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델바이스 해적
독일어: Edelweißpiraten, 영어: Edelweiss Pirates
나치 독일 시기의 반체제적 청소년 집단. 주로 독일 서부(현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지역)의 청소년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조직되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 독일 서부는 루르 공업지대를 비롯한 대규모 공장들이 많이 들어선 산업도시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모습이었다. 당연히 인구 밀도도 다른 지역보다 높은 편이었고, 중하류층 청소년들은 집안 사정 때문에 초등 교육을 마치면 바로 비숙련공 또는 보조직 노동자로 생업에 뛰어드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당연히 이들은 사춘기라는 예민한 시기에 바로 거친 작업장에서 나치 식으로 강요된 집단 노동에 시달렸고, 2차대전 발발 후에는 노동자에 대한 임금이 인상되기는 했지만 생활 조건은 여전히 열악했다.
이 과정에서 학교에서는 히틀러 유겐트의 규율 강요에, 직장에서는 힘든 노동에 시달렸던 청소년들은 자연스럽게 그러한 현실에 대해 일탈을 꾀했고, 그 과정에서 주로 지역 별로 이러저러한 청소년들이 무리를 지어 여가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이들 무리의 명칭은 지역마다 달랐는데, 뒤셀도르프나 오버하우젠에서는 키텔바흐 해적(Kittelbachpiraten)[1] , 쾰른에서는 나바요스(Navajos) 등으로 자신들을 칭하고 다녔다. 하지만 이들이 서로 교류하게 되면서 아예 통칭을 에델바이스 해적이라고 했고, 이후 나치의 게슈타포 보고서에서도 이 표현이 계속 사용되었다.
주로 북부 독일에서 많이 자생한 스윙 청소년과 비슷하게 에델바이스 해적도 어느 정도 일관된 드레스 코드를 갖고 있었다. 이들은 주로 하얀 양말과 검은색 등 짙은 색깔의 반바지, 체크무늬 와이셔츠 등을 입고 다녔고, 웃도리 칼라에는 여러 가지 모양의 양철 장식물을 달고 다녔다.
초기의 에델바이스 해적 활동은 어지간한 나치 충성파가 아닌 이상 별로 이상하게 볼 거리가 없었다. 주중에는 일을 하고, 주말에는 도시락과 배낭을 챙겨 주변의 휴양지로 여행을 떠나 휴식을 즐겼다. 이들은 자신과 달리 집단 내에서는 똥군기나 잡으며 군대놀이를 하면서도 정작 자신들처럼 제대로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하던 히틀러 유겐트를 경멸했고, 히틀러 유겐트도 에델바이스 해적을 빈둥거리며 놀러 다니고 방종한 짓이나 하는 집단으로 규정하고 순찰을 돌면서 이들을 공격했다.
하지만 히틀러 유겐트는 역설적으로 전쟁이 시작되면서 점차 조직이 해이해지고 있었다. 특히 독일이 연합군 공군의 폭격에 시달리기 시작한 1940년대 초반이 되자 히틀러 유겐트의 주요 시설과 유스호스텔, 체육관 등이 폭격으로 소실되는 일이 잦아졌고, 이에 따라 이들에게 주어졌던 하이킹이나 운동회 등 여가 기회는 계속 축소되었다. 결국 나머지 시간은 병영화된 학교에서 따분한 군사 훈련만 반복하다가, 징집 연령이 되면 독일군에 입대하는 식으로 사실상 유년사관학교나 마찬가지가 되면서 청소년들은 더욱 히틀러 유겐트를 멀리하게 되었다.
또 에델바이스 해적은 히틀러 유겐트(남자)-독일 여성연맹(여자)으로 완벽하게 성적으로 분리된 관제 청소년 단체들과 달리 자연스럽게 또래의 이성과 어울려 자유롭게 교제할 수 있었다. 하지만 히틀러 유겐트와 게슈타포는 에델바이스 해적의 이런 교제를 마치 난교 파티라도 벌이는 것처럼 악의적으로 상부에 보고했고, 이에 따라 나치와 점점 심한 갈등을 겪게 되었다. 에델바이스 해적은 나들이 때 히틀러 유겐트 순찰대가 어설프게 시비를 걸어오면 바로 두들겨 패서 쫓아내기 일쑤였고[2] , 단원들이 계속 역관광 당하며 돌아오게 되자 지역 유겐트 대장이 경찰에게 검거 작전을 펴달라고 떼를 쓰는 지경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전쟁 중 노동자 부족으로 인한 임금의 상승으로 몇몇 에델바이스 해적은 궁핍한 배급제와 극히 제한된 여행의 자유에도 불구하고 히치하이킹과 무임승차 등으로 훨씬 먼 오스트리아나 바이에른, 슈바르츠발트(현 바덴-뷔르템베르크)까지 장거리 여행을 감행하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이들은 그 당시 좀처럼 직접 만날 수 없었던 타지의 청소년들과 어울렸고, 히틀러 유겐트에서는 금지곡이었던 유행가를 부르며 휴식을 즐겼다. 이들이 부르던 유행가는 기존의 것도 있었지만, 주로 가사를 바꿔 히틀러 유겐트를 조롱한다거나 나치, 심지어 히틀러까지 디스하는 민중가요 식으로 마개조한 것이 많았다.
