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의 잉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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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어) : Queen Ingrid of Denmark
(덴마크어) : dronning Ingrid
(스웨덴어) : Drottning Ingrid av Danmark
1910년 3월 28일 ~ 2000년 11월 7일
잉리드는 스웨덴 구스타프 6세 아돌프와 코넛의 공녀 마거릿 사이의 자녀로, 덴마크 프레데리크 9세의 아내이자 현재 국왕인 마르그레테 2세의 어머니이다.
2. 작위
- 1910년 3월 28일 – 1935년 5월 24일 : 스웨덴의 잉리드 공주 전하 (Her Royal Highness Princess Ingrid of Sweden)
- 1935년 5월 24일 – 1944년 7월 17일 : 덴마크와 아이슬란드의 왕세자비 전하( Her Royal Highness The Crown Princess of Denmark and Iceland)
- 1944년 7월 17일 – 1947년 4월 20일 : 덴마크의 왕세자비 전하 (Her Royal Highness The Crown Princess of Denmark)
- 1947년 4월 20일 – 1972년 1월 14일 : 덴마크의 왕비 폐하(Her Majesty The Queen of Denmark)
- 1972년 1월 14일 – 2000년 11월 7일 : 덴마크의 잉리드 왕대비 폐하 (Her Majesty Queen Ingrid of Denmark)
3. 일생
3.1. 어린시절
1910년 3월 28일 오후 3시 경 왕세자였던 구스타프 6세 아돌프와 왕세자비 코넛의 마거릿 사이에서 고명딸(셋째)로 태어났다. 스웨덴 왕실에서 1891년 이후로 처음으로 태어난 공주이다. 잉리드는 2명의 오빠와 2명의 남동생이 있었기에, 딸임에도 불구하고 부모님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특히 어머니인 마거릿 왕세자비와의 사이는 매우 각별했다. 이는 후에 새 어머니로 들어오는 루이즈와 친해지지 못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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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와 잉리드
잉리드가 10살이 되던 해(1920년)에 그녀에게 큰 슬픔이 찾아왔다. 바로 어머니 마거릿 왕세자비가 갑자기 사망한 것이다. 어머니 마거릿이 사망한 3년 뒤, 아버지 아돌프 왕세자가 루이즈에게 청혼을 했다. 공교롭게도 루이즈는 빅토리아 여왕의 증손녀였기 때문에 마거릿은 물론 잉리드와도 친척지간이었다. 문제는 아돌프가 자녀들에게 재혼에 대해 언질을 주지 않았고, 이에 어머니와 유달리 각별했던 잉리드는 큰 충격을 받아 루이즈를 어머니로 인정하지 않았다. 게다가 교육을 위해 외가인 영국으로 떠나게 되어 루이즈와의 사이는 계속 어색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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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코넛 공작과 잉리드
잉리드는 후에 덴마크에 시집을 가서도 자신이 낳은 딸들에게 외할머니는 마거릿 공주라고 누누히 강조를 했다. 루이즈에게는 다행히도 잉리드 아래의 남동생들은 나이가 어렸기에 새어머니를 잘 따랐다.
3.2. 왕세자비
잉리드는 영국에서 교육받으며 야외 스포츠를 즐겨 했는데 특히 승마와 스케이트를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후에 자라면서 영국의 에드워드 왕자와 조지 왕자[2] 와의 혼담이 오갔지만, 이는 성사되지 않는다. [3]
잉리드는 덴마크의 왕자인 프레데리크와 결혼이 결정되었다. 프레데리크의 할머니는 스웨덴 출신의 공주(스웨덴의 루이세)였기에 가까운 세대에서 혼맥으로 얽혀 있었고, 이는 범 스칸디나비아적 동맹을 강화하는 좋은 계기였다. 1935년 5월 24일, 25살의 잉리드는 스톡홀름 대성당에서 프레데리크와 결혼식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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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리드의 가슴을 장식했던 데이지 브로치는 친어머니의 다이아몬드들로 만든 것이다. 데이지는 친어머니의 별명이었다. 또한 어머니의 웨딩 베일과 그녀가 가져온 머틀로 만든 관을 썼다.
잉리드는 사이가 좋지 않던 남편과 시아버지간의 부자 갈등을 완화하며 왕실을 안정시켰다. 남편과의 사이에서 마르그레테 2세, 베네틱트 공주, 아네마리에 공주를 낳았다.
