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자민 휘소 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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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제강점기 서울에서 태어난 한국계 미국인 물리학자. 미국 이름은 벤저민 프랭클린의 이름을 땄다고 한다. 아내는 중국계 말레이시아인인 심만청(Marianne). 슬하에 천(泉, Jeffrey), 안(安, Irene)이란 1남 1녀를 두었다.[5]'''“핵무기는 언젠가 반드시 없어져야 하며, 특히 독재가 행해지고 있는 개발도상국에서의 핵무기 개발은 결코 허용해서는 안 된다.”'''[3]
이휘소 본인의 발언. (강주상 《이휘소평전》 발췌)[4]
그는 20세기 후반 입자물리학에서 자발적으로 대칭성이 부서진 게이지 이론의 재규격화 문제의 해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고, 맵시 쿼크의 질량을 예측하여 그 탐색에 공헌하였다. 물리학자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이래 약 20년간 모두 110편의 논문을 발표하였으며, 이 중 77편의 논문이 학술지에 게재되었다. 10회 이상 인용된 논문은 이 중 69편에 달하며, 500회 이상 인용된 논문은 모두 8편이다. 2013년 10월 이후 그의 모든 논문들은 13,400회 이상 인용되고 있다.
2. 일생
1935년 경기도 경성부에서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중학교 4학년[6] 때 전쟁을 맞아 마산중학교를 거쳐 부산으로 옮긴 경기중학교에서 5학년 과정을 마쳤고, 검정고시를 치러 대학 입학자격을 얻게 되었으며 입학시험을 통해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화학공학과(현 화학생물공학부)에 수석 입학했다. 이때 한참 전쟁 중이었기에 서울대학교도 부산의 "전시 연합 대학"에서 입학했다. 이러한 열악한 상황에서 이휘소는 물리에 흥미를 가져 물리학과로 전과를 원했다.
그러나 당시 서울대는 화학공학과에서 물리학과로의 전과를 금지하고 있었는데, 서울 수복 이후 태릉에 임시로 대학이 있던 상황. 전쟁 중이라는 특수한 상황 등이 공과대학에서 문리과대학으로 전과를 불허받은 이유 중 하나였다고 한다. 이후 이휘소는 수차례에 걸친 물리학과로의 전과시도가 실패로 돌아가자 주한미군 부인회의 도움으로 1954년에 미국으로 유학(편입)가게 되었고, 이후 수많은 경력들을 쌓게 된다. 미국 국적을 취득한 건 1968년이다.
- 마이애미 대학교 물리학 학사
- 피츠버그 대학교 물리학 석사
- 펜실베니아 대학교 물리학 박사
-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연구회원[7]
- 펜실베니아 대학교 조교수
- 앨프리드 P. 슬론 재단 연구회원
- 뉴욕 주립 대학교 스토니브룩 석좌교수
- 양전닝 이론물리학 연구소 정교수
- 페르미 국립 가속기 연구소 이론물리학 초대부장
- 시카고 대학교 교수[8]
- 미국 예술-과학 아카데미 회원
2.1. 사망
이휘소는 1977년 6월 16일 오후 1시 22분경, 일리노이 주의 고속도로에서 교통사고로 숨졌다. 한참 앞 다른 차선에서 유조차가 사고가 났는데, 바퀴가 터진 뒤 통제불능 상태의 유조차가 미끄러져 이휘소 박사가 탄 차를 강타, 박사는 즉사하고 가족들은 중경상을 입었다. 사망 당시 그의 나이는 42세였다. 당시 도로가 중앙분리대를 차후 확장을 위해 잔디로 해놨는데 하필 유조차가 그 위로 미끄러지며 마찰계수가 0에 가까워지는, 즉 방향 전환도 불가능하고 브레이크가 말을 안 듣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이휘소는 1977년 8월,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훈 받았으며, 2006년에는 한국과학기술한림원에 의해 한국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헌정되었다.
3. 대표적인 업적
3.1. 자발 대칭 깨짐 게이지 이론의 재규격화
1964년에 이휘소는 그의 지도교수 에이브러햄 클라인과 자발적인 대칭성의 부서짐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다.
