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기에 학살

 


1. 개요
2. 계기
3. 뒷이야기


1. 개요


영어: The rape of Belgium[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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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의 학살을 묘사하는 삽화
넓게 보면 1914년 9월부터 1918년 11월까지, 독일 제국벨기에를 가혹하게 수탈하였던 점령 통치 방식을 일컫는 말이지만, 좁게 보면 1914년 8월 당시 독일 제국군이 벨기에를 점령하면서 벨기에의 여러 도시들에서 민간인 학살을 저지른 사건들을 통틀어서 말하는 사건이다. 아르메니아 학살과 함께 1차 세계대전 당시 동맹국이 저지른 대표적인 전쟁범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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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9월, 영국 신문에 실린 관련 기사. 연합군의 프로파간다에 자주 사용되며 훗날 미국의 참전에도 명분을 더해 준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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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행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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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 화가 에바리스트 카르팡디에가 그린 블레니 학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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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괴된 루뱅 대학교와 루뱅 도서관'''
관련 영상.
관련 영상2. '''0:38부터 다소 충격적인 장면이 있으므로 시청에 주의를 요한다.'''[2]

2. 계기


1914년 6월 28일 터진 사라예보 사건을 계기로 같은 해, 7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세르비아 왕국에 선전포고함으로써 제 1차 세계대전이 시작된다. 당시 독일 제국범게르만주의를 내세우며, 같은 게르만 민족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의 동맹 및 상호 방위조약을 이행하고자 오스트리아의 편을 들어 전쟁에 뛰어들었다.
독일 제국은 일찍이 알프레드 폰 슐리펜이 세워둔 슐리펜 계획 하에, 대다수의 병력을 서부전선으로 보내 프랑스를 6주 안에 항복시키고 곧장 그 병력들을 동부전선으로 보내 러시아 제국을 항복시킬 생각이였다. 따라서 프랑스를 빠르게 항복시키기 위해 파리를 어떻게해서든 빠른 시일 내에 손에 넣고자 하였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알자스-로렌 지역으로 쳐들어가기보단 차라리 중립국이였던 룩셈부르크와 벨기에를 쳐서 손에 넣고 프랑스 동북쪽 방면으로 병력을 몰빵하여 파리로 들이치는 것이 나았다.
개전 당시 독일 제국군은 벨기에군을 '''초콜릿 군인'''(Schokoladensoldaten)[3]이라 비하했다. 벨기에는 1830년에 중립국으로써 강대국들로부터 안전을 보장받고 생긴 나라라 상대적으로 강한 군사력을 갖추는 데 소홀했기 때문이다. 독일 제국군은 벨기에를 며칠이면 금방 무너질 나라라고 생각하여 벨기에군의 저항 자체를 생각하고 있지도 않았다. 그러나 생각 외로 벨기에군은 조국을 지키기 위해 매우 강렬하게 저항을 하였고, 프랑스군의 항전이 거셌으면 거셌지 설마 벨기에 같은 콩알만한 나라가 저항을 하면 얼마나 할까 하고 아예 무시를 하고 있었던 독일군은 의외에 항전에 격노했다.
