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난

 

法難
1. 개요
2. 역사 속 사례


1. 개요


불교에서 불교 탄압을 이르는 말. 즉 훼불(毁法)·폐불(廢佛)·멸불(滅佛)사건 등이 가장 큰 예이다.
대한민국에서는 대한민국 제5공화국 출범을 앞두고 집권 신군부 세력이 불교계 정화를 명분으로 승려들을 고문, 감금하고 누명을 씌웠던 사건인 10.27 법난(1980년)이 유명하다.

2. 역사 속 사례



2.1. 중국의 삼무일종법난


중국 남북조시대당나라, 오대십국시대 때에 걸친 네 차례의 법난이 유명한데 이를 삼무일종(三武一宗)의 법난이라 한다. 항목 참조.

2.2. 조선숭유억불(배불숭유)


잘 알려졌다시피 성리학에 기초한 것. 물론 그 이면에는 고려시대 기성세력(권문세족)과 연계된 불교세력의 부정부패에 대한 신진사대부 세력의 반감도 포함되어 있었다. 다만 디테일하게 표현이 조금씩 다르다.
  • 도첩제를 실시하고 사원재산을 환수하고 국사, 왕사를 폐지한 태종과 여러 종파를 합병[1]시킨 세종대왕(초기)은 배불(排佛)[2]
  • 연산군때는 그야말로 불교 자체를 부정하는 박살 수준의 파불(破佛)
  • 성종의 경우는 도첩제 폐지 등 때문에 척불(斥佛)이라고 한다.
굳이 따지면 배불<폐불<척불<<파불이라고 할 수 있는데, 폐불(廢佛), 배불, 척불은 혼용되는 편이며, 중종의 '''폐불'''은 최후의 법난이란 점에서 의미를 두기도 한다.[3]
세조대에 일시적으로 승유억불 정책이 폐지되어 상당수 불경들이 한글로 번역되기도 했으며, 성종대 이후로 승유억불 정책이 부활했지만 명종대에 문정왕후가 수렴청청을 하면서 불교는 상당히 부활했으며, 문정왕후 사후에 다시 탄압을 받게 되었지만 임진왜란승병의병활동 이후로는 승려들에 대한 지위가 일부 격상되었고 비상시의 노동력으로도 썼기 때문에(...) 국가적인 차원에서의 탄압은 찾아보기가 힘들어졌다.[4]
영조의 경우 도성 가까이 사찰이 지어지고 부녀자들이 출가를 한다며 불교를 배척하라는 승지 이정주의 말에 '나라가 망하는 것은 불교와 상관없고 백성들이 곤궁한 처지에 있으니 오죽하면 출가를 하겠는가?'라고 답하기도 했다.승정원일기 영조 1년 5월 3일 기사.
조선 시대에는 유림세력이 불교 사원에 행패를 부리는 등의 억압이 내내 존재했고 승려들은 천민의 신분으로 노동력과 공물 등을 착취당했다. 아울러 조선 말기까지 도성 안에 사찰을 짓지 못하게 하고 승려를 도성에 들이지 못하게는 하는 등 불교에 대해서 억압이 항상 있었다. 예외적으로 실록을 보관/관리하거나, 왕실의 무덤을 관리하거나 위패를 모신 사찰에는 유생들이 함부로 행패를 부리지 못했고[5] 유학자들 가운데서도 승려들과 교류를 가지며 친분들 다지는 예도 종종 있었다. 초의선사와 친분이 두터웠던 정약용이나 김정희가 대표적인 예.

2.3. 일본폐불훼석


메이지 유신 직후, 국가신토를 창시하고, 국가신토에 의거해 천황의 권위를 높이고 일본이 신국이라는 사상 하에 이와는 배치되는 불교와 슈겐도를 탄압하였다. 불교는 그나마 두터운 신도층 덕분에 어찌어찌 넘어갔지만, 슈겐도는 그러지 못하고 불교에 사실상 완전 예속되었다.
이 때가 일본불교에서 대처승과 육식이 현대의 일본불교 모습으로 완전히 정착되어 일반화된 시기다. 그 전에는 아무래도 걸리는 게 있다보니(?) 사상/교리적으로 면피할 해석/주장을 만들어놓았고 결혼하지 않는 승려도 많았지만, 이때 이후로는 그런 거 없고 일본 애니에 나오는 것처럼 "일본 스님= 마누라와 자식 두고 고기도 자유롭게 먹는다"는게 완전히 대중화/고착화되었다.
다만, 지금도 선종 계열 사찰에서는 교파에 따라 육식이나 결혼에 제한을 두는 경우가 많고, 대처와 육식이 완전히 퍼진 종파도 정진 기간에는 고기가 없는 정진요리만을 먹으며 수행하는 경우가 많다.[6]

3. 10.27 법난


해당 문서 참조
[1] 정확히는 태종때 11개 종파를 7개 종파로, 다시 세종때 선종 / 교종의 2개 종파로.[2] 다만 세종대왕 개인은 크게 불사를 일으키기도 했으며 이 때문에 유림의 비판을 받았다.[3] 을 녹여 총통을 만들고, 사리를 태우는 등의 최종박해였다.[4] 다만 현종대에 승려의 도성출입을 제한하는 등의 조치를 취한적은 있다. 이 이후로는 이런 조치들을 찾아보기 힘들지만.[5] 하는 순간 왕실을 능멸하는 것으로 취급되어 대가를 아주 톡톡히 치르게 되었다. 또한 실록 관리 사찰의 경우 주지가 유사시 지방 군대를 동원할 수 있는 밀부도 갖고 있었다.[6] 다만 고기를 대신하기 위해 간장, 기름 등을 많이 써서 채소가 주 재료임에도 칼로리가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