소립자들은 게이지 입자라 불리는 입자들을 공유하고 상호작용하는데 이때까지 이론만으론 자연스럽게 질량의 존재를 설명할 수 없었다. 국소 게이지 대칭성을 갖는 라그랑지 안에는 게이지 보존의 질량항이 없고 설령 사람의 손으로 끼워 넣는다고 해도 국소 게이지 변환이 불변하지 않아서 대칭성을 위반하게 된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이런 상태가 되려면 '''질량이 없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한편 20세기 중반, 일본 물리학자 난부 요이치로와 영국 물리학자 제프리 골드스톤 등에 의해 "반드시 대칭적인 상태만이 가장 안정적이지는 않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대칭적인 상태보다도 더 안정적인 상태가 있을 수 있고 만약 그렇다면 자연계는 '''스스로 대칭을 깨서라도 더 안정적인 상태를 선택한다'''"는 자발적인 대칭성의 부서짐의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골드스톤의 정리에 의하면 자발적 대칭성 붕괴 이론에는 반드시 '''무질량 입자'''가 존재하며 그러한 입자를 골드스톤 보손이라 정의한다. 이휘소와 클라인은 그 예시로 당시 유명했던 초전도체와 하나하나 비교해가며 무엇이 골드스톤 보손이 되는지 논하고 결국 무질량 입자로서 추가적인 '''스푸리온'''(Spurion)의 존재의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이 논문이 쓰여질 당시에는 힉스 보손의 존재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 논문은 힉스 메커니즘과 같은 이론의 등장을 촉진하는 것과 같은 역할을 한 셈이다.
1969년에는 자발 대칭 깨짐을 논할 때 장난감 모형으로 애용되는 시그마 모형의 재규격화에 성공하였다. 이런 가운데 당시 네덜란드의 대학원생이던 헤라르뒤스 엇호프트는 힉스 메커니즘을 양-밀스 이론에 적용하여 비가환 게이지 이론의 국소 대칭성이 자발적으로 깨지는 모형을 연구하고 있었다. 그는 1970년 프랑스령 코르시카의 카르제스(Cargèse) 여름학교에서 이휘소의 강의를 들었는데 이때 그는 그의 학위 논문 주제였던 자발적 대칭성 붕괴인 비가환 게이지 이론의 재규격화에 대해 결정적인 아이디어를 얻었으며 마침내 이에 성공하게 된다.
엇호프트는 이 업적으로 1999년에 당시 자신의 지도교수였던 펠트만과 함께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였다. 만약 이휘소가 생존해 있었더라면 이 때 공동수상 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미국의 이론물리학자 데이비드 폴리처는 그의 2004년 노벨상 수상 강연에서 이휘소가 전약 이론에 대한 엇호프트의 연구결과를 재해석하여 알기 쉽게 풀어 쓴 덕분에 당시 학자들이 그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고 말하였다. 여기서 폴리처가 말하고 있는 것은 이휘소가 뉴욕 주립 대학교 스토니브룩에서 1972년 가을학기에 강의했던 내용을 대학원생 어네스트 에이버스와 함께 정리해서 《피직스 리포트》에 단행본 형식으로 발표한 '''〈게이지 이론〉'''이라는 논문이다.
이것은 헤라르뒤스 엇호프트가 서울대학교 이수종 교수에게 보낸 편지에도 자세히 언급이 되어 있다.
3.2. 참(Charm/맵시) 쿼크의 질량 예측
소립자는 베타 붕괴와 함께 그 전하를 바꾸게 되는데, 아주 드문 경우 전하가 변하지 않는 현상을 중성 보존류라 한다.
하지만 연구 결과 기묘도를 가진 입자가 베타 붕괴를 하면 '''언제나 중성 보존류가 없다'''는 흥미로운 결론이 내려졌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셸던 글래쇼, 이오아니스 일리오풀로스, 루차노 마이아니(Luciano Maiani)는 1970년에, 맵시 쿼크라는 또다른 쿼크를 가정하여 이를 설명하였다. 이에 이휘소는 1974년 여름에, 메리 게일러드(Mary K. Gaillard), 조너선 로즈너와 함께 〈참쿼크를 찾아서〉라는 논문에서 케이온의 섞임과 붕괴에 해당하는 양을 계산하여 맵시 쿼크가 존재한다면 그가 가질 수 있는 질량 범위를 예측하였다.
이 논문을 지침서로 삼아 탐색 작업이 시작됐다.
