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윙 청소년
독일어: Swing-Jugend, 영어: Swing Kids
나치 독일 시기에 미국의 재즈를 좋아하던 청소년들을 칭하던 단어. 하얀 장미 같이 대놓고 나치를 거부하고 투쟁한 집단은 아니었지만, 이들 역시 나치로부터 저속함과 방종, 나태 등을 이유로 숱한 탄압을 당했다.
이미 1차대전 이후 독일에서는 재즈의 열풍이 불고 있었다. 당시에는 정확히 스윙재즈 라는 장르가 유행했다. 카바레나 나이트클럽의 가수들은 거리낌 없이 재즈 혹은 그 풍을 따라한 노래를 불렀고, 독일 뮤지션들이 결성한 재즈 밴드도 수백 개 단체가 활동하고 있었다. 이러한 영향은 심지어 대중음악 뿐 아니라 클래식 등 다른 장르에도 파급되어 쿠르트 바일의 '서푼짜리 오페라' 나 에른스트 크레네크의 '조니는 연주한다' 같은 재즈 스타일 혹은 그것을 접목시킨 오페라까지 등장했다.
하지만 보수적인 음악인들이나 청중들은 이를 독일 문화에 대한 모욕으로까지 간주해 강하게 비판했고, 1933년에 히틀러가 총리로 선출되면서 나치가 실권을 잡게 되자 이제 정부 차원의 제재까지 가해지기 시작했다. 1935년에 괴벨스의 심복이자 나치 제국 방송 담당관이었던 오이겐 하다모프스키는 독일 방송국들의 재즈 방송을 전면 금지했고, 대도시를 거점으로 하는 재즈 클럽과 거기에 속한 밴드들은 공공연한 탄압과 간섭에 시달려야 했다.
이렇게 초기에는 재즈를 대놓고 깎아내리기는 했지만, 괴벨스는 그렇다고 재즈가 가진 중독성이라든가 파급 효과를 완전히 무시하지는 못했다. 오히려 재즈를 무턱대고 금지하는 로젠베르크 식의 무식한 방침은 재즈를 좋아하는 청년 세대들의 반발을 불러온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재즈나 스윙 같은 '매국적' 용어 대신 '새로운 독일의 댄스 음악(Neue deutsche Tanzmusik)' 이라는 표어를 내세우고 독일 춤과 오락 악단 같은 관제 빅 밴드까지 만들면서 원조 재즈의 강렬한 리듬을 죽이고 클래식/이지리스닝 풍의 서정적인 선율미를 전면에 내세운 형태의 음악을 권장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독일에서 재즈 팬의 숫자와 영향력은 별로 줄어들지 않았다. 2차대전 개전 직전까지도 독일에서는 여전히 합법적으로 재즈 음반의 판매와 소비가 이루어지고 있었고, 밴드들도 나치 관료들에게 '미국식으로 연주하면 알아서 해라' 고 끝없이 갈굼을 당하고는 있었지만 여전히 상당수가 그대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애매모호한 나치 재즈 정책의 틈새를 파고든 이들이 스윙 청소년들이었다.
스윙 청소년들은 나치가 골치를 썩인 여타 청소년 집단들인 에델바이스 해적이나 모이텐 같이 중하류 계층의 집안 출신 보다는 어느 정도 재정 형편이 되는 중상류 계층의 자제들이 많았다. 이들은 대개 김나지움(Gymnasium. 한국 식으로는 문과 고등학교)을 다녔거나 다닌 경험이 있었고, 그 때문에 일상적인 영어 회화나 영어 노래의 청취/독해가 어렵지 않았다는 공통점도 갖고 있었다.
당연히 이들은 영어권 재즈 음악에 몰두했고, 나치의 재즈 금지 조치나 대안으로 제시한 새로운 독일의 댄스 음악 어떤 것도 거부했다. 만약 클럽에서 밴드가 나치의 요구에 맞춰 물타기한 밍밍한 재즈를 연주할 경우 야유를 퍼부었고, "그딴 따분한 거 집어치우고 스윙을 연주하라고!" 라고 연호하면서 미국식 정통 스윙 재즈를 연주하도록 유도하기도 했다. 심지어 2차대전 개전 뒤인 1940년에는 함부르크에서 스윙 축제를 개최하기까지 했고, 이후 이들이 주최한 공연이 나치로부터 부도덕하다는 비난을 받자 비밀 지하 클럽으로 거점을 옮겨 재즈에 탐닉했다.
