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스 커밍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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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미국의 디펜스뉴스와의 인터뷰 중.
1. 소개
2. 계보
3. 활동영역
4. 그밖에
5. 저서

Bruce Cumings 1943년 9월 5일 출생

1. 소개


미국의 한국학자이며 시카고 대학교의 석좌교수이다. 아시아학의 거두로 꼽힌다.

2. 계보


미국의 1세대 한국학자인 에드워드 와그너 (Edward W. Wagner), 그의 제자인 제임스 팔레(James Palais)[1]의 계보를 잇는 2세대 미국인 한국학자다. 1961년에 평화봉사단으로 한국에 온것이 인연이 되어 한국 연구에 파고들었다. 워싱턴 대학교에서 팔레의 동료 겸 후임 교수임에도 불구하고[2], 로스토우 (Walt W. Rostow)의 근대화 이론을 동아시아학에 적용시킨 하버드의 에드윈 라이샤워 (Edwin O. Reischauer)나 존 페어뱅크 (John K. Fairbank)의 영향을 깊이 받은 와그너와 팔레와는 달리,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에 깊이 영향을 받은 시카고 대학교 출신의 해리 하루투니안 (Harry Harootunian)과 테츠오 나지타 (Tetsuo Najita)의 학풍을 더 많이 따라간다.[3][4] 컬럼비아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팔레의 초청을 받아 워싱턴 대학교에서 가르칠 당시에는 특별히 제자를 많이 두지는 않았으나, 시카고 대학교로 학적을 옮긴 이후에 현재까지 UCLA의 이남희 (Namhee Lee),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마이클 신 (Michael D. Shin), 컬럼비아 대학교의 찰스 암스트롱 (Charles Armstrong) 등의 많은 한국사 전공자들을 제자로 길러냈으며, 2017년 현재까지 커밍스 아래서 많은 한국사학자들이 탄생하고 있다.