나치는 이에 대해 수시로 일제 검거 작전을 펼쳐 대응했고, 경고 등 최소한의 조치 외에 삭발 후 훈방 같은 공개적 모욕, 주말 동안 가택 연금 혹은 유치장 구금 등을 행했다. 나치의 관점에서 심한 일탈을 저질렀다고 판단된 경우에는 청소년 강제수용소 수감이나 형사재판까지 걸어서 무자비하게 탄압했고, 이러한 당국의 탄압이 심해지면 심해질 수록 에델바이스 해적의 활동도 과격해졌다.
이들은 잦은 병가나 결근, 전직 같은 소극적인 것에서 교묘한 사보타주(태업) 등으로 나치의 강압적인 노동 규범을 강요하는 직장에 대응했고, 뒤셀도르프와 쾰른에서는 공산당 등 활동 금지를 당한 정당의 지하 조직과 연대해 반나치 구호가 담긴 낙서나 삐라를 몰래 우체통에 투함하거나 탈영한 독일군 병사, 연합군 포로, 점령지에서 끌려온 노예 노동자, 강제수용소 탈주자 등에게 은신처를 제공하는 등 한층 위험하고 적극적인 반체제 활동에 뛰어들기도 했다.
전쟁 후반기인 1944년 가을에는 쾰른의 에델바이스 해적 청소년들이 반나치 저항 조직인 에렌펠트 그룹(Ehrenfelder Gruppe)과 연계해 병영 무기고를 털어 무장한 뒤 시내의 친위대나 돌격대, 히틀러 유겐트 지도부, 여타 골수 나치들을 습격하는 게릴라식 전투를 벌였고, 이 과정에서 쾰른의 게슈타포 총수와 히틀러 유겐트 간부, 돌격대원 등이 사살되었다. 이는 공식 기록으로 확인된 에델바이스 해적의 유일한 반나치 무장 투쟁이었다.
결국 빡친 친위대 총수 하인리히 힘러는 반나치 청소년 척결을 위한 명령을 공식 발표해 더 강한 탄압을 지시했고, 게슈타포에 의해 체포된 에렌펠트 그룹 소속 13명에게 재판 없는 즉결 공개처형을 명령했다. 이들 중 바르텔 싱크, 요한 뮬러, 귄터 슈바르츠, 프란츠 라인베르거, 구스타프 베르멜, 아돌프 슈츠 여섯 명이 당시 16~18세의 쾰른 에델바이스 해적 소속 청소년들이었다. 이외에도 수천 명에 달하는 청소년들이 에델바이스 해적의 수괴, 적극 가담자 등으로 분류되어 수감과 강제 노역, 강제 징집을 당했고, 이들 중에서도 수많은 희생자가 나왔다.
하지만 2차대전 패전과 나치의 소멸 후에도 이들은 제대로 명예 회복을 받지 못했다. 에렌펠트 그룹의 일원으로 처단된 이들은 여전히 독일 사법계의 경직된 분위기 속에서 살인범으로 규정되어 있었고, 나치 잔재 청산보다 경제 재건에 몰두한 콘라트 아데나워 정권 치하에서 유가족들의 복권 운동은 끊임없이 방해를 받았다. 하지만 68운동으로 좌파의 목소리가 점차 커지기 시작한 1970년대 이후 이들에 대한 재평가와 복권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언론을 통해 보도되기 시작했다.
결국 1980년대 들어 역사학계에서도 에델바이스 해적을 하얀 장미에 준하는 반나치 청소년 결사 운동으로 재평가하기 시작했고, 이들에 대한 국가 배상과 명예 회복, 상훈 등이 주어지고 있다. 1986년에는 가장 강하게 저항했던 쾰른의 에렌펠트 그룹을 기리기 위해 그들이 처형당한 거리에 추모비가 건립되었고, 1990년에는 청소년 인권 증진에 기여한 이들에게 수여되는 바르텔 싱크 상이 제정되었다. 2004년에는 니코 폰 글라소의 감독으로 에렌펠트 그룹의 저항 운동을 극화한 영화 '에델바이스 해적' 이 제작되었고, 2005년부터는 에렌펠트 그룹과 여타 에델바이스 해적 생존자들이 쾰른의 평화공원에서 에델바이스 해적 축제를 매년 개최하고 있다.