그런데 이 논문이 저널에 실리기도 전인 같은 해 11월 11일에, 스탠퍼드 선형 가속기 센터의 버튼 릭터 연구진과 브룩헤븐 국립연구소의 새뮤얼 차오 충 팅 연구진에 의해 맵시 쿼크와 그 반쿼크가 결합해서 이루어진 제이/프시 중간자가 발견됨으로써, 맵시 쿼크의 존재가 간접적으로 확인되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이휘소 등이 논문을 저널에 기고하면서 프리프린트로써도 공개'''하였고, 맵시 쿼크 탐색 실험의 지침서로 사용된 것은 정식 출판된 논문이 아니라 프리 프린트였기 때문이다.
이휘소가 USAID 평가위원으로 모국에 일시 귀국 직전 작성해서 프리프린트로 공개한 것이, 서울대학교 평가가 끝난 후 미국에 돌아와 채 '''두 달도 걸리지 않아 발견된 셈이다.'''
제이/프시 중간자를 발견한 버튼 릭터와 새뮤얼 팅은 이 업적으로 1976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다. 예측한 이휘소도 이 때 공동수상했어야 하지 않았냐 생각할 수 있지만, 상술한 바와 같이 해당 논문은 이휘소 단독이 아닌 다른 공동저자까지 세 명의 논문인데, 노벨상의 공동수상은 세 명까지 가능하므로 릭터와 팅 외에 논문 저자 중 어느 한 명만 추가할 수는 없기에 수상할 순 없다.
3.3. 물리우주론적 리-와인버그 경계의 계산
1977년, 이휘소는 스티븐 와인버그와 함께 〈무거운 뉴트리노 질량의 우주론적 최소 경계치〉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참고로 '''현재까지 깨지지 않은 가벼운 암흑물질의 질량 경계 계산식'''이다.
이 논문에서 그들은 초기 우주 팽창의 흔적으로 쌍소멸을 통해 다른 입자로 바뀌는, 충분히 무겁고 안정적인 입자가 남아있으면, 상호작용 세기는 최소한 2 GeV일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여기에서 이들이 다룬 입자는 윔프(''wimps'', Weakly Interacting Massive Particles)이다. 윔프의 질량이 작아질수록 그 쌍소멸 반응단면적(Cross section (physics))의 크기도 작아져야 하는데, 이는 대략 $$\displaystyle \frac{m^2}{M^4}$$ 정도이다. 여기서 m은 윔프의 질량이며, M은 Z보존의 질량이다.
이것은 초기 우주에서 풍부하게 생산된 윔프들 중, 가벼운 윔프는 무거운 윔프보다 보다 일찍 상호작용을 그만둔, 즉 우주의 온도가 보다 더 높았을 때에 상호작용을 그만둔 윔프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휘소와 스티븐 와인버그의 계산에 의하면, 윔프의 질량이 2 GeV보다도 가볍다면 그 흔적의 밀도는 우주의 스케일을 뛰어넘는, '''즉 있을 수 없는 값'''을 갖게 된다. 윔프의 질량이 더 이상 작아질 수 없는 이 경계를 '''리-와인버그 경계'''라고 한다.
이 논문은 피지컬 리뷰 레터가 1977년 5월 13일에 접수하였고, 1977년 7월 25일에 제 39권의 네 번째 이슈에 실었다. 그러나 이휘소는 그해 6월 16일에 교통사고로 숨졌기에 이 논문의 출판을 볼 수 없었고, '''이 논문은 그의 유작이 되었다.''' 이와 같은 인연은 스티븐 와인버그가 크리스 퀵과 함께 직접 피직스 투데이에 이휘소의 부고 논문을 쓰게 된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크리스 퀵은 이휘소의 뒤를 이어 페르미 연구소의 차기 이론 물리학 부장이 되었다.
4. 평가
- 대학원생 시절 폴리처와 2번 공동 연구를 했고 서로 이름을 부르며 절친했던 서울대 이수종 교수의 회고를 보자.
