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박사

 



'''이박사
李博士 | Epaksa
'''
'''본명'''
이용석
'''출생'''
1954년 10월 5일 (70세)
경기도 양주군 화도면
(現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종교'''
불교[1]
'''형제자매'''
3남 중 셋째
'''신체'''
160cm, 45kg
'''직업'''
테크노, 트로트 가수
'''소속사'''
빅대디엔터테인먼트[2]
'''데뷔'''
1989년 '신바람 이박사'[3]
1. 개요
2. 생애
2.1. 데뷔 전
2.2. 전성기
2.3. 그 후
3. 활동
3.1. 방송&음악 활동
4. 미투 운동 관련 발언 논란
5. 평가
5.1. 일본에서의 평가
5.2. 한국에서의 평가
6. 앨범 목록
6.1. 한국
6.2. 일본
6.2.1. DVD
6.3. 도서
7.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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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예술을 알면 돈이 멀어지고, 돈을 알면 예술이 멀어져야 돼. 그래야 음악가야."'''

이박사의 몽키 매직 - 스페이스 몽키 (Feat. 윈디 시티) 도입부 中

'''대한민국 뽕짝의 대표주자'''이자 뮤지션으로, 일본에서 슈퍼스타 대우를 받는 몇 안되는 트로트 가수다. 1954년 10월 5일 경기도 양주군 화도면(현 남양주시 화도읍) 출생. 본명은 이용석.
각각 EDM, 테크노를 결합한 노래를 만들어 트로트 내에서 새로운 장르를 만들었다. 기존의 트로트 가수들과는 상반된 자신만의 독자적인 영역을 개척하고 있는 가수다. 세계 일렉트로닉 뮤직계에서 저명한 "덴키 그루브" 등의 일본 일렉트로니카 집단과 협업하고 앨범도 발매한 적이 있다. 구전가요, 트로트 곡을 커버하는 경우도 많았지만 오리지널 넘버들이 존재하며 특유의 장르를 초월한 사이키델릭함으로 회자되고 있다. 말 그대로 비공식 장르인 "뽕짝" 의 알파이자 오메가인 셈. 정통 트로트 뮤지션이라 자칭하는 쪽에서는 배척받는 분위기이지만 자신만의 독자적인 스타일을 구축한 가수이다.[4]

