거야!"라며 분노가 폭발한다. 그에게 있어서 같이 살던 셰퍼드는 불법 밀입국자의 목숨과는 비교할 수 없이 소중한 '가족' 그 자체였다. 이 셰퍼드도 주인을 잘못만나 그렇지 상당한 충성심을 보이다 죽는다.
먹이를 주니까 좋아하는 척 하는 거 아니냐는 것은, 먹이를 안주는 사람도 좋아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반박이 된다. 실제 먹이는 부모가 주고, 아이는 그냥 같이 놀아주기만 해도 아이를 더 따르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사람도 제 밥그릇(이권)을 중시'''한다. 시사방송에서 결혼업체에 대해 다뤘는데, 어느 여성은 업체가 소개시켜주겠다는 남성이 의사였음에도, 응급의학과라고 하니 확 돌변하며 자기가 요가 배우고 많이 노력하고 있다며, 피부과나 성형외과처럼 돈이 되는 의사를 원했다. '''이 여성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인가, 돈(먹이)을 사랑하는 것인가?''' 돈보고 결혼하면 사랑이 아닌가? 돈보고 결혼했어도 '정'이 들 수도 있는데, 실제 서로 '사랑해서' 결혼한 부부들도 열렬한 사랑은 초반 잠깐이고 그 다음부터는 '정'으로 살기도 한다. 어쨌거나 '''서로 극혐하지 않고 그럭저럭 산다면 원만한 부부관계로 판단하듯, 동물이 주인을 꺼리지 않고 곁에서 편안함을 느낀다면 원만한 동거관계로 판단'''할 수 있다.
근래 의학계에서는 반려동물의 옥시토신 분비에 대한 연구가 보고되어 있다. 신경전달물질의 하나인 옥시토신 분비량은 사랑의 정도를 계량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6] 다만 옥시토신은 안정된 상황에서도 많이 분비되며 이것이 사랑, 애정 때문인지 안정된 상황 때문인지에 대해서는 이론이 있다.
정상적인 반려견이 주인과 있을 경우 실험대상 개들은 평균적으로 57.2%, 고양이는 12%의 옥시토신이 분비되는 실험결과가 나왔다. 일반적으로 긍정적인 만남의 대상이 초면일 경우 약 15%에서 25%의 옥시토신이 방출되며, 지인이라면 25%에서 50%까지 옥시토신이 상승한다. 그리고 옥시토신 배출이 50% 이상일 경우는 자녀나 배우자같이 우리가 정말로 아끼고 사랑하는 대상일 경우이므로 개가 훨씬 인간을 많이 따른다고 볼 수 있는 실험결과였다.출처 물론 링크된 기사에서는 개 10마리와 고양이 10마리가 실험대상이었기에 표본의 한계가 존재하고, 연구자 역시 고양이가 사는 집에서 실험했다면 더 많은 옥시토신을 방출했을 것이라고 대답하기도 했다.
원래 고양이 자체가 영역동물인지라 낯선 실험장소에서 스트레스를 훨씬 많이 받았을테니 '안정된 상황'에서 많이 분비되는 옥시토신이 개보다 적을 수 밖에 없기에 각자의 집에서 측정해야 보다 정확한 실험이었을텐데 그러지 못한 한계가 있다. 실제 개는 산책을 안시키면 학대로 분류할 정도로 바깥구경도 시켜줘야 하지만, 오히려 고양이는 영역 동물이라 낯선 곳에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으므로 산책을 권장하지 않는다. 개는 집에서 노는 것보다 모처럼 주인이 다른 곳에 데리고 나가 같이 놀면 더 만족할 가능성이 크지만 고양이는 정반대인데, 그럼에도 어느 정도 긍정적인 느낌은 있는 12%였다는 것은 오히려 고양이도 주인과 같이 있으면 낯선 곳에서도 일정 부분 안정감을 느낀다고 해석하면 될 것이다.
2010년대 중반부터 이에 관한 연구가 활성화되고 있고 pet oxytocin 등으로 검색하면 위 출처 외에도 관련 논문을 읽을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연구가 활성화된 것은 불과 몇 년 사이에 일이며, 여러 연구 주제들이 초기에 특정 목적 편향적으로 연구되었다가 나중에 여러 반박 연구 결과로 인해 묻히는 경우도 부지기수이므로 아직까지 이런 몇 가지 연구 결과들로 확증하기에는 이르다 볼 수 있다.
