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한샘
1. 개요
서한샘(Seo, HanSaem, 1944년 1월 9일 ~ 2019년 5월 6일)은 대한민국의 교사, 국어 강사, 제15대 국회의원이다. 서한샘은 개명된 이름이다. 개명 이전 이름은 서용웅으로, 국어학자 주시경의 호인 한힌샘에서 따온 이름으로 변경하였다. 본관은 이천(利川)이다.
2. 생애
2.1. 출생 및 국어교사 시절
1944년 인천부에서 나고 자라 동산고등학교,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를 졸업했으며, 경기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고등학교 국어 교사로 10여년간 재직하다가 모종의 이유-당시 학교 재직 중 폐결핵으로 병원 입원 중 간호사 분의 극진한 간호로 완쾌, 그 당시 동인천 유명학원 YMCI 학원에서 첫 강의를 하다가 서울 5대 단과 중의 하나였던 남영동 대종학원으로 이직 했다가 서대문 한샘학원으로 옮겨 강의-로 학원강사로 전직, 이후 노량진 등에서 재수학원 단과 강의로 서서히 이름을 알렸다. 노량진대성학원이 있긴 하지만 2010년대 초반까지도 노량진에서의 재수학원의 메인은 단과학원이였다.[1]
2.2. 학원강사 생활
재수학원 강의로 이름을 알리던 중 1980년 전두환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는 7.30교육개혁조치를 통해 대학교 졸업정원제, 과외 금지를 골자로 한 일련의 조치를 내린다. 그러나 오히려 단속을 피해 음지로 숨어들면서 사교육비가 상승하는 악순환으로 이어진다. 결국 TV 강의를 통해 사교육을 대체하겠다는, 오늘날 EBS의 원조격이 되는 시도를 하는데, 이때 영입된 특급 강사 가운데 한 사람이 서한샘이었고, 강의가 히트를 치면서 소위 스타 강사의 원조로서 떠올랐다. 오프라인 강의도 수백 석의 거대 강의실에 빈 자리가 없었다고.
유명어로 '밑줄 쫙~', '돼지꼬리 땡야' 등이 있으며, 사라진 한글 자모 설명 등 그가 고안한 암기법이 많고, 학창시절 그의 강의를 들었던 현재의 주류 강사들(4~50대)이 이를 가져오거나 변형해 사용하는 경우도 많다. 한때는 서한샘의 영향을 안 받은 강사들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이후 비타에듀의 전신이 되는 한샘학원을 설립하였다.198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정진학원과 함께 재수단과의 메카로서 비타에듀가 사업을 접은 2010년대 후반까지도 우수강사의 마르지 않는 샘이였다.[2] . 근황의 자세한건 비타에듀 참고.
2.3. 방송시장으로의 진출
한샘학원을 세우고 나서 교육채널 '''다솜방송'''[3][4] 도 세웠으며, 재산도 많이 모았다.
2.4. 정치의 입문 및 쓰라린 경험
유명세를 바탕으로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인천광역시 연수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신한국당)되기도 했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가 출범한 후 새정치국민회의로 이적하여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출마했다가 낙선하면서 재선에 실패하였고[5] 설상가상으로 그 시기에 많은 재산을 투자했던 다솜방송이 파산하면서 재산상으로도 많은 손실을 입었다.[6]
2.5. 학원으로의 복귀
2003년 조용히 학원 강사로 복귀했다. 2013년부터 공무원 시험 강의에도 뛰어들어 남부고시학원에 이어 2014년에는 공단기 학원에서 국어 강의를 진행하였다. 특히 4월까지의 강의 수강시 이후 서울시 시험까지 오프라인 무료 혜택을 주는 코스가 화제였다. 문제에 있어서도 학원 공통 문제 기출 및 자신의 고유 기출 자료와 문제를 보충하면서 노익장을 과시했다. 강의 시에도 직접 생각하고 푸는 것을 중시하며 이론적으로 깊게 나가기보다는 원리를 정리하면서 시험 수준에 맞게 다져주는 스타일에 가깝다. 다만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에서 다소 빗겨나간 그를 접한 젊은 층은 그의 이름조차 잘 모르기도 하고, 종합반 강의를 진행하지 않아서 수강생이 많지는 않았다.
