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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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지금 나를 잡으려고 군대까지 동원하고 엄청난 돈을 쓰는데 나같은놈이 태어나지 않는 방법이 있다. 내가 초등학교때 선생님이 '너 착한놈이다' 하고 머리한번만 쓸어주었으면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것이다. 5학년때 선생님이 '새끼야 돈 안가져왔는데 뭐하러 학교와, 빨리 꺼져' 하고 소리쳤는데 그때부터 마음속에 악마가 생겼다.'''
신창원 907일의 고백 中
'''난 정말 평범한 사람들이 부럽다.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사는...'''
신창원의 일기장 中
'''저 같은 범죄자가 다시는 없게, 사회와 가정에서 문제아들에게 사랑을 주십시오.[1]
'''
1990년대 후반, '''탈옥 이후 907일 동안 잡히지 않아 대한민국을 뒤흔든 희대의 범죄자.''' 1967년 5월 28일생이다.'''안녕하세요? 편지 잘 받았습니다. 이틀 동안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만, 사형도 부족한 중죄를 지은 죄인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어요? 모두 자기 변명에 불과할 뿐이지요. 저는 그저 이곳에서 조용히 속죄하며 남은 생을 마무리하고 싶습니다. 신창원 드림.'''
2020년 10월 8일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방송에서 신창원이 보낸 편지 내용
2. 생애
2.1. 초기
4남 1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어린 신창원에게는 지독한 가난도 고통이었지만, 어머니가 간암으로 일찍 세상을 떠난 것이 견딜 수 없는 슬픔이었다. 아버지 역시 부인을 잃은 슬픔으로 도박과 술에 빠져 지냈지만 얼마 후 20대 후반~30대 초반 정도의 계모와 계모의 아들을 집에 들였다. 하지만 신창원의 동생이 아파서 신창원이 약을 사달라고 하자 계모는 신창원을 꾸짖고 막상 자신의 아들은 과일 등을 깎아주었다고 한다. 다음 날 신창원은 칼을 들고 학교 다녀오기 전까지 안 나가면 죽여버린다며 협박했고 계모는 돌아가신 친어머니의 패물을 모두 들고 도망갔다. 아버지는 평소에 엄한 성격이어서 신창원이 잘못을 저지르면 폭행을 했고 신창원은 아무 말 없이 며칠 나갔다 들어왔다고 한다. 계모가 나간 그날에도 폭행을 가했다.
그가 범죄자가 된 계기는 그의 저서에 남양국민학교 5학년 때 선생으로부터 '''"새끼야, 돈 안 가져왔는데 뭐하러 학교 와. 빨리 꺼져."'''라는 막말을 듣고 자신의 마음 속에서 악마가 태어났음을 느끼고 어둠을 품게 되었다고 한다.[2] 결국 학교생활에서도 학우들과 잘 어울리지도 못하였었고 재미를 붙이지 못했던 신창원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가출을 시작했었으며, 결국 중학교에 진학한 지 3달 만에 퇴학당했다. 21세기에 인권존중을 그나마 어느 정도는 받으며 초중등 교육을 마친 세대들이 보기에는 "세상에 그딴 막돼먹은 몹쓸 쓰레기 같은 교사들이 어딨냐?"라며 믿지 못하고 그냥 자신을 정당화하려는 거짓말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당시만 해도 만화 검정 고무신이나 소설 흰종이 수염에 나오는 것처럼 어디에 쓰이는지 알 수도 없는 이러한 잡다한 납입금[3] 을 안 냈다는 이유로 교장이나 교감 같은 높은 사람들이 아이들을 엄하게 가르쳐야 강하게 자란다는 핑계나 다름없는 명분을 내세워 담임들에게 돈을 안 가지고 온 아이들을 때리라고 지시하거나 담임들이 교실 앞에 불러세워 놓고, 다른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안 내면 졸업 못한다' 식으로 으름장을 놓은 온건한 타입부터 두들겨 패고 모욕감을 주거나 심지어 수업받을 자격이 없다며 교실에서 내쫓는 썩어빠진 부패한 교사들이 '''분명히 있었고 심지어 많았다.''' 인권의식 및 시민의식이 낮았던 당시 시대 분위기도 한몫했다.[4]
