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실리 스탈린
1921년 3월 21일 ~ 1962년 3월 19일(만 40세)
Василий Сталин
소련군 공군의 장군. 이오시프 스탈린의 둘째 아들로 본명은 바실리 주가시빌리다. 이는 이복형인 야코프 주가시빌리도 마찬가지.
스탈린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각종 망나니짓을 하다 아버지의 사후 개털이 돼서 비참하게 죽은 인물이다.
1921년, 스탈린과 스탈린의 둘째 아내인 나데즈다 알릴루예바 사이에서 태어났다. 스탈린의 고향인 조지아의 그루지야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복형 야코프 주가시빌리와 달리 바실리 스탈린은 러시아에서 태어나고 자랐기 때문에 자신을 러시아인으로 생각했다.
스탈린은 아들 바실리를 상당히 아꼈는데 라리사 바실리에바의《크레믈린 여인들》에 따르면 부하린이 어느 때 스탈린을 만나러 갔을때 스탈린은 갓난아기였던 바실리의 얼굴에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아기가 콜록거리며 우는 걸 보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고 한다. "아, 괜찮아. 애한테 좋은 일이라구. 연기를 뿜어주면 이 놈이 강해진단 말이오!"라고 했다.[1] 나데즈다가 쓴 편지에서도 이것이 사실로 확인되는데 나데즈다는 1922년, 시어머니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다.
바실리 스탈린은 말을 듣지 않고 함부로 굴어 나데즈다를 힘들게 했고 공부 대신에 축구하기를 즐겼다.
1935년 4월 22일, 아버지 스탈린, 여동생 스베틀라나와 함께 모스크바 지하철 개통을 기념하여 모스크바 지하철에 탑승했는데 엄청난 숫자의 군중이 몰려와 환호하는 대소동이 벌어졌고 바실리는 매우 겁을 먹었다고 한다. 지하철 시승이 끝난 후 집에 돌아온 바실리는 침대 위에서 발작하듯이 울부짖었다는데 아버지의 엄청난 위상을 몸으로 겪은 탓일까, 이후 그는 아버지의 권력을 믿고 차차 안하무인으로 굴기 시작한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바실리 주가시빌리라는 기존 이름에서 아버지인 스탈린의 성을 따서 바실리 스탈린이라 칭했고 이 때문에 스탈린은 바실리를 불러서 "넌 스탈린이 아니고 나도 스탈린이 아니야. 스탈린은 소련 권력이야!"라고 질책했지만 바실리는 귓등으로도 안들었다.
어머니인 나데즈다 알릴루예바가 자살한 후 스탈린 일가는 크렘린의 새 관저로 이사했다. 스탈린은 아내의 죽음 이후 충격을 받아 가족들에게 좀 더 관심을 기울였는데 바실리는 아버지를 믿고 날뛰기 시작했다. 1935년, 주발로브 다차 관리인은 스탈린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1938년, 참다못한 학교 측이 스탈린에게 바실리가 학교 당국으로부터 특별대우를 받고 있으며 자살위협을 통해 원하는 것을 얻어낸다고 보고했다. 스탈린은 솔직히 보고한 학교 측에 감사를 표하며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바실리는 이후 크림 반도의 항공군사학교에 입학했고, 여전히 교관들로부터 특별대우를 받으며 으스댔다. 일개 생도에 불과한 바실리는 이동하면서 언제나 학교 관리자들의 화려한 영접식을 받았고 숙소가 아니라 호텔에서 머물렀으며 장교 식당에서 특식을 먹곤 했다. 바실리는 몹시 으스대며 일부러 장교 식당에서 할 수 없는 음식을 주문하여 요리사들을 골탕먹이기도 했고 이 때문에 당황한 요리사들이 시내로 나가 요리를 공수해야 할 정도였다. 여기에 오토바이나 자동차를 타고 크림 반도를 자기 정원처럼 마구 누비면서 폭주족 놀이까지 했다.