나치 독일 시기의 반체제적 청소년 집단. 주로 독일 서부(현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지역)의 청소년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조직되었다.
1. 개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 독일 서부는 루르 공업지대를 비롯한 대규모 공장들이 많이 들어선 산업도시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모습이었다. 당연히 인구 밀도도 다른 지역보다 높은 편이었고, 중하류층 청소년들은 집안 사정 때문에 초등 교육을 마치면 바로 비숙련공 또는 보조직 노동자로 생업에 뛰어드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당연히 이들은 사춘기라는 예민한 시기에 바로 거친 작업장에서 나치 식으로 강요된 집단 노동에 시달렸고, 2차대전 발발 후에는 노동자에 대한 임금이 인상되기는 했지만 생활 조건은 여전히 열악했다.
이 과정에서 학교에서는 히틀러 유겐트의 규율 강요에, 직장에서는 힘든 노동에 시달렸던 청소년들은 자연스럽게 그러한 현실에 대해 일탈을 꾀했고, 그 과정에서 주로 지역 별로 이러저러한 청소년들이 무리를 지어 여가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이들 무리의 명칭은 지역마다 달랐는데, 뒤셀도르프나 오버하우젠에서는 키텔바흐 해적(Kittelbachpiraten)[1] , 쾰른에서는 나바요스(Navajos) 등으로 자신들을 칭하고 다녔다. 하지만 이들이 서로 교류하게 되면서 아예 통칭을 에델바이스 해적이라고 했고, 이후 나치의 게슈타포 보고서에서도 이 표현이 계속 사용되었다.
주로 북부 독일에서 많이 자생한 스윙 청소년과 비슷하게 에델바이스 해적도 어느 정도 일관된 드레스 코드를 갖고 있었다. 이들은 주로 하얀 양말과 검은색 등 짙은 색깔의 반바지, 체크무늬 와이셔츠 등을 입고 다녔고, 웃도리 칼라에는 여러 가지 모양의 양철 장식물을 달고 다녔다.
2. 활동
초기의 에델바이스 해적 활동은 어지간한 나치 충성파가 아닌 이상 별로 이상하게 볼 거리가 없었다. 주중에는 일을 하고, 주말에는 도시락과 배낭을 챙겨 주변의 휴양지로 여행을 떠나 휴식을 즐겼다. 이들은 자신과 달리 집단 내에서는 똥군기나 잡으며 군대놀이를 하면서도 정작 자신들처럼 제대로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하던 히틀러 유겐트를 경멸했고, 히틀러 유겐트도 에델바이스 해적을 빈둥거리며 놀러 다니고 방종한 짓이나 하는 집단으로 규정하고 순찰을 돌면서 이들을 공격했다.
하지만 히틀러 유겐트는 역설적으로 전쟁이 시작되면서 점차 조직이 해이해지고 있었다. 특히 독일이 연합군 공군의 폭격에 시달리기 시작한 1940년대 초반이 되자 히틀러 유겐트의 주요 시설과 유스호스텔, 체육관 등이 폭격으로 소실되는 일이 잦아졌고, 이에 따라 이들에게 주어졌던 하이킹이나 운동회 등 여가 기회는 계속 축소되었다. 결국 나머지 시간은 병영화된 학교에서 따분한 군사 훈련만 반복하다가, 징집 연령이 되면 독일군에 입대하는 식으로 사실상 유년사관학교나 마찬가지가 되면서 청소년들은 더욱 히틀러 유겐트를 멀리하게 되었다.
또 에델바이스 해적은 히틀러 유겐트(남자)-독일 여성연맹(여자)으로 완벽하게 성적으로 분리된 관제 청소년 단체들과 달리 자연스럽게 또래의 이성과 어울려 자유롭게 교제할 수 있었다. 하지만 히틀러 유겐트와 게슈타포는 에델바이스 해적의 이런 교제를 마치 난교 파티라도 벌이는 것처럼 악의적으로 상부에 보고했고, 이에 따라 나치와 점점 심한 갈등을 겪게 되었다. 에델바이스 해적은 나들이 때 히틀러 유겐트 순찰대가 어설프게 시비를 걸어오면 바로 두들겨 패서 쫓아내기 일쑤였고[2] , 단원들이 계속 역관광 당하며 돌아오게 되자 지역 유겐트 대장이 경찰에게 검거 작전을 펴달라고 떼를 쓰는 지경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전쟁 중 노동자 부족으로 인한 임금의 상승으로 몇몇 에델바이스 해적은 궁핍한 배급제와 극히 제한된 여행의 자유에도 불구하고 히치하이킹과 무임승차 등으로 훨씬 먼 오스트리아나 바이에른, 슈바르츠발트(현 바덴-뷔르템베르크)까지 장거리 여행을 감행하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이들은 그 당시 좀처럼 직접 만날 수 없었던 타지의 청소년들과 어울렸고, 히틀러 유겐트에서는 금지곡이었던 유행가를 부르며 휴식을 즐겼다. 이들이 부르던 유행가는 기존의 것도 있었지만, 주로 가사를 바꿔 히틀러 유겐트를 조롱한다거나 나치, 심지어 히틀러까지 디스하는 민중가요 식으로 마개조한 것이 많았다.