2.2. 범죄자의 길
불우했던 가정환경 속에서의 아버지의 폭력과 초등학교 5학년때 선생님의 막말로 인한 마음의 상처는 신창원이 범죄의 유혹에 쉽게 빠져들게 만들었으며, 어려운 살림살이 때문에 남의 밭과 가게에서 먹을 것을 훔쳐 먹고 동네에서 닭, 수박 서리를 하기 시작한 게 도둑 인생의 시작이었다. 그는 달리기가 빨라 도망치면 아무도 못 잡았다고 동네 사람들이 전한다. 또한 무작정 멀리 달아나는 것이 아니라, 가까운 나무 위에 올라가 숨어서 추적자의 동향을 살피곤 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경찰서에 끌려간 것이 14살 때였다. 어느 날 좀도둑질을 하게 되었는데, 그래도 이때까지는 신창원을 범죄자의 구렁텅이에서 건져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신창원의 아버지는 '''아들의 버르장머리를 고친답시고, 경찰관들도 훈방 조치한 신창원을 굳이 다시 끌고 와서 소년원에 넣어달라고 사정을 하여 잡아넣었다.''' 아버지의 의도는 정말 좋은 뜻이었는지 어떤지 몰라도[5][6] , 이 때문에 신창원의 인생은 망가졌다. 소년원을 다녀온 일을 계기로 감옥에 한 번씩 갔다 올 때마다 그의 범죄는 나날이 대담해졌으며, 결국에는 강력 범죄까지 저지르게 되었다.[7][8]
신창원은 어릴 때부터 싸움을 잘 했다. 패배를 인정하기 싫어했고, 원하는 것은 반드시 손에 넣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권투를 배워 걸핏하면 남의 싸움에 끼어들었다. 그러다 한 번은 사람을 크게 다치게 한 일이 있었는데, 합의금으로 줄 돈이 없어 후배들과 함께 돈 좀 있어 보이는 행인을 협박해 돈을 털기도 했다.
이후 서울에서 고향 선후배 4명과 모의해 슈퍼마켓과 금은방 등에서 강도 행각을 벌이다 1989년 3월 28일에 주범인 김양훈이 문구점을 운영하는 피해자를 살해하게 된다. 다른 일당 4명은 4월 1일에 체포됐지만, 신창원은 총상을 입고 도주에 성공했고 반 년 뒤에 체포되었다.
이후 강도살인치사죄로 무기징역을 받고, 경북북부제2교도소에서 복역한다.
2.3. 탈옥 사건
이후 1994년 부산교도소로 이감되어 복역하다 1997년 1월 탈옥을 저질렀다. 노역 작업 도중 손에 넣은 작은 실톱날 조각으로 하루 20분씩 무려 2개월간[9] 들키지 않도록 화장실 쇠창살을 몰래 조금씩 그어 마침내 지름 1.5cm의 쇠창살 2개를 끊었고, 감방을 빠져나와서 외벽 환기통을 타고 1층으로 내려왔다. 끊은 쇠창살로 20m 가량 떨어진 교도소 내 교회 신축공사장 철담장 밑의 언 땅을 폭 53cm 깊이 20cm 가량 파내어 공사장으로 들어간 후, 공사장에서 주운 밧줄을 타고 외부로 통하는 공사장 펜스를 넘어 교도소를 빠져나갔다.
빠져나가는 데에는 1시간 30여분 밖에 걸리지 않았는데, 사전에 동료 죄수들을 포섭했다거나 심지어 교도소의 묵인이 있었던 것 아니냐는 설이 제기될 정도로 신출귀몰한 탈출이었다. 이 탈옥을 위해 좁은 곳을 지나가기 쉽도록 15kg을 감량하였고, 신뢰를 쌓아 감시를 줄이기 위해 오랜기간 모범수로 지냈다고 한다. 교도소를 빠져 나간 신창원은 500m 떨어진 화훼 농가로 침입하여 옷을 훔쳐 입고 자전거를 훔쳐 4km를 달려 구포사거리까지 간 뒤, 택시를 타고 서울로 잠입했다.