2. 생애



2.1. 데뷔 전


국악인이었던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박사의 아버지인 이 모 씨는 근동에서 유명한 국악인이며, 이박사의 어머니도 목청이 좋을 정도로 소리를 잘 낸 국악인이었다고 한다. 이박사가 태어났을 당시 아버지의 나이가 세는나이 기준으로 61살이었으며,[5]아버지의 별세도 객지에서, 그것도 이박사가 갓난아기 시기에 맞이해서 자신의 아버지 얼굴을 본 기억이 전혀 없었다고 한다.
초등학교 때부터 가요를 시작하여 신동 소리를 들었으며, 15살 때부터 록 음악에 심취하더니 부모님으로부터 경기도 민요까지 접하였다가, 결국 19세에 들어서 뽕짝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고 한다.
관광버스 가이드로 일한 경력이 있으며, 관광객들에게 안내와 더불어 노래를 불러주기도 했다. 그 시대의 관광버스에는 리듬 박스라는 일종의 드럼머신이 장치된 경우가 많았는데, 이걸 틀어놓고 그 박자에 맞춰 노래를 불러주곤 했다. 나중에 전자 음악과 잘 어울리는 이유도 여기서 찾는 경우도 있다. (초기 맹인 키보디스트와 활동한 적이 있었는데 그 당시 사용하던 야마하, 인켈 키보드에는 간소화된 드럼머신 기능이 내장되어 있는 경우가 많아 그것을 활용하여 bpm을 올렸다 내렸다 하면서 공연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 애초에 키보드, 신디사이저로 음악을 시작했으니 전자음악에 대한 조예와 느낌을 체득했음은 자명한 일))
유년 시절 경기민요를 배운 경험을 바탕으로, 노래 중간 중간에 독특한 추임새를 넣어 관광객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기 시작한다. 이러한 추임새는 현재까지도 '이박사'하면 먼저 떠오르는 그 만의 트레이드 마크로 자리 잡고 있다. 보통 뽕짝이라 칭하는 구전 트로트 스타일 + 민요에서는 짤막한 추임새를 가끔 넣으면서 흥을 이끄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이박사는 이 단편적인 추임새를 기반으로 추임새 자체로 "싱잉"(?)을 하는 말로 표현할수 없는 독특한 스타일과 그루브를 보여주었고 한창 이박사가 유명세를 타던 시절 방송에서 이박사 모창을 시도한 연예인, 일반인들이 있었지만 근처에도 가지 못했을 정도로 독보적이었다.
당시, MBC 인간시대에 '신바람 이박사(1989년 11월 13일 방영)'라는 제목으로 출연한 적이 있는데, 머리 속에 넣고 있는 노래가 3,000개였다고. 또, 이박사의 노래를 틀어 놓고 즉석에서 도너츠를 반죽해서 만드는 분의 사연도 '춤추는 도너츠'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적이 있다. 방송은 이쪽이 먼저다.
참고로 관광버스 가이드를 하기 전에는 양복점을 운영했는데 '''재미가 없어서''' 그만 두고 노래 부르면서 일할 수 있는 관광버스 가이드 일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 전의 일을 보면 세는나이로 17살 되던 해에 처음으로 요정에서 3개월 동안 잔심부름일을 하였고 양복점 시다 3년을 했다. 그 후 이발소 시다, 우체국 편지배달, 중국집 음식배달, 다방 심부름, 당구장 등의 일을 전전했다. 세는나이로 20살, 만 19세가 된 해인 1973년 5월 KBS에서 민속백일장이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의 지역예선에 입상을 해 서울로 올라가 본선 참가를 했지만 본선에서 망했다고 한다. 서울에서 구두닦이를 하면서 1년을 전전하다가 고향으로 내려가 양복점 시다와 요정 아가씨를 상대로 창을 가르치는 일을 하였다. 1976년 이후 아예 양복점을 세차례나 경영하면서 두차례 망해서 남의 양복점 가서 일하면서 돈모으고 세번째 양복점을 개업했는데, '''영 재미가 없어서''' 자신이 개업한 양복점을 남한테 넘기고, 친구 빚 갚아주고 노래 부르면서 일할 수 있는 관광버스 가이드 일을 시작했다고 한다.
이와 관련해서 위키백과 문서에 1977년 군 전역 후 관광버스 가이드 생활을 시작했었다고 나온적이 있었지만 이박사가 병역을 마치고 관광버스 가이드 생활을 시작했다는 내용은 방위병 복무만으로 보면 사실일 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다.[6]
2001년 자서전을 냈다. 제목은 '이박사 - 한번 만나볼까요?'

2.2. 전성기



살충제 광고.
[image]
소니뮤직에서 제작한 포스터
1989년가수데뷔한 그는 신바람 이박사 Vol.1 을 출시한다. 기존 고속도로 뽕짝과는 사뭇 다른 노래들로 테이프 판매량 1백만 장 이상을 기록하는 놀라운 인기를 얻게 된다. 이 인기의 여파로 각종 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되며, 그 이후 19개의 앨범을 내고, 앨범마다 큰 인기를 얻으며 고속도로에서 신바람나게 팔려나갔다.
하지만 제한된 영역에서의 히트였기 때문에 한계가 있다고 판단, 이박사와 그를 돕던 매니저 측은 1995년 일본 진출을 기획하게 된다. 일본의 모 인디 레이블을 통해 일본 진출 가능성을 점쳐보려 했는데, 샘플을 들었던 사람 중에 운 좋게도 소니 뮤직 대표가 있어, 쉽게 앨범을 내고 일본에 진출할 수 있었다고 한다. [7]
그 덕에 첫 일본진출 앨범인 1996년 Encyclopedia of Pon-Chak을 발매한 이후, 일본에서 지명도를 얻으며 이후 "뽕짝으로 키가 5cm 컸다" 등의 다양한 음반을 내며 일본에서 "바다건너 온 스타"로서 자리매김을 굳건히 하게 된다.

