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데스리가/역사
1. 역사
1.1. 독일 챔피언십
1897년 독일 챔피언십이라는 이름으로 독일 남부와 브란덴부르크에서 축구 리그가 시작되었고 이후 여러 리그가 생겨나며 남부 독일 챔피언십, 브란덴부르크 독일 챔피언십, 중부 독일 챔피언십, 서부 독일 챔피언십, 북부 독일 챔피언십, 남서부 독일 챔피언십, 발트 독일 챔피언십이 생겨났다. 그리고 각 리그에서 우승팀들끼리 플레이오프를 거쳐 우승자를 가리는 '''독일 챔피언십'''이 생겨났다.
1.2. 가우리가
이후 1933년 나치 독일이 정권을 잡으며 무려 16개 지구를 가진 가우리가라는 리그가 생겨났다.
1.3. 오버리가
1945년 나치가 패망하고 5개의 지구를 가진 오버리가가 생겨났다.
1.4. 분데스리가
가우리가, 오버리가같은 리그 방식이 타 유럽 국가에 비해 클럽의 수준이 떨어지게 하자 서독의 3개 지역을 대표하는 16팀을 구성한 통일된 리그를 만들며 시작되었다.[1] 그리고 1965년에 2팀[2] 을 더해 총 18팀이 참가하게 되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원래는 16팀으로 유지하려 했지만 1965년 헤르타 베를린의 급료 불법 지급 파동으로 베를린에 팀이 없어지자 독일 축구 협회에서 억지로 베를린팀을 넣기 위해 두 팀을 늘려야 했고,[3] 20개 팀으로 늘리자는 움직임도 있었지만 실현되지는 않았다.[4] 아무래도 비교적 추운 기후 때문에 많은 경기를 치르기가 힘든 사정이 원인인 것으로 보인다.
1954 스위스 월드컵에서 극적인 우승 때문에[5][6] 축구 열기가 높아져서 정부 차원에서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이는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대표적인 부분이 후술할 인프라 부분. 여기에 독일축구협회에서 재무 부분과 외국인 선수 부분에 대한 관리를 통해 튼튼한 기반을 구축했다.
1971년 1971년 분데스리가 승부조작 사건으로 잠시 인기가 바닥을 치게 되지만, 1974년 서독이 월드컵 우승을 차지하면서 유럽 최고의 리그로 인정받기 시작한다. 이후 90년대 후반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의 부흥기 전까지[7] 유럽 TOP 3 리그 자리를 놓치지 않는다. 이 와중에 1990년 독일은 통일되고, 구 동독 1부 리그인 DDR 오버리가의 상위 2팀이 분데스리가로, 차상위 6팀이 2. 분데스리가로 편입되는 등의 변화를 겪는다.
그러나 1990년대 말부터 프리미어 리그가 본격적으로 성장하면서 점차 밀려나더니 프랑스 리그앙과 포르투갈 프리메이라 리가, 네덜란드 에레디비시와 비슷한 리그가 되어버린다. 이 시기는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이 녹슨 전차라고 불리며 비아냥을 받던 때였다. 이 침체기는 2000년대에 들어오면서까지도 꽤 길게 이어졌다. 독일 통일 과정에서 쓴 비용 문제로 인해 독일 경제가 어렵던 시절이었고, 이것이 리그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2002년 미디어 그룹 키르히가 파산하며 분데스리가 방송 중계권료 폭락으로 인해 분데스리가 클럽들의 재정이 붕괴하기도 했는데, 당시 대부분의 클럽들은 주축 선수들의 주급을 감당할 수 없어 파산 위기를 맞아 어쩔 수 없이 외국 클럽들에게 선수들을 팔아넘겨야 했다. 원래 독일 선수들은 타국 리그에서 뛰는 경우가 드물었지만 이 당시의 일로 대량의 강제 외국 진출이 달성(?)되었다. 근래에 와서야 분데스리가 방송 중계권료가 EPL의 절반(EPL의 새로운 중계권료 계약의 3분의 1(...))을 넘어섰다는 것을 감안하면 당시의 사태가 얼마나 위중했는지 약간은 짐작할 수 있다. 분데스리가와 TV
그러나 꾸준히 재정 면에서 안정을 유지하며 다시금 유럽 TOP 3의 자리를 노리게 되었다. 칼치오폴리 스캔들 이후, 세리에 A가 흔들리면서 리그의 위상 측면에서도 거의 따라잡았으며 리그의 건전성까지 생각하면 오히려 분데스리가가 앞서게 된다. 2009-10 시즌까지 UEFA 리그 랭킹에서 세리에와 분데스리가의 점수 차이는 단 1점 이었고, 무리뉴가 이끄는 인테르의 트레블이 아니었다면, 다시 말해 바이에른 뮌헨이 트레블을 달성했다면 역전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드디어 2013-14 시즌 챔피언스 리그부터 4팀이 출전하게 되었다. 마침내 세리에를 넘어선 것. 유로파 리그에서의 선전과 챔피언스 리그에서 그래도 꾸역꾸역 한 팀이라도 8강에는 진출했던 호성적, 튼튼한 재정 기반과 축구를 사랑하는 많은 인구가 바탕이 되고 있기 때문에 한 때 무너진 리그의 위상을 다시 재건하는데 성공했다.