2017년 하반기 이후로는 정규 커리큘럼 대신 어휘의 힘, 문법 1500제 등 특강을 통해 수험생들을 가르쳤다. 국어 실력이 어느 정도 본궤도에 오른 다음 들으면 좋다는 평이 많으며, 가끔씩 옛 경험을 이야기하여 분위기를 풀어 주는데 이것이 엄청나게 오래된 이야기라 학생들이 혀를 내두르기도 한다. 학창시절 청소년 적십자단 전국 부회장으로서 '''경무대'''에 가서 윤보선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을 예방한 일이라든가, 서울대학교 입시를 쳤는데 그것이 아주 옛날 방식이었다거나...
워낙 경력이 길다 보니 후배 강사들의 존경어린 평가도 여기저기서 들린다. 고종훈 강사는 기출독종 OX 강의에서 "오랜 세월 강의하시는 모습이 멋있다"는 식으로 짤막하게 언급하였다. 사회 민준호 강사가 단과반 강의 때 말하기를, 이선재 강사에게 서한샘 선생님의 위상은 어떠한지 질문했다가 '''"그 누구와도 비교가 불가능한 분"'''이라는 대답을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2018년 대비 <한샘 어휘의 힘> 교재 뒷부분에는 이선재 강사의 장문의 추천사가 실려 있다.
2.6. 별세
2019년 5월 6일 향년 75세로 별세하였다. 뒤늦게 폐암을 발견하여 투병중이었다고 한다.
3. 선거 이력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1] 지금과는 다르게 단과가 평일 오전, 오후에도 있는 다른 지역에서 찾기 힘든 독특한 문화였다. 물론 평일 저녁, 주말에 열리는 재학생용 강의도 있기는 하다. 지금은 학생 수 급감으로 인해 평일 오전, 오후에 열리는 재수단과는 찾기 힘들다[2] 정진학원과 더불어 스타강사가 되려면 반드시 거쳐가야 하는 곳으로 2000년대에도 유명강사가 많이 거쳐갔다. 국어의 이근갑, 정지웅, 김상진, 추경문, 박담. 영어의 최원용, 이충권, 김정호(타미), 로즈리, 김한상, 이박사(그 이박사가 아니다.), 김선권. 수학의 라승균, 홍기하, 삽자루, 정승제, 이기홍(폴수학), 유상현 과학의 백인덕, 백호, 김성재, 오지훈. 사회의 최진기, 신상호, 위종욱, 현재복, 오성균, 설민석, 라영환 등 화려한 강사진들의 마르지 않는 샘이였다[3] 1994년 개국하였으며 당시 사옥은 마포구 서교동 337-8(와우산로 143)번지에 있었다. 당시 채널 번호는 26번. 1998년 초 파산하면서 대한민국 케이블 역사상 최초로 파산한 방송사라는 기록을 남겼다. 이후 홈마트에 인수되고 의료전문방송으로 업종을 전환한 후에도 이 명칭을 사용하다가 1999년 의료+건강 26을 거쳐 2004년 생활건강TV로 변경하였다. 그 뒤 2015년 현재의 카툰네트워크 계열 만화채널 부메랑으로 바뀌었다. 참고로 다솜방송 사옥이 있었던 자리는 한국영화아카데미가 사용하다가 현재는 다른 건물로 사용중이다.[4] 사명의 의미는 '사랑'이라는 뜻의 순우리말로 대한민국 교육의 미래를 책임지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차이점으로는 비슷한 시기에 개국한 마이TV(미래교육방송)와 이듬해에 개국한 두산수퍼네트워크(DSN)가 약간의 광고수입으로 운영된 것과는 달리 다솜방송은 공익광고를 제외한 상업광고를 일체 하지 않았다.[5] 이 당시 서한샘을 꺾고 당선된 사람이 훗날 새누리당 대표를 지내는 황우여다. 참고로 3위는 자유민주연합 소속으로 출마한 배우 정한용이다.[6] 서한샘이 정치와 방송사업 등으로 학원계를 떠난 사이 빈 자리에서 유두선이 국어 1타 강사로 성장하였는데, 정진학원의 유두선이 국가 단속으로 주춤한 동안 손주은이 메가스터디를 통해 중견기업으로 성장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