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병호
1. 소개
'''흑마구의 달인'''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포지션은 투수. 전 삼성 라이온즈 소속. 등번호는 11번 - 17번이며 코치가 되고서는 70 - 97 - 80번이다.
10승을 거둔 시즌이 단 2시즌뿐이었고, '흑마신', '음지의 에이스' 등 그를 칭하는 별명처럼 앞장서서 활약을 보이지 않았지만 뒤에서 묵묵히 삼성 라이온즈를 받쳐 주던 좌완투수였다.
입단 당시에는 최고 147km/h 평균 140km/h대를 찍을 수 있는 좌완 속구형 투수로 기대받았지만, 부상[2] 과 혹사로 인해 망가지게 되었다. 그로 인해 130km/h대의 직구를 구사할 수밖에 없는 몸이 되고 말았다. 참고로 가장 느린 때는 구속 114km/h를 찍었다고. 그런데도 선동열 감독은 컨트롤만 되면 OK라는 반응이었다고 한다.
2. 선수 생활
대구상업고등학교를 거쳐 영남대학교 (1992학번)재학 시절 대학 야구에서 속구 에이스로 활약했고, 1996년 삼성의 1차 지명을 받아 입단했지만 영대 시절부터 누적되어 왔던 혹사로 인해 꽤 부진했다. 초년에는 주로 선발로 나왔고 1997년 10승을 올렸지만, 이 때는 방어율을 5점 가까이 기록했다. 이후로는 부상을 입으면서 구속을 잃고 중간계투로 전락하고 말았으며, 중간에는 공익으로 입대하여 군 복무를 했다. 2002년까지는 새가슴 기질까지 있어서 삼성 팬들에게 '저 놈은 투수도 아니다', '저 놈이 올라오면 경기 보기도 싫다'[3] 라고 엄청나게 까였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잃어버린 구속 대신 컨트롤을 피나게 연습하여 결국 '''느린 공으로도 프로 선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그야말로 인간승리가 아닐 수 없다.[4]
그 결정적인 반전의 계기가 2002년 한국시리즈였다. LG와의 1승 1패 상황 때 3차전에 흔히 말하는 '바람잡이 깜짝 선발'로 등판, 예상치 못하게 5이닝 무실점으로 막아 내고[5] 배영수에게 마운드를 넘겨 준 경기다. 그 경기 이후부터 사람이 달라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2006년에 2번째이자 마지막 10승을 거두고 2007년 말에 열린 베이징 올림픽 예선 및 아시아 선수권 대회 때 대표팀에 선발됐다. 게다가 일본전에 깜짝 선발로 발탁되어 모두를 혼란에 빠뜨렸다. 실제 경기에서는 2⅓이닝 동안 3피안타 1볼넷 3실점(2자책점)을 기록, 최소한 3이닝 정도를 무실점으로 막아 주기를 원했던 코칭스태프의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다.
2008년까지 삼성에서 선발과 중간 가리지 않고 나와 던져 주었으며, 에이스들의 빈 공간을 메꿔 주고 약한 부분을 보충해 주는 역할로 나와 사람들은 그를 기려 '음지의 에이스' 라고 부르고 있다.
6승 6패를 거둔 2008 시즌 종료 후 현역 은퇴를 선언하며 더 이상 그의 흑마구를 볼 수 없게 되었다. 플레이오프 종료 직후 은퇴 권고를 받았으며, 그의 느린 직구에 어울리지 않게 이틀만에 은퇴라는 빠른 결정을 내렸다. 지인 100명에게 물어봐서 많은 쪽을 따르기로 했는데 20명째까지 전부 '은퇴하라'고 권유해서 그냥 결정했다고. '''본인은 흑마구라는 말이 싫었다고 한다.''' 배번은 채태인에게 넘겼다.
3. 은퇴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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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후 코치 시절
3.1. 삼성 라이온즈 코치 1기
은퇴 후 삼성 1군 불펜코치가 되었으며, 그의 손에서 흑마구의 계승자가 나올 지 주목받고 있다. 덧붙여 차기 로나쌩 클럽 , 엘나쌩 클럽회장직도 누구한테 넘겨줄지 롯빠들의 관심사가 되고 있다.
2009년 4월 5일 그의 은퇴식이 치러졌다. 시구자로서 흑마구를 마지막에 장식했다.
2010 시즌은 잔류군 투수코치를 맡았다가 10월 말에 재계약이 불발되며 삼성을 떠났다. 대신 2군에서 김태한이 올라와서 불펜코치가 되었고, 김태한이 맡던 2군 코치는 성준 코치가 맡는다.
3.2. 삼성 라이온즈 코치 2기
1년간 야인으로 지내다가 2012 시즌부터 다시 삼성의 2군 투수코치로 복귀했다. 2013년에는 3군 투수코치를 맡았다가 시즌 도중 외국인 선수 스카우트 역할도 맡게 되었는데, 그 에스마일린 카리대가 거하게 망하고, 먹튀가 되자 비판을 받았다.
다만 전병호가 비판받는데 억울한 부분이 있다면, 원래 외국인선수 영입담당이었던 이충무가 2013년 시즌 중 삼성을 떠나 kt wiz로 옮기는 바람에 스카우트 팀에 공백이 생기자 코치였던 전병호가 갑작스레 외국인 선수 스카우트를 '''겸직'''하게 되었던 사정도 있다.