이딴 짓이나 하고 있으니 성적이 제대로 나올 리도 없었고 평균적인 기간에 비해 굉장히 늦게 졸업해서 스탈린이 바실리를 불러서 야단치기도 했지만 바실리는 그러는 아버지는 사관학교 졸업장이 있냐고 빈정대는 등 오로지 스탈린의 아들이라서 가능한 망나니짓만 골라서 했다.
이후 1940년 학교를 졸업하여 공군 중위로 임관[3] 하였다.
1941년, 대위로 승진하였을 때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스탈린의 장남 야코프 주가시빌리가 육군 포병 대위로 최전선에 달려간 반면 바실리는 모스크바에 주둔하며 스탈린의 다차에서 흥청망청 파티를 벌이며 소일을 보냈다. 그럼에도 스탈린의 아들이란 이유로 승진을 거듭했고 지상공격기 IL-2를 타고 26번 출격한 공로로 1943년 공군 대령으로 승진하여 비행 연대장을 맡았다.
1941년 7월 야코프 주가시빌리는 최전선에서 대위로 싸우다 나치 독일에 붙잡혔고[4] 스탈린은 전시수상으로서 아들의 구조를 포기했다. 이후 야코프 주가시빌리는 1943년 수용소에서 사망한다. 의젓했던 아들의 죽음에 스탈린은 상당히 슬퍼했다고 전해진다.
1943년 4월, 부하들과 낚시를 나가서 '''폭탄을 이용해서 낚시를 하려다가'''[5] 실수로 장교 한 사람이 사망하고 바실리 자신도 부상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스탈린은 노발대발했고 크렘린 병원에서 치료받던 바실리에게 국방 인민위원 명의로 징계를 내렸다.
하지만 아버지가 자신을 정말로 혼내진 않을 것이라 믿던 바실리의 방종한 행동은 끝을 몰랐다. 바실리는 계속 승진을 거듭했고 1945년 즈음에는 24세의 나이로 공군 중장까지 승진했다. 바실리는 거듭된 방탕한 파티 때문에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으며 알코올 중독으로 얻은 만성질환으로 인하여 건강이 크게 악화되어 계속 골골댔고 스탈린은 그런 아들의 모습에 실망을 금치 못했다. 공군 내부에서도 바실리의 추태에 분노를 감추지 못할 정도였다.
독소전쟁 승리 후 동독에 파견되었다가 1947년 귀국하여 모스크바 군관구 공군 사령관에 임명되었지만 알코올 중독으로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자신에게 아첨하는 패거리들을 몰고 다니면서 온갖 사치를 부렸다. 그가 자기가 원하는 사람에겐 얼마든지 금일봉을 내리거나 감옥에 보낼 수 있었으므로 스탈린의 경호실장 니콜라이 블라시크마저도 바실리에게 아첨하였다.
하지만 문제는 바실리가 도를 넘어선 행동을 했는데 1952년 5월 1일, 바실리는 나쁜 기상 상태 때문에 비행을 금한다는 사령부의 명령을 무시하고 위험천만한 에어쇼를 지시했다. 전투기 몇 대가 역사박물관 첨탐 사이를 통과하여 붉은 광장 위를 날아다녔는데 이는 스탈린의 명령을 무시한 것이었으므로 격노한 스탈린은 바실리를 해임시켰다.
그럼에도 정신 차리지 못하고 술과 방탕한 생활을 하는 아들을 보다못한 스탈린은 바실리를 불러 자신은 70세가 넘었지만 여전히 공부하고 있다면서 그를 참모본부 부속대학 청강생으로 집어넣어 공부를 시켰지만 바실리는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여전히 폭음과 난봉꾼 짓에 정신이 없었다. 이 시점에서 바실리는 지나친 폭음으로 건강까지 나빠져 생명이 위태로운 수준이었다.
그러다가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하자 바실리는 공포에 질려서 의사들과 정치국원들에게 아버지를 죽였다고 미친 듯이 비난을 퍼부으며 날뛰었다. 국방장관 니콜라이 불가닌이 바실리를 호출하여 지방 군관구 공군사령관직을 제안하자 바실리는 모스크바 군관구 사령관 자리가 아니면 가지 않겠다고 버텼다. 이에 분노한 불가닌이 "군대에 적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건가?"라고 질책하자 바실리는 인정하지 못한다고 소리를 질렀고 불가닌도 더는 참을수 없어 그 자리에서 바실리의 계급장을 떼버렸다.