> "불의의 사고로 타계하신 고 이휘소(B.W. Lee) 박사는 이 (게이지) 이론의 완성에 가장 중요하게 기여한 학자이며, 생존하셨더라면 당연히 노벨상을 공동수상하셨을 분입니다. 전에 근무하던 프린스턴 대학교 물리학과 3층 복도에는 유명한 이론물리학자들 10여 명의 사진이 걸려있는데 그 한가운데에 이휘소 박사가 위치하고 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그곳을 지나칠 때마다 사진 속 이휘소 박사가 후학에게 따뜻한 격려의 눈빛을 보내는 것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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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지 이론과 끈 이론", 한국물리학회지 이 글 자체가 폴리처와 월첵 교수의 연구성과와 논문 제출 대한 일화들을 대단히 재미있게 다루고 있다.
물론 실제로 많은 대가들이 노벨상을 받은 사람의 업적보다도 훨씬 뛰어난 업적을 남기고도 이른 죽음이나 불운 때문에 수상을 놓치기도 하며, 심지어 노벨상 수상 업적의 공동연구자이면서도 노벨상을 수여받지는 못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이휘소가 살아 있었다고 해도 노벨상을 반드시 받았으리라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가장 수상 가능성이 높았던 한국계 외국인 중 하나이긴 했다.[9]
>
>"게이지 이론과 끈 이론", 한국물리학회지 이 글 자체가 폴리처와 월첵 교수의 연구성과와 논문 제출 대한 일화들을 대단히 재미있게 다루고 있다.
물론 실제로 많은 대가들이 노벨상을 받은 사람의 업적보다도 훨씬 뛰어난 업적을 남기고도 이른 죽음이나 불운 때문에 수상을 놓치기도 하며, 심지어 노벨상 수상 업적의 공동연구자이면서도 노벨상을 수여받지는 못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이휘소가 살아 있었다고 해도 노벨상을 반드시 받았으리라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가장 수상 가능성이 높았던 한국계 외국인 중 하나이긴 했다.[9]
- 13살 위인 양전닝(1957년 노벨물리학상 수상)과 절친했으며, 양전닝이 스토니브룩 뉴욕주립대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석좌교수로 가면서 그에게 권유해 함께 일했다.
- 압두스 살람/스티븐 와인버그/셸던 글래쇼(1979년 공동수상). 이휘소는 이들의 논문을 심사(와인버그), 재평가(살람)했다. 후에 이휘소는 와인버그와 가벼운 암흑물질을 공동연구하여 "리-와인버그 경계"[10] (1977년)를 밝혀냈는데, 이것이 그의 유작이 되었다. 압두스 살람의 경우 "벤자민 리의 자리에 내가 있다."라고 수상 연설에서 말했을 정도로 그의 죽음을 아쉬워하였는데 이휘소가 전자기력과 약력(약한 핵력)을 포괄하는 "경입자"연구의 문제점인 "재규격화"를 증명했으며, 이 연구 과정에서 살람의 공로를 재평가 한 것도 그였기 때문이다. 원칙상 죽은 사람에게는 노벨상을 수여하지 않기 때문에 이휘소는 노벨 물리학상을 받지 못했지만, 만약 그가 와인버그, 그래쇼, 살람이 상을 수상했던 1979년 이후까지 생존했다면 상을 수상했을 가능성은 높다.
- 네덜란드의 헤라르뒤스 엇호프트는 대학원생 시절인 1970년, 후에 "Chiral Dynamics(비대칭 역학)"으로 출판되는 이휘소의 강의를 듣고 부서진 비가환 게이지 이론의 재규격화에 결정적인 아이디어를 얻었다. 그리고 이 업적으로 1999년 노벨상을 수상하였다. 그런데 엇호프트의 이런 논문을 물리학자들에게 이해하기 쉽게 풀어 쓴게 바로 이휘소다. 1973년 《피직스 리포트》에 당시 그가 지도하던 대학원생 에이버스와 함께 저술한 〈게이지 이론〉이 바로 그 논문.
5. 정치 성향과 한국에 대한 애정
이휘소는 미국 국적을 취득한 뒤로도, 조국인 한국에 대한 관심을 놓치 않았다. 1971년 당시 한국과학원 부원장인 정근모 박사는 한국 물리학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 물리학 여름학교를 정기적으로 개최하려는 계획을 추진하며 이휘소 박사를 초빙하려 하였다. 이미 유럽이나 미국에서 활발히 진행되고 있었던 이러한 시도에 대한 이휘소의 답신 또한 긍정적이었지만, 그 해 4월 제7대 대통령 선거 결과를 둘러싼 야당의 부정선거 의혹 제기와 박정희의 위수령 선포를 보며 그는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파괴되고 독재체제가 강화되는 것에 큰 우려를 표하였다. 정근모 박사는 정권과 국민을 따로 생각해 한국과학발전을 도와야 한다고 설득했지만, 결국 1972년 초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내 모두 없었던 일로 하게 된다.