물론 옥시토신만으로 사랑의 정도를 완벽하게 측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옥시토신이 사랑의 척도라는 것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다. 옥시토신은 상대에 대한 애착과 더불어 안정된 상황에서 분비가 높아진다. 무리 동물인 개는 그룹의 리더가 있어야만 안정감을 느끼고 리더가 부재하면 불안감을 느끼는 동물이다. 비록 개는 자신이 충분히 강하다고 인식하며 리더와 서열 싸움을 하여 스스로 그룹의 리더가 되려는 본능을 가지고 있어 리더에게 도전하는 경우도 많지만 어쨌거나 자기보다 강한 존재를 인정한다면 그 존재로 인해 안정감을 얻는다. 때문에 개들은 심지어 강아지 공장의 주인도 자신의 주인이라 여기기 때문에 꼬리를 마구 흔들고 반가워 한다.
사람들도 사이비 종교에 빠진 사람들은 자신들을 착취하는 교주를 최고존엄마냥 열성적으로 찬양하며 반가워하기도 하고, 노예가 주인에게 충성심을 보이기도 한다. 부부관계라고 할지라도 아내가 매맞으며 순응해서 복종하거나, 혹은 아이문제나 이혼하는게 두려워서 참고 살기도 하고, 혹은 돈때문에 살기도 하고 어디까지를 사랑으로 봐줄 것이냐, 스토커는 사랑이냐 집착이냐, 의처증과 의부증도 사랑이 지나친건지, 애초 사랑이 아닌 소유욕이었던건지 사랑이란 정의 자체에 많은 논쟁이 있으므로 동물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다. 여하튼 동거인과 같이 있을 때 편안함을 느낀다면 그럭저럭 원만한 동거관계라고 판단하는데, 개는 일단 주인과 있을 때 편안함을 느끼는 것은 사실이니 사람을 많이 좋아한다고 판단할 수는 있을 것이다.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들 중에는 개가 너무 사람을 따르고 주인 곁에 착 달라붙어있으려 하여 그게 부담스러워서 독립적인 성격의 고양이를 기르는 원인이 되기도 하니 새롭게 실험으로 알게된 내용이라기보다는 이미 알고 있는 상식을 과학적인 데이터로 증명한 것에 가깝다. 개가 고양이보다 훨씬 주인에게 애교가 많고 살갑기에 반려동물로 개가 더 많이 선호되는 것이니 말이다. 한국에서도 개는 친숙했으나, 고양이를 키운다는 것은 일반적이지도 않았을 정도로 확실히 개가 사람을 좋아하기는 한데, 다만 공동주택이 대세가 되며 개는 주인과 떨어지면 분리불안 증세를 보이거나 시끄럽게 짖기도 해서 소음문제 때문에 비교적 조용하고 독립적인 고양이를 기르는 사유가 되어 고양이를 키우는 인구도 많이 늘어났다.
사랑하는 관계에서는 경계를 풀고 심리적으로 편안함과 안정감을 느끼며 '무장해제'상태로서 옥시토신이 분비되므로 사랑의 잣대로 판단한다. 다만 현대사회에서는 '도덕적 올바름'의 잣대를 들이대므로 논란이 생기는 것인데, 이를 동물에게까지 들이대는 것은 과하단 지적도 있다. 예를 들어 과거 왕에게 복종하던 궁녀들이 왕과 잠자리를 하며 만족하니 당시엔 '사랑'이었지만, 현대사회에서는 안희정 성폭력 사건처럼 위력에 의한 성폭력 사건이므로 사랑이 아니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과거에는 김기덕 감독, 조재현 주연의 나쁜남자처럼 스토커같이 쫓아다니던 동네 총각에게 겁탈당해 여성은 어차피 순결을 잃었다며 체념하고, 또 과거 분위기상 동네에서 흉볼 것이 두려워 결혼을 하여 부부가 되는 사례가 있었다. 금슬좋아보였던 모 유명개그맨의 부인이 폭로하기도 했으며, 심지어 법원에서 총각 미래 망친다고 피해자에게 그냥 결혼하라고 중재한 사건도 있었다. 그땐 사랑이었지만 지금은 아니라고 판단한다. 애초 이는 '사랑'이란 정의에 당사자의 생각만이 아닌 도덕적 올바름의 잣대를 들이대어 생기는 논란이므로, '진정한' 사랑이냐 아니냐 논란이 생기는 '사랑한다'보다는, '주인을 좋아한다, 따른다' 정도만 옥시토신으로 입증되었다고 보면 될 것이다.