그렇게 31세의 나이로 퇴역 장군이 된 바실리는 별장에 틀어박혀 술독에 빠져 살았고 아내를 계속 갈아치웠다. 바실리는 인사불성이 되어 길거리에서 아무나하고 술을 마시고 그걸 기억 못하는 폐인의 삶을 살았고 결국 어느 외국인과 술을 마셨다가 부하들의 고발로 1953년 4월 28일 체포되었다.
군사법원은 투기, 공금유용, 직권남용, 부하에 대한 폭력행위, 군 내부의 음모 혐의로 바실리를 기소했고 바실리는 노비코프 장군 등을 음해하여 투옥시킨 혐의가 인정되어 8년형을 선고받았다. 자신이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란 것을 인정하지 못한 바실리는 정부에 협박 편지를 보내며 날뛰었다.
서기장인 니키타 흐루쇼프는 오히려 그런 바실리를 불쌍하게 여긴 1954년에 그를 병원에 보내 추후에 석방시키려 했으나 바실리는 오히려 병원에서도 패거리를 몰고 다니면서 갖은 행패를 부렸다. 그래서 흐루쇼프는 1955년 즈음에 바실리를 석방한다는 계획을 포기하고 그를 그대로 교도소에 처넣었다. 바실리는 스탈린의 측근들에게 편지를 쓰며 석방을 탄원했고 마오쩌둥이 자신을 도울 것이라는 망상에 사로잡혔다.
1960년 1월, 흐루쇼프는 바실리를 불러서 1시간 동안 대화를 나눈 후 석방하여 프룬제 강변 거리의 아파트와 주코프카의 별장 및 장군 연금, 자동차, 당원증, 무공훈장 등을 모두 돌려주었다. 하지만 바실리는 정신을 차리기는커녕 다시 패거리들을 모아 설쳐댔고 바실리의 자녀들도 보다못해서 아버지에게 정신 차리라고 설득했지만 바실리는 어린 것들이 주제넘게 나선다고 전혀 들으려 하지 않았다.
결국 4월에 바실리는 키스로보츠크에 강제로 요양을 떠나게 되었다가 그대로 레폴타 교도소에 투옥되었다.
군사법원은 바실리에게 8년의 형기를 도로 채울 것을 선고했지만 망가질 대로 망가진 바실리의 몸이 그것을 견디지 못했다. 1961년 봄, 바실리는 간장병, 위장병, 영양실조 등 각종 만성질환으로 인하여 가석방되었다. 그는 이미 밥 대신에 보드카로 연명할 정도로 몸이 망가져 있었다. 모스크바와 그루지야에서 거주하는 것을 금지하는 조건으로 석방된 바실리는 마샤라는 간호사와 함께 카잔으로 이주해서, 한 칸짜리 아파트에서 거주했는데 여기서도 여전히 술에 찌들어 살았다. 잦은 음주로 인해 말년에 찍은 바실리 사진을 보면 머리가 벗겨지고 주름이 깊게 생기는 등 급격하게 노화가 와서 마흔살에 죽었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사람이 망가졌다.
1962년 3월, 어느 그루지야인과 밤새도록 술을 마셔댄 바실리는 의식불명이 되어 일주일 동안 쓰러져 있다가 3월 19일 사망했다. 부검 결과 그의 내장은 알코올 중독으로 망가질 대로 망가져 있었다. 그의 자식들과 세 번째 아내 카피토리나, 네 번째 아내 마샤가 참석한 가운데 조촐한 장례식이 거행되었고 바실리는 카잔에 매장되었다.
바실리 스탈린의 아들인 알렉산드르는, 고모가 그랬듯 스탈린 성씨를 버리고 어머니의 성씨인 부르돈스카야(Burdonskaya)를 따라 알렉산드르 부르돈스키로 살았다. 알렉산드르는 2017년에 죽었다.