1972년 10월에 박정희가 유신헌법을 선포하자 이휘소는 외국인 동료를 대하기가 부끄럽다고 가까운 한국인 친구들에게 자주 말하곤 했다. 그와 친한 과학자였던 강경식 전 브라운대학교 교수는 당시 재미한인과학기술자협회 부회장이었고, 가끔 모국 방문 학술회의나 하계 심포지엄의 연사 초청의 수락을 이휘소에게 권유하곤 했는데 그때마다 이휘소는 박정희가 독재를 계속하고 있는 한은 말도 꺼내지 말라고 단호히 거절하였다. 참고로 박정희는 이휘소가 사망한 1977년 이후인 1979년까지 정권을 유지하다 10.26 사태때 사망하였기 때문에 이휘소가 주도하는 여름학교는 안타깝게도 한국에서 영영 이루어지지 못했다.위수령 발동, 학생운동 탄압 등 최근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사태로 우리가 추진 중인 여름 학교 사업을 재고하게 됩니다 ...(중략)... 여름 학교의 책임을 맡게 된다면 내가 한국의 현 정권과 그 억압 정책을 지지하는 것으로 보일까 걱정이 됩니다. 참으로 난처한 입장입니다. 한편으로는 한국의 과학 발전을 위하여 조그만 도움이라도 되고 싶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민주주의의 원칙을 무시하는 이러한 처사들에 반대 의사를 분명히 밝히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한국 정부에서 이에 관한 초청이 오더라도 수락하지 않을 결심입니다. 엉뚱한 짓이라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한국 국민의 장래를 걱정하는 한 사람으로서 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강주상, 신동아 1993년 12월호 "물리학자 이휘소의 삶과 죽음" 中
1974년에 이휘소는 20여 년 만에 일시 귀국을 하게 됐다. 미국 국제개발청 차관에 의한 서울대학교 원조 계획의 미국 측 평가위원 자격이었다. 이것이 이휘소가 유신 정권 치하의 한국을 방문한 유일한 사례다. 평가위원들의 원조 타당성 조사 사업은 그해 9월 1일부터 10월 2일까지 한 달 동안 진행됐다. 그러나 이휘소는 소련 학회에 참여한 러시아 출신 과학자들에게 벌어진 것 같은 납치를 두려워하여 한달 내내 미 대사관 직원 숙소에만 머물렀다.
1977년 이휘소가 교통사고로 타계한 후 정부에서 훈장을 추서했다는 것을 "이휘소가 핵개발에 참여했다는 증거"로 제시하는 이도 있지만, 사실무근이다. 본래 정부에는 '한국에 직접 공헌한 바 없다'며 소극적이었던 것을 국내 과학계의 거듭된 탄원으로 성사된 것이고, 이마저도 유족들이 '유신 정권에 대한 고인의 비판적 입장'을 이유로 거부한 것을 이 박사의 모친을 통해 겨우 수여했다. 게다가 훈장 자체도 3등급인 동백장. 정부가 핵개발의 핵심 멤버로 여기는 중요 인사였다면 최고등급인 무궁화, 혹은 그 다음인 모란장 정도는 주었을 것이다.
이휘소의 대표적인 제자로 강주상(1941.8.24 ~ 2017.1.6) 고려대학교 물리학과 명예교수가 있는데, 그는 이 무렵 뉴욕 주립 대학교 스토니브룩에서 이휘소에게 박사 학위 논문 지도를 받고 있었고, 이휘소가 객원교수로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에 있을 때에도 한 학기 동안 그를 따라가서 연구하기도 했다. 이휘소는 당시에도 한국에 대한 관심을 한시도 버리지 않았고, 강주상과 함께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제를 자주 이야기하였다. 어느 날에는 핵무기에 관한 이야기가 화제가 되었고, 그때 그는 상술되어있는 인용말로 자신의 입장을 분명하게 피력하였다고 강주상은 기억하고 있다.