3.3. '애완(愛玩)'의 동물비하적 단어 여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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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반려의 적절성 여부와 별개로 사실 이쪽이 가장 근본적인 논쟁이라 할 수 있다. 상술했다시피 완(玩)이라는 한자의 뜻 중 '희롱하다'는 것이 있어 동물을 희롱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 나온 단어이기 때문.
정확히는 '희롱'한다기보다는, 장난감처럼 여기는 뉘앙스가 있어서 그렇다. '완구(玩具)'는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장난감이란 뜻인데, 그래서 어감이 좋지 않았던 것이다. 일단 한자 자체가 '희롱할 완(玩)'이란 뜻이며, 물론 '사랑하다'는 뜻도 있으나 '장난하다, 업신여기다, 깔보다, 구경하다' 등, 유희의 대상이란 어감이 강하다.
그런데 완월장취(玩月長醉)에 달을 벗[7][8] 삼아 오래도록 술을 마신다는 뜻이 있듯이, 반려동물에 내포된 의미는 이미 '''애완동물에 포함되어 있는 뜻'''이다.[9]
거기다가 정치적 올바름/비판#s-2.2 문서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실제로 애완동물이 동물을 희롱한다는 의미로 사용된 용례가 얼마나 있는지도 의문이다. 설령 애완이라는 단어가 동물을 희롱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고 해도 실제로 그렇게 사용하는 사람이 있느냐 없느냐는 천지차이이기 때문이다.[10] 그러나 애완동물이라는 단어는 그저 '자신이 기르는 동물' 정도의 의미만 가지고 있을 뿐 그런 의도로 사용했다는 경우는 '그럴 수도 있다'는 반려동물측의 주장밖에 없고 실제 용례는 찾아볼 수 없다.[11]
비슷하게 나쁜 의도는 없지만 인종차별적 단어로 사용이 자제되는 흑형과 비교하자면 이쪽은 당사자들이 '''정말 불편한 반응을 보이기 때문에 사용을 자제'''한다. 그런데 애완동물은 사용되는 대상인 동물들이 그런 반응을 보이는 주체가 아니라는 점에서 차이가 크다. 동물들의 입장에서는 자신을 애완동물로 부르나 반려동물로 부르나 자기들 알 바가 아니다. 어떤 단어를 쓰든 자신을 아껴주고 챙겨주느냐만 따질 뿐이다.[12]
4. 대체할 만한 표현
반려동물이라는 표현이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기만하고 위선을 조장한다며 논란이 되고 있다면, 그런 논란의 여지가 없는 중립적인 표현을 쓰는 것도 고려해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 동거동물: '자신과 함께 살고 있는 동물'의 의미만을 담고 있다. 동물과 인간이 동등한 반려자 관계라는 의미는 포함돼 있지 않으며, 동거에 상호 동의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를 논할 필요가 없는 표현이다.
- 집동물: '거의 집 안에 있는 동물'의 의미를 담음으로써 야생동물과 구분할 수 있고, '축(畜)' 표현을 쓰지 않았으므로 인간이 고기를 얻기 위해 키우는 '가축(家畜)'과도 구별된다. 그리고 애완동물, 반려동물 등은 4음절인 반면 이쪽은 3음절이어서 더 경제적이다.