이후 1997년, 일본의 전위예술 그룹인 메이와 덴키(명화전기)와의 공동작업으로 オレは宇宙のファンタジー(나는 우주의 판타지)라는 제목부터 우주적인 센스를 가진 앨범을 발매했다. 앨범 전곡 듣기 이 앨범의 동명의 수록곡은 국내에서 1집 발매 때 테크노 뮤지션인 가재발의 재편곡으로 스페이스 판타지로 리메이크되었다. 이 외에도 의외로 일렉트로니카 영역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임으로써 일본 등지에서는 상당한 인지도를 얻고 있다. 참고로 한국에 인디음악이 창궐하던 90년대 후반(98년) 볼빨간이라는 뮤지션이[8] 1집 '지루박 리믹스 쑈' 앨범에서 이 곡의 오마주인 '나는 육체의 환타지'를 발표한 적이 있다.[9]

특히 1996년 전기 그루브와 함께 '이박사 덴키그루브 : 열려라 뽕짝'이라는 앨범을 작업했으며, 본격적으로 테크노씬에 손을 댄 탓에 당시 국내에서는 흔치 않았던 일본식 테크노 음악을 만드는 것으로 우리나라 일렉씬에서도 많이 알아주는, 어쩐지 평가가 묘하게 엇갈리는 가수.

'''SBS - 이주일의 투나잇 쇼 출연영상''' 아래 서술하는 무도관 공연 일부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앨범의 인기를 몰아 덴키 그루브무도관 공연 오프닝 무대에도 섰다. 그리고 도쿄대학의 '''초청'''을 받아 한국 트로트의 역사와 전통을 주제로 한 강연도 했다. 무엇보다 이게 최근도 아니고, 과거 트로트엔카의 하위장르로 인식되던 시절의 일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대단한 것이다.

2.3. 그 후


한국에서 한창 인기있을 때, 집앞의 나무를 다듬다가 다리를 다쳐 몇 년간 활동을 못했다. 2012년MBC 공감토크쇼 놀러와에도 출연해서 당시의 상황을 설명했다. 게다가 그 공백기 동안 사기도 두 번이나 당하고 2년간 빽빽히 차있는 스케줄이 모두 취소되어 위약금을 배상하게 되어 '''100억'''에 달하는 가산까지[10] 모두 사라지고 이혼도 했다.[11] 결국 이런 인생의 시련들로 인해 마지막 남은 큰아들과 함께 힘든 생활을 지내 왔었다고 한다.
경기도 남양주시 오남읍 천마산 인근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카페를 운영하고 있었다. 링크 날씨가 좋은 날 동네를 지나다니다 보면 금발머리를 휘날리며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모습을 간혹 볼 수 있었다.
2019년 들어서 근황올림픽에서 올린 영상에 따르면 인천으로 이사를 간 듯하며, 2층 사무실을 월세로 임대하여 라이브 카페를 돌며 생활을 이어오고 있는 듯하다.
2020년 빅대디엔터테인먼트라는 회사와 계약후 새 앨범 발매 준비를 하고 있다. #
깡 패러디인 '깡키매직'을 준비했다고 한다. 새 앨범으로 7월중 컴백할 계획이라고. #
2020년 8월, 빅대디 계약 후 첫 싱글인 ‘술이 웬수다’를 발매했다. 그리고 술이 웬수다 챌린지를 시작했다.
킬링트로트(...) 라는 것에 출연해서 라이브를 했다. 딩고 킬링벌스의 패러디인 듯. 배경이나 엠블럼 등이 동일하다. https://youtu.be/iU4ocyxPWy4
빅대디엔터와 계약한 후 머리스타일을 확 바꾸고, KBS전주에서 진행하는 백투더뮤직에 출연해 2019년 제작한 곡 '야야야' 라이브를 했다. https://youtu.be/IA6m-FGfuAA 참고로 해당 곡은 이박사 작사 작곡에 편곡은 아들 이성민이 맡았다.
복면가왕에 출연했다.

3. 활동



3.1. 방송&음악 활동


과거 한국에서는 엽기나 인터넷 열풍으로 알려지긴 했지만, 최근 들어서 재평가를 받고 있는 트로트&일렉트로닉 계 아티스트이다. 자세한 사항은 평가 참조.
1989년 인간시대 (MBC)
2000년 키움닷컴증권광고에 출연했다.
2001년 시트콤 세 친구에 특별출연 하였다. 다만 스토리에 영향을 끼치는 역할이 아니라 엑스트라로서 나온다.
시트콤 세 친구 제 57화 - 한판승부 세 친구/에피소드 목록#s-6.7
2008년 기분 좋은 날 (MBC)
2010년 8월 4일에는 MBN 뉴스M에 출연하여, 앵커들에게 굴욕을 주기도 했다. 관련 내용