그 뒤 2년 6개월간 4만여km 의 거리의 도주를 계속하였으며, 도주를 다니는 동안 빈집들을 털며 훔친 현금으로 생활했고 이동 수단도 훔친 차를 이용했다. 그렇게 도망다니는 동안 잡힐 듯 하면서도 체포 직전에 경찰관들 추격을 따돌린 것만 무려 6번이었다. 연 인원 97만 여명이 동원되었고, 전국 6개 지역 지방 경찰청에 수사 본부가 설치되는 등 거의 전국을 돌아다니며 도주 행각을 벌였다. 그 중 유독 천안시 근처에 자주 출몰했기 때문에 천안 시내 이곳저곳 마다 경찰 병력이 배치되고 차량 검문이 실시되었으며 천안 시민들이 공포에 떨어야 했다. 천안 이외에도 지나간 곳이 많아 곳곳마다 해당 지역 경찰서 높으신 분들의 '''목이 날아갔다.''' 당시 신창원 검거 실패로 징계 받은 경찰관들은 29명, 총경 이상만 10명이었다고 한다. 심지어 당시 복무하던 전의경과 경교대원들에게도 악몽으로 기억되었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화성 연쇄살인 사건과 마찬가지로 경찰관의 진급 정체를 해소하는 혁혁한 공을 세웠다는 말을 듣기도 한다.[10] 또한 이 때 진급한 김석기 등이 나중에 서울지방경찰청장까지 승진하게 된다.[11]
이리하여 신창원은 방송을 타며 전국구 급으로 이름이 알려지게 되면서, 현상금이 1,000만원에서 5,000만원이 넘어갔다. 이는 당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래 사상 최고액 현상금으로, 2011년까지 매 년마다 산불을 일으킨 방화범 일명 '봉대산 불다람쥐'에 현상금 3억원이 걸릴 때까지 경신되지 않았다. 그리고 2014년, 유병언이 현상금 '''5억원'''으로 기록을 다시 깬다.
1999년 당시 5,000만원은 단순 소비자물가지수 가치환산으로도 2018년 기준 약 8,000만원이며, 최저임금으로 산정해보면 1999년 최저임금은 시급 1,600원이므로 시급 7,530원인 2018년에는 약 2억 3,500만원이고, 당시 대치 은마아파트 35평이 1억 5천만원에 매매되던 시절이니 엄청나게 큰 현상금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별의 별 천태만상들이 나왔는데, 신창원이 나타난다는 사전 정보를 입수하고도 저 혼자 공 세우려고 단독으로 검거를 시도하다 실패하고 징계를 받은 형사가 있는가 하면[12] , 잠복근무를 하던 형사가 신창원 동거녀를 성폭행하여 결국 파면되고 구속되지 않나[13] , 신창원 관련한 신고를 받고 천신만고 끝에 검거했는데 알고 보니 신창원을 사칭한 강도범인 경우도 있었다. 가장 압권은 시민의 신고로 검거된 상태에서 경찰관의 부주의로 놓친 일이 있었는데, 이걸 가지고 현상금 못 주겠다고 경찰 측에서 땡깡을 부려, 신고자가 소송을 내고 대법원까지 끌고 가면서 5,000만원을 다 받아냈다. 이리하여 신창원 현상금은 2번 지급되었다.
거기에 신창원은 경찰관의 발터 PP에 맞았는데도 기어코 도망을 가고, 경찰관과의 격투 중 부러진 뼈를 혼자 맞추기도 했다. 추격이 심할 땐 쥐를 잡아먹으면서 박스 안에서 일주일 넘게 은신하기도 했다.
여담이지만 그는 문신이 있다. 아무리 별의 별 변장을 해도 문신을 지울 수 없기 때문에 그는 문신을 가리기 위해 한여름에도 긴팔 티셔츠를 입고 자주 활보했다고 한다. 이는 그의 결정적 단서를 확보하는데 쓰인다.
일례로 신창원은 돈을 훔치기 위해 한 집에 들어갔다가 해당 집에 주거중인 여성과 마주쳐서 강간을 저질렀다. 신창원은 강간혐의만은 적극 부인했으나 피해여성이 신창원의 몸에 있는 사슴문신, 성기에 박힌 구슬 등 신창원임을 특정할 수 있는 증언을 하여 강간이 인정되었다. 당시 신문 기사
신창원 곁에는 늘 여자가 있었다. 검거당시 신창원은 전북 익산시 은하수카페 종업원 김모 양과 동거하며 결혼을 약속했다. 6월 29일 김 양은 전남 순천시에 내려가 대주파크빌을 계약하고 다음날부터 곧장 살림을 시작했다. 신창원은 이 때 김 양에게 돈다발을 보여주다가 갑자기 "나를 배신하지 말라"고 위협하는 등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7월 16일 신창원이 검거되자, 김 양은 이러한 사정을 털어놓으며 "아파트는 내 이름으로 계약했으니 빼앗지 말아달라."라고 경찰관에게 사정했다. 김 양에게 중요한 것은 신창원과의 사랑이 아니라 돈이었던 것이다. 결국, 신창원은 자신을 숨겨줄 여자가 필요했고 여자는 돈이 필요해서 이해관계가 떨어진 것이 '신창원의 여복'이었던 셈이다. 물론 신창원도 여자들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도피처로 이용했던 것이기에[14] 서로 각자의 이익을 위한 필요관계에 불과했던 것.