3.3. 왕비
1947년에 시아버지인 크리스티안 10세가 세상을 떠나고 남편이 덴마크 국왕이 되면서 잉리드도 왕비가 된다. 왕비가 되고나서 그녀는 왕실의 가정적인 분위기를 꾸리는 데 노력한다. 원래는 세 딸에게 왕위계승권이 없었으나 1953년 개헌으로 계승권이 부여되었고, 장녀 마르그레테가 왕세녀가 된다. 그리고 성년이 되고 심정적으로 아버지를 이해하게 된 잉리드는 새어머니인 루이즈와 점차 화해하게 되고, 생전에 교류도 하며 루이즈의 임종도 지켰다.
1968년에 마르그레테가 프레데리크를 낳았고, 이듬해 요아킴 왕자를 낳으며 할머니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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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들과 함께아버지 구스타프 아돌프, 막내딸 아네마리에, 새어머니 루이즈, 큰딸 마르그레테, 본인, 둘째딸 베네틱트, 남편 프레데리크
3.4. 왕대비
1972년에 남편 프레데리크 9세가 세상을 떠나자 큰딸인 마르그레테 2세가 덴마크 여왕으로 즉위한다. 왕대비가 된 잉리드는 덴마크 의회에서 섭정지위를 받는다. 큰딸 부부가 공무를 하러 가게 되면 외손자들의 양육을 직접 하며 덴마크 왕실의 가정적인 분위기와 안정적인 공무 수행, 아이들의 정서 발달에 힘썼다. 잉리드는 외손자 요아킴 왕자[4] 의 큰아들인 증손자(외증손자) 니콜라이 왕자(1999년생) (요아킴 왕자와 첫 부인 알렉산드라 왕자비 사이에서 출생) 의 출생까지 지켜보고[5] 1년 후 2000년 11월 7일에 90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4. 평가
잉리드 왕비는 덴마크에서 국민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는데, 그녀가 인기를 많이 얻은 이유는 가정적인 왕실의 이미지를 각인 시켰기 때문이었다. 덴마크 왕실은 상당히 가부장적이었고 시아버지 크리스티안 10세가 아내 알렉산드리네 왕비와 아들 프레데리크 왕세자에게 고압적으로 대했다. 잉리드는 시아버지와 남편 사이를 중재하며 가족간의 갈등을 줄였다.
가장 중요하게 평가받는 것은 반 나치 행보였다. 1940년대의 덴마크는 나치의 점령[6] 으로 인해 고통을 받았다. 그녀는 저항의 의미로 마르그레테 공주의 방 문에 덴마크, 스웨덴, 영국의 국기를 달았다고 한다. 덴마크가 폭격을 당할 시에 위험을 무릅쓰고 장녀를 유모차에 실어 거리를 활보한 적도 있었다. 이 사실을 안 할아버지인 구스타프 5세가 손녀를 매우 걱정하였으나 잉리드는 의연했고, 이러한 행보는 국민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며 왕실에 대한 지지도를 높였다.
5. 여담
차녀 앨리스 공주>>헤센의 공녀 빅토리아>>>루이즈 마운트배튼
3남 아서 왕자>>코넛의 공녀 마거릿>>>잉리드 공주
6. 가족관계
6.1. 조상
6.2. 자녀
[1] 현 스웨덴 국왕 칼 16세 구스타프의 아버지[2] 조지 5세의 4남, 1902~1942. 훗날 그리스 왕국의 마리나 공주(요르요스 1세의 3남 니콜라오스 왕자의 딸이다.)와 결혼하여 2남 1녀를 낳지만 항공사고로 젊은 나이에 사망한다.[3] 후에 조지 왕자의 결혼식에 들러리로 참석한다.[4] 마르그레테 2세의 차남[5] 잉리드 왕비가 생전에 본 증손주는 니콜라이 왕자 외에도 막내딸 아네마리에 전 그리스 왕비의 장남(둘째)인 파블로스 전 왕세자의 장녀(고명딸) 마리아 올림피아 공주(1996년생), 장남 콘스탄틴-알렉시오스 왕자(1998년생), 차남 아킬레스-안드레아스 왕자(2000년생, 타계 약 세달 전인 8월 12일 출생), 둘째딸 베네딕트 공주의 장녀(둘째)인 알렉산드라 공주와 독일 옛 귀족(백작) 가문의 첫 남편(1998년 결혼, 2017년 이혼. 이후 알렉산드라 공주는 2019년에 다른 남자와 재혼)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인 리처드(1999년생)가 있기는 하다.[6] 덴마크 보호령 항목 참고[7] 구스타프 4세 아돌프의 외손자이다.[8] 빌헬름 1세의 외동딸이다.[9]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의 손자이다.[10] 덴마크의 왕세자 프레데리크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