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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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濟馬
1837년(1838년?) ~ 1900년 8월 11일
조선 후기와 구한말의 무인이자 의학자. 호는 동무(東武). 본관은 전주로 왕실의 종친이지만 서자다.[1] 출생지는 함흥.[2]
사상의학의 창시자로 유명하다. 이제마는 태양인이었기 때문에 태양인 이제마라는 드라마도 만들어졌다.
젊은 시절에는 서자라는 출생과 부모 및 조부모의 사망으로 인해 방황하였다. 때문인지 10대에 향시(동네 시험)에서 장원했다는 기록 이후 36세까지 생의 기록이 없다고 한다. 당시에 한반도 북부 일대는 물론 만주나 연해주까지 돌아다니면서 견문을 넓혔다고 하는 소문이 있다.
학문에 있어서는 30세 전후에 객사에서 발견한 한석지의 저서인 <명선록>의 영향을 받아 양명학 계열의 학풍을 띤다. 방황 후에 고향으로 돌아와 36세에 무과 급제해 50세에 진해현감(현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 진전면, 진북면 일대로 현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와는 다른 곳)이 되었으며 2년 10개월을 진해현감으로 지냈다. 이후 1896년에는 60세가 다 된 나이에 최문환의 난을 진압하고 고원군수로 임명받았으며 1897년 사직하였다. 이후 의술에 전념하여 동의수세보원을 저술한 후 향년 64세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에게 남긴 유언은 "내가 죽고 100년이 지나면 사상의학이 세상을 풍미할 것이다"였다. 저서에 <격치고>, <동의수세보원> 등이 있다.
학문적으로는 대표적인 유의(유학자 의사)로서 유교적 세계관과 동의보감의 의학 지식을 토대로 사상의학의 기틀을 수립하였기에 한의학계에서는 중요한 의사로 보고 있다. 다만 이제마의 사상의학은 이론이 철저히 성리학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과학적 근거가 희박한게 흠이다. 그 중요한 위치는 기본적으로 중국의 의학을 조선에 들여와 향약을 분류하던 정도에서 그치던 기존 한의학의 역사 전개 과정에서 최초로 독자적인 이론을 냈다는 것 정도에서 기인한다.
야사에는 환자들의 체질을 모를 경우 선호하는 음식을 알아보거나 같이 지내며 확인하는 일도 있다. 한 번은 천도교의 지도자와 만남을 가지게 되었고 체질을 몰라 고민하다가 장작더미를 옮겨보도록 하고 여러번 옮기게 한 뒤에야 비로소 소음인임을 파악하게 된다.
李濟馬
1837년(1838년?) ~ 1900년 8월 11일
1. 개요
조선 후기와 구한말의 무인이자 의학자. 호는 동무(東武). 본관은 전주로 왕실의 종친이지만 서자다.[1] 출생지는 함흥.[2]
사상의학의 창시자로 유명하다. 이제마는 태양인이었기 때문에 태양인 이제마라는 드라마도 만들어졌다.
2. 생애
젊은 시절에는 서자라는 출생과 부모 및 조부모의 사망으로 인해 방황하였다. 때문인지 10대에 향시(동네 시험)에서 장원했다는 기록 이후 36세까지 생의 기록이 없다고 한다. 당시에 한반도 북부 일대는 물론 만주나 연해주까지 돌아다니면서 견문을 넓혔다고 하는 소문이 있다.
학문에 있어서는 30세 전후에 객사에서 발견한 한석지의 저서인 <명선록>의 영향을 받아 양명학 계열의 학풍을 띤다. 방황 후에 고향으로 돌아와 36세에 무과 급제해 50세에 진해현감(현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 진전면, 진북면 일대로 현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와는 다른 곳)이 되었으며 2년 10개월을 진해현감으로 지냈다. 이후 1896년에는 60세가 다 된 나이에 최문환의 난을 진압하고 고원군수로 임명받았으며 1897년 사직하였다. 이후 의술에 전념하여 동의수세보원을 저술한 후 향년 64세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에게 남긴 유언은 "내가 죽고 100년이 지나면 사상의학이 세상을 풍미할 것이다"였다. 저서에 <격치고>, <동의수세보원> 등이 있다.
학문적으로는 대표적인 유의(유학자 의사)로서 유교적 세계관과 동의보감의 의학 지식을 토대로 사상의학의 기틀을 수립하였기에 한의학계에서는 중요한 의사로 보고 있다. 다만 이제마의 사상의학은 이론이 철저히 성리학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과학적 근거가 희박한게 흠이다. 그 중요한 위치는 기본적으로 중국의 의학을 조선에 들여와 향약을 분류하던 정도에서 그치던 기존 한의학의 역사 전개 과정에서 최초로 독자적인 이론을 냈다는 것 정도에서 기인한다.
야사에는 환자들의 체질을 모를 경우 선호하는 음식을 알아보거나 같이 지내며 확인하는 일도 있다. 한 번은 천도교의 지도자와 만남을 가지게 되었고 체질을 몰라 고민하다가 장작더미를 옮겨보도록 하고 여러번 옮기게 한 뒤에야 비로소 소음인임을 파악하게 된다.
3. 대중매체에서
- 대체역사소설 한제국 건국사에서는 본래 무과에 급제했다는 점을 반영해 무인으로 신미전쟁에 참전한다. 현대에서 넘어간 민국인들은 이제마가 사상의학의 창시자라는 정도는 알고 있다 보니 이제마가 기침만 해도 "그러게 자네는 의원이 되어야 하는데..."라고 하고 이제마는 속으로 '민국인들은 다 좋은데 가끔 실없는 소리를 한다. 평생 무인되기를 꿈꾼 사람더러 의원이 되라니...'하며 살짝 투덜거린다. 서양 연합군에 착검 돌격을 벌여 지휘관 다수가 전사하는 격전 중에 어깨 부상을 입었으나 출혈이 다소 있을 뿐 생명에는 지장이 없어 운신 가능한 최선임 장교로 권철상에게 전투 결과를 보고했다.
- 1986년 KBS 드라마 선구자에서는 임혁이 주인공으로서 이제마 역을 맡았다.
- 1990년 MBC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 대원군에서는 남성훈이 이제마 역을 맡았다.
- 2002년 KBS 드라마 태양인 이제마에서는 최수종이 주인공으로서 이제마 역을 맡았다.
4. 관련 항목
[1] 야사에 따르면 함흥 작은 마을의 주막집 백치 딸과 이제마의 친부가 관계하여 낳은 걸로 나온다.[2] 사실 이성계의 고조부인 목조 이안사의 둘째아들 안원대군 이진의 후손이다. 같은 전주 이씨이기는 하지만 태조의 증조부 대부터 이미 갈려나와 사실상 일반 양반들과 다를게 없는 상황이었다. 조선은 대군의 4세손, 군의 3세손, 공주와 옹주와 결혼한 부마와 그 자녀들까지를 왕족으로 인정해 작위를 하사했으며 군-령-부령-정-도정-수-부수 같은 작위를 수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