이들은 또 독특한 드레스 코드도 갖고 있었다. 남자들은 대개 영국 스타일의 가벼운 정장을 입고 외교관 스타일의 모자를 썼으며, 우산을 날씨에 관계 없이 늘 지니고 다녔다. 머리카락도 어깨까지 내려올 정도로 길렀다. 여자들도 마찬가지로 영국 스타일의 코디로 옷을 입고 당시 성인 여성들도 꺼리던 매니큐어를 비롯한 짙은 화장을 하고 다니는 등, 그 당시 기준으로 겉보기에 상당히 튀는 차림을 하고 다녔다. 다만 이들은 대체로 나치든 그 반대의 공산당이든 어떤 정치 집단에서 제시하는 이념이나 구호에는 무관심했고, 나치의 반유대주의 선전도 아오안으로 받아들이며 유대인 혹은 유대계 청소년들과도 거리낌 없이 어울렸다.
이들의 실제 사진.
나치는 물론 이들의 재즈 선호와 자유분방한 행동, 개방적인 성 의식, 유대인과의 교제 등을 경멸했지만, 그렇다고 이들이 대놓고 나치를 비난하거나 적대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딱히 제재할 명분과 수단을 찾지 못했다. 하지만 SS 총수였던 하인리히 힘러 휘하의 게슈타포는 이미 1930년대 후반부터 스윙 청소년들에 대한 부정적인 제보나 보고를 수집하기 시작했고, 히틀러 유겐트를 비롯한 나치 관제 청소년 단체들에도 '스윙에 탐닉하는 것은 죄악' 이라는 식의 세뇌 교육을 시작했다.
그리고 전쟁이 시작되자 이들은 나치 관제 언론들에 의해 '조국을 위해 헌신하지 않는 게으름뱅이' 로 매도되기 일쑤였고, 심심하면 발동된 검거령에 의해 수십에서 수백 명이 한꺼번에 체포되기도 했다. 특히 1941년 8월 18일에 전국적으로 진행된 대규모 검거 작전에서는 약 300여 명에 달하는 스윙 청소년들이 체포되었다. 이들은 혐의에 따라 경미한 경우 삭발을 당하고 풀려났고, 엄중한 경우에는 청소년 강제수용소에 수감되어 노역에 시달려야 했다.
독일이 전쟁에서 수세에 몰리기 시작한 1942년 이후로는 스윙 청소년에 대한 탄압도 더 심해졌고, 특히 이들이 적국의 음악을 좋아한다는 것을 노린 게슈타포의 책략에 의해 종종 영국 스파이나 반나치 조직에 대한 원조/방조 혐의 같은 말도 안되는 죄목이 붙어 중형에 처해지기도 했다. 예로 함부르크에 거주하던 17세 소년 귄터 디셔는 1942년에 함부르크 스윙 청소년의 '수괴' 로 체포된 뒤 모링엔 강제수용소에 수감되어 상습적인 구타와 가혹행위, 강제 노역에 시달리다가 연합군의 수용소 해방으로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이러한 탄압은 특히 매우 금욕적인 청소년기를 보낸 힘러에 의해 강화되었는데, 1942년 1월에 힘러는 심복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 이들에 대한 처벌을 한층 가혹하게 하라고 지시하기까지 했다. 힘러 외에도 대체로 재즈를 부정적으로 보던 '구세대' 출신의 나치 관료들도 마찬가지로 스윙 청소년들을 영국과 섹스의 노예라고 악의적으로 묘사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고, 또 이를 재즈에 대해 (그들이 보기에는) 애매한 태도를 취한 괴벨스와 휘하 선전성을 은근히 공격하는 수단으로 삼기도 했다.
비록 하얀 장미처럼 나치에 직접 맞선 용감한 면모는 별로 보이지 않았지만, 나치 시대의 문화 탄압사와 그 당시 민중들의 일상을 연구하는 일상사(Alltagsgeschichte)의 연구가 본격화된 1970년대 후반 들어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들의 존재로 인해 나치 시대에 권장된 새로운 독일 댄스 음악에 대한 비판적 연구도 같이 진행되었고, 또 그 당시 만큼 극단적이지는 않아도 흔히 벌어지는 세대 간의 갈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영화나 뮤지컬 등으로 극화되고 있기도 하다. 관련 영화로 스윙키즈(1993)가 있다.