2012년 8월, 인천 펜타포트 락 페스티벌 스페셜 게스트로 출연했다.
2012년 8월 23일, 미니앨범 "레알 뽕짝커"를 통해 컴백했다. 아수라발발타, 다른 오빠(feat. 미미시스터즈), 몽키매직 - 스페이스 몽키 (feat. 윈디시티) 세 곡이 수록되었다. 그리고 컴백과 함께 엠넷의 '비틀즈 코드'에 출연했다.
2012년 9월 10일 인터뷰

한국 품바 예술협회에 고문으로 가입되어 있다. 링크 (임원소개를 누르고 두번째 페이지를 보면 이박사님의 증명사진을 볼 수 있다!)
2012년, 싸이강남스타일의 열풍에 대해 내 전성기에 유튜브 있었으면 싸이처럼 월드 스타가 되었을 것이라고 인터뷰를 했다. # [12] 다른 가수가 이런 말을 했으면 아무리 인기가 많은 가수라도 '싸이 인기에 편승하려는 것이냐?'라는 소리를 들었겠지만 이박사가 한 이 말에 반문을 던지는 사람은 많이 없다.
2013년 11월 3일 자 도전 1000곡에 출연하였다. 관련 영상
2013년 11월 26일에는 MBC 컬투의 베란다쇼 '싼티의 매력 속으로'편에 출연하였다.
2014년 11월 21일에 홍대 롤링홀 공연 "이박사x이랑"에서 팬클럽 재창단을 선언했다.

2014년 11월 23일 발매된 임창정의 '''임박사와 함께 춤을'''[13] 에 피처링에 참여했다. 여전한 뽕짝끼는 일품. 노래도 좋다.
2016년 테크노 뽕짝 가수 이박사41번째 앨범 낸 '테크노 뽕짝' 가수 이박사 "듣는 사람 신나게 해준 게 장수 비결"

2017년 11월에 비스츠앤네이티브스소속 DJ 및 프로듀서인 250이 이박사 메들리 오프닝을 샘플링한 Spring이라는 곡을 내놓기도 하였고, 위 영상과 같이 이박사의 인터뷰 영상의 목소리 샘플을 가지고 기가막힌 비트를 창작해냈다.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공연을 하고 있는데, 특이한 점이라면 각설이 품바 공연단이랑 매번 같이 다닌다는 점...
인디레이블 비싼트로피의 오너인 박정근의 조광사진관에서 공연이 열린 적도 있었으며[14] 유튜브 등지에서는 이박사와 유사한 컨셉으로 애니송 등을 커버하는 영상이 인기를 끌기도 했다.
아들 이성민씨와 함께 금도희 등 다른 가수들에게 곡을 주기도 한다. 작사, 작곡은 이박사가 하고 편곡은 이성민씨가 맡는 식. 참고로 이박사의 ‘야야야’ 역시 이성민의 편곡이 들어갔다.
2019년 7월에 근황이 공개되었고, 인천에 있는 한 나이트에 취직했다고 한다.
2019년 8월 7일 채널A 교양프로그램 행복한 아침에 게스트로 출연하여 근황을 전했다.

10월 19일 나몰라 패밀리와 콜라보 음악 '때려너'를 발표했다. 이 곡에선 트랩까지 선보인다!
행사도 꾸준히 받는데, 이박사의 유튜브 채널로 행사문의를 받고 있다. 댓글에서 말하는 바에 따르면 1회 행사비가 50만원에서 100만원 정도 하는 듯하다.
델모라는 가수의 곡 ‘갓’에 피처링했다. 사실 피처링은 아니고 나레이션.
2020년 2월 김종만의 '수원성에서'라는 곡을 만들어주었다. 작곡이 이박사이고 편곡은 아들인 이성민이 맡았다.
2020년 빅대디 엔터테인먼트와 계약하고 2020년 8월 싱글 ‘술이 웬수다’를 발매했다.

