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만
1. 소개
前 SK 와이번스 소속의 야구선수이자 現 삼성 라이온즈의 1군 수비코치.
강대중-김진영-박정일-하일-김재박-이종범-박진만-강정호-김하성 으로 이어지는 한국 국가대표 유격수 계보를 차지한 2000년대 KBO 간판 유격수.
인천고등학교 선배인 인천야구의 대부 김진영 의 직계 계보.
현대 유니콘스 시절부터 SK에서 은퇴할 때까지 줄곧 7번을 달았다.
별명은 찐만두, 만두, 만두신, 명인만두를 거쳐 SK와 계약으로 탄생한 고향만두 등. 그 외에도 수비만, 삐삐밴드[6] 가 있다. 중계진이나 언론에선 주로 명품 유격수라는 별명을 사용해 그의 수비를 칭찬했다.
수비 범위가 상당히 넓고, 어깨 또한 강한 편이라 신체적인 능력으로는 유격수에 딱 알맞는 조건. 그렇다고 타격이 안 되는 것도 아니고, 전성기 때 3할에 20홈런을 기록한 적 있는 중장거리 슬러거이기도 했었다. 하지만 하필이면 현대시절 팀내 쟁쟁한 타자들이 많았고, 유격수라는 포지션 때문에 현대에서 주로 '''하위타선겸 9번 타자'''에 배치되곤 했다. 그래서 투승타타 기준으로는 타점이 적고, 워낙 수비가 뛰어나서 박진만이 왕년에 일발장타를 갖춘 강타자였다는 사실이 종종 묻히곤 한다. 그러나 2007년을 마지막으로 방망이가 죽었고[7] 2010년경부터는 글러브질에서 조금씩 노쇠화가 드러나고 있고 고질적인 무릎부상[8] 때문에 포구할 때의 자세가 많이 불안해졌다. 2010년 잦은 수비 실책의 원인.
단 주력은 무릎 부상때문에 유격수임을 감안하면 느린 편이었다.[9] 이 점만 좋았다면 수비 범위에서는 웬만한 중견수 못지 않았을 텐데. 그나마 그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수비력과 센스가 있었기에 오래 선수 생활을 할 수 있었다.
2. 선수 경력
3. 수비 스타일
박진만 삼성 유격수 시절 수비 하이라이트
4. 지도자 경력
[image]
SK 와이번스 코치 시절.
코치진에 합류하자마자 공부하려는 자세를 보여주며 호평을 들었고, 시즌 개막 이후에는 1루 주루코치의 역할도 수행했다.
그러나 2016 시즌이 끝난 뒤 사임했다. 2군 수비코치를 제안받았는데 은퇴 직전 다쳤던 무릎이 아직 좋지 않고 해서 그냥 그만둔 걸로 보인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 삼성 라이온즈 코치로 영입되어 김한수 사단으로 들어갔다. 아마 2군 발령이 나니까 1군 코치직을 보장한 삼성으로 간거 같은데, 솩갤에선 무릎 때문에 쉰다고 한다고 해놓고선 곧바로 말을 바꿔 타팀 코치로 가버렸다며 배신자[10] 라고 욕을 얻어먹고 있다.
하지만 삼성에서도 2군 수비코치로 보직이 확정났다가 4월 28일 코칭 스태프 개편으로 1군 수비코치로 보직을 바꿨다.
2018년 시즌 도중 삼성의 1,3루 작전코치인 김호(야구), 김재걸 코치가 2군으로 내려가면서 3루 작전코치를 겸임하는 중이다. 그러나 2019 시즌 부터는 최태원 코치 영입하면서, 수비코치에만 전념할 계획이다.
2020 시즌에는 최태원 작전코치가 수석코치가 되면서 작전코치로 보직이 바뀌었다.
5. 여담
- 현대와 삼성에서 우승반지를 6개[11] 나 먹은 반지캡터. 특히 2003년과 2004년에 현대에서 2년 연속 우승을 경험하고 삼성으로 이적해 2005년과 2006년에 또 다시 2년 연속 우승반지를 가져갔다. 2010년까지만 하더라도 8개 1명, 7개 3명, 6개 2명(박진만 포함) 뿐이라 6개만 되어도 충분히 반지캡터라 부를 수 있었지만, 2011~2014년 삼성이 4연패를 하면서 삼성의 고참 선수들이 대거 6~7개의 반지를 갖게 되면서 다소 밀린 감이 있다. 그래도 서로 다른 팀 소속으로서 우승반지를 획득한 선수로는 최다이다.