3. 활동영역


한국전쟁 기원에 대한 담론을 진지한 학문의 영역으로 승화시켰다고 평가받고 있다. 그의 주장을 상당부분 부정한 박명림 교수 및 기타 이후 세대의 학자들조차도 브루스 커밍스가 만들어 놓은 담론의 틀에서 그다지 벗어나지는 못했다. 사실 한국전쟁은 미국에서는 오랫동안 언급자체가 안되던 '''잊힌 전쟁'''이다. 일단 미국이 미영전쟁 이후로는 거의 처음으로 무승부를 기록했던 전쟁이었고 전쟁 기간도 비교적 짧았기 때문에 미국인에게 베트남전쟁처럼 큰 파장을 주지 못했다.
커밍스의 연구는 여러모로 주목할만한데, 당시로서는 파격적으로 조선 사회를 막시스트 관점에서 분석하였다. 또한, 북한을 진지한 담론의 대상으로 끌어올린것도 커밍스가 처음이었다. 북한에 대한 그의 관심은 그의 제자인 찰스 암스트롱이 이어간다. 하지만 암스트롱은 2013년 자신의 저서 <약자의 폭정>에서 고려대학교 북한학과 교수 발라즈 샬론타이 교수의 2005년 저작인 <흐루쇼프 시대의 김일성>을 대거 표절하거나 날조된 출처를 제시한 것이 확인되면서 브라이언 마이어스, 안드레이 란코프 등 저명한 북한학자들의 공격을 받았고 결국 2017년에 <약자의 폭정>으로 수상했던 존 페어뱅크 상을 반납하고 안식년을 보내던 2019년, 24년이나 재직했던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불명예 해임되었다. 컬럼비아 대학교와 NK NEWS에서 암스트롱의 프로파일은 삭제되었고 현재는 학계에서 매장당했다고 볼 수밖에 없을 듯.
'''한때'''는 6.25 전쟁이 자연적으로 발생한 내전이라고 주장했다. 그가 저서인 '한국전쟁의 기원'에서 주장한 내전설의 내용을 요약하면 한반도는 이미 1945년 해방 당시부터 사실상 내전상태였다는 것이다. 기존에는 한국전쟁을 1950년 6월 25일 ~ 1953년 7월 28일으로 한정해서 과연 6월 25일 누가 먼저 침공했나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브루스 커밍스 교수는 해방 직후부터 좌익vs우익, 농민vs지주, 노동자vs자본가, 친일파vs독립운동가, 소련vs미국, 북vs남 등으로 대표되는 각종 모순들이 겹치면서 한반도 전역에서 광범위한 무력충돌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한반도 북부에서 일어난 각종 반공/반소 의거(신의주 반공학생사건이 대표적)와 남부에 벌어진 대구 10.1 사건, 여수시 여수 14연대 반란사건, 제주 4.3 사건, 지리산 빨치산 투쟁은 물론이고, 토지개혁을 둘러싼 농민과 지주의 충돌 등으로 해방 이후 조선은 전국적 혼란 상태였다. 거기에 1948년 남북 양쪽 정권 수립 이후에는 1950년 6월 25일 직전까지 38선 전역에서 산발적인 국지전이 계속되고 있었다[5]. 즉 브루스 커밍스는 이 모든 것을 감안해봤을때 한반도 전역이 사실상 내전 상태였고 6월 25일 누가 먼저 선제공격 했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본 것이다. 초판 이후 개정판에선 견해가 어느 정도 달라진다.
이런 관점에서 '한국전쟁의 기원' '''초판'''은 일제강점기 말기부터 1949년까지의 한반도 내부의 혼란상을 강조하고 있다. 6월 25일의 상황은 북의 조선인민군이 보다 큰 규모의 국지전을 시도하다가 전면전, 총력전으로 확대됐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그러면서 당시에 나온 여러 정황 자료상 남침설이 근거가 적다고 본 것이다. 이에 따라 내전확전설 혹은 남침유도설 등의 가능성을 제기한 것이다. 이 때문에 북침설, 음모론적 남침유도설을 주장했다는 오해를 받기도 하는데 본인은 이에 대해 불쾌, 내지는 황당하게 여기는 모양이다.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를 보면 어쩌다 만나게 된 한국 정부 고위 인사가 "이제는 더 이상 북침설을 주장하지 않는 것이죠?"라고 물어서 그를 어이없게 만든 일도 있다고 한다.
사실 커밍스가 이런 평가를 받은 데는 이유가 있는데, 당시 이 책의 '''한국어 번역판'''을 대학가의 필독서로 만들었던 전대협, 한총련 인사들이 이 책을 근거로 들어 남침유도설을 주장했고, 더 나아가 6.25 이전의 사건을 들어 북침을 주장해 북한에 남침 면죄부를 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걸 읽었든 읽지 않았든 사람들은 커밍스가 그랬다고 여겼다. "6월 25일이란 전면남침 날짜가 의미없다"내지 "적어도 북한은 우발적으로 방어했을 뿐"이라는 주장은 80~90년대 운동권 출신자와 당시 대학을 다닌 정치인과 교사 중에서 지금도 주장하는 사람을 자주 볼 수 있는데 그들이 배운 책 중 하나가 이것이다.
그러나 구소련 및 공산권이 붕괴하면서 그간 숨겨져 있던 기밀문서가 대거 공개되고, 서방측 연구자들이 구소련쪽 인사들의 증언을 들을 수 있게 되자 한국전쟁 연구도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그리고 이런 상태가 전면전으로 발발하게 된 것은 김일성 및 북한지도부의 결심이 큰 작용을 했다는 것이 밝혀졌다.'''[6]
이후 새로운 자료와 증언에 기반해서 한국전쟁의 기원 '''개정판'''에선 스스로 자신의 견해를 수정한다. 자신의 생각보다 '''소련의 지원이나 남침이 훨씬 계획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명확하다'''고 소견을 밝히면서 기존의 수정주의 관점을 폐기한 것이다.
80년대에 한국 현대사학에 새바람을 불어넣고, 그 논의를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린 것"(그의 의견을 상당부분 비판한 박명림 교수의 견해)에서는 괜찮은 학자다. "6.25는 김일성 독단으로 일으켰다"는 기존의 관념에 반론을 제기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논란이 된 것도 사실이지만.
한국전쟁의 기원으로 동아시아 현대사 해석에서 수정주의 사조를 만들어냈으나, 이후 여러 새로운 이론이 등장하면서 퇴색하였다.[7] 특히 연세대학교 박명림 교수가 1995년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을 출판하면서 한국전이 스탈린-모택동-김일성 3자 합의에 의한 명백하고 계획적인 남침이란 것을 풍부한 사료를 통해서 증명하고, 브루스 커밍스 이래 유행하던 수정주의 사조를 무너뜨렸다.
원래부터 이 양반의 방법론은 철저한 사료를 바탕으로 한 미국식 실증주의이다. 미국인으로서 수천건의 한국어 사료를 섭렵하여 연구한 것은 대단하다. 당시 한국학자 중에서도 그만큼 자료를 수집해서 하는 사람도 드물었다. 엄청난 사료를 섭렵해서 연구를 했기 때문에 어쨌든 많이 인용되는 학자이기도 하다.
논란이 되는 것 중에 하나가 김구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것으로, 임정요인들이 해방 이후 귀국하자 '''김구가 일단의 첩의 무리들과 유급 총잡이들을 데리고 귀국했다.'''고 했으며 송진우 마지막으로 대화한 게 김구라는 근거로 송진우 암살 배후를 김구라고 주장했다. 훗날 김자동은 김구가 송진우 암살 배후인건 우파의 음해라고 했다. 그는 1960년대에 자신이 송진우 사위랑 같이 살았는데, 송진우 유족들도 김구가 배후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김자동은 한국전쟁의 기원을 번역한 사람이다.