6. 소설 속의 왜곡된 이휘소
사실 이휘소 박사의 죽음에 대한 의혹과 루머는 당대에도 있긴 했다. 경향신문에 따르면, "사고가 일어난 지 딱 2주 지난 6월 30일, 국회 경제과학위원회의 대정부 질문 자리에서 신민당의 고흥문 의원이 이휘소의 사망에 “어떤 흑막이 개재되어 있지 않느냐”며, “해외에 흩어져 있는 우수두뇌, 그중에서도 세계적인 두뇌를 늘 정부는 어떻게 보호하고 있는지" 최형섭 과학기술처 장관에게 물어보았다고 한다.#
헌데 세월이 지나 90년대가 되어 소설가 김진명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라는 소설에서 그를 이용후 박사라는 이름으로 등장시켰다. 이 소설에서 나오는 이용후는 제3공화국의 핵무기 개발 계획의 중심 인물로 핵무기 설계도를 수술한 다리뼈에 숨겨서 들어오는 등의 활약을 펼쳤다. 또한 그의 죽음도 핵 개발을 저지하려는 미국의 음모라는 내용이다.
그런데 사실 이휘소를 핵물리학자 내지 핵개발과 연관지은 것은 김진명보다 공석하(1941~2011) 교수가 먼저로 그는 1989년에 '핵물리학자 이휘소'라는 소설을 출판했다.[11][12] 이에 이휘소 유족의 반발이 있자 다시는 출판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였으나, 김진명이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내자 1993년 약속을 깨고는 《소설 이휘소》를 출판하였다.(...)[13][14] 이후 2010년 '로스트 이휘소'를 출판하였다. 이러한 책들을 읽고 그 내용이 진실이라 믿는 몇몇 사람들이 있는데, '''픽션은 픽션'''일 뿐으로 흥행을 위해 만들어진 소설을 보고서 그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15]
이 소설들은 이휘소의 유족들이 소설의 내용에 강하게 반발해 출판금지와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하였다. 당시 군사정권의 '자주국방'을 미화하기 위해 꾸며낸 얘기로 고인의 명예가 훼손됐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소설이 허위임은 인정하였으나 소설의 내용이 이휘소의 명예를 높였다고 볼 수 있다는 이유로 기각 명예훼손과 출판금지는 기각했다.[16] 정작 군사독재정권과 핵무기 개발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던 이휘소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 같지만... 결국 이런 법원의 판결에 매우 실망한 이휘소의 아내 심만청은 한국에 대한 실망감을 드러내며 이후 한국 언론과의 접촉을 거부하였다. 이는 KBS 이휘소의 진실에서 KBS의 인터뷰 요청을 강하게 거부함으로써 그대로 드러난다.
7. 여담
- 스토니브룩 대학교 재직 시절 한국 유학생이 많았는데,[17] 그 중에는 이휘소 평전의 저자이자 위에서도 여러 번 언급된 고려대 명예교수 강주상[18] , '인연' 이라는 수필집으로 유명한 피천득 선생의 딸이며 보스턴 대학교 물리학과 교수인 피서영, 한국 정보통신산업 발전의 계기를 마련한 카이스트 이사장 오명 등이 있다.
- 우수한 물리학자였지만 사생활에서는 좀 깨는 면모도 많았다. 엄청난 일 중독자였고 옷 갈아입는 것을 싫어하여 속옷이 낡고 삭아버릴 정도로 오래 입는 버릇이 있었으며, 굉장한 골초라 파이프 담배를 즐겨 피웠다. 대학원생 시절 한인교회 목사에게 만찬에 초대받아 갔을 때 목사가 기도를 시작하자 바로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고 한다.[19]
- 레드얼럿2 모드인 GMHANMOD에서 한국군 특수 건물로 이휘소 연구소가 있다. 타임머신을 이용한 한국군이 교통사고로 죽을 운명이었던 이휘소 박사를 구해내서 연구소를 설립했고, 이휘소 박사는 한국군 특수 전폭기 유닛 주작을 다섯 대 만들어내고 실종됐다는 설정. 원본 게임부터가 아인슈타인이 히틀러를 날려버리고 역사를 바꾸는 내용이니 물리학자가 전폭기 개발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는 묻지 말자.