[image]
스탈린의 죽음을 다룬 블랙코미디 영화 <스탈린이 죽었다!>에서는 루퍼트 프렌드가 분했다. 자신의 실수로 소련의 하키 국가대표팀을 몰살시키고 그 스트레스를 함량 미달의 새로운 국가대표팀을 마구 갈구는 막장 모습으로 등장한다. 스탈린이 죽은 후에야 별장에 도착하지만 스탈린의 부검 현장과 곁에 있던 미국제 호흡장치를 보고는 정치국원들이 스탈린의 뇌를 적출해서 미국에 팔아넘기려고 한다는 망상에 사로잡혀서 권총을 난사하며 마구 난동을 부린다. 결국 권총을 압수당하지만 옆에 있던 NKVD 장교의 권총을 빼앗아 다시 난동을 부리려 하는데 그때까지도 스탈린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잠시 정치국원들과 다른 장교들이 어쩔 줄 모르고 쳐다보기만 하는 장면이 백미. 결국 장교들이 달려들어 끌어낸다.
이후 저우언라이에게 자신의 음모론을 떠들면서 마구 날뛰다가 게오르기 주코프에게 군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망나니라고 두들겨맞는다. 스베틀라나가 달려와 이런게 바로 우리 가족에 대한 위협이라고 따지자, 내가 때렸고, 아주 즐겁게 패줬다고 의기양양해하며 스베틀라나를 무시하고 연회장으로 가버린다. 이제 더이상 빽봐줄 아버지도 없다는걸 안 스베틀라나가 어떻게든 이 맛간 오빠를 인간 만들려고 노력하지만 결국 성과는 없었고, 스탈린의 장례식에서 연설을 하게 해달라고 졸라서 새끼곰 운운하는 조잡한 연설을 하려 하지만 정치국원들이 바실리의 연설 순간에 에어쇼를 벌여서 바실리의 연설을 묻어버리고 바실리의 연설을 중단시켜버린다. 이후 베리야가 처형된 후 스베틀라나는 유학 명목으로 빈으로 보내지고 바실리는 소련에 억류된다. 원래 역사대로 감옥에 끌려갔을듯.
Василий Сталин
1. 개요
소련군 공군의 장군. 이오시프 스탈린의 둘째 아들로 본명은 바실리 주가시빌리다. 이는 이복형인 야코프 주가시빌리도 마찬가지.
스탈린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각종 망나니짓을 하다 아버지의 사후 개털이 돼서 비참하게 죽은 인물이다.
2. 생애
2.1. 유년 시절
1921년, 스탈린과 스탈린의 둘째 아내인 나데즈다 알릴루예바 사이에서 태어났다. 스탈린의 고향인 조지아의 그루지야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복형 야코프 주가시빌리와 달리 바실리 스탈린은 러시아에서 태어나고 자랐기 때문에 자신을 러시아인으로 생각했다.
스탈린은 아들 바실리를 상당히 아꼈는데 라리사 바실리에바의《크레믈린 여인들》에 따르면 부하린이 어느 때 스탈린을 만나러 갔을때 스탈린은 갓난아기였던 바실리의 얼굴에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아기가 콜록거리며 우는 걸 보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고 한다. "아, 괜찮아. 애한테 좋은 일이라구. 연기를 뿜어주면 이 놈이 강해진단 말이오!"라고 했다.[1] 나데즈다가 쓴 편지에서도 이것이 사실로 확인되는데 나데즈다는 1922년, 시어머니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다.
바실리 스탈린은 말을 듣지 않고 함부로 굴어 나데즈다를 힘들게 했고 공부 대신에 축구하기를 즐겼다.