을 패러디한 몽키매직 뮤직비디오 '깡키매직'을 새로 찍었다. 아마 새로 녹음한 버전으로 추측된다.
곧 새로운 앨범이 발매된다고 한다.# 복귀 앨범에는 최대 히트곡인 몽키매직의 2020년 버전과 민요 옹헤야를 현대감각으로 재편곡한 '신 옹헤야', 그리고 선공개곡 '술이 웬수다' 등등이 수록될 예정이라고 한다.

2020년 12월 6일 사이코러스에 출연하여 포스를 뿜으며 황제성양세찬압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EP. 387).

4. 미투 운동 관련 발언 논란


"이 노래 들으면서 마음대로 춤을 추되, 요즘에 여자들 잘 사귀어야 돼. 잘못하면 ‘미투’에 인생 조져"

2018년 8월 제천국제음악영화제에서 "여자 잘못 사귀면 미투로 인생 망친다"는 발언을 하여 논란이 되었다. 언론의 특별한 언급은 없었다.

5. 평가


일본에서는 김연자와 쌍벽을 이루었던 원조 한류스타로서 인기가 상당했던 반면 대한민국에서는 젊은 층들에게는 상당한 인기가 있었지만 주위 트로트 가수들에게 뽕짝 가수라는 이유로 천대를 받았다. 그러나 일본과 한국 양국에 테크노 트로트를 개척하고 전파시킨 뮤지션임은 명백하다.

5.1. 일본에서의 평가


일본에서 꽤 인기를 끌었다. 처음 일본에 진출했던 90년대 당시에는 일본인들이 "한국하면 뽕짝(Pon-chak)아닌가요."라고 여기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또한 후지테레비의 HEY!HEY!HEY!에 2번째로 출연한 외국인 가수 타이틀도 가지고 있다. 니코니코 동화에 올라오는 그의 영상에는 한국인에게 흔히 붙는 비하나 욕이 전혀 달리지 않는다. 아니, 애초에 영상에 붙는 태그가 '한국을 싫어하는 나도 인정하는 한류 슈퍼스타'. 국내에서는 보기도 힘든 80년대 테이프나 음원들도 죄다 일본인들이 발굴해서 유튜브 등지에 올릴 정도다.

여담으로 일본 활동기의 이박사는 팝송이나 일본 음악을 자신의 스타일로 체화시키기도 했는데, 가장 대표적인 곡이 빌리지 피플YMCA고다이고Monkey Magic.

5.2. 한국에서의 평가


최근에서는 재평가를 받으며 천편일률적인 뽕짝에서 벗어났지만, 여전히 한국에서는 '이박사'라고 하면 몇몇 사람들은 고속도로 휴게소 판매용 음반이나 내는 가치없는 저급 노래꾼으로 치부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트로트 가수 중 한 사람인 태진아가 과거에 이박사를 가리킬 때 "이박사는 '''정통 트롯트 가수가 아니며, 그저 광대'''에 불과하다" 라고 강도 높게 폄하하면서 상종조차 하지 않으려 했던 것도 그런 사례 중 하나다.( )
'''하지만, 최근에 들어서 대부분 사람들은...'''

'''"가우스를 평가하는 구몬 선생들"'''

영상의 최다 좋아요 댓글

"8명의 스님들이 불경을 외우다 부처님이 강림 하셨는데 "오, 저거 부처 아니야?" 라고 말하거나, 8명의 신부님들 또는 목사님들이 기도를 하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오 저거 예수 아니야?" 라고 말하는 급"