[1] 오얏 이, 빛날 휘, 밝을 소[2] 핵물리학은 이휘소의 전공 분야가 아니다. 김진명의 소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때문에 실제로 그가 전공 했다고 '''잘못'''알고 있는 경우가 제법 있다.[3] 이 박사가 박정희 독재 정권 시절 핵무기 개발에 관련했다는 식의 음모론은 이 문장 하나로 반박된다. 당연히 지금으로 치면 북한도 마찬가지.[4] 강주상 교수는 이휘소의 제자 중 한명으로 1981년부터 2006년까지 고려대학교 물리학 교수로 재직하였다. 여기에 따르면 손동철 교수(경북대)와 함께 우리나라 고에너지 물리학 분야의 선구자였다고.[5] 여기서 재밌는 사실이 있는데, 중국의 노벨상 수상 물리학자인 양전닝(양진녕)도 벤자민 프랭클린을 존경하여 미국 이름을 '프랭클린 양'으로 지었고, 후에 이휘소와 만나서 친분을 쌓게 된다.[6] 당시에 중학교와 고등학교는 하나였다. 경기고등학교가 현재처럼 분리된 것은 1950년대부터였다. 여담으로 경기중학교는 1970년대에 폐교.[7] 당시에 한국인으로서는 최초였다고 한다.[8] 단, 시카고 대학교에서는 일종의 파트타임으로 일하기로 했으나 원한다면 언제든지 전임교수가 될 수 있었다고 한다.[9] 귀화했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노벨상을 탔다고 해도 한국인 수상자는 아니다. 다만 노벨상에서의 국적은 출생지로 기록하기 때문에 대한민국으로 기록되긴 했을 것이다. 실제로 한국계도 아니고 그저 부산에서 태어났기만 했는데도 노벨상에서는 대한민국 국적으로 기록된 찰스 피더슨이라는 사람의 사례도 있다.[10] 하단에도 서술했지만, 가벼운 암흑물질. 즉 WIMPs의 질량이 이 경계질량보다 낮다면, 흔적밀도가 이론상으로 말이 되지 않는 수준으로 높아진다. 즉 가벼운 암흑물질의 질량 하한선을 결정한 기념비적인 논문. 심지어 이 논문의 하한선 계산값은 지금도 깨지지 않았다.[11] 생전에 소설의 성공을 위해서 20%는 '''픽션'''화할 수밖에 없다고 KBS '이휘소의 진실 2부 - 벤자민 리의 유산'에서 말한 바 있다.[12] 그런데 황당한게 사실 이휘소 박사는 애초에 주전공 분야가 소립자 분야로 '''핵무기와는 직접적인 관련도 없었다'''. 차라리 서울대 시절 전공인 화학공학이 핵무기의 원료 우라늄을 뽑아내어 정제하는데 더 중요한 기술들을 다룬다.[13] 김진명은 공석하의 소설을 읽고 참고했다고 하였다.[14] 이러면서 공석하는 1994년, 김진명을 상대로 도서제작 및 출판금지를 청구하였는데 그 이유로 자신은 유족 때문에 핵물리학자 이휘소를 절판하고 김진명에게 인용하면 곤란하다고 하였으나, 그가 출판하여 제소를 당해 피해를 봤다는 것이다. 반면 김진명 측은 인용을 흔쾌히 수락하지 않았냐며 공석하도 '소설 이휘소'로 돈을 벌지 않았냐며 반론하였다. 해당 재판은 1997년에 공석하가 패소하면서 끝났다.[15] 아래 항목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이휘소 박사는 박정희의 군사독재를 싫어했다.[16] 서울지법 1995. 6. 23., 선고, 94카합9230.[17] 오늘날에도 스토니브룩은 한국 유학생이 유달리 많은 학교로 유명하다.[18] 이휘소가 역임했던 현 국립 페르미 가속기 연구소 부소장 겸 시카고대 교수인 김영기의 스승으로, 김 부소장은 이휘소의 제자의 제자, 즉 사손師孫에 해당한다.[19] 골초라서 그랬다는 얘기도 있고, 기독교 종교관에 대한 시위의 하나였다는 얘기도 있다.[20] 작중에서 카츠라기 타쿠미는 천재 물리학자이며 사고로 목숨을 잃은 행적이 이휘소의 생애와 굉장히 비슷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