1935년 4월 22일, 아버지 스탈린, 여동생 스베틀라나와 함께 모스크바 지하철 개통을 기념하여 모스크바 지하철에 탑승했는데 엄청난 숫자의 군중이 몰려와 환호하는 대소동이 벌어졌고 바실리는 매우 겁을 먹었다고 한다. 지하철 시승이 끝난 후 집에 돌아온 바실리는 침대 위에서 발작하듯이 울부짖었다는데 아버지의 엄청난 위상을 몸으로 겪은 탓일까, 이후 그는 아버지의 권력을 믿고 차차 안하무인으로 굴기 시작한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바실리 주가시빌리라는 기존 이름에서 아버지인 스탈린의 성을 따서 바실리 스탈린이라 칭했고 이 때문에 스탈린은 바실리를 불러서 "넌 스탈린이 아니고 나도 스탈린이 아니야. 스탈린은 소련 권력이야!"라고 질책했지만 바실리는 귓등으로도 안들었다.
어머니인 나데즈다 알릴루예바가 자살한 후 스탈린 일가는 크렘린의 새 관저로 이사했다. 스탈린은 아내의 죽음 이후 충격을 받아 가족들에게 좀 더 관심을 기울였는데 바실리는 아버지를 믿고 날뛰기 시작했다. 1935년, 주발로브 다차 관리인은 스탈린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그런가 하면 여자들 앞에서 마구 음담패설을 늘어놓다가 듣다 못한 이복형 야코프 주가시빌리에게 두들겨맞기도 했고[2] 학교에서도 마구 함부로 행동하면서 선생들까지 업신여겼다."바실리는 스스로를 어른으로 여기며 바라는 것을 갖겠다고 고집을 부리는데, 가끔 어리석은 것을 바라기도 합니다."
1938년, 참다못한 학교 측이 스탈린에게 바실리가 학교 당국으로부터 특별대우를 받고 있으며 자살위협을 통해 원하는 것을 얻어낸다고 보고했다. 스탈린은 솔직히 보고한 학교 측에 감사를 표하며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스탈린은 학교 측에 아들을 더 엄히 지도해 달라고 부탁하고 자신도 아들의 멱살을 잡아 버릇을 고쳐놓겠다고 약속했지만 어디까지나 말로만 그러했지 방종한 아들을 제어하는데 실패했고 스탈린은 학교에서 바실리를 혼낸 선생들을 숙청하는 걸로 대신했다. 이렇게 아들에게 무르게 대했으니 바실리가 더 망가지는 것은 당연했고 스탈린은 바실리 때문에 계속 골머리를 앓았다."바실리는 범용하고 버릇없는 젊은이입니다. 항상 정직하지 못하고, 권위가 약한 선생을 위협하길 좋아하고, 툭하면 무례하고, 심지가 약한-아니 흐트러진- 작은 스키타이인입니다. '영감과 여편네들'이 '스탈린의 아들'이라고 시종 떠받들어서 그 녀석을 망쳐 놓았습니다."
2.2. 독소전쟁 시기의 활동
바실리는 이후 크림 반도의 항공군사학교에 입학했고, 여전히 교관들로부터 특별대우를 받으며 으스댔다. 일개 생도에 불과한 바실리는 이동하면서 언제나 학교 관리자들의 화려한 영접식을 받았고 숙소가 아니라 호텔에서 머물렀으며 장교 식당에서 특식을 먹곤 했다. 바실리는 몹시 으스대며 일부러 장교 식당에서 할 수 없는 음식을 주문하여 요리사들을 골탕먹이기도 했고 이 때문에 당황한 요리사들이 시내로 나가 요리를 공수해야 할 정도였다. 여기에 오토바이나 자동차를 타고 크림 반도를 자기 정원처럼 마구 누비면서 폭주족 놀이까지 했다.
이딴 짓이나 하고 있으니 성적이 제대로 나올 리도 없었고 평균적인 기간에 비해 굉장히 늦게 졸업해서 스탈린이 바실리를 불러서 야단치기도 했지만 바실리는 그러는 아버지는 사관학교 졸업장이 있냐고 빈정대는 등 오로지 스탈린의 아들이라서 가능한 망나니짓만 골라서 했다.
이후 1940년 학교를 졸업하여 공군 중위로 임관[3] 하였다.