- 군 문제와 관련하여 2000년에 아버지가 병역비리를 위해 브로커에게 면제청탁을 부탁하며 뇌물을 건네 구속되었다는 흑역사가 존재한다. 그 해 2000 시드니 올림픽 동메달로 병역특례를 받아 병역 문제를 해결하기는 한다.[12]
- 탤런트 박민영이 시구할 때 2010년 10월 18일 삼성 라이온즈-SK 와이번스의 한국시리즈 3차전, 2011년 10월 19일 SK 와이번스-롯데 자이언츠의 플레이오프 3차전 두 번 모두 박진만의 소속팀 유니폼, 그것도 박진만의 등번호인 7번을 달고 시구를 했다.
- 프로야구매니저의 SK, 삼성 듀얼팀컬러로 타향만두라는 팀컬러가 업데이트되었는데, 이건 아무리 봐도...
- 마구마구에서는 삼성과 국대 레전드가 출시되었는데, 삼성은 확실히 나올만 했지만 국대 레전드가 통산 0.111의 타율이라는 충격적인 성적을 기록한 탓에 퍼주기라고 말이 많았다. 대신 컨택형인데도 고작 79라는 스페급의 스탯을 받은지라 다른 포지션을 엘테랑으로 메울 수 있게 된 이후로는 십중팔구 용병을 대신 사용한다.
- 현대 유니콘스가 서울로 연고지 이전을 시도하던 당시 인천 출신의 모 투수와 함께 "서울로 연고지를 옮기면 더 좋잖아요."라는 말로 인천 야구팬들의 속을 뒤집었다는 카더라가 있었다. 그런데 무려 14년만에 진실이 드러났다. 인천 아시안게임 개최를 기념한 인천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박진만은 "당시 수원으로 가면서 한편으론 상당히 아쉬웠다"며 "인천에서 경기하면 편안했는데 고향을 떠나 선수 생활을 하며 안정감이 없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인천 토박이로서 인천을 위해 꾸준히 야구했다는 평가를 받고 싶다는 포부까지 전하면서 오랜 루머의 종지부를 찍은 셈.
- 은퇴 후, 박진만이 인천 야구에서 지니는 상징성과 그간의 활약상을 기념하자는 취지에서 그의 선수 시절 등번호였던 7번을 영구결번하자는 의견이 자주 나오고 있다. 다만 SK 와이번스에는 다른 레전드 7번[13] 도 있었고, 박진만이 그의 번호를 물려받았기 때문에 명성이 조금은 부족한 것 아니냐는 의견도 있어서 더 지켜 봐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2015년 12월 현재 팀 공식 홈페이지 상으로는 박재상이 7번을 가져간 것으로 되어 있어 영구결번은 어려울 듯. 그리고 솩갤러들은 왜 저딴 놈이 7번을 물려받았냐며 가루가 되도록 까는 중... 이었는데 정작 개막하고 보니 그 물려받은 놈이 엄청 잘 하고 있다. 역시 인생만사 새옹지마. 사실 순혈 프랜차이즈 스타였던 어린왕자도 영구결번을 받지 못했고 빵형도 영구결번을 받지 못한 채 한동민 에게 번호를 넘겨줬는데 순혈 프랜차이즈 스타도 아니고 김원형-박재홍은 인천(과 쌍방울)에서만 뛴 데에 반해 박진만은 삼성에서도 뛰었으니 영구결번의 가능성이 낮긴 했다. [14] 참고로 이후 인천 야구 최초의 영구결번은 박경완이 되었다.[15]
- 오지환이 삼진 1005개를 기록하기 이전에 유격수 중에서 통산 삼진 1위(...)였다.(통산 1003개)
- 종교는 확실치 않으나 한때 가톨릭 신자였다는 얘기가 있었다. 마침 후임 유격수 김상수도 독실한 가톨릭 신자[16] . 아무튼 이 사실 때문에 불암콩콩코믹스에서 (가톨릭 신자라) 예배를 안나왔다고 이만수 의 장난으로 총에 맞는 장면이 나왔다.
- 야구를 시작하기 전 어렸을 때의 장래희망은 파일럿이었다고 한다.