2.4. 검거
1999년 7월 16일 전라남도 순천시 금당 대주아파트 104동 205호에서 가스레인지 수리공인 김 모씨는 당시 우연히 의뢰 받은 집을 수리하다가 신창원을 보았는데, 신창원인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 다시 그 집으로 들어가 남자의 얼굴을 확인했으며, 경찰서에 신고 후 심지어 부동산에 들어가서 그 집이 여자의 명의로 된 건지 확인까지 했다고 한다. 또한 이 과정에서 집을 계약한 다음날 바로 입주했다는 것을 알고 신창원임을 확신했다고 한다. 대개 이사하려면 계약하고 며칠 뒤 돈을 주고 들어오는 게 보통이기 때문. 신창원을 발견하고 신고한 수리공은 '''군정보부대 특수정보 부서에서 복무한 적이 있던 전직 하사로,''' 이 공로를 인정받아 현상금을 받았다. 또한, 본인의 의지를 받아들인 경찰청장이 '''그를 경찰관으로 특채하였으며''', 현재까지도 근무중이다. 더불어 김 씨는 꿈이 경찰관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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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검거될 당시 입었던 미쏘니 니트 셔츠가 화제가 되어 한때 저 딱 달라붙는 티셔츠가 '신창원 티셔츠' 라며 유행하기도 했다.[15] 검거된 뒤 징역 22년 6개월이 추가되었고 그는 흉악범을 가둬두는 청송교도소의 2.6m2의 독방에 수감되었다.
2.5. 재수감 이후
청송교도소에서 수감생활을 하던 신창원은 공부를 시작해 2004년 고입, 대입 검정고시에 연이어 합격해 세상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탈옥 사건 이후로는 모범수로 지내고 있는 모양이다. 한때 개신교를 믿은 적이 있었으나, 개신교 측의 문제로 냉담자가 된 듯 하다.
2010년 6월에 강력범을 수감하는 청송 2교도소에서 일반 교도소인 제1교도소로 이감되었다고 하며, 상담사 자격증을 목표로 감옥 내에서 향학열을 불태우고 있다고 한다. 2011년 시점으로 검정고시에 합격하고, 학사학위를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그가 감옥에서 주고 받은 편지들을 보면 매우 논리적이고 지적인 문장과 내용이 인상적이다. 법을 공부해서 국가와 교도소장을 상대로 4건의 소송을 제기했는데 승소했다.
2011년 8월 18일 감방에서 목을 매어 자살을 시도했다. 시도 이유는 1달 전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에 영향을 받은 듯 하다고 한다. 신창원은 복역 초기엔 자신에게 신경쓰지 않는 아버지에게 불만이 많았으나 다시 감옥에 들어간 뒤로 '''그를 찾아온 건 아버지 뿐'''이었다고 한다. 신창원은 극심한 저산소증으로 상당히 위중했으나 얼마 후 의식을 회복했고 생명에 지장이 없다는 보도가 이어졌지만, 늦게 발견된 탓에 뇌손상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그런데 2011년 8월 22일, 그가 지난 1월에 한국의 교도소 행정에 대해 강한 불만을 드러낸 편지를 문성호 자치경찰연구소장에게 보냈다는 기사가 실렸다.관련 뉴스 문 소장은 이 때문인지, 아버지의 죽음보다 장기수에 대한 절망적인 수용 실태 때문으로 짐작한다고 말했다.신창원의 편지
2.6. 추가 형량에 대한 평가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은 그간 있었던 유영철, 강호순, 정남규, 정두영, 조두순, 김성수, 고유정 등 온갖 흉악범들이 등장하면서, 최근 들어서 신창원 탈옥 사건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 선두 주자는 다름아닌 표창원[16] 으로 그의 요지는 한 마디로 '''"신창원이 잘못한 건 맞는데 법원이 처벌을 그렇게 감정적으로 하면 되나? 그 조두순도 12년 형밖에 못받았는데 도망 좀 잘 쳤다는 이유로 22년 6개월 증형이 타당한가."'''로 정리할 수 있다. 신창원이 도망을 잘 친 건 무능한 경찰관들이 반성할 일인데도 그들이 반성하는 대신[17] 신창원에게 엄벌을 한다는 것은 '도망을 잘 친 네가 나빠'라며 괘씸죄로 책임을 전가하는 꼴 아니냐는 의견이다.
