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주(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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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전성기였던 삼성 라이온즈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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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라이온즈 원정 기록원으로 재직하던 당시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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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격코치 시절.
1. 소개
삼성 라이온즈와 KIA 타이거즈에서 뛰었던 전 야구 선수. 마해영이 삼성으로 오기 전 이승엽-양준혁과 클린업을 구축하여 상대의 투수에게 공포를 선사하던 장본인. 그래서 임창용도 신동주가 해태로 이적하고 나서야 원래 등번호인 37번을 찾을 수 있었다.[2] 해태 타이거즈의 마지막 5번타자.
2. 선수 시절
1991년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해 1992년에 데뷔했으며, 백인천 감독의 휘하에 삼성의 중심 타선으로 자리잡았다. 롯데의 8888577의 암흑기였던 백인천이었으나 젊은 시절의 백인천은 1990년 LG의 우승을 이끌었는데다 삼성 감독으로서 최익성, 신동주, 이승엽의 타격 실력을 대폭 향상시킨 장본인이다. 1997년에는 21홈런-18도루를 기록하며 아쉽게 도루 2개가 모자라 20-20을 달성하지 못했으나 '''타율 .326, 장타율 .581'''로 타율-장타율에서 당시 최전성기였던 이종범과 맞먹는 스탯을 자랑했다.[3] 게다가 그해 준플레이오프에서는 2개의 홈런을 쏘아올렸는데 1차전 전주경기에서는 결승홈런이었고 2차전 대구에서도 0:3에서 추격하는 홈런을 올렸다.[4] 1999년에는 .278 22홈런 26도루로 20-20을 달성하기도 하였다.
이 때 KBO 리그 역사상 전후무후한 기록을 세웠는데 이것은 '''1이닝 3도루'''이다. 1999년 6월 24일 대구에서 벌어진 LG와의 더블헤더 2차전에서 2회말 볼넷으로 출루한 뒤 '''2,3루 도루와 홈 스틸을 잇달아 성공시키며''' 대기록을 작성했다.
게다가 그의 이미지는 찬스에 강하며 '만루홈런의 사나이'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그도 그럴것이 삼성에서 뛰었던 2000년까지 6개의 만루 아치를 그렸으며 그것은 김기태(당시까지 8개)에 이은 2번째 기록이며 당시 한참 홈런을 많이 때리던 홍현우(5개)보다도 많은 수치였다.[5]
그러나 2000년 시즌 부진하며 주전 자리에서 밀려났고, 마침 기존의 김기태와 김종훈, 강동우에 이어 마해영이 트레이드로 영입되었고, 대졸 신인 박한이와 외국인 타자 매니 마르티네스가 합류하며 사실상 삼성에서 설 자리를 잃었다.
결국 김응용 감독 부임 직후인 2001년 초 좌완투수 강영식과의 트레이드로 해태 타이거즈로 이적, 해태-KIA에서도 주전 외야수로 뛰다가 2003년 시즌 후 FA 마해영의 보상선수로 지명되며 친정팀인 삼성에 복귀했다. 2004년은 준주전으로 뛰다가 2005년 7월 시즌 중 투수 최용호와의 맞트레이드로 다시 KIA 타이거즈로 이적하였지만, 하락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이듬해인 2006년 6월 웨이버 공시되어 은퇴했다.
현역 시절 우승과는 인연이 없었다. 1999년 롯데와의 플레이오프 당시 삼성의 주전 외야수였으나 팀은 7차전까지 간 접전 끝에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했고, 그가 강영식과 트레이드되어 KIA에 있었을 때인 2002년에는 친정팀 삼성 라이온즈가 첫 한국시리즈 우승컵을 들어올린 해였다. 이후 2004년 다시 친정팀 삼성으로 돌아와 그해 한국시리즈 엔트리에 들며 생애 첫 한국시리즈 무대도 밟아봤으나 팀은 9차전까지 간 접전 끝에 준우승에 그쳤다. 이후 2005년 7월 다시 KIA로 트레이드된 뒤 그해 한국시리즈에서 삼성이 우승하는 등 여러모로 현역 시절 우승과는 인연이 없었다.
현역 시절 당대 최고의 좌완투수였던 이상훈에게 무척 강한 모습을 보였고 불꽃 남자라는 별명을 지니고 있었고 찬스에 무척 강했다. 또한 타격 시에 배팅장갑을 착용하지 않고 타격을 하기로 유명했다.
2.1. 연도별 성적
3. 지도자 시절
은퇴 후 대구광역시 북구 침산2동에 B&G 스크린 골프연습장을 열었으며, 전 삼성 - 두산 - 롯데 투수 출신 이상훈을 티칭 프로로 맞이하여 함께 운영했다. 2012년 현장으로 복귀하여 친정 팀인 삼성의 원정 기록원으로 활동했다.
2014년부터 정식 코치가 되어 2군 타격코치로 보직이 결정됐는데, 실제로는 1군 선수단과 동행 중이다. 2015년부터 1군 타격코치로 김한수와 같이 타격코치를 맡게 됐다.
2016년부터는 신인시절에 달던 70번을 23년만에 달게 되었다. 2016년 4월 동안 부진하던 박해민의 개인훈련에 함께 하면서하며 박해민이 각성하는 데 일조했다.
2017년, 김한수 타격코치가 감독으로 승격되면서 단독으로 1군 타격코치를 맡았지만,[6] 삼성 라이온즈가 '''02 롯데''', '''13 한화''' 수준의 막장 경기력을 4월 내내 보여 주자 수비코치 이윤호와 묶여서 3군으로 강등되었다. 대신 김종훈이 1군 타격코치로 올라왔으며, 박진만도 수비코치로 왔다. 그리고 강기웅이 3군에서 2군으로 이동했다.
2019 시즌 이후 2019년 10월 2일 보도된바로는 구단으로부터 재계약 불가 통보를 받아 팀을 떠나게 되었다.
[1] 외야 전 포지션이 가능하지만, 주포지션은 우익수.[2] 임창용은 3년동안 39번을 달았다.[3] 한편으로는 아쉬운 해였다. 이 해 외야 부문 KBO 골든글러브는 양준혁, 박재홍, 이병규가 탔는데, 양준혁, 박재홍이야 압도적인 실력이니 그렇다 쳐도 이병규와 비교해서는 타율, 홈런 등에서 압도적으로 우위를 점했음에도 골든글러브에서 떨어지며 결국 골든글러브는 인기투표임을 인증했다. [4] 물론 그 준플레이오프는 선수생명의 마지막 불꽃을 태운 김상엽에게 mvp가 돌아갔다.[5] 2000년 당시까지를 기준으로 김기태는 227홈런, 홍현우는 173홈런을 때려냈다. 신동주의 홈런수는 82개에 불과했다. 그가 얼마나 만루에 강했는지 알려주는 지표다.[6] 2011년 류중일 감독 부임 이후 삼성에는 줄곧 1군에 2명의 타격코치를 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