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무일종법난

 

한자
三武一宗法難
1. 개요
2. 원인
3. 진행과 결과
4. 여담
5. 관련 항목


1. 개요


중국사불교 용어 중 하나.
삼무일종법난(三武一宗法難)이란 중국 중세시기에 일어났던 네번의 대대적인 불교 탄압(법난)을 일컫는 용어이다. '''폐불'''이라고도 한다. 그래서 삼무일종폐불, 혹은 줄여서 삼무일종이라고 한다.
황제가 도교를 신봉하여 빚어졌다. 다른 황제들과는 달리, 이쪽은 승려에 대한 대대적인 학살까지 이루어 졌다.
황제가 문무백관을 모아 유불도 삼교를 논의하게 한 뒤, 유교를 제일로 놓고 도교와 불교를 탄압했다. 다만 도교에 대해서는 형식적이였다고.
  • (唐) (武宗) (회창폐불 會昌廢佛) - 840 ~ 846
당의 국력이 쇠퇴해짐에 따라 개방적이던 사회 분위기가 차츰 폐쇄적으로 변하였고, 한참 흥성했던 불교에 대해 한유와 같은 유학자들의 비판이 강해졌으며, 결국 당무종 때에 불교 탄압책이 실시되었다. 이때에 불교 뿐만 아니라 서역에서 전래된 모든 종교, 즉 경교(네스토리우스교), 현교(조로아스터교), 마니교도 모두 탄압을 당했다.
국가의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서 일어났다.
이 네 명의 황제에 의해 일어났다고 해서 '''삼무일종'''이라고 부른다.

2. 원인


이러한 대대적인 종교 탄압이 일어나게 된 계기는 외래 종교인 불교에 대한 거부감, 중국 전통 사상인 유학도교의 반발, 불교 교단의 병폐, 세수와 노동력 및 병역인구의 확보, 위정자들의 의도 등이 꼽히고 있다.
여담으로, 삼무일종의 법난을 일으킨 네 황제 중 당무종을 제외하면 전부 명군의 반열에 드는 황제들이라는 것이 특징이라면 특징. 심지어 당무종도 최소한 당나라 최후의 개혁군주 정도로 평가받는다. 보통은 이들 군주들이 지배체제의 개혁과 정비, 중앙집권화와 한화 과정에서 불교를 장애물로 여기게 되면서 탄압이 시작된 편이다.

3. 진행과 결과


종교 탄압에는 강력한 물리력이 동원되었으며 불교 외에도 외래에서 들어온 3이교, 즉 경교(기독교 네스토리우스파), 현교(조로아스터교=배화교), 화교(마니교)가 모두 대상이 되어 박해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삼무일종이란 단어가 등장한 것은 불교가 가장 세가 강성했기 때문에 그만큼 피해도 많았고, 3이교에까지 박해가 가해진 것은 당무종의 회창폐불 때 뿐이며, 거기다 불교를 제외한 다른 종교는 이 박해를 견뎌내지 못하고 중국 내에서 거의 소멸해 버렸기 때문이다.(그래도 네스토리우스파의 경우 유목민족들에게는 여전히 세가 컸고, 마니교는 민중들 사이로 녹아들어가 각종 밀교의 기원이 된다.)
탄압의 결과 초기에는 남쪽에 비해 우세했던 북중국 일대의 불교가 크게 쇠락하였고 교종계열 불교 대신 달마에서 시작된 선종계열 불교가 중국 불교의 주류가 되었다. 사실 선종 역시 달마의 의발을 이은 혜가, 승찬이 북주파불도 견디며 포교하는 등 북쪽에서 발전했으나, 당나라 초기를 거치며 혜능의 남선종과 대비되어 신수의 북선종은 점차 세를 잃었다.

4. 여담


조선정도전태종 등에게 주도된 숭유억불과 일맥상통하는 구석이 있다. 다만 어느 쪽이든 불교 사원에 대한 폐쇄, 강제환속 조치 등이 이루어졌으나 대규모 학살이 벌어지지는 않았다.[1] 이러한 성리학의 불교비판론은 남송시대 불교세력에게 비난받았던 성리학의 시초 주희(주자)의 개인적인 경험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무종 때의 한유 등 주희 이전의 유학자들도 불교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였다.
다만 중국의 법난은 도교의 주도가 더 크다. 특히 당나라때는 도교의 흥성으로 불교가 쇠퇴했고, (마치 불교가 중국에서 고구려로 전해졌듯이) 도사들이 연개소문시대의 고구려에 파견되기도 했다고 전한다. 이런 분위기속에 고구려의 승려들은 백제신라로 망명하는데, 삼국유사연개소문[2]에 비판적인 태도와 심지어 도사들이 당나라의 첩자였다는 등의 설화는 이러한 불교계의 시각을 반영한 것이다. 서유기에서 도교와 불교의 대립 그리고 (비교적) 도사=악[3] 승려=선[4]으로 묘사되는 것 역시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5]
북주 무제는 "이런 짓을 하면 불지옥간다"라는 승려들의 비난에 "백성들이 편할 수만 있다면 내 몸 불지옥에 가도 상관 없다"라는 위엄찬 태도로 받아쳤다. 과연 후대 불교 설화들에서는 북주 무제를 불지옥을 보내서(...) 지옥에서 "불교를 박해하지 말껄.."하고 후회하고 있다는 디스성 이야기들이 덧붙여진다(...)
태무제 역시 44세에 끔살을 당했고, 무제(35세), 무종(32세), 세종(38세)은 요절했기에 "벌을 받았다"라는 식의 말이 꼭 덧붙여진다. 실제로 무제와 세종의 경우 손자가 다음 왕조들에서 찬탈을 당하고 그 왕조에서 통일이 이어진지라 정말 팔자가 제대로 사나웠다고 볼 수 있다.
세종의 경우 불상을 녹여 화폐인 주통전을 만들게 했는데 세종이 요절하자 당시 세간에선 “주통전이 유통되는한 세종은 지옥에서 구제받지 못할 것”이라는 말이 돌았다고한다.

5. 관련 항목


[1] 아무리 강경한 반불의식을 가진 유학자들도 적어도 "중놈들을 싹 다 죽여버리죠?" 라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2] 삼국유사에 따르면, 세발처럼 유,불,선(도)가 균형을 이뤄야하는데 도교가 부족하다면서 도사들을 청했다고 한다. [3] 대개 도사로 위장한 요괴들에게 붙어먹으며(다만 본인들도 요괴가 위장한 것인 줄은 몰랐다.) 승려들을 탄압하고 부려먹는 이들로 나온다.[4] 당초 주인공인 손오공만 해도 '''승려'''인 삼장법사를 모시고 있는 데다가 스토리도 삼장법사가 서역으로 불경을 가지고 가는 것이니 어쨌든 승려를 악으로 묘사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5] 단 서유기가 쓰여진 시기는 오히려 명나라 시기였다. 당나라 때는 오히려 노자가 국성인 이씨라며 도교를 대단히 숭상하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