나치 독일 시기에 미국의 재즈를 좋아하던 청소년들을 칭하던 단어. 하얀 장미 같이 대놓고 나치를 거부하고 투쟁한 집단은 아니었지만, 이들 역시 나치로부터 저속함과 방종, 나태 등을 이유로 숱한 탄압을 당했다.
1. 개요
이미 1차대전 이후 독일에서는 재즈의 열풍이 불고 있었다. 당시에는 정확히 스윙재즈 라는 장르가 유행했다. 카바레나 나이트클럽의 가수들은 거리낌 없이 재즈 혹은 그 풍을 따라한 노래를 불렀고, 독일 뮤지션들이 결성한 재즈 밴드도 수백 개 단체가 활동하고 있었다. 이러한 영향은 심지어 대중음악 뿐 아니라 클래식 등 다른 장르에도 파급되어 쿠르트 바일의 '서푼짜리 오페라' 나 에른스트 크레네크의 '조니는 연주한다' 같은 재즈 스타일 혹은 그것을 접목시킨 오페라까지 등장했다.
하지만 보수적인 음악인들이나 청중들은 이를 독일 문화에 대한 모욕으로까지 간주해 강하게 비판했고, 1933년에 히틀러가 총리로 선출되면서 나치가 실권을 잡게 되자 이제 정부 차원의 제재까지 가해지기 시작했다. 1935년에 괴벨스의 심복이자 나치 제국 방송 담당관이었던 오이겐 하다모프스키는 독일 방송국들의 재즈 방송을 전면 금지했고, 대도시를 거점으로 하는 재즈 클럽과 거기에 속한 밴드들은 공공연한 탄압과 간섭에 시달려야 했다.
이렇게 초기에는 재즈를 대놓고 깎아내리기는 했지만, 괴벨스는 그렇다고 재즈가 가진 중독성이라든가 파급 효과를 완전히 무시하지는 못했다. 오히려 재즈를 무턱대고 금지하는 로젠베르크 식의 무식한 방침은 재즈를 좋아하는 청년 세대들의 반발을 불러온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재즈나 스윙 같은 '매국적' 용어 대신 '새로운 독일의 댄스 음악(Neue deutsche Tanzmusik)' 이라는 표어를 내세우고 독일 춤과 오락 악단 같은 관제 빅 밴드까지 만들면서 원조 재즈의 강렬한 리듬을 죽이고 클래식/이지리스닝 풍의 서정적인 선율미를 전면에 내세운 형태의 음악을 권장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독일에서 재즈 팬의 숫자와 영향력은 별로 줄어들지 않았다. 2차대전 개전 직전까지도 독일에서는 여전히 합법적으로 재즈 음반의 판매와 소비가 이루어지고 있었고, 밴드들도 나치 관료들에게 '미국식으로 연주하면 알아서 해라' 고 끝없이 갈굼을 당하고는 있었지만 여전히 상당수가 그대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애매모호한 나치 재즈 정책의 틈새를 파고든 이들이 스윙 청소년들이었다.
2. 특징
스윙 청소년들은 나치가 골치를 썩인 여타 청소년 집단들인 에델바이스 해적이나 모이텐 같이 중하류 계층의 집안 출신 보다는 어느 정도 재정 형편이 되는 중상류 계층의 자제들이 많았다. 이들은 대개 김나지움(Gymnasium. 한국 식으로는 문과 고등학교)을 다녔거나 다닌 경험이 있었고, 그 때문에 일상적인 영어 회화나 영어 노래의 청취/독해가 어렵지 않았다는 공통점도 갖고 있었다.
당연히 이들은 영어권 재즈 음악에 몰두했고, 나치의 재즈 금지 조치나 대안으로 제시한 새로운 독일의 댄스 음악 어떤 것도 거부했다. 만약 클럽에서 밴드가 나치의 요구에 맞춰 물타기한 밍밍한 재즈를 연주할 경우 야유를 퍼부었고, "그딴 따분한 거 집어치우고 스윙을 연주하라고!" 라고 연호하면서 미국식 정통 스윙 재즈를 연주하도록 유도하기도 했다. 심지어 2차대전 개전 뒤인 1940년에는 함부르크에서 스윙 축제를 개최하기까지 했고, 이후 이들이 주최한 공연이 나치로부터 부도덕하다는 비난을 받자 비밀 지하 클럽으로 거점을 옮겨 재즈에 탐닉했다.