4. 그밖에


5월 6일 세계의 역사학자 187명이 일본 아베정부의 과거사 왜곡에 항의하는 집단성명을 발표할때 브루스 커밍스도 해당 성명에 동참했다.
10월24일 한국 연구자와 교수들 154명과 함께 한국 교과서 국정화 반대에 동참했다.
가끔씩 세미나 수업도중 자신의 가족얘기나 정치얘기를 하는데, 열렬한 도널드 트럼프의 안티이다. 2016년 대선때 트럼프가 당선되는것 자체를 예상치도 못하시다가..안습. 수업 분위기는 매우 단란한 편이며 오피스 아워 때 찾아가도 인자한 할아버지처럼 맞아준다. 다만 워낙 권위있는 학자다 보니 조금씩 그런 분위기를 풍긴다.[8] 견해가 반대되는 다른 학자들에 대해 솔직히 비판하는 반면, 학생들의 연구주제나 방향에 대해서는 직설적인 비판은 삼가는 편이며, 최대한 건설적인 방향으로 지도와 조언을 해준다.
아내가 한국계 미국인이다.[9] 시카고 컵스의 열렬한 팬이기도 하다.
한국의 여러 교수들과도 친분이 있다. 6.25 전쟁에 관한 그의 학설을 깨트리는데 기여한 박명림 연세대 교수와도 친분이 있다. 예를 들면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 서울대 박태균 교수 등과 안면이 있다고 한다. 그도 그럴만한게, 자주 한국에 강제소환(...)당하는 처지다 보니. 최근 2017년에는 4.3 제주학살사건을 기리는 행사에 참가했다. 또한 전남대 사학과 임종명 교수도 그의 직속 제자로서 친분이 있다.
2020년에 출판 예정인 케임브리지 한국사 시리즈의 제 4권 현대사 부분의 총 저자이다. 제1권 고대사는 이덕일이 시비를 걸던 하버드 대학교의 마크 바잉턴 교수, 제2권 고려사는 렘코 브뢰커(네덜란드 라이덴대)·셈 베르메르스(서울대), 제3권 조선사는 조지 캘랜더(시라큐스대)·유진 박(펜실베이니아대)·마이클 페티드(빙햄턴대), 그리고 총 책임 편집자는 브리티시 컬럼비아 대학교의 도널드 베이커 교수가 맡는다.

5. 저서


  •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10]
  • 미국 패권의 역사
  • 대학과 제국
  • 김정일 코드
  •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
  • 한국전쟁의 기원
[1] 한홍구나 카터 에커트, 존 던컨 등 많은 한국학자들을 길러냈다[2] 커밍스의 학위 논문 제출 당시, 반발이 엄청나서 커밍스는 학자생활을 접는걸 고려해야 했다. 하지만 팔레는 자신의 의견과 정면으로 반대됨에도 불구하고 커밍스를 워싱턴 대학교에 꽂아주었다. 대인배.[3] UC 버클리의 사회학자 존 리 (John Lie)에 의하면, Chicago School 내지는 나지투니안(Najitoonian)이라고 한다. https://en.wikipedia.org/wiki/Harry_Harootunian[4] 다만, 커밍스를 시카고학파로 분류하기는 약간 애매하다.[5] 현역장병을 대상으로 편찬된 정훈만화 같은 곳에서 관련 자료를 제시해주는데, 건국~1950년 6월 초까지의 국지전 횟수가 무려 세자리(!)에 육박한다.[6] 전쟁발발 최소한 몇 달 전부터 김일성과 북한 외교라인은 전면남침을 허락하고 지원해달라고 스탈린과 마오쩌뚱을 설득하는 활동을 했다는 양국 문서가 많이 발견되었다.[7] 1980년대 출간된 해방 전후사의 인식 초판, 1988년에 박세길이 쓴 <다시쓰는 한국현대사> 1권에도 남침유도설 같은 수정주의 관점의 견해들이 대거 수록되었으나, 동시에 당시 대학원생이던 박명림의 "한국전쟁사 쟁점"도 같이 수록되었다.[8] 본인도 스스로의 권위를 알며 은근 즐기는 경향이 조금 엿보인다. 다만, 절대 학생에게 거만하거나 권위주의적이지는 않다. 조금 직설적으로 다른 학자들을 비판하거나 하는 편[9] 무려 15살 차이다.(...)[10] 영어제목은 'Korean War A History'로, 연평도 포격 이후인 2011년에 출간됐다. 국내에는 북미관계가 긴장관계에 놓여있던 2017년에 번역됐다. 키건의 1차세계대전사를 번역한 조행복씨가 번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