스님들이 불경외다가 진짜로 앞에 부처님 나타났는데 삿대질하면서 엥? 저거 부처맞아? 이런 개지랄을 한다고 해서 보러왔는데 진짜 말그대로네

영상의 댓글 中

현재 시점에서 이박사의 평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트로트 엑스의 출연 장면이다. 오래 전에 이박사에게 광대라고 비난을 날렸던 태진아는 심사위원으로 나올 법한 인물이 무대에 서서 공연 [15]을 하니 태진아 본인도 어이없다는 듯이 짜증이 가득한 웃음을 지었고, 설운도, 박명수는 싸한 분위기를 아는지 연신 태진아 눈치를 슬슬 본다.[16] 어쨌든 박명수와 설운도는 최소한 무례한 태도는 보이지 않았기에 그나마 비판을 덜 받았다.
게다가 아무리 방송이라 한들, 다른 까마득한 후배 출연진들 또한 이박사를 가리키며 이박사 아니냐며 반말이나 삿대질 등 기본적으로 무례한 행동을 했기 때문에 모든 심사위원들이 네티즌들의 강도높은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17] 저 자리에 서 있는 사람이 이박사가 아니라 송대관이어도 심사위원들이 "오 송대관 아냐?"라고 할 수 있을지 생각해보면 답이 나온다. 모니터 뒤에 가려져 있다고 해도 신기한 물건을 본 것 마냥 너무 대놓고 삿대질을 한다. 물론 심사위원들의 태도만 탓할 것이 아니라, 이박사의 음악이나 뽕짝 자체를 저질문화로 치부하던 한국의 풍조도 책임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18]
'''뚝심있게 자신만의 장르 음악을 한다는 건 무시받기는커녕 존경받아야 할 진정한 음악인의 자세다.''' 자신만의 영역을 개척하여 새로운 음악을 일구어낸 음악인에 대한 평가가 싸구려 같다는 이유로 절하되고 예우가 전혀 갖추어지지 않은 현실을 볼 수 있다. 특히 2000년대 이후 발전을 멈추고 그저 그런 양산형 음악만을 쏟아내어왔던 트로트 업계가 이박사를 폄하할 자격이 있는지 의문이지만, 애초에 자신들과 스타일이 다르고 취향을 탄다는 이유로 일방적으로 깎아내리는 것은 굉장히 무례한 일이며 도리에도 맞지 않는 것이다.
현재 트로트계에서 가장 젊은 세대인 20~30대 신세대 트로트 가수들도 자신들만의 새로운 스타일을 개발하지 않고 기존 선배들이 해왔던 트로트에 그냥 박자만 빠르게 바꾸거나 기존 히트곡의 변주나 복제에 그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이는 더욱 더 반성해야 할 세태라고 할 수 있다. 사실 트로트 가수가 이전 트로트 풍을 계승한다는것은 그리 큰 잘못은 아니다. 이박사도 트로트로 시작한 트로트 가수이며 그의 음악 스타일도 이질적인 면이 있지만 트로트 느낌이 남아있다.
문제는 2000년대 이후로 등장한 이른바 세미 트로트가 트로트의 창법과 음계를 전혀 사용하지 않은 사실상 하우스 댄스풍 노래이며 트로트의 이름만 듸집어 씌운 채 트로트의 정체성을 훼손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2000년대 신세대 트로트 가수들은 좋게 말하자면 참고하고, 나쁘게 말하자면 배끼거나 복제했으면서도 이를 잘 계승하지 못했다는 것.
다행히도 최근에는 이박사의 과거 음반이나 행적들이 발굴되면서 조금씩 좋은 재평가를 받고 있다. 일본에서의 인기와 받아들이는 모습과는 많이 다르다. 최근 한국에서 이박사는 아주 독창적이고 독립적인 예술가의 이미지는 있으나, 영향력이 거대한 거장으로서의 인식은 거의 없다. 이는 일반적인 트로트 노래들보다 몽키매직 하나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던, 동시에 한국에서는 대접받지 못했기에 이박사에 대해 제한적인 정보를 받아들인, 인터넷에 익숙한 세대의 영향이다.
2000년대에 학창 시절을 보냈던 90년대생들은 이박사라는 가수는 몰라도 그의 노래는 접한 적이 있었을 것이다. 오락실에서는 Pump It Up에서는 몽키 매직이 수록되었고, 개그콘서트에서는 정종철이 아리랑에 맞춰 부채춤을 추는 코너 아리아리도 나름 인기 코너였으며, 당시 유행하던 판타지 개그에서는 개그가 나온 후 캐릭터들이 막춤을 추는 장면에서 스페이스 판타지가 나왔다. 유튜브에서 이박사 노래를 찾다보면 그때의 추억을 회고하는 댓글을 많이 볼 수 있다.
미스터리 음악쇼 복면가왕 140회차 경연에서 나는 개똥벌레~ 적수가 없네~ 반딧불이라는 이름으로 참가했는데, 1라운드에서 목소리를 듣자마자 그를 눈치챈 판정단들은[19] 이박사를 칭찬했다.[20] '''트로트 가수들은 그를 외면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비 트로트 음악 관계자들은 그를 칭송한다.'''
평소 레게를 기반으로, 한국적 요소에 집중하던 김반장(윈디시티)에 의해 윈디시티 공연에 헤드라이너(?)로 나왔으며 목에 탬버린을 걸고 유유자적하게 걸어나오는 이박사,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뮤지션 이박사!!!" 라고 토스팅하는 김반장, 열광하는 관객들 등 조그마한 장관을 연출했으며 이박사는 신들린듯한 애드립과 추임새로 화답했다.
공연 초반에 연주하는 윈디시티 멤버들에게 하나하나 다가가며 "밥먹었니" "진짜 잘한다 잘해~" "너 오랜만에 본다?" 등 대화를 걸고 악수를 청하는 등, 공연이 아니라 잼을 하러 나온듯한 모습을 보였으며 굉장히 멋진 공연이 되었다. 유튜브에서 확인 가능하며 본 문서 중단에도 게재 되어있다.거듭 말하듯 "트로트" 뮤지션이라는 집단에서는 배척받으나 다른 분야의 뮤지션, 예술가들에게는 존경받는 인물이다. 이 공연에서 본 문서 최 상단에 있는 이박사의 명언이 나왔다.