이들은 또 독특한 드레스 코드도 갖고 있었다. 남자들은 대개 영국 스타일의 가벼운 정장을 입고 외교관 스타일의 모자를 썼으며, 우산을 날씨에 관계 없이 늘 지니고 다녔다. 머리카락도 어깨까지 내려올 정도로 길렀다. 여자들도 마찬가지로 영국 스타일의 코디로 옷을 입고 당시 성인 여성들도 꺼리던 매니큐어를 비롯한 짙은 화장을 하고 다니는 등, 그 당시 기준으로 겉보기에 상당히 튀는 차림을 하고 다녔다. 다만 이들은 대체로 나치든 그 반대의 공산당이든 어떤 정치 집단에서 제시하는 이념이나 구호에는 무관심했고, 나치의 반유대주의 선전도 아오안으로 받아들이며 유대인 혹은 유대계 청소년들과도 거리낌 없이 어울렸다.
이들의 실제 사진.
3. 나치의 탄압
나치는 물론 이들의 재즈 선호와 자유분방한 행동, 개방적인 성 의식, 유대인과의 교제 등을 경멸했지만, 그렇다고 이들이 대놓고 나치를 비난하거나 적대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딱히 제재할 명분과 수단을 찾지 못했다. 하지만 SS 총수였던 하인리히 힘러 휘하의 게슈타포는 이미 1930년대 후반부터 스윙 청소년들에 대한 부정적인 제보나 보고를 수집하기 시작했고, 히틀러 유겐트를 비롯한 나치 관제 청소년 단체들에도 '스윙에 탐닉하는 것은 죄악' 이라는 식의 세뇌 교육을 시작했다.
그리고 전쟁이 시작되자 이들은 나치 관제 언론들에 의해 '조국을 위해 헌신하지 않는 게으름뱅이' 로 매도되기 일쑤였고, 심심하면 발동된 검거령에 의해 수십에서 수백 명이 한꺼번에 체포되기도 했다. 특히 1941년 8월 18일에 전국적으로 진행된 대규모 검거 작전에서는 약 300여 명에 달하는 스윙 청소년들이 체포되었다. 이들은 혐의에 따라 경미한 경우 삭발을 당하고 풀려났고, 엄중한 경우에는 청소년 강제수용소에 수감되어 노역에 시달려야 했다.
독일이 전쟁에서 수세에 몰리기 시작한 1942년 이후로는 스윙 청소년에 대한 탄압도 더 심해졌고, 특히 이들이 적국의 음악을 좋아한다는 것을 노린 게슈타포의 책략에 의해 종종 영국 스파이나 반나치 조직에 대한 원조/방조 혐의 같은 말도 안되는 죄목이 붙어 중형에 처해지기도 했다. 예로 함부르크에 거주하던 17세 소년 귄터 디셔는 1942년에 함부르크 스윙 청소년의 '수괴' 로 체포된 뒤 모링엔 강제수용소에 수감되어 상습적인 구타와 가혹행위, 강제 노역에 시달리다가 연합군의 수용소 해방으로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이러한 탄압은 특히 매우 금욕적인 청소년기를 보낸 힘러에 의해 강화되었는데, 1942년 1월에 힘러는 심복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 이들에 대한 처벌을 한층 가혹하게 하라고 지시하기까지 했다. 힘러 외에도 대체로 재즈를 부정적으로 보던 '구세대' 출신의 나치 관료들도 마찬가지로 스윙 청소년들을 영국과 섹스의 노예라고 악의적으로 묘사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고, 또 이를 재즈에 대해 (그들이 보기에는) 애매한 태도를 취한 괴벨스와 휘하 선전성을 은근히 공격하는 수단으로 삼기도 했다.
4. 전후의 평가
비록 하얀 장미처럼 나치에 직접 맞선 용감한 면모는 별로 보이지 않았지만, 나치 시대의 문화 탄압사와 그 당시 민중들의 일상을 연구하는 일상사(Alltagsgeschichte)의 연구가 본격화된 1970년대 후반 들어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들의 존재로 인해 나치 시대에 권장된 새로운 독일 댄스 음악에 대한 비판적 연구도 같이 진행되었고, 또 그 당시 만큼 극단적이지는 않아도 흔히 벌어지는 세대 간의 갈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영화나 뮤지컬 등으로 극화되고 있기도 하다. 관련 영화로 스윙키즈(1993)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