그러던 중 루뱅(Louvain, 네덜란드어로는 뢰번Leuven)이라는 도시에 주둔하고 있던 독일군 병사 하나가 어디서 온지 모를 총알 하나에 제대로 헤드샷을 당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갑작스럽게 병사 하나가 즉사하는 일이 발생하자 제대로 공황상태가 온 루뱅 주둔 독일군 병사들은 공포에 떨며 밤을 지새웠고, 자신들의 전우를 죽인 범인이 벨기에인 빨치산이라고 확신을 하게 된다. 날이 밝자 독일군은 루뱅 시에 살고 있었던 모든 민간인들을 조사하기 시작했고, 조금이라도 총이나 쇠붙이를 만진 흔적이 있거나, 군복을 입은 경험이 있는 자들을 죄다 끌어내 처형하였다. 그리고 증거도 없이 민간인들을 마구잡이로 잡아들여 총살한다. 헌데 정작 독일군 병사를 쏴죽인 사람이 벨기에인이라는 증거는 전혀 없었을 뿐더러, 심지어 학계에 따르면 밤에 피아식별을 잘못하여 벌어진 오인사격일 가능성도 크다고 한다.
아무튼 루뱅에서의 사건이 아니더라도 독일군은 벨기에의 도시들을 점령한 이후에 벨기에 민간인들 중 상기한 것 처럼 민간인으로 위장해 독일군에게 총질하는, 불어로 '프랑-티뢰르(franc-tireur)'라고 부르는[4] 자발적 빨치산에 대해 병적인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다.
독일군을 폭압적인 침략군으로 인식했던 벨기에인들은 정보를 연합군에게 흘리거나, 삐라를 뿌리거나, 독일군이 강제로 징발한 전시 노동 작업을 사보타주하는 등 소규모 저항은 적극적으로 펼쳤지만 아예 대놓고 점령군에게 총들고 저항하는 직접적인 물리적, 무장 저항은 거의 없었다(애시당초 벨기에-네덜란드는 영토면적은 좁고 지형은 평지인지라 게릴라전에는 최악의 환경이다. 시대적으로도 수만명 돌아다니는 중근세가 아니라 백만명 죽으면 백만명 더 붓는 시대이니...) 그러나 독일군은 벨기에 빨치산에 대한 의심만으로 가톨릭 성직자들까지 인질로 삼아 죽이고, 논밭을 짓밟고, 마을마저 불태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물론 이 사건의 영어 명칭 그대로 민간인 여성에 대한 강간도 일삼았다.
여하튼 이 사건을 시작으로 독일 제국군은 루뱅 지역에서만 380여 명을 살해하고, 벨기에의 유서 깊은 명문 루뱅대학교를 파괴하고, 대학생들을 학살했다. 그것도 모자라 디낭(Dinant)에서는 676여 명의 무고한 인명을 살상하고, 민가 750여채를 불태웠다. 1914년 한 해에만 벨기에 전역에서 1000여 명의 벨기에인들을 죽이고, 강간했다. Larry Zuckerman[5], Alan Kramer[6], Jeff Lipkes[7] 등 서부전선과 1차대전 당시 전쟁 범죄 전문 역사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1차대전 내내 독일 점령기 내내 최소 6천 명의 벨기에 민간인이 주로 입증되지도 않은 빨치산 혐의로 인하여 독일군에게 직접 학살당했고, 추가로 1만 5천에서 2만 가량의 민간인들이 강제 이주나 의도된 기아, 독일군에 의한 구금 상태에서 죽었으며, 3만 명 가량이 영구적이든 일시적이든 신체적 상해를 입었고, 2천채 이상의 건물과 가옥이 무너졌고, 십만 이상의 노동자들이 독일의 전시 공업에 노예 노동자로 강제 동원되어 독일 본토로 끌려갔다. 여기에 이프르리에주, 브뤼셀, 루뱅 등 수많은 도시들이 전투에 휘말리든 독일군의 보복성 파괴에 의해서든 쑥대밭이 되었다. 루뱅 가톨릭 대학교 도서관 방화 사건에서는 20만권 이상의 장서가 파괴되었는데 그 중에서는 1700권 가량의 귀중한 중세에 제작된 필사본 고서적들이 포함되어 있었다.[8]
사건이 알려진 후 독일에서는 "비겁하게 우리의 뒷통수를 친 벨기에의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씨알도 안먹혔다. 이 사건이 당시 벨기에에 있던 '중립국' 미국 기자들의 취재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아직은 고립주의 상태였고 연합군과 조금 더 친할 뿐이었던 상황이었던 미국 언론의 보도는 독일의 만행을 이야기했다. 미국 기자가 루뱅 시장을 인터뷰했는데, 울음 때문에 제대로 말도 못했다고...
그리고 독일군은 1918년 11월 11일 패망하는 그 마지막 날까지 벨기에를 수탈하였다.