- 친구동물
- 가족동물
5. 관련 문서
[1] 외국에서의 캣맘은 자신의 고양이에 각별한 애정을 쏟는 여성들을 뜻한다.[2] 장애우란 표현은 장애인을 기피하고 차별하는 정서가 강한 한국에서 친구처럼 대해주자는 의도였으나, 정작 장애인들이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 묻혔다. 하지만 아직도 일부에서는 장애인이라고 하면 '장애우라고 합시다'라는 댓글을 다는데, 이는 마치 애완동물이라고 쓰는 사람에게 반려동물로 쓰라고 하는 상황과 유사하다. 물론 반려동물이 실제로 '반려자'처럼 동등한 관계는 전혀 아니지만 반려자처럼 대해주자는 의도였던 것처럼 장애우도 그러했으나, 오히려 장애우라는 단어의 사용으로 인해, 장애인을 누구나 '친구'처럼 도와줘야하는 자립적이지 못한 존재로 인식된다고 하여 현재는 잘 쓰이지 않는다.[3] 농림축산식품부의 공식통계로는 개는 160만 마리 정도다.[4] 당연히 이 문단의 의의는 개에게 훈련을 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5] 반려동물이라는 단어가 처음 공론화되었을 때 확실한 반려자라고 할 수 있는 배우자나 자식에게 성대 제거, 거세 등을 강제적으로 동의없이 할 수가 있냐는 반발이 터져나왔지만, 이것 때문에 점점 사그러 들어가는 추세다.[6] 요즘엔 기술적으로는 fMRI로 이를 측정할 수 있다.[7] 비슷한 또래로서 서로 친하게 사귀는 사람이나, '''사람이 늘 가까이하여 심심함이나 지루함을 달래는 사물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8] 완월장취에서 완의 훈독은 '희롱할 완'으로 '''벗으로의 의미도 아니고 사랑한다는 의미는 더더욱 아니다.''' 또 희롱할 완자에 '사랑하다'는 의미가 있다고 하지만 정작 사랑의 의미로 희롱할 완자를 쓴 사용례를 찾기 힘들정도로 극히 드물다. 한자라는게 같은 글자에 여러가지 훈독이 가능하다고는 하지만 사실상 사회적으로 폭넓게 쓰이는 의미 한두가지로만 쓰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희롱할 완'자를 인명용으로 쓸 경우 '보배 완'으로 훈독하기는 한다. 하지만 애완동물의 완자는 인명의 용례를 확장한 것도 아니고 사랑의 의미를 강조한것도 아니다. 완구와 같은 의미의 완자에 불과할 뿐이다. 실제로 반려인들이 반려동물에게 가지는 감정이나 반려인들에게 요구되는 책임감이나 태도를 고려해볼 때 애완이라는 단어는 적합하지 않다. 단적으로 얘기해서 애완과 똑같은 의미의 '완'을 쓰는 완구에 책임감을 가질 것을 요구하는 경우는 없지 않은가?[9]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애완은 어느 용례에서도 반려의 의미를 내포하지 않는다. '''만약 애완이란 단어가 반려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면 연인이나 부부사이에서도 쓰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리고 애시당초 본문의 '완월'을 진짜로 친구처럼 대한다는 해석 자체가 틀렸다. 그냥 달 구경한다는 뜻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10]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애완동물이란 단어의 사용을 지양하자는 것이다. 언어가 사고를 결정한다는게 무리한 주장일 수는 있다. 그러나 대상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언어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11] 애완동물이란 단어가 집에서 기르는 동물을 지칭하는 일반적인 명사로 쓰이면서도 '''애완의 완을 해석할 때 완구의 경우처럼 '희롱할 완'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었지 '사랑하다'라는 의미는 한자를 어느정도 아는 사람들조차도 생각지도 못했다. 그리고 '완'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사랑하다'로 쓰이는 용례도 거의 없다. 오히려 반려동물이란 용어가 어느정도 퍼지면서 반려동물이란 단어에 거부감을 느끼던 사람들이 갑자기 '완에는 '사랑하다'라는 의미도 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본문의 내용과는 달리 애완동물을 고수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명확한 용례를 제시하지 못한 채 반려동물이란 단어에 반대하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위의 완월에 대한 엉터리 해석과 애완에 반려의 의미도 내포돼있다는 엉터리 주장이 나오는 것이다.[12] 대상이 특정 단어를 접했을 때 느끼는 감정도 중요하지만 그 단어를 쓰는 집단이나 개인이 그 단어의 지칭 대상을 어떻게 여기는지에 대한 인식변화를 위해서 기존에 쓰이던 단어를 다른 단어로 대체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복지분야에서 정박아를 지적장애인으로, 스포츠에서 용병을 외국인 선수로 바꿔 부르는 식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