게다가 위에서도 전술했듯, 탈옥 사건 이후로도 수감 생활 도중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학업에 정진하면서 세상을 더욱 놀라게 했다는 점을 보면 모범적으로 수감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에서 언급한 범죄자들과는 달리 신창원에게 더더욱 동정과 안타깝다는 의견들이 대다수이며, 신창원의 유년 시절 어른들의 따뜻한 보살핌이 있었으면 신창원의 삶이 달라졌을 거라는 의견들과 심지어는 가석방으로 풀어주면서 사회에 봉사할수 있는 기회를 주었으면 좋겠다는 일부 의견도 있다.
다만 비판론자들은 밀레니엄을 전후한 시대와 2010년대의 시대 상이 다르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다. 그 당시에는 2010년대보다 형량을 가혹하게 선고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이걸 2010년대 시각에서 평한다는 건 무리한 처사다. 당시 신문 기사를 봐도 강도 사실이 밝혀지면 최대 사형에 아니면 징역 22년 6월 수준으로 나올 것으로 예상했다. 실제로 사형을 구형받기도 했고...
결정적으로 '''어차피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사람'''인지라 사형당하는 거 아니면[18] 추가 형량을 얼마나 선고하든 실질적으로 유의미한 것도 아니다.
3. 기타
- 박인권이 신창원을 미화할 여부가 있는 만화를 그려서 논란이 되었다. 다만 이것은 서로 다른 관점에서 보면 미화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박인권이 그린 신창원 만화는 여론에서 단순하게 일색하는 탈주범의 이미지가 아니라 그의 유년기 시절부터 검거되기 직전까지의 그의 인생을 자세하게 그려놓았다. 만화에는 신창원을 홀대하는 아버지와 계모, 돈이 없어 방황하는 그의 성장기가 담겨져 있고 독자들은 그의 범죄행위가 단순히 그의 잘못만이 아닌 환경과 주변 사람들의 잘못도 있다는 동정심을 유발시킨다. 더욱이 아무리 악인을 소재로 한다 하더라도 작품의 주인공은 주인공 보정이라는 특수한 요소가 들어갈 수 밖에 없다. 아마 박 작가 본인도 신창원의 범죄행위를 적나라하게 그렸다고 할지라도 만화 중간마다 빠지지 않는 그의 인간적인, 사람을 동정하고 인간미를 좋아하는 모습을 단순하게 신창원을 위한 변명거리로 그리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박인권은 만화 속 문구에 "신창원은 결국 범죄자이고 그는 검거돼야 할 사람이다"라고 굳게 명시하고 있다. 이런 문구의 의미는 범죄자는 결국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하고 다른 이유로 면죄부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겠다. 결국 정리하자면 만화 자체가 어느 정도 동정심을 유발할 수 있으나, 그것은 만화가 그의 인생을 자세하게 담으면서 그의 어려웠던 환경이 있었음을 불가피하게 보여줄 수 밖에 없었고, 이것을 범죄자를 미화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조금 억측일 듯하다.
- 신창원이 기부를 했다는 소식이 알려지고 부자들만 턴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신창원에게 우호적인 혹은 대리 만족을 요구하는 여론이 신창원 신드롬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래서 당시 반항기 가득한 사춘기 청소년을 비롯해서 젊은층 사이에 신창원을 응원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신창원이 체포될 당시 입었던 옷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래서 당시 전문가들이 방송에서 이것을 사회 병리 현상이라고 진단하기도 했다. 다만 신창원이 기부에 쓴 돈은 극히 일부며, 절도한 돈은 대부분 도주 비용과 동거녀와의 살림에 썼다.
- 애아빠가 될 뻔했다고 한다. 한 내연녀와 사이에서 아이를 갖게 되자 태어날 때 까지 잘 보살피자고 약속을 했는데 신창원이 도망을 가버렸고 내연녀는 혼자 아이를 기를 자신이 없어 낙태했다고 한다. 신창원은 이에 죄책감을 느꼈던지 도주 중에 쓴 일기장에서도 '나 살자고 여자와 자식을 버린 놈'이라며 자책하고 있다.