6. 연도별 주요 성적
7. 관련 문서
[1] 인천고 2학년 시절 무릎 부상으로 1년 유급[2] 20년의 선수생활 중 마지막 시즌인 15시즌을 제외하면 모든 시즌을 유격수로서 가장 많은 경기에 나왔고 마지막 시즌도 유격수로 150이닝 가까이 소화했다. 데뷔시즌인 96시즌부터 09시즌까지 거의 15년 동안 유격수로만 출전했다. 통산 1993경기 중 1861경기를 유격수로 출전했다.[3] 4월 28일부로 승격[4] 6월 26일부터 작전코치 겸임[5] 와이번스의~! 박진만~ 박진만~ 시간이 지나도~ 대한민국 최고 유격수! SK 와이번스 박진만~ 최고의 박진만~[6] 신인시절 수비와 더불어 2할8푼을 치는 준수한 활약으로 당시 신인왕을 먹은 박재홍과 엮였다. 둘다 박씨라 이니셜의 P를 딴 것. [7] 마지막 규정타석 '''3할'''시즌이였다[8] 이는 본인의 노쇠화도 있지만 그가 뛰었던 삼성 라이온즈의 옛 홈구장이 참으로 악명 높은 '''인조잔디'''를 보유했던 것도 한 몫 했다. 당시 대구랑 광주를 연고지 하는 KIA 타이거즈의 홈구장인 '''무등야구장'''과 최악의 야구장이라고 불었다. 역설적으로 홍세완 역시 인조잔디의 문제점으로 무릎 이상 여파로 은퇴를 빨리하게 되었다.[9] 일반 야수들과 비교하면 평균을 살짝 넘은 정도지만 유격수는 기본적으로 빠른 발을 갖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데뷔 초와 말년에만 해도 두 자릿수 도루는 했었다. 하지만, 중요한 포지션이기도 하고 현역시절 팀내에 빠른 선수들이 하나 둘은 있었기에 감독들 특성상 시키지를 않았다.[10] 이와 별개로 현대시절에는 인천 떠나서 좋다 라는 루머로 비난을 들은 적이 있다. 훗날, 박진만 본인은 아니라고 해명을 했다.[11] 권혁, 선동열, 조동찬과 우승반지 개수가 동일. 참고로 이 분야 최강은 해태의 김정수로 해태에서 8번 진출하여 8번 우승반지를 꼈다. 뒤이어 배영수도 삼성 7회, 두산 1회로 총 8개의 우승반지를 달성하고 은퇴. 그 다음으로 역시 해태의 김성한, 이순철, 한대화, 그리고 삼성의 진갑용, 박한이의 7개다.[12] 박진만 외에 이 때 병역특례를 받은 선수는 손민한, 정수근, 장성호, 이승호(SK)가 있다. 유일한 아마추어 선수였던 정대현은 이미 병역면제를 받았기 때문에 병역특례와는 무관하다. 당시의 몇몇 기사에서는 정대현이 병역특례를 받았다고 나온 것도 있으나 이후 기초 군사훈련을 받았다는 기사가 전혀 없었다. 당시 기자들이 유일한 아마추어 팀 소속 선수이니 미필이겠지 지레짐작한 것이 컸다. 나중에는 김수경도 병역특례가 아니라고 나온다.[13] 사족으로, 이후 입단한 이 선수와의 동명이인은 8번을 달고 있다.[14] 참고로 77번은 백재호 2군 수비코치다.[15] 박경완이 인천 출신은 아니지만 (전주 출신), 쌍방울 - 현대 - SK로 이어지는 커리어로 봤을 때 인천 야구의 상징 중 하나였던 것은 사실이다. 물론 완전한 프렌차이즈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현재까지는 인천에 영구결번을 받을 만한 프렌차이즈 자체가 보이지 않는다. 은퇴 후의 김광현과 최정이 현재로서 확정적이지만, 출신 팜까지 따지면 김광현은 안산공고 출신, 최정은 수원 유신고 출신으로 둘 다 인천 출신은 아니다. 애초에 출신까지 인천 순혈이기가 힘들다는 이야기. 그러므로 박경완 정도면 충분히 인천 레전드로 인정받을 만 하다. 은퇴 후 커리어도 SK에서 이어가고 있다.[16] 정작 본인의 아버지와는 반대다. 물론 진짜 친아들은 당연히 아니고, 류중일이 김상수를 자기 아들 같다고 항상 기자들에게 장난치듯이 말해서 그런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