6. 앨범 목록



6.1. 한국


  • 1989년 신바람 이박사 1, 2, 3집(1989 TGR Reissue-HSR)
  • 1990년 유행가 뽕짝
  • 1990년 굿거리 장단
  • 1990년 아싸 좋아 1, 2, 3집
  • 1991년 그것도 모르냐
  • 1993년 서울깜빡이
  • 1996년 앗싸 유랑 서커스
  • 1996년 노래하는 이박사
  • 1996년 이박사 김박사 테크노 쌍쌍박사
  • 2000년 신바람 인터넷 이박사 1, 2
  • 2000년 신바람 인터넷 콘서트 이박사 3, 4
  • 2000년 멋대로 맘대로 [21]
  • 2000년 E-PAK-SA 스페이스 환타지 (정규 1집)
  • 2001년 PAK-Sa Revolution & Emotion (정규 2집)
  • 2003년 E-PAK-SA 003[* 2003년에도 epaksa 003 이라는 앨범을 냈었는데. 이게 헤비메탈, 레게, 테크노 등을 적극적으로 시도했다. 본인이 디시뉴스에서 한 인터뷰에 따르면 "내가 하고 싶은 음악을 100이라고 하면 70 정도는 구현해낸 앨범" 이라고.] (정규 3집)
  • 2003년 스페이스 환타지
  • 2003년 Epaksa 캐롤 2003
  • 2004년 메들리 황제 이박사
  • 2005년 사랑은 일방통행
  • 2006년 이박사 하이웨이 랩 댄싱
  • 2009년 야야야
  • 2011년 야야야3
  • 2012년 레알 뽕짝커
  • 2014년 신바람 이박사 앗싸 대박났다
  • 2016년 테크노 뽕짝 가수 이박사
계속 메들리 앨범을 내긴 하지만 정규 앨범은 소니뮤직에서 발매한 스페이스 환타지와 PAK-Sa Revolution & Emotion, 003 세 장뿐이다.

6.2. 일본


  • 1996년 YOUNGMAN 영맨 (싱글)
  • 1996년 I LOVE FIFA WORLD CUP (싱글)
  • 1996년 이박사의 뽕짝으로 키가 5cm 자랐다!
  • 1996년 이박사 VS 덴키 그루브의 "열러라! 뽕짝!"
  • 1996년 뽕짝 대백과
  • 1997년 나는 우주의 환타지
  • 2002년 이박사의 2002년 우주 여행

6.2.1. DVD


  • 2004년 이박사의 80일간 세계 일주

6.3. 도서


  • 2001년 신바람 이박사 한번 만나볼까요?