- 본의 아니게 신창원과 이름이 똑같은 동명이인들이 피해를 입기도 했다. 실제로 법원에 소송해서 개명하는 동명이인도 있을 정도였다.
- 막장사고 갤러리가 한창 리즈 시절이었을 때 난데없이 신창원의 이름을 네이버 검색 순위 1위로 올려놓는 검색 순위 조작을 한 적이 있다. 이는 전국구급 낚시로 사람들은 당시 신창원이 또 뭔가 저질렀나 의아해했다고 한다.
- 탈옥이 이슈가 되었을 때 스타크래프트/유즈맵이 존재했었는데, 이를 가지고 지상파 뉴스(KBS? SBS?)에서 신창원 찬양하는 게임이 돌아다닌다고 비난했다. 다만 맵이 돌아가는 게임의 명사는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그냥 '신창원 탈옥게임'으로 보도했다.
- 신창원 탈옥이 사회 이슈이던 당시 신창원과 이름이 같은 신창원역이 소소한 화젯거리가 되기도 했다.
- 부산 성지곡동물원에서 1997년 12월 일본원숭이들 15마리가 집단으로 탈출하는 사태가 발생했는데, 대부분은 곧바로 붙잡아서 동물원으로 돌아갔지만 '치타'라는 이름의 1마리는 1년 2개월 동안 부산 전역의 주택가를 배회하면서 개밥을 훔쳐먹고 지능이 높은 동물답게 묶여있는 개를 목줄 범위 바깥에서 구타하거나 만만한 여자, 노약자, 어린이만 골라 괴롭히면서 온갖 말썽을 일으켰다. 당연히 경찰 인력이 투입돼 잡으러 다녔지만 얼마나 도망을 잘 쳤는지 당시 유명하던 범죄자 신창원의 이름을 따서 '신창원 원숭이'라는 별명까지 얻었을 정도였다. 이 원숭이는 1999년 2월이 되어서야 간신히 포획할 수 있었다. 동물원 측은 이 녀석이 일으킨 문제로 피해를 당한 사람들이 따지러 오는 통에 보상하느라 미칠 지경이었기에 잡은 뒤로 동물농장에서 취재하니 엄중히 가둬서 다시는 못 나가게 한다고 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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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대 와서 근황 사진을 보면 이제 나이 50이 넘으면서 탈모로 머리카락이 많이 빠져 있다.
- 범죄자라 그렇지 실제로 보면 호감형 외모다. 실제로 그를 옹호하는 여론이 많이 생긴 이유 중 하나가 이 때문이다.
- 2020년 10월 8일에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 신창원의 근황이 공개되었다. 이 방송을 통해 아직까지도 심리학을 공부함과 동시에 같은 재소자들의 심리 상담을 해주고 있다는 등의 근황을 전하면서 신창원의 자필 편지가 공개됐는데, "중죄인으로서, 교도소 안에서 조용히 살다가 가겠다."라는 요지의 말을 남겼다.
- 스티븐 러셀과 유사한 격이다. 공통점이라면 어릴 때부터 인생이 좋지 않았고 교도소에서 탈옥했으며 스티븐 러셀은 교도소 들락거리면서 도망자 생활하면서 사기쳤으나 신창원은 탈옥만 했지 범죄현장에서 동조를 했을 뿐이다.