3. 뒷이야기


  • 2001년 5월, 당시 독일의 국방차관이였던 "발터 콜보(Walter Kolbow)"는 이 학살 사건에 대해 벨기에 정부에게 공식적으로 사과를 표하였고, 유족들과 그 후손들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관련기사.
  • 벨기에의 루뱅과 디낭 등 다수 지역에서는 하켄크로이츠는 물론 독일 제국의 흑-백-적 삼색기 또한 엄격히 게양이 금지되고 있고, 게양하면 법적 처벌을 받게 된다.
  • 1914년 당시, 벨기에 학살 사건이 외부로 알려지자 영국과 프랑스 등은 이 사건을 프로파간다로 사용한다. 즉, "이런 야만적이고 미개한 기본적인 인권조차 모르는 놈들을 때려잡는 것이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너희들의 임무다."라는 취지의 모병 포스터로. 다만 영프군은 "독일군이 이 때 벨기에에서 아기를 잡아먹었다"라는 상당히 과장된 거짓말로 이 사건을 포장했는데, 물론 당시 연합국 병사들과 민간인들도 그 말을 진지하게 믿지는 않았지만, 이미 독일군이 저지른 비인간적 행위는 외부에 알려진지 오래였고 그것만으로도 연합군이 제국군에 대한 증오심을 불태우는 데는 충분했다. 미국조차 1917년에 벨기에의 학살을 들먹이며 "훈족들을 쳐부수러 가자!"라고 했었던 사실을 보면, 얼마나 이 사건에 대해 연합국이 치를 떨었는지 알 수 있다. 소설 '서부전선 이상없다.'에서도 주인공 일행 프로이센 군인들이 왜 서로 개인적인 원한이 없는 사람들끼리 싸우느냐 등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런 프로파간다를 언급하며 '적들은 우리보다 더 속고 있는건 분명해. 이런식으로 전쟁을 부추기는 놈들이 정말 나쁜 놈들이야.' 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 상술한 영미 언론의 벨기에 학살을 주제로한 선전 활동이 유아 식인에 벨기에 여성이란 여성마다 교회 문에 칼로 박아 놓아 유방을 도려냈다는 수준으로 과장한 바도 있어서 1차대전 이후 베르사유 조약 과잉론과 더불어 독일에 대한 동정 여론과 영국, 프랑스에 대한 회의적인 여론이 퍼졌을때는 벨기에의 학살이 마치 영미 언론이 전적으로 지어낸 뻥으로 취급받던 시절도 있었다.[9]
  • 독일군 총사령관이었던 에리히 루덴도르프는 1919년 위의 저 프랑-티뢰르 빨치산들의 존재를 언급하며 당시 독일의 행위를 정당화하려했다. 이에 대하여 문필가 G.K. 체스터턴이 쓴 사설이 아래에 있다.
>"(설령 민간인 빨치산들이 유의미한 규모로 존재했다 쳐도) 이런 문제에서 독일제국이 한 일은 정말 멍청 단순하기 짝이 없다. 한줌 숨어서 총한두발 날리고 숨는 게릴라로 인해 그리 심한 타격을 받았을 만큼 당시 독일군이 무능했다고 주장하는 것일까? 설령 그런 사건이 존재했다 한들 단연코 말하건데 프랑-티뢰르[10]은 군인의 관점에서 비난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는 야만적이고 비열한 존재가 아니라 되려 조금의 명예와 관용의 정신을 지닌 군인이라면 마땅 경외감을 담아 전쟁 포로로 대하여할 적이다. 프랑-티뢰르란 무엇인가? 그는 곧 1870년 프로이센군이 제공한 군복과 장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단어 그대로 자유인으로서 침략한 외세에 맞서 총을 들고 가족과 조국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대항하기로 결심한 존재이다. 그 누가 훈장 하나, 군복 한벌도 주지 않는데 순전한 자유 의지로 인해 점령 당시 가지고 있던 외로운 총 한자루로 들고 소시민으로서 결의를 한 투사이다. 포츠담군국주의자들이 생각 하는 것과 달리 이건 전혀 사소한 요소가 아니다."
>
>Illustrated London News 9월 13일자 사설 중
  • 독빠들이나 독일내 네오 나치들은 레오폴드 2세가 저지른 콩고 대학살을 들먹이며 독일을 실드친다. 독빠들의 자폭은 독빠 문서의 '벨기에 학살 옹호' 문단을 볼 것.
다만 독빠와 별개로 벨까들도 있다. 벨기에 역시 콩고에서 제국주의적 침략과 수탈을 일삼았고 그 정도는 독일에게 당한 것보다 훨씬 지독했다. 당연히 '시대적으로 어쩔 수 없었다' '야만인에게 문명을 전해줬다' 하는 벨기에인들에게 그럼 너네가 당한것도 마찬가지겠네? 하는 것.(약한놈은 야만인이다)

[1] 'rape'라는 말은 강간이라는 뜻도 있지만 약탈, 파괴, 학살을 포함하는 '유린'이란 뜻도 있어, '벨기에 유린'과 같은 뉘앙스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하다. 허나 이 학살때 이루어진 강간도 많은터라 중의적인 의미로 생각하는것이 타당하다. 또한, 난징 대학살도 영어로는 'The Rape of Nanjing'이라 한다.[2] 간략히 설명하자면 독일군 2명이 아기를 안은 여성에게서 아기를 뺏어 내던진 후 비웃는 장면이다. 과장된 연출로 보아 실제 영상은 아닌 듯 하며 후대에 만들어진 영화로 보인다.[3]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호주군을 초콜릿 군인이라 했다.[4] 직역하면 '자유 사수'란 뜻으로, 의병과 똑같은 의미다. 보불전쟁 당시 급속도로 진격하며 이 당시만 하더라도 민간인이 자발적으로 정규군에게 총을 쏘며 저항한다는 사실에 경악했던 프로이센군은 루아르 계곡 일대에서 이런 소규모 지역 의용군에게 상당히 고생했다.[5] The Rape of Belgium: the Untold Story of World War I[6] Dynamic of Destruction: Culture and Mass Killing in the First World War[7] Rehearsals: The German Army in Belgium, August 1914[8] Craig Gibson, The culture of destruction in the First World War (2008)[9] 상술한 Lipkes 저서에서 발췌.[10] 빨치산 의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