7. 여담


  • 무한도전에서 박명수가 멤버들에게 노래를 작곡해주는 "박명수의 어떤가요" 특집 당시, 노홍철이 박명수와 1대1 면담때 자신이 존경하는 뮤지션이 이박사라고 밝혔다. 그때 언급한 음악이 <학교 매점 출출해>였다.
  • 체격이 작다는 등의 이유로 무시당했던, 아픈 기억이 있어 다시 태어나면 노래 안 한다고 한다. 연예 뒤통령이진호의 영상

[1] 집 벽에 달마 그림이 걸려 있다.[2] 노지훈이 소속된 회사이다.[3] 네이버 인물검색시 데뷔관련하여 2000년 1집 앨법 'Space Fantasy'로 나온다.[4] 그의 음악을 딱히 무엇이라고 지칭할 수는 없으나 "이박사 스타일" 이라고 하면 대부분 알아듣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5] 이박사의 아버지는 1894년생이다.[6] 이박사가 청년시기였던 1970년대의 배경을 보면 당시의 청년층 인구가 많아 병역자원이 넘쳐나던 시기였으며, 이 영향으로 인해 현역병 입영대상이 50%도 안되고 방위병 소집이 되거나 장기대기로 병역이 면제되는 경우도 많았던 시기였다. 초등학교만 졸업한 이박사의 학력, 당시의 키와 체중에 의한 병역판정기준으로 이박사가 관광버스 가이드가 되기 전에 방위병으로 소집되어 병역을 마쳤거나 장기대기로 인한 소집면제였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기간 동안 일자리를 전전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박사처럼 1954년생이 주요 대상자였던 1973년 징병검사에서 초등학교 졸업자는 갑종(1급)만 현역, 1~3을종(2~4급)은 당시 방위병 소집대상이던 보충역이었다. 이와 비슷한 상황에 놓였던 것은 태진아도 비슷하며, 태진아는 방위병으로 병역을 마쳤다.[7] 그래서 라르크 앙 시엘이 소속된 것으로 유명한 소니 뮤직 산하의 큔 레코드(ki/oon records)를 통하여 앨범을 발매하였다.[8] 볼빨간사춘기와는 다르다.[9] 사실 이 앨범 거의 전체가 이박사 오마주에 가깝다. 1번 트랙 제목이 '지루박 돌려요! (이박사에게 바침)'[10] 인터뷰에서 한 곡 부를때 마다 천만 원을 받던 가수였고, CF도 심심하면 찍을 정도였으니 자세히는 100억이 넘었을 것이라고 본인이 이야기 하기도 했다.[11] 전처와 사이가 나빠서 이혼한 거까지는 아니라고 한다. 생활고로 인한 합의 이혼에 가까웠다고. 이혼한 후에도 전처와 간간히 만나는 듯하다.[12] 사실 펌프 잇 업 때문에 의외로 중남미권에서는 좀 알려진 편이다.[13] 사실 이 노래는 동년 3월에 발매된 임창정의 정규 12집 앨범인 '흔한 노래, 흔한 멜로디...' 에 이미 먼저 수록되어 있던 곡이고, 이박사도 이 때 피쳐링에 참여했지만 별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몇 개월 후 임창정이 낸 싱글앨범 '친한 사람' 에 다시 수록되어 주목받기 시작했다.[14] 당시 밤섬해적단권용만이 드럼을 치기도 했다(…).[15] 무대 중간에 디스코를 잘 추며 잘 노네 부분에서 급발진 버럭을 외치는데 이게 또 기묘함을 자아내는 장면으로 회자된다. 그리고 무대에 앞서 손가락질을 하는데 방향상 태진아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16] 두 사람 모두 이박사를 보며 웃고, 홍진영, 박현빈등이 얘기하는 것을 듣다가도 태진아를 볼때마다 눈치를 보고 있다. 특히나 박명수는 태진아의 바로 옆이었으니 더더욱 태진아의 기분을 볼 수밖에 없었다.[17] 이게 농담으로도 볼 수 없는 것이 군대의 장교(태진아 등) vs 부사관 또는 준사관(이박사) 알력싸움같은 개념일 수 있기 때문이다.[18] 이박사와 비슷한 예로 KBS 해피투게더 시즌3에서 배우 겸 가수인 이지훈이 개그맨 김원효를 무시한 사건도 있다. 또한 영화배우들도 자신들의 행사에 아이돌 가수들이 공연오면 팔짱끼고 무시하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경우가 많다. 이와 같이 연예계에서는 이렇게 급수를 따지는 일들이 암암리에 일어나고 있다. 관련기사[19] 윤상 曰 "이 분은 닥터(박사)세요."[20] 독설가로 유명한 김구라가 "영화로 만들고 싶다"고 말할 정도.[21] 이박사의 정수가 담긴 대표작으로 간주된다. 소울메이트인 키보디스트 김수일의 굉장한 즉흥연주를 감상할 수 있는 명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