4. 같이보기
[1] 1999년 탈옥 후 재검거 당시 한 말들. 당시 10대 청소년들이 그를 우상으로 받든다는 사실을 안 이후 한 말이다.[2] 큰 상처를 받고 심한 모욕감과 반항심을 느껴 삐뚤어진 것이다. 마음의 상처를 많이 받으면 성격이 거칠어지고 부정적이게 되는 경우가 많다.[3] 1952년부터 초등학교는 의무교육이었으므로, 신창원보다 훨씬 윗 세대들도 초등학교 때는 학비를 내지는 않았으나, 90년대까지 학교 자체적으로 육성회비, 운영회비, 어머니회비 등의 온갖 명목을 만들어 소액이나마 강제로 걷는 금액이 존재했다. 이런 것들은 1996년 정부가 육성회비를 공식적으로 폐지하면서 사라졌으며, 공식적인 폐지 이후에도 지금 기준으론 꽤나 과도한 스승의 날 선물 관행 등으로 잔존하기도 했다.[4] 현재 이런 행위들은 가난한 개도국들에서 일어나고 있다.[5] 말이 그렇다는 거지, 가정폭력이나 하는 인간이 진짜 좋은 의도로 그랬을 리가 없다. 문제가정의 부모들이 하는 '버르장머리'는 좋은 습관을 들인다는 게 아닌, "나를 귀찮게 하지 않게, 혹은 나한테 개기지 않게 버르장머리를 고쳐놓는다"는 의미가 많다. 또한 신창원의 아버지가 그를 귀찮아한 점을 미루어보아, 단순히 자신의 편의를 위해 소년원에 수감시켰을 가능성도 있다.[6] 가사소송법에는 이런 의도를 충족하기 위한 법적 절차인 '감화 또는 교정기관 위탁허가' 사건이 있다. 1960년대 당시 인사(人事)소송법 및 가사심판법에는 이와 같은 규정이 없었다.[7] 이러한 현상을 잘 설명하는 이론으로 미국의 범죄학자 서덜랜드가 제시한 '차별적 접촉이론'이 있다. 감옥에서 다른 범죄자들과 접촉하면서 그들로부터 범죄 기술뿐만 아니라 범죄에 대한 우호적인 태도 또한 학습된다는 이론이다. 그러므로 엄벌주의는 당장은 속시원할지 몰라도 장기적으로 보면 재범률을 크게 높인다. 검사들이 기소유예, 법관들이 집행유예를 하는 이유도 그들이 공감능력이 없는 사이코패스라서가 아니라, 실무를 하면서 '징역은 최후 수단이어야 한다'는 점을 깨달았기 때문이다.(교도소 수용력 등의 현실적인 이유도 있다.) 하지만 일반인들은 범죄자들을 처벌하는 것에만 관심있지 그들이 출소한 이후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여론과 판결과의 괴리가 발생하는 것이다.[8] 실제로 흉악범들이나 혹은 흉악범까진 아니더라도 죄질이 절도보다 높은 범죄자들 대부분은 생애 첫 범죄가 절도죄이다. 절도죄가 흉악범이 되는 첫 단추이며, 흉악범까진 아니더라도 더 강력한 범죄를 저지르게되는 첫 단추이기도 하다.[9] 이 당시에 법무부 교정본부에서 ‘보라미방송’을 매일 두 시간 정도 전국 교정시설에 송출했는데, 톱질을 하면서 소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매일 방송하는 시간에 변비라고 하며 화장실에서 20분간 톱질을 한 것이다.[10] 이때당시 '신출경몰' 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였는데, 신창원이 출몰하면 경찰이 몰락한다 라는 우스갯소리가 등장했었다.[11] 이 분은 10년 후 용산 참사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임했으며 현재는 경주시 국회의원으로 재직중이다.[12] 다만 이 형사는 후에 동료들의 탄원으로 복직한다[13] 신창원이 도주 중일 때 쓴 일기장에 언급되면서 알려졌다. 당시 형사는 "더 이상 신창원을 수사하지 않고 사건을 종결하겠다"고 거짓말을 하여 동거녀를 성폭행했고, 후에 동거녀가 울면서 신창원에게 고백했다고 한다. 해당 사건은 2000년 DJ DOC 노래 <포조리> 가사에서도 짧게 언급되었다.[14] 도주 중 쓴 일기장에서 이를 고백했다.[15] 이후 신정아, 최순실, 조주빈이 입은 옷도 나름 블레임 룩으로 유행을 탔다.[16] 공교롭게도 신창원과 어릴 적 자라온 환경이 비슷하고 이름도 똑같이 '창원'인데다가 나이도 겨우 1살 차이지만, '''표창원은 그 때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이 있었기에 경찰관이 되고, 신창원은 그렇지 않았기에 범죄자가 되었다'''고 말한다.[17] 알다시피 신창원 도주 중 처벌 받은 경찰관들은 30명도 넘었지만 정작 그가 검거되고 난 후 경찰관들의 무능함에 대한 자성 및 시스템적 개선은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그냥 자축하고는 끝. 심지어 검거 과정도 위에 쓰여진대로 시민 제보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 경찰 수사를 기반으로 잡은것도 아니다.[18] 게다가 국민의 정부 이후에는 사형을 집행하지도 않았으므로 '''사형 선고조차도 의미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