3. 나치의 탄압과 저항
나치는 이에 대해 수시로 일제 검거 작전을 펼쳐 대응했고, 경고 등 최소한의 조치 외에 삭발 후 훈방 같은 공개적 모욕, 주말 동안 가택 연금 혹은 유치장 구금 등을 행했다. 나치의 관점에서 심한 일탈을 저질렀다고 판단된 경우에는 청소년 강제수용소 수감이나 형사재판까지 걸어서 무자비하게 탄압했고, 이러한 당국의 탄압이 심해지면 심해질 수록 에델바이스 해적의 활동도 과격해졌다.
이들은 잦은 병가나 결근, 전직 같은 소극적인 것에서 교묘한 사보타주(태업) 등으로 나치의 강압적인 노동 규범을 강요하는 직장에 대응했고, 뒤셀도르프와 쾰른에서는 공산당 등 활동 금지를 당한 정당의 지하 조직과 연대해 반나치 구호가 담긴 낙서나 삐라를 몰래 우체통에 투함하거나 탈영한 독일군 병사, 연합군 포로, 점령지에서 끌려온 노예 노동자, 강제수용소 탈주자 등에게 은신처를 제공하는 등 한층 위험하고 적극적인 반체제 활동에 뛰어들기도 했다.
전쟁 후반기인 1944년 가을에는 쾰른의 에델바이스 해적 청소년들이 반나치 저항 조직인 에렌펠트 그룹(Ehrenfelder Gruppe)과 연계해 병영 무기고를 털어 무장한 뒤 시내의 친위대나 돌격대, 히틀러 유겐트 지도부, 여타 골수 나치들을 습격하는 게릴라식 전투를 벌였고, 이 과정에서 쾰른의 게슈타포 총수와 히틀러 유겐트 간부, 돌격대원 등이 사살되었다. 이는 공식 기록으로 확인된 에델바이스 해적의 유일한 반나치 무장 투쟁이었다.
결국 빡친 친위대 총수 하인리히 힘러는 반나치 청소년 척결을 위한 명령을 공식 발표해 더 강한 탄압을 지시했고, 게슈타포에 의해 체포된 에렌펠트 그룹 소속 13명에게 재판 없는 즉결 공개처형을 명령했다. 이들 중 바르텔 싱크, 요한 뮬러, 귄터 슈바르츠, 프란츠 라인베르거, 구스타프 베르멜, 아돌프 슈츠 여섯 명이 당시 16~18세의 쾰른 에델바이스 해적 소속 청소년들이었다. 이외에도 수천 명에 달하는 청소년들이 에델바이스 해적의 수괴, 적극 가담자 등으로 분류되어 수감과 강제 노역, 강제 징집을 당했고, 이들 중에서도 수많은 희생자가 나왔다.
4. 전후의 재평가
하지만 2차대전 패전과 나치의 소멸 후에도 이들은 제대로 명예 회복을 받지 못했다. 에렌펠트 그룹의 일원으로 처단된 이들은 여전히 독일 사법계의 경직된 분위기 속에서 살인범으로 규정되어 있었고, 나치 잔재 청산보다 경제 재건에 몰두한 콘라트 아데나워 정권 치하에서 유가족들의 복권 운동은 끊임없이 방해를 받았다. 하지만 68운동으로 좌파의 목소리가 점차 커지기 시작한 1970년대 이후 이들에 대한 재평가와 복권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언론을 통해 보도되기 시작했다.
결국 1980년대 들어 역사학계에서도 에델바이스 해적을 하얀 장미에 준하는 반나치 청소년 결사 운동으로 재평가하기 시작했고, 이들에 대한 국가 배상과 명예 회복, 상훈 등이 주어지고 있다. 1986년에는 가장 강하게 저항했던 쾰른의 에렌펠트 그룹을 기리기 위해 그들이 처형당한 거리에 추모비가 건립되었고, 1990년에는 청소년 인권 증진에 기여한 이들에게 수여되는 바르텔 싱크 상이 제정되었다. 2004년에는 니코 폰 글라소의 감독으로 에렌펠트 그룹의 저항 운동을 극화한 영화 '에델바이스 해적' 이 제작되었고, 2005년부터는 에렌펠트 그룹과 여타 에델바이스 해적 생존자들이 쾰른의 평화공원에서 에델바이스 해적 축제를 매년 개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