1941년, 대위로 승진하였을 때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스탈린의 장남 야코프 주가시빌리가 육군 포병 대위로 최전선에 달려간 반면 바실리는 모스크바에 주둔하며 스탈린의 다차에서 흥청망청 파티를 벌이며 소일을 보냈다. 그럼에도 스탈린의 아들이란 이유로 승진을 거듭했고 지상공격기 IL-2를 타고 26번 출격한 공로로 1943년 공군 대령으로 승진하여 비행 연대장을 맡았다.
1941년 7월 야코프 주가시빌리는 최전선에서 대위로 싸우다 나치 독일에 붙잡혔고[4] 스탈린은 전시수상으로서 아들의 구조를 포기했다. 이후 야코프 주가시빌리는 1943년 수용소에서 사망한다. 의젓했던 아들의 죽음에 스탈린은 상당히 슬퍼했다고 전해진다.
1943년 4월, 부하들과 낚시를 나가서 '''폭탄을 이용해서 낚시를 하려다가'''[5] 실수로 장교 한 사람이 사망하고 바실리 자신도 부상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스탈린은 노발대발했고 크렘린 병원에서 치료받던 바실리에게 국방 인민위원 명의로 징계를 내렸다.
하지만 아버지가 자신을 정말로 혼내진 않을 것이라 믿던 바실리의 방종한 행동은 끝을 몰랐다. 바실리는 계속 승진을 거듭했고 1945년 즈음에는 24세의 나이로 공군 중장까지 승진했다. 바실리는 거듭된 방탕한 파티 때문에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으며 알코올 중독으로 얻은 만성질환으로 인하여 건강이 크게 악화되어 계속 골골댔고 스탈린은 그런 아들의 모습에 실망을 금치 못했다. 공군 내부에서도 바실리의 추태에 분노를 감추지 못할 정도였다.
2.3. 추한 말년
독소전쟁 승리 후 동독에 파견되었다가 1947년 귀국하여 모스크바 군관구 공군 사령관에 임명되었지만 알코올 중독으로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자신에게 아첨하는 패거리들을 몰고 다니면서 온갖 사치를 부렸다. 그가 자기가 원하는 사람에겐 얼마든지 금일봉을 내리거나 감옥에 보낼 수 있었으므로 스탈린의 경호실장 니콜라이 블라시크마저도 바실리에게 아첨하였다.
하지만 문제는 바실리가 도를 넘어선 행동을 했는데 1952년 5월 1일, 바실리는 나쁜 기상 상태 때문에 비행을 금한다는 사령부의 명령을 무시하고 위험천만한 에어쇼를 지시했다. 전투기 몇 대가 역사박물관 첨탐 사이를 통과하여 붉은 광장 위를 날아다녔는데 이는 스탈린의 명령을 무시한 것이었으므로 격노한 스탈린은 바실리를 해임시켰다.
그럼에도 정신 차리지 못하고 술과 방탕한 생활을 하는 아들을 보다못한 스탈린은 바실리를 불러 자신은 70세가 넘었지만 여전히 공부하고 있다면서 그를 참모본부 부속대학 청강생으로 집어넣어 공부를 시켰지만 바실리는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여전히 폭음과 난봉꾼 짓에 정신이 없었다. 이 시점에서 바실리는 지나친 폭음으로 건강까지 나빠져 생명이 위태로운 수준이었다.
그러다가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하자 바실리는 공포에 질려서 의사들과 정치국원들에게 아버지를 죽였다고 미친 듯이 비난을 퍼부으며 날뛰었다. 국방장관 니콜라이 불가닌이 바실리를 호출하여 지방 군관구 공군사령관직을 제안하자 바실리는 모스크바 군관구 사령관 자리가 아니면 가지 않겠다고 버텼다. 이에 분노한 불가닌이 "군대에 적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건가?"라고 질책하자 바실리는 인정하지 못한다고 소리를 질렀고 불가닌도 더는 참을수 없어 그 자리에서 바실리의 계급장을 떼버렸다.