3.3. kt wiz 코치
2013년 11월 신생팀 kt wiz의 코칭스태프로 영입되었다. 보직은 불펜코치. kt가 2군에서 조정기를 거쳐 2015년부터 1군에 진입하자 1군 불펜코치가 되었다.
2016 시즌 종료 후 조범현 감독의 재계약 불발로 코칭스태프가 대대로 개편되는 과정에서 kt를 떠나게 되었다.
이후 대구로 내려와서 전 삼성 우완투수 이상훈과 함께 중구 남산1동에 아마야구 선수들을 대상으로 하는 피칭 아카데미를 열었다.
4. 투구 스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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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구폼. 구속이 무려 125km/h! 80마일도 안되는 77.6마일의 속도.
그보다 앞서 느린 공으로 타자를 상대했던 성준이 인터벌로 타자의 타이밍을 빼앗았다면, 전병호는 '평범한 직구 - 느린 직구 - 좀 더 느린 직구 - 매우 느린 직구 - 가장 느린 직구'[6][7] 등의 속구의 구속 차이로 타자들의 타이밍을 뺏었다. 구속 차이로 타자들을 농락한 후 '몸쪽 꽉 찬 130km/h대 속구'를 결정구로 타자들을 간혹 폭풍삼진을 당하게 했다.
입단 후 초기 커리어만 한정하면, 전병호는 흑마구 투수는 아니었다. 앞서 기술된 바대로 구속이 140km/h 초반까지 찍을 수 있었기 때문에 속구 로케이션을 높게 가져가 뜬 공을 양산하는 플라이볼형 투수였다.
속구의 구속 차이로 타자의 타이밍을 뺏는 것 외에, 일반적인 포심 그립이 아닌 공의 실밥을 하나만 걸쳐잡는 원심과 아예 실밥을 안 잡고 던지는 무심 등 공의 그립 차이로 인한 공의 변화도 주곤 했다. 이외에는 싱커, 커브 등의 변화구를 주로 구사했다.
또 이런 스타일의 특징인 강심장 소유자이기도 하다. 현역시절 '만루가 투수만 부담스럽나? 타자도 부담스럽지'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땅볼 유도율이 타 투수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으며, 그 때문에 팬들은 '흑마신은 주자가 있을때 더 보기 편하다' 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또한 견제시의 속도가 매우 빠르기 때문에 '투구보다 견제구가 더 빠르다'라는 말도 들린다.
매 등판 후 경기를 복기했다. 그 날 자신이 던진 100개의 공의 구질, 코스를 모두 기억한다고 한다.
스스로 말하기를, 타자의 타격 자세만 봐도 자신의 어떤 구질을 노리는지 안다고 한다.
로나쌩 클럽(롯데만 만나면 쌩유) 회장직을 역임하기도 했다. 2006년 그의 대 롯데전 방어율은 3점대인데 마지막 경기 전까지 롯데에게 1점만 허용했으나 마지막 롯데전에서 2이닝 12실점하는 바람에 그렇게 된 것이다.
5. 기타
이승엽의 사인을 잘 흉내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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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가 어떤 투수인지, 흑마구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그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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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호의 리즈 시절로 유명한 사진. 하지만 이 사진에 찍힌 구속은 조작이다(...).[9]
선수 초창기 시절인 1997년에 싸인 문제가 생겨서[10] LG의 심재학에게 쓰리런을 허용하자 백인천 감독에게 뺨을 맞았는데, 이 사건은 백인천이 삼성 감독에서 물러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전병호가 삼성 팬에게 2002년 이전까지 평가가 좋지 않았던 이유 중 하나. 여담으로 백인천은 전병호의 뺨을 때리고 열이 뻗쳤는지 뇌출혈로 쓰러지고 응급실로 향했다. 그후 백인천은 감독직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수석코치 조창수가 임시감독으로 시즌을 마친 이후 감독직에서 사퇴했다. 그후 다시 롯데 자이언츠에 감독으로 부임하게 되었는데...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하일성 해설위원은 같은 팀 대선배이자 레전드 좌완투수 권영호와 투구 폼과 스타일이 흡사하다며 자주 비교하곤 했다.
6. 연도별 성적
[1] 1992학번[2] 특히 무릎 부상. 오랫동안 쪼그려 앉을 수 없다고 한다.[3] 심지어는 팬들로부터 젬병호, 염병호, 전병신 등등... 수많은 욕 별명들이 붙어다니기까지 하며 욕을 여러차례 얻어먹었다고 한다.[4] 이와 비슷한 일본프로야구 선수로는 오릭스 블루웨이브(現 오릭스 버팔로즈)에서 뛰었던 호시노 노부유키가 있다.[5] 당시 삼성 팬들은 전병호가 선발이라는 소식을 듣고 경기를 포기했다고 한다.[6] 이 말은 실제로 진갑용이 인터뷰 중에 언급하기도 했고 스스로도 자신의 구질에 대해 저렇게 얘기했다.[7] 이 말 자체는 사실 1960년대 메이저리그 투수였던 스투 밀러에 대한 평에서 나온 말이다. 자세한 것은 야구 명언 참조.[8] 왼쪽부터 성준 선수, 전병호 선수, 임동규 선수이다.[9] 실제 이 '플래쉬백' 프로그램을 보면 152km/h가 아닌 125km/h가 찍혀 있다.[10] 물론 포수가 김영진인 거를 감안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