2012-13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선 3팀 모두 16강에 진출하고 유로파 리그에선 4팀 모두 32강에 진출했는데, 이는 분데스리가 역사에서도 최초이며 이 시즌 유럽 대항전에서도 유일한 전원 토너먼트 진출 성적이라 리그 점수가 올라갔기에 2위인 프리미어 리그를 추격 중이다. 챔피언스 리그 8강에선 바이에른 뮌헨과 도르트문트가 진출했고 4강에도 2팀 모두 진출하면서 전원 8강 진출에 실패한 프리미어 리그를 앞설 듯 싶다. 그리고 챔피언스 리그 4강에서 바이에른과 도르트문트가 각각 바르셀로나, 레알 마드리드를 꺾으면서 역사상 최초로 '''독일 클럽 간의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이 성사되었다. 그리고 바이에른 뮌헨이 우승을 거머쥐며, 동시에 독일 클럽 최초의 '''트레블'''을 달성한다. 그리고 2015-16 시즌 EPL을 넘어 리그 랭킹 2위에 올라섰다.
이렇듯 리그 랭킹 순위를 끌어올릴 정도로 호성적을 기록할만한 클럽들이 등장했기에 분데스리가가 과거 70년대의 화려한 전성기를 되찾는 것이 아니냐는 전망까지 나오고 있었으나 이후 바이에른 뮌헨을 제외한 나머지 팀들이 유럽 대항전에서 일찌감치 전멸하며 2017-18 시즌 종료 후 UEFA 리그 랭킹 4위까지 추락했다. 바이에른 뮌헨을 제외하면 유럽의 유수의 빅클럽들과 비교하여 클럽 규모 면에서 현격하게 떨어지는 것이 문제점이다. 클럽의 경영 건전성을 중시하는 풍토와 50+1 룰에 의한 슈거 대디의 진입이 차단되는 구조에서 분데스리가 클럽들은 이적 시장에서 많은 돈을 투입하기 어렵고 비싼 고액 주급의 선수단을 유지하기 힘들다. 2018-19 시즌에도 챔스진출클럽중 뮌헨을 제외하고 모든 클럽이 16강에서 광탈하는 등 좋지 않았지만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가 유로파 4강에 진출하는 등 세리에 A를 누르고 다시 3위로 올라섰다.
2019-20시즌엔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를 제외하고 모든 클럽이 유로파 16강 이상에 진출했고 거기다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선 '''4강에 리그앙 2팀[8] , 분데스리가 2팀[9] '''이 남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2. 역대 시즌
3. 역대 우승팀
4. 역대 엠블럼
5. 역대 공인구
제작사는 아디다스이며 현재 사용되는 Torfabrik이란 이름은 2010/11시즌부터붙은 이름이다. Torfabrik(토어파브릭)은 직역하면 Goal Factory라는 뜻이다. 이전까지는 리그만의 특징 없이 아디다스에서 제작한 공(팀 가이스트, 유로패스 등)을 그대로 하용하였지만 이후 유로파 리그 공인구와 마찬가지로 연도별 국가대항전에 사용된 공인구의 색상이나 디자인을 조금씩 변경하여 제작하는 형식이다.
여담으로 분데스리가는 국제대회에서 쓰일 아디다스 공인구를 직전 시즌에 1년간 사용하기 때문에 국제 무대에서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의 경쟁력을 상승시킨 숨은 원인 중 하나로 분석되기도 했었다. 예컨데, 자블라니의 반발력에 월드클래스 선수들이 갖은 고생을 겪은 2010 FIFA 월드컵 남아공을 앞둔 09/10 시즌, 분데스리가의 공인구가 자블라니여서 선수들이 충분히 적응할만 했고, 마찬가지로 유로 2008 공인구가 직전시즌인 07/08 분데스리가 공인구였고, 팀 가이스트 역시 2006 FIFA 월드컵 독일을 앞두고 05/06시즌 분데스리가의 공인구였다. 피버노바 역시 01/02 시즌 분데스리가의 공인구였다. 아디다스가 자국 기업이기에 생기는 어드벤티지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자체 제작 공인구를 사용하기 시작한 10/11 시즌부터는 볼 수 없는 풍경이 되었다.
6. 원년 멤버
-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 아인트라흐트 브라운슈바이크
-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 함부르크 SV
- 헤르타 BSC
- 1. FC 카이저슬라우테른
- 카를스루에 SC
- 1. FC 쾰른
- 마이더리허 SV
- TSV 1860 뮌헨
- 1. FC 뉘른베르크
- SC 프로이센 뮌스터
- 1. FC 자르브뤼켄
- FC 샬케 04
- VfB 슈투트가르트
- SV 베르더 브레멘
[1] 1962 칠레 월드컵 8강에서 유고슬라비아에게 패배하며 탈락한 것도 원인 중 하나였다.[2] 바이에른 뮌헨,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3] 이때 어거지로 승격했던 SV 타스마니아 베를린은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는 '''2승 4무 28패'''라는 성적을 기록하며 강등되게 된다.[4] 딱 한 번, 동독 리그와 통합한 첫 시즌인 1991-92 시즌만 20팀이 참가했다. 그러나 이 시즌 4팀을 강등시키고, 2팀만 승격시키면서 다시 18팀으로 고정.[5] 독일 현대사에서 1954년 스위스 월드컵 결승전은 독일이 제2차 세계대전의 죄의식에서 벗어나 비로소 국가로서 재탄생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6] 그러나 도핑이라는 의혹이 매우 강하다. 전반전이 끝나고 하프타임에 메스암페타민(필로폰)을 복용했다는 설이 있다.[7] 이전에는 세리에 A의 부흥기 전까지라고 기록되어 있었지만, 세리에 A는 80년대부터 치고 올라와서 80년대 후반부터 분데스리가를 앞서갔다. 도리어 힐스버러 참사로 인해 클럽들의 유럽 대항전 진출이 막혔었던 프리미어 리그의 부흥 이후 TOP 3 자리를 위협받게 되었다.[8] 파리 생제르맹 FC, 올랭피크 리옹[9] FC 바이에른 뮌헨, RB 라이프치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