그렇게 31세의 나이로 퇴역 장군이 된 바실리는 별장에 틀어박혀 술독에 빠져 살았고 아내를 계속 갈아치웠다. 바실리는 인사불성이 되어 길거리에서 아무나하고 술을 마시고 그걸 기억 못하는 폐인의 삶을 살았고 결국 어느 외국인과 술을 마셨다가 부하들의 고발로 1953년 4월 28일 체포되었다.
군사법원은 투기, 공금유용, 직권남용, 부하에 대한 폭력행위, 군 내부의 음모 혐의로 바실리를 기소했고 바실리는 노비코프 장군 등을 음해하여 투옥시킨 혐의가 인정되어 8년형을 선고받았다. 자신이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란 것을 인정하지 못한 바실리는 정부에 협박 편지를 보내며 날뛰었다.
서기장인 니키타 흐루쇼프는 오히려 그런 바실리를 불쌍하게 여긴 1954년에 그를 병원에 보내 추후에 석방시키려 했으나 바실리는 오히려 병원에서도 패거리를 몰고 다니면서 갖은 행패를 부렸다. 그래서 흐루쇼프는 1955년 즈음에 바실리를 석방한다는 계획을 포기하고 그를 그대로 교도소에 처넣었다. 바실리는 스탈린의 측근들에게 편지를 쓰며 석방을 탄원했고 마오쩌둥이 자신을 도울 것이라는 망상에 사로잡혔다.
1960년 1월, 흐루쇼프는 바실리를 불러서 1시간 동안 대화를 나눈 후 석방하여 프룬제 강변 거리의 아파트와 주코프카의 별장 및 장군 연금, 자동차, 당원증, 무공훈장 등을 모두 돌려주었다. 하지만 바실리는 정신을 차리기는커녕 다시 패거리들을 모아 설쳐댔고 바실리의 자녀들도 보다못해서 아버지에게 정신 차리라고 설득했지만 바실리는 어린 것들이 주제넘게 나선다고 전혀 들으려 하지 않았다.
결국 4월에 바실리는 키스로보츠크에 강제로 요양을 떠나게 되었다가 그대로 레폴타 교도소에 투옥되었다.
2.4. 죽음
군사법원은 바실리에게 8년의 형기를 도로 채울 것을 선고했지만 망가질 대로 망가진 바실리의 몸이 그것을 견디지 못했다. 1961년 봄, 바실리는 간장병, 위장병, 영양실조 등 각종 만성질환으로 인하여 가석방되었다. 그는 이미 밥 대신에 보드카로 연명할 정도로 몸이 망가져 있었다. 모스크바와 그루지야에서 거주하는 것을 금지하는 조건으로 석방된 바실리는 마샤라는 간호사와 함께 카잔으로 이주해서, 한 칸짜리 아파트에서 거주했는데 여기서도 여전히 술에 찌들어 살았다. 잦은 음주로 인해 말년에 찍은 바실리 사진을 보면 머리가 벗겨지고 주름이 깊게 생기는 등 급격하게 노화가 와서 마흔살에 죽었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사람이 망가졌다.
1962년 3월, 어느 그루지야인과 밤새도록 술을 마셔댄 바실리는 의식불명이 되어 일주일 동안 쓰러져 있다가 3월 19일 사망했다. 부검 결과 그의 내장은 알코올 중독으로 망가질 대로 망가져 있었다. 그의 자식들과 세 번째 아내 카피토리나, 네 번째 아내 마샤가 참석한 가운데 조촐한 장례식이 거행되었고 바실리는 카잔에 매장되었다.
바실리 스탈린의 아들인 알렉산드르는, 고모가 그랬듯 스탈린 성씨를 버리고 어머니의 성씨인 부르돈스카야(Burdonskaya)를 따라 알렉산드르 부르돈스키로 살았다. 알렉산드르는 2017년에 죽었다.
3. 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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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의 죽음을 다룬 블랙코미디 영화 <스탈린이 죽었다!>에서는 루퍼트 프렌드가 분했다. 자신의 실수로 소련의 하키 국가대표팀을 몰살시키고 그 스트레스를 함량 미달의 새로운 국가대표팀을 마구 갈구는 막장 모습으로 등장한다. 스탈린이 죽은 후에야 별장에 도착하지만 스탈린의 부검 현장과 곁에 있던 미국제 호흡장치를 보고는 정치국원들이 스탈린의 뇌를 적출해서 미국에 팔아넘기려고 한다는 망상에 사로잡혀서 권총을 난사하며 마구 난동을 부린다. 결국 권총을 압수당하지만 옆에 있던 NKVD 장교의 권총을 빼앗아 다시 난동을 부리려 하는데 그때까지도 스탈린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잠시 정치국원들과 다른 장교들이 어쩔 줄 모르고 쳐다보기만 하는 장면이 백미. 결국 장교들이 달려들어 끌어낸다.
이후 저우언라이에게 자신의 음모론을 떠들면서 마구 날뛰다가 게오르기 주코프에게 군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망나니라고 두들겨맞는다. 스베틀라나가 달려와 이런게 바로 우리 가족에 대한 위협이라고 따지자, 내가 때렸고, 아주 즐겁게 패줬다고 의기양양해하며 스베틀라나를 무시하고 연회장으로 가버린다. 이제 더이상 빽봐줄 아버지도 없다는걸 안 스베틀라나가 어떻게든 이 맛간 오빠를 인간 만들려고 노력하지만 결국 성과는 없었고, 스탈린의 장례식에서 연설을 하게 해달라고 졸라서 새끼곰 운운하는 조잡한 연설을 하려 하지만 정치국원들이 바실리의 연설 순간에 에어쇼를 벌여서 바실리의 연설을 묻어버리고 바실리의 연설을 중단시켜버린다. 이후 베리야가 처형된 후 스베틀라나는 유학 명목으로 빈으로 보내지고 바실리는 소련에 억류된다. 원래 역사대로 감옥에 끌려갔을듯.
4. 참고문헌
- 스탈린 평전, 로버트 서비스, 교양인.
- 스탈린 평전, 올레크 흘레브뉴크, 삼인.
- 스탈린 평전, 드미트리 볼코고노프, 세경사.
- 젊은 스탈린, 사이먼 시백 몬티피오리, 시공사.
- 나의 아버지 스탈린, 스베틀라나 알릴루예바, 일신서적출판사.
[1] 2000년대 이후로는 인간쓰레기나 할 막장짓이지만 7, 80년대 유럽은 물론이고 사실 한국도 90년대까진 이랬다. 그 땐 아파트 베란다에 아빠가 아이 데리고 가서 세워놓고 옆에서 담배피고, 극장에서 영화보며 담배피고, 택시기사가 손님 태우고 운전하며 담배피고, 버스나 지하철에서 승객들이 담배피고, 강의실에서 교수가 강의하며 담배피던 시절이라...무엇보다 당시에는 담배가 그렇게까지 몸에 좋지 않다는 것을 모르던 시절이다. 지금도 흡연에 관대한 해외 일부 국가에서는 이런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2] 야코프 주가시빌리는 바실리와 나이가 14세나 차이가 나고 바실리의 어머니도 야코프보다 고작 6살 많기 때문에 형이라기보다는 삼촌뻘이다. 야코프 주가시빌리는 오랫동안 아버지와 사이가 서먹했고 성격도 솔직담백했지만, 그 덕분에 군인이 된 이후 독소전쟁 직전 시점 부터는 아버지와 화해해서 잘 지냈다.[3] 소련군은 군종별로 사관학교가 1개씩 있는 서방과 달리, 특기별로 나뉜 사관학교가 여럿 존재한다. 교육기간도 상이해서 2~4년제가 혼재하며, 4년제는 중위, 그 이하는 소위 계급으로 임관하는 차이를 둔다.[4] 독소전쟁 발발이 1941년 6월이기 때문에 개전 한 달만에 붙잡힌 셈이다.[5] 미친 짓 같아 보이지만 한국에서도 군이나 건설현장 등 폭약을 다루는 곳이라면 과거에는 심심찮게 해오던 짓이다. 충격파로 기절한 물고기들이 수 백 마리씩 수면으로 둥둥... 유해어법으로 지정되어 있